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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고종』
저자 박종인. 2020.12.30.
[논설실의 서가] 고종, 나라를 빼앗긴 게 아니라 팔았다
박영서 기자 입력: 2021-03-30 19:45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은 평가가 극명하게 갈려온 존재다. 이 책은 고종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오랜 시간 취재와 국내외 사료·기록들을 고증한 결과, 저자는 우리가 배워온 고종의 모습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된다. 근대화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고종 때문이었고, 근대화에 뒤쳐진 것도 고종 때문이었고, 국가 경제가 파탄난 것도 고종 때문이었다. 조선이 몰락을 거듭하다 전투 한 번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사라져야 했던 이유다. 저자는 이런 고종을 '매국노', '만악의 근원'이라고 규정한다.
고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백성보다는 이씨 왕가의 보존을 최우선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라가 망했음에도 종묘사직에 계속 제사를 지낼수 있다는 일에 안도했던 인물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백성들을 도륙하기도 했다. 동학농민군이 죽창 들고 봉기하자 고종은 청나라를 불러들였고 일본군도 뒤따라 들어왔다. '만인의 어버이'라는 고종은 '동비(東匪) 역적'을 뿌리뽑으라는 어명을 내렸다. 관군과 민보군(民保軍 ; 양반·유생·향리들이 구성한 민병대)은 일본군과 콤비를 이뤄 전국 곳곳에서 도륙에 나섰다. 일본군은 조선을 지배하는 데 가장 성가진 존재였던 동학군을 박멸했다. '인디언 헌팅'에 쓰였던 개틀링 기관총이 태평양을 건너 조선의 농민들을 쓸어버렸다. 토벌은 처참했다. 일본군 대위가 충격을 받고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고종 곁에는 백성들의 피고름을 빨아들이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바로 민비와 여흥 민씨 일족이었다. 민씨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보다 더 심한 매관 매직, 뇌물 수수 등 온갖 부정으로 권력 유지와 축재를 했다. 고종은 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일본 황족에 준하는 지위를 누리며 호의호식했다. 1910년 나라의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넘긴 고종과 그 아들은 대일본제국의 '왕공족'(王公族)으로 편입되었다. 책에 따르면 고종은 은근슬쩍 이완용 등 친일 무리에게 한일합방의 책임을 떠넘겼다. 회사로 치면 고종은 '오너'였고 이완용은 '월급쟁이 사장'였던 셈이다.
저자는 "고종은 오로지 자기 목숨과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해 나라를 버렸다"면서 "누가 고종을 자주 독립을 염원한 개혁 군주라고 찬양하는가"라고 일갈한다. 저자는 고종의 위선과 허상을 고발하면서 비극적 역사에 대한 책임을 고종에게 묻는다.
박영서 논설위원
출처: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21033102102369061001&ref=naver
[연재] 청년여래의 근현대불교운동사-4
(3) 조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약) 체결(1876)과 일본의 조선 진출
1874년 흥선대원군 실각 후 1876년 조선에 통교교섭을 거부당한 일본은 운요호를 앞세워 강화도 갑곶에 상륙 후 조선정부에 무력을 앞세워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약)를 체결합니다. 이 조약은 조선에서 청의 배제를 통해 일본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반 마련이 핵심으로,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이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➀ 2개 항구(제물포, 부산, 이후 원산 추가)의 개항과 개항 항에서 일본인의 자유무역 보장(오늘날 한미 FTA)
② 개항 항에서 일본인의 거주보장 및 일본인 범죄에 대한 치외법권 보장(오늘날 한미 SOFA협정)
③ 조선 전 지역의 측량 보장(동북아시아 점령을 위한 군사적 준비 보장)
조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약) 체결로 일본은 동북아시아 진출에 교두보를 확보합니다. 조선은 미·일·영·청·러 등의 식민지지배 경쟁 속에서 집권계급의 무능과 부패는 극에 달했고 그 결과 1862년 조선 전역에서는 임술민란이라 불리는 민중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어1882년 부패한 관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고부봉기와 구식 군대 폐지와 차별에 대한 5군영 소속 군인들에 의한 임오군란이 일어납니다.
