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한 이제니는 등단한 첫 해 동안만 4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아왔다. 등단작 「페루」에서부터 그녀는 언어에 대한 시적 인식을 드러낸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페루」 부분
“말”이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버린 것”이며 사물과 분리되어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것”이며 사물에 대해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시구는, 그녀의 언어에 대한 사유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녀의 시는 불완전한 언어로 인해 사물과 존재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는 비애를 노래한다. 동시에 그녀의 시는 ‘움직이는 비애’를 넘어서 사물과 존재를 온전히 언어로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의 왕복 운동을 음악적인 언어와 경쾌한 어조로 형상화해내는 특징을 내보인다.
풍선 풍선 풍선은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서운했다
― 「분홍 설탕 코끼리」 부분
도케이 시케이 만포케이. 메이래이 시레이 한래이. 기어이 운율을 맞추고야 마는 슬픈 버릇
― 「창문 사람」
적막이란 적막 이전에 소리가 있었다는 말
― 「코다의 노래」
너는 공백으로만 기록된다…중략…내가 기록하는 건 이미 사라진 너의 온기. 체온이라는 말에는 어떤 슬픈 온도가 만져진다
― 「블랭크 하치」
인용된 시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그녀의 시적 인식은 일관적이다. 사물들은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를 너희들(「녹슨씨의 녹슨 기타」)”이며 사물들의 이름을 적은 “창문 위의 글자는 씌어지는 동시에 지워(「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진다. "적막"이란 말은 적막 이전에 사물들의 “소리가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물은 언어의 “공백으로만 기록”된다. 그녀의 시쓰기는 “이미 사라진 너(사물)의 온기”를 기록하는 일이다. 언어의 빈칸에 남아있는 사물의 “체온”은 사물의 흔적과 사물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낱말이 허용되지 않는 세계는 축복일까 저주일까(「이불」)”라는 시인의 존재론적 슬픔과 물음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슬픔”과 “울음”은 사물과 언어에 대한 탐구로부터 기원한 것으로서 시인이라는 실존에서 흘러나온 고통의 음악이다.
그녀의 시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이국의 이름과 무의미한 언어의 반복(“그건 단지 요롱요롱한 세상의 요롱요롱한 틈새를 발견한 요롱요롱한 손가락의 요롱요롱한 피로(「요롱이는 말한다」)”은 시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사물과 존재를 가리키기 위해 창조한 운율이며 일상 언어의 죽은 의미를 지우면서 이제니만의 언어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한 음악적 시도이다. 그녀는 “하나의 이름으로 둘을 부르는 일에 골몰(「그늘의 입」)”하고 “흘러다니는 흘러다니는. 잡을 수 없는 잡을 수 없는. 이제 내게 허용되지 않는 낱말이란 없다(「아름다운 트레이시와 나의 마지막 늑대」)”고 선언한다.
「별 시대의 아움」과 「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 그리고 「네이키드 하이패션 소년의 작별인사」는 「사몽의 숲으로」(『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와 함께 아름다운 시이면서 그녀의 시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어제 익힌 불안의 자세를 복습하며 한 시절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 막 떠올랐다 사라져버린 완벽한 문장.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언어의 심연. 시대에 대한 그 모든 정의는 버린 지 오래. 내 시대는 내가 이름 붙이겠다.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여전히 귓가엔 둥둥 북소리. 내 심장이 멀리서 뛰는 것만 같다. 세계는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것.…중략…후회 반성 고쳐 말하기는 오래된 나의 지병. 얼룩이 남는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다. 한 시절을 훑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먼지 같은 사람과 먼지 같은 시간 속에서 먼지 같은 말을 주고 받고 먼지 같이 지워지다 먼지 같이 죽어가겠지. 나는 이 불모의 나날이 마음에 든다.
― 「별 시대의 아움」(『문예중앙』 2008년 봄호) 부분
사물이 결핍된 언어의 빈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은 사물을 어둠과 침묵의 세계로 떨어지게 하고 “불모의 나날”을 살아가야 한다. 언어의 의미 이전에 사물들로 구성된 “세계는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세계는 “그냥 있는 것”이다. 그냥 거기에 있는 사물과 최초로 만난 사물의 이름은 “이제 막 떠올랐다 사라져버린 완벽한 문장”이며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언어의 심연”이다. 사라져버린 완벽한 문장을 복원하는 방법은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을 반복하는 것이다. “후회”하고 “반성”하고 “고쳐 말하기”이다. “고쳐 말하기”는 사물에 대한 최초의 명명이 새로움을 잃고 일상 언어의 관습적 의미로 죽어갈 때 사물의 이름을 매번 다시 명명함으로써 어둠과 침묵 속에서 사물을 끌어올리려는 그녀의 시쓰기이다. 시인의 “오래된 지병”이다.
