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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 西安 : 시안 Xian)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성도로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 하나입니다. 인구는 약 230만 명이며, 관중 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또한 과거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며, 천년 전에 인구100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서안보다는 오히려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서주 때부터 진, 서한, 북주, 북제, 북진, 요진, 서위, 수, 당 등 13개 왕조의 1,000년 고도(古都)입니다. 중국 7대 고도중 하나이며 7대 고도는 서안,북경,낙양,개봉,남경,항주,악양 입니다. 세계 4대 문명도시(서안,이스탄불,로마,아테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남북으로 장강(양자강)이 흐릅니다.
오늘날 서안은 인구230만명의 도시로 강철, 화학비료, 콘크리트, 시계제조 등의 신흥 내륙 공업 지역 가운데 하나이며, 북경, 상해에 이어 3번째로 많은 43여 개의 대학과 연구소들을 갖춘 교육 도시이기도 합니다. 중점대학은 교통대학이고요. 지금은 중국의 군수 공장, 우주연구센터 등 핵심적인 산업체가 있습니다. 작물로는 밀, 옥수수를 2모작하며, 강우량은 연600㎜로 부족한 편입니다. 이 곳의 날씨는 1월이 -10 ℃, 7-8월은 40℃이며 봄가을은 5,6,9,10월로 관광철이기도 합니다. 시안(서안)은 6개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곳 임동현 소재 특산물은 석류, 곶감, 화청감이라 합니다.
시안은 1남 1녀의 역사라고도 하는데 1남은 진시황이 남긴 병마총이고 1녀는 양귀비가 이용한 화청지이지요. 중국 소수민족은 56개로 여기에는 37개의 소수민족이 생활하고 있고 조선족도 400명이 된다고 합니다 . 가장 많은 소수민족은 회족으로서 돼지고기(자신들의 조상이라 생각함)를 먹지 않고, 양고기, 쇠고기를 먹습니다. 야시장에서 꼬치구이를 팔고 있으며,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단결심이 강하다고 합니다. 소수민족에게는 교육과정서 동점시 우대를 하고 가점 10점을 준다고 합니다. 여기서 조선족이 많이 사는 길림성, 흑룡강성 연변까지는 기차로 33시간이 소요되며 명절(구정,단오) 때 간다고 합니다. 이 때는 민속한복을 입습니다. |
홍콩이나 상해에서는 집집마다 창밖으로 빨래 널어놓는데 서안에는 창밖으로 빨래 널어놓는 모습 볼 수 없음. 서안에는 습도가 낮아 집안에서도 3∼4시간이면 충분히 마름
비 안 오는데 길바닥 젖어 있음 - 공기가 건조해 市에서 길에 물 뿌림.
서안은 분지(盆地)로 바람이 적음. 내륙이라서 태풍이 무언지 모르고 살아감. 중국의 서북방에 위치함
서안의 북쪽에 황하강이 있고 남쪽에 장강(長江)이 있다. ‘양쯔강’은 장강의 일부분으로 장강의 하구 부분만 ‘양쯔강’이라 부른단다.
서안 시내가 희뿌옇게 흐린데 ‘미세먼지’가 아니고 매연이라 문제될 것 없다고 가이드가 한마디로 일축. 서안 시내에서 마스크 착용한 사람 보지 못했음.
▣ 실크로드 깃점
공항에서 점심식사 후 1시간을 이동하여 ‘실크로드 깃점’에 도착하여 첫 번째 관광을 함
이곳은 유적지가 아니고 요즈음 서안 관광지를 홍보하기 위해 조성한 조형물로 낙타를 타고 이동하는 캐러밴들을 형상화 한 거대한 조각 작품임.
이곳이 실크로드 깃점이고 서쪽은 로마까지가 실크로드라 함
서안은 4환(環)으로 도시가 구성 됨. (북경은 6環)
서안성(西安城)은 건조 당시의 모습대로 온전히 남아 있음 -길이 13.14Km
서안 백성들은 물이 있는 곳을 좋아함
- 한국에서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곳 : 서울, 제주도, 강릉
- 중국인들이 싫어하는 곳 : 경주(물이 없다)
한국인 : 산을 좋아함
중국에서는 ‘덤’이란 개념 없음 - 식당에서 무한 리필은 생각도 못함. 뭘 더 주는 법 없음
- 추가 주문은 돈 더 내야 함
중국에선 선불(先拂)문화임 - 전화, 전기, 수도, 가스가 낸 요금의 기한이 넘으면 차단됨
- 한밤중이라도 낸 요금 기한 넘으면 차단됨
▣ 서안 성벽·종루·고루
시안 성벽(西安城墙) 중국에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성벽 당나라 때 장안 황성(长安皇城)으로 축조했던 성벽이 원조다. 당나라 말기에 장안 황성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수도를 뤄양으로 옮겼고, 1374년 명나라가 방어 체계를 구축할 목적으로 새로이 성벽을 쌓았다. 시안 시가 1983년부터 무려 20년에 걸쳐서 명나라 때의 성벽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높이 12m, 폭 15m, 총 길이 13.7km에 달하는 성벽으로, 총 98개의 성루가 성벽을 따라 이어진다.성벽 바깥쪽 바닥에는 적의 침입을 막고자 판 연못인 ‘해자’가 있다. 동서남북으로 각각 성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그 중에서 서문(안정문(安定门, 안딩먼)은 고대 실크로드로 가는 길목이라서 중요시되었고, 싸움이 잦았던 북문(안원문(安远门, 안위안먼)은 도성을 수호하는데 매우 중요했다.지금은 시민들이 성벽을 드나들기 쉽도록 문을 몇개 더 설치했다. 총 18개 문 중에서 13개 문을 통해서 성벽에 오를 수 있는데, 자전거 하이킹을 하려면 대여점이 가까운 남문(영녕문(永宁门, 융닝먼)으로 오르는 것이 편리하다. 참고로 남문은 비림 박물관에서 도보로 10분이면 도착한다. 한여름 시안의 무더위는 상상 그 이상이다. 되도록 한낮에 오르지 않는 게 좋지만, 시간이 그때뿐이라면 얼음물을 꼭 챙기자. 걷기는 부담스럽고, 자전거 하이킹이 내키지 않는다면, 전동차를 타고 일주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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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루(鐘樓) ↓
시안성벽은 직접 오르지 않고 차창관광을 함
옛 성문은 4개였는데 원활한 교통을 위해 지금은 17개의 성문으로 출입 할 수 있게 함
서안은 완전 계획도시
서안 : 겨울 밤 영하 17℃까지 내려 감
- 겨울에 자기 집 앞 눈 안 치우면 고액의 벌금 매김
▣ 흥선사
서안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고 사리탑이 있고, 밀교사원이라는 점까지만 알아들었다. 그런데 밀교가 불교의 어떤 종파인지 들어도 참고 자료를 보아도 모르겠다.
흥선사는 3세기 말에 창건되었다고 하니, 서안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수나라 때 사찰을 크게 중수하고 흥선사라고 불렀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몇 