민씨정권에 반대하던 위정척사파는 임오군란 수습을 위해 흥선대원군을 복귀시키자 명성황후는 청군을 끌어들여 궁중에 들어와 있던 대원군을 납치해 권력을 다시 차지합니다. 일본은 개화파를 사주해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키나 민씨정권은 위안 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군에 도움을 청하고 12월 6일 청군은 1500여 명의 군대를 동원 3일 만에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친청정권을 강화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은 각각 조선에 군대를 진주해 대치하게 되고 전국 곳곳에서는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이어지다가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정부군과 농민혁명군 사이의 내전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1890년대 경제공황을 맞은 일본은 극심한 내부혼란에 휩싸입니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쟁탈을 통해 성장하는 체제였고 조선을 차지하려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도 극에 달합니다. 영국은 제정 러시아의 극동진출에 막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했고, 미국은 신미양요를 일으켜 조선에 교두보를 확보하려 합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입장에서 본국과 먼 거리에 있는 군사기지 유지에 부담이 되자 그 대리자로 일본을 선택하고 일본 역시 식민지 확장을 통해 경제공황을 극복하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영국은 청일전쟁 2주전인 1894년 7월 16일 일본과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통해 일본의 중국진출을 동의해 줍니다. 미국 역시 1905년 가스라-테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과 대만 식민지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차지하기로 합의합니다.
1894년 일본은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출병해 조선의 관할권을 두고 청일전쟁을 벌립니다. 일본은 7월 25일 풍도 앞바다 해전, 29일 성환전투에서 청군에 승리하고 아산 점령에 이어 9월 15일 평양에서 1만의 청군을 격파하고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조선에서 청의 철군을 가져옵니다.
1895년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에서 건너 온 48인의 낭인을 인솔해 경복궁을 급습해 친청정권의 핵심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 당시 낭인 중 한명인 에조는 그 당시 상황을 ‘에조보고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성황후의 강간/살해/소각을 기록한 에조보고서 1895. 10. 5>
명성황후의 살해를 기록한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는 조선정부의 내부 고문관으로 을미사변이 터진 다음날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고 전직 상사인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비밀보고서를 보냅니다.
이 보고서는 현재 "일본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헌정사편찬회문서 (憲政史編纂會文書)>"에 보관 중으로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에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 분량으로 철저히 비밀문서로 분류되고 있다 1966년 야마베 겐타로(山健太郞,1905∼1977)에 의해 알려졌으나 일제 식민지 사관에 충성하는 한국사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 2002년 소설가 김진명씨에 의해 전문이 입수되어 그 내용이 확인되었다. (사진출처 위키아카데미 티스토리 1828)
...먼저 낭인 20명 정도가 궁에 쳐들어가 고종을 무릎 꿇게 만들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먼저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쪽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을 했다. 살아 있을 때도 했고 6번째부터는 죽어 있는데도 계속 했다. 강간을 시체에 하는 게 ‘시간’이고 살아있을 때 하는 게 ‘윤간’인데 명성황후는 시간과 윤간을 다 당했다. 그것을 뜯어 말리는 충신들은 사지를 다 잘라버렸다.... 이렇게 너덜너덜해진 황후의 시체에 얼굴부터 발끝까지 차례로 한명씩 칼로 쑤셨다.... 여자로서 가슴을 도려내는 큰 수치를 당했다.... 그것도 길거리 서민들이 다 보고 있는 데서 시행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명성황후의 시체에 기름을 붓고 활활 태웠다.(10월 9일 石塚英藏)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한 48명중 한명인 토우 카츠아키(藤勝顯)는 1908년 황후를 베었을 때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후쿠오카 하카타역 인근의 고후쿠마치 소재 셋신(節信)원 입구에 명성황후 추모 관음상'자안(子安) 관음상'을 세워 이 절에 기부합니다.
