모지리 농부 콩 농사 / 김여울
엊그제 무서리가 내렸으렷다. 울울창창하게 밭두둑을 덮고 있던 콩대들이 서리를 맞고는 속절없이 잎을 떨어트렸다. 잎을 떨군 앙상한 콩대가지마다 빈틈없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콩들이 소담스럽기 그지없다.
그 모습을 보고 지난 지 대엿새쯤 후 콩대를 베어 눕히기 시작했으렷다. 콩대를 말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베어 눕힌 콩대 위로 몇 번인가 서릿발이 다녀갔다. 서리를 맞을수록 쨍쨍대는 가을 한낮의 햇볕에 콩대는 곱으로 잘 말랐다.
그럭저럭 한 3백 평 남짓 될까? 콩들을 거두어 타작을 하기에 이르렀다. 콩대를 밀어 넣기 바쁘게 게눈 감추듯 집어삼키는 탈곡기 소리가 굉음에 가까울 정도로 요란하다. 굉음과 함께 동글동글 누렇게 잘 영근 콩알들이 알곡을 모으는 분출구에 매달아 놓은 마포 자루 속으로 쉴 새 없이 쏟아져 쌓인다.
올 콩 농사는 풍작이다. 콩알이 하나같이 또록또록 잘 영근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일부러 가투를 찾아볼래도 없을 정도로 쪽 고르게 생겼다. 모지리 농부 기분 한번 찢어지게 좋다. 탈곡기에 한 아름씩 콩대를 집어 처넣으면서도 입가에 사뭇 웃음이 떠날 새가 없다. 귀촌 후 10년 가까이 콩 농사를 지었지만 올 같은 풍작은 일찍이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좀 더 일찍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후회막급이 다. 제초제란 게 농작물에 그렇게 해를 끼칠 줄은 미처 몰랐더랬다. 콩 농사 실패의 원인이 제초제 오남용 때문이었을 줄이야.
해마다 밭을 갈아엎기 직전이면 우북하게 자라 밭을 뒤덮고 있는 잡초를 죽인답시고 제초제를 살포했다. 그런 다음 얼마쯤 있다가 제초제 세례를 머금고 죽은 밭두렁풀을 파 엎어 흙을 고른 뒤 콩을 심었다. 땅이 촉촉 습을 물고 있는 흙이라면 콩을 심은 지 4, 5일이면 콩들이 바깥세상을 향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고 나온다. 이때의 콩밭 정경이란 마치 꼭 동화 속의 꼬마병정들이 열병식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방불케 한다. 일단 바깥나들이를 나온 여린 콩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쑥쑥을 하기 마련이다. 대궁 끝에 두 쪽으로 벌린 떡잎이 사라지고 본잎이 돋아 바야흐로 마악 클 고부에 접어들 무렵이다. 원인도 모르게 콩대가 주저앉기 시작했다. 오뉴월 밝은 햇살을 멱 감듯 뒤집어쓰고 무럭무럭 쑥쑥 자라야 할 콩대들이 날이 다르게 주저앉는 것이었다. 물론 3백 평 밭 전체가 다 그렇다는 게 아니다. 이랑마다 절반 남짓의 콩대들이 나자빠졌다고 하면 될까? 이유가 뭘까.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생각 끝에 평소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토박이 정수형을 찾아가 물었더랬다.
-워째 그런 일이 있을꼬 잉. 워디 한번 가서 디레다 보두라고 잉.
정수형이 앞장을 섰다.
-이잉. 농약 중독이구먼. 제초제 중독이란께.
콩밭 상태를 둘러보고 난 정수형이 대뜸 한 말이었다.
-농약 중독이라고요? 콩이 나서 자라면서부터는 전혀 약을 한 적이 없는 걸요.
-아니여. 내 보기엔 농약 중독이 틀림없는디…. 혹시나 말여, 콩을 심기 전 제초제 같은 것을 살포하지 않았남? 밭에 난 잡초를 죽인다고 말여.
일리 있는 말이란 생각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잡초를 없애기 위해 제초제를 살포한 후 갈아엎은 흙 속에 독한 제초제가 잔류하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체 콩을 심었던 게 불찰이었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멍청한 소견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로소 농약, 제초란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노라고 하면 어떨까.
전과를 교훈으로 모지리 금년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콩 농사에 열을 올렸겠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제초제를 맛보이지 않은 순정의 맨흙 땅 두둑 위로 떡잎을 치켜든 콩들이 열병식을 하듯 쪽 고르게 돋아 솟아났다. 고것들이 고 귀여운 것들이 제법 자라 잎사귀를 살랑거릴 무렵이 되었는데도 어느 것 하나도 예년처럼 폭삭 주저앉는 것이 없었다. 이제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안심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금상첨화로 콩대가 튼튼하게 더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콩 뿌리 주변에 흙을 쌓아 덮어주어야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걸 ‘북’을 해준다고 하는데, 이곳 토박이들은 ‘붓’을 해준다고 하더라. 북이나 붓이나 어원이야 어떻든 모두가 콩을 잘 자라게 하는 작업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한여름 뙤약볕과 소나기를 들이마시고 자란 콩밭. 콩밭 에선 날마다 푸른 파도가 일렁거렸다. 이때쯤이면 콩밭 여기저기 키 자랑을 하듯 겅중겅중 돋아난 명아주나 진득찰 까마중 같은 잡초를 뽑아준다. 더불어 뒤이어 꽃이 일기를 기다려 살충제를 살포하는데 보름 간격으로 3, 4회 가량 해주면 가투가 없는 완벽한 콩을 수확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굉음을 내지르던 탈곡기의 모터를 끄고 싯누런 콩이 수북수북 담긴 콩포대들을 점검하듯 눈 여겨 보았다. 볼수록 그렇듯 오달져 보일 수 가 없었다. 3백 평 밭에서 40킬로그램 여섯 포대가 나왔으니 모지리 딴에는 가히 배를 두드려도 족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김여울] 동화작가. 수필가.
《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당선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신춘문예 소설당선
《도민일보》신춘문예 수필당선
《월간문학》 민조시 당선
수필집 《봄, 그리고 고향》 외37권
300평 콩을 심어 가꾸는 밭농사, 만만치 않은 면적 같은데요. 콩 농사짓기 10년 만에 드디어 풍년 농사를 이뤘군요, 축하합니다~~
콩 심고 콩대가 쏙쏙 솟아오르는 정경을 “동화 속 꼬마병정들 열병식을 방불케 한다.”는 표현이 눈앞에 콩밭을 선명히 연상시켜 주시네요.
선생님께선 고향으로 귀촌하셔서 동화작가로 동화를 쓰시면서, 직접 먹을거리 농사도 지으시고요. 공기 좋고 풍광 좋은 시골에서 영위하시는 노년이 무척 행복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