그녀는 시쓰기의 “얼룩이 남는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녀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고쳐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실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와 사물이 완전히 하나로 결합된 시를 완성하지 못하고 그녀가 죽는 순간에서야 실패는 선언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의 이름에서 사물의 부재는 어둠과 침묵 속에 침잠한 사물을 다시 끌어올리면서 새로운 시를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사물이 부재하는 “내 시대는 내가 이름 붙이”는 것이다.
쓸모없는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중략…
말수가 줄어들듯이 너는 사라졌다 네가 사라지자 나도 사라졌다 작별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발설하지 않은 문장으로 너와 내가 오래오래 묶여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문학동네』 2008년 겨울호) 부분
사물의 이름이 사물과 결별하게 된 이유는 사물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언어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사물에 대한 최초의 명명이 지닌 새로움과 무용함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최초로 명명된 사물의 이름은 사물 자체이지만 언어의 불완전성 속에서 사물의 결핍을 드러내고 관습적인 일상 언어로 굳어지면서 낡은 의미로 전락하고 유용한 목적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사물이 부재하는 언어를 최초로 명명된 사물의 이름으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는 “고쳐 말하기”의 과정을 거쳐 사물 자체를 가리키는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유용한 모든 언어를 “그믐”의 어둠 속으로 밀어넣어야 한다. 인간이 부여한 의미와 유용성 이전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쓸모없는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그녀의 진술은, 무용하게 그냥 여기에 나와 함께 존재하는 세계를 환기시키면서 그녀가 지향하는 시세계를 단적으로 제시한다. 나와 사물들의 세계는 모든 목적과 유용한 관계로부터 벗어날 때 무목적성과 무용성 속에서 “발설하지 않은 문장으로” 함께 존재할 것이다. 김종삼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쓸모없는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원”하고 “너와 내가 오래오래 묶여 있”을 것이다.
슬픔의 순간에도 운율만은 잊지 않았지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하이패션이 있습니까 각운이 아니었더라면 난 더 슬펐을 거야
나는 지금 죽지 않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다 죽지 않기 위해 너무 쉽게 붉어지는 얼굴과 너무 빤히 들여다보이는 마음이 부끄러웠다
말을 마치자 피곤이 몰려왔다
― 「네이키드 하이패션 소년의 작별인사」(『문학동네』 2008년 겨울호)
이제니가 “슬픔의 순간에도 운율만은 잊지 않”는 것은 사물이 결핍된 언어로 시를 쓰는 시인의 실존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운율을 망각하는 것은 사물의 결핍에 대한 고통을 잊는 것이며 어둠과 침묵의 세계에서 다시 끌어올린 사물에 대한 명명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새로운 언어 창조라는 시인의 임무를 방기하고 시인으로서 말하기를 멈추면서 시인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제니가 시를 쓰는 이유는 “지금 죽지 않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는 아직 그녀만의 언어로 정립되지 못한 언어이다. 사물이 부재하는 언어임을 인식하고 있는 언어이다. 운율은 언어가 되지 못한 언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너무 쉽게 붉어지는 얼굴과 너무 빤히 들여다보이는 마음이 부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시쓰기와 고쳐 말하기는 지속되어야 한다. “말을 마치”면 “피곤이 몰려”오고 시인의 죽음은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와 음악의 기원으로서 언어에 대한 깊은 회의는 사물과 언어와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제공한다. 언어에 대한 깊은 회의는 시를 쓴다는 것과 한 편의 시를 완성한 언어와 시를 쓰는 주체 자신에 대한 성찰을 모두 발생시킨다. 사물과 언어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킨다. 사물의 부재를 드러내는 언어 너머의 어둠과 침묵의 심연 속에 자리잡은 사물을 바라보게 한다. 언어에 대한 깊은 회의로부터 기원한 운율은 언어에 대한 회의와 탐구를 드러내는 이제니 시의 발생학이며 무한한 어둠 속에 잠겨있는 사물을 응시하면서 노래하는 미완의 음악 언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