관음상 곁에 세워진 비석에는 '1895년 민비 사건으로…(중략)… 희생되어 돌아가신 왕비의 혼을 기리기 위해 독지가의 도움으로 세웠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는 범행에 사용한 일본도를 “두번 다시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된다”라며 절에서 그리 멀리 않은 쿠시다(櫛田)신사에 맡겼다고 합니다. 이 절 금고 속에 보존되어 있는 칼은 길이가 120㎝정도로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섬뜩한 글이 적혀 있어 당시 명성황후 시해범들이 작전명을 '여우 사냥'이라고 붙였다는 이야기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다. 현재 문화재제자리찾기(사무총장 혜문)가 ‘히젠도환수위원회’를 조직 이 칼의 압수, 폐기를 일본정부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으로 격은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세자와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피신을 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합니다. 아관파천 당일 고종은 친일인사로 구성된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 유길준, 어윤중, 조희연, 장박, 정병하, 김종한, 허진, 이범래, 이진호를 면직하고, 유길준 등을 체포하도록 명합니다. 이어 김병시를 내각총리대신에 명하는 등 내각 인사를 새로 합니다. 이날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이 살해되었고, 유길준·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이범진·이완용 등의 친러 내각이 조직됩니다. 러시아는 아관파천을 계기로 경원·경성의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의 채벌권과 같은 각종 이권을 요구합니다.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으로 조선의 지배에 자신하던 일본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에 주도권을 빼앗기자 1904년 2월 려순항에 상륙해 3월 봉천전투, 5월 압록강전투를 통해 러시아 육군을 만주에서 몰아내고 1905년 5월 발틱함대를 격파해 조선을 비롯한 극동지역을 식민지로 차지합니다. 이로 인해 러시아제국은 몰락하게 됩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경제공황 때마다 각종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통해 위기를 극복합니다. 군수산업으로 성장한 미국의 경우 보면 미국의 기준에서 선악을 가르고 전쟁의 위기를 고조해 무기를 팔고 전쟁을 벌여 경제를 유지하는 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 이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발생한 경제공황을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통한 조선식민지 수탈 과 대동아전쟁을 벌이며 아시아지역 식민지 수탈전에 참가합니다.
(4) 일본 불교 그리고 조선 포교
일본은 점령한 식민지 통치를 위해 동북아시아의 공통종교인 불교를 앞세웠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부역하는 승려들이 출현합니다. 이에 반발해 불교자주화운동이 시작되어 조국해방운동과 건국운동으로 이어지나 한국전쟁을 과정에서 그 맥이 끊깁니다. 이후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다시 시작된 불교자주화운동은 1998년 조계종 분규를 기준으로 끝으로 단멸되어 2016년 현재 참담한 불교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현재 각 나라의 산재한 불교를 비교해 그 우위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단 불교가 그 시대 어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가? 불교도와 성직자들의 행동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바탕을 하고 있는가? 란 두 가지 기준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근현대 시기 조선에 진출한 일본불교의 종단과 승려들이 비판 받아야 하는 이유는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부처님의 정법을 왜곡해 일본정부의 이익에 충실히 봉사한 것.
② 그로 인해 나라를 잃고 분단으로 이어져 조선 민중에게 극심한 고통을 준 것.
③ 이런 범죄에 가담한 일본불교 종단 및 승려들의 경우 조동종을 제외하고 다른 종단의 경우 공식 사죄와 반성이 없는 것.
일본불교를 알려면 일본의 정치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일본의 정치구조는 형식상 최고 지배자인 천왕이 있고, 천왕을 대리해 통치하는 막부가 있었습니다.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쇼군, 그 밑에는 지방을 통치하는 다이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 등이 다이묘들입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통해 쇼군에 올라 도쿠가와 막부를 만든 사람입니다.
이렇듯 일본 불교계는 사찰에 다이묘나 쇼군을 위한 전각을 세우고 막부정권은 사찰보호를 통해 성장합니다. 본원사의 법주 겐뇨(嚴如)는 1866년 막부 정권이 조슈한(長州藩)을 토벌할 때 군수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모든 신도들에게 전(錢) 백필(百疋)과 쌀 두 되씩을 납부하도록 하였고, 1867년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정권을 천왕에게 반환할 것을 선언하였음에도 말사(末寺)의 승려들로 군대를 조직해서 막부에 편입하는 신청서를 제출하는 등 막부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가집니다.
이렇게 이어 오던 막부정권이 1868년 천왕 측과 내전에서 패하고 천왕이 직접 통치하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정부가 탄생됩니다. 새롭게 탄생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정부는 천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섬기는 신도(神道)를 내세웁니다. 신도(神道)는 천왕숭배 내지 조상숭배를 핵심으로 하는 국수주의적 성격이 강한 일본 고유종교입니다. 신도는 메이지유신을 통해 불교를 밀어내고 천황제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자 국교의 지위를 갖던 불교는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불상 목과 팔이 잘려 나가는 폐불훼석(廢佛毁釋)이 일어납니다. 일본불교도 고려가 몰락하고 조선이 수립 후 시행된 불교탄압정책과 유사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이때 정치인인 에도 신페이(江藤新平)가 1870년에 대외침략정책에 불교계를 활용하는 의견서를 메이지정부에 제출하고 메이지정부가 이를 수용합니다.
18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를 지배할 때 제일 먼저 실시하였던 것이 가톨릭 선교사를 원주민사회에 들여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선을 내세우며 현실의 고통을 내세의 안락을 얻기 위한 과정으로 미화시킵니다. 이를 통해 무력으로 복속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감을 무마시켜는 역할을 종교에 부여하고 가톨릭은 이에 적극 동참합니다. 이를 학습한 일본은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며 이런 역할에 일본불교를 이용합니다. 폐불훼석(廢佛毁釋)시기 일본 불교계는 식민지 포교에 적극 진출해 메이지정부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생존의 길을 찾습니다.
조·일 병자수호조약 체결 후 조선에 진출한 일본 불교의 종파들을 보면 정토 진종 대곡파, 동본원사파는 1877년에 부산에 동본원사 별원을 설립하고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적극 도운 오쿠무라 조신(奧村淨信)의 7대손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과 히라노 게이스이(平野惠粹)를 파견해 이들은 부산·원산·광주 등 개항장과 인근 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합니다. 정토진종이 세운 부산 포교소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빈민구제, 행로병 환자 구호 등을 실시하다가 나중에는 조선인 구제사업을 실시합니다.
정토진종의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을 통한 일본불교의 위상과 근대적 포교방식, 일본화 한 교리는 조선불교에 큰 충격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이동인, 유대치, 무불 등 초기 개화파 인사들은 오쿠무라 엔싱에게 접근해 근대화를 위한 정토진종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1881년에는 일련종(日蓮宗)의 와타나베 이치웅(渡邊日運)이 건너와서 일련종 포교소를 설립합니다. 쿄토(京都) 묘각사의 주지였던 아사히 미츠(旭日苗)는 부산으로 건너와서 ‘일종해외선교회’를 조직하고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여 포교활동을 합니다.
1911년까지 진종·정토종·일련종·조동종·진언종·임제종 등 6개 종파가 조선에 설립한 별원 및 포교소는 167개에 달합니다. 일본 불교 별원이나 포교소들은 본국 종단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아 유치원과 각종 실업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며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빈민구제 사업을 통해 조선 불교계와 조선인들에게 도심에 기반을 둔 새로운 불교를 보여줍니다.그러나 조선에 진출한 일본 불교의 목적은 일본정부의 정책에 따른 식민지 조선인들의 저항의식을 약화시키는 것에 있었습니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 불교는 조선불교의 종단 설립, 법령제정, 조선승려의 일본 유학 등을 통해 조선불교계를 장악해 식민지 수탈 정책에 충실히 부역하게 합니다.
일본 조동종은 1992년 11월 20일 조동종 종무총장 이름으로 일본 불교계로서 유일하게 식민지 시기 범죄에 대해 참회와 사죄를 발표하고 2012년 9월 참사문을 비에 새겨 군산 동국사에 세웁니다. 참사문 비문을 보면 참 사 문 (참회와 사죄의 글)우리 조동종은 명치유신 이후 태평양 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해외포교라는 미명 하에 당시의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 야욕에 가담하거나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해 왔다....
특히 한반도에서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라는 폭거를 범했으며 조선을 종속시키려 했고, 결국 한국을 강점함으로써 하나의 국가와 민족을 말살해 버렸는데, 우리 종문은 그 첨병이 되어 한민족의 일본 동화를 획책하고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다....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사상이나 신앙을 초월해 훨씬 엄숙하다.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맹세한다.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그리고 과거 일본의 억압 때문에 고통을 받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깊이 사죄하면서 권력에 편승하여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 해외 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하는 바이다. (1992년 11월 20일 조동종 종무총장 大竹明彦) 사진 오른쪽) 2012년 8월 12일 국내 11번째 군산 동국사 참사문비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군산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 회복을 위해 1000여 명의 군산 시민이 낸 성금과 일본 조동종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 스님 등 일본인들의 참여로 건립되었다. (사진출처 조종안)
[불교중심 불교닷컴. 이 칼럼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dasan2580@gmail.com]
출처: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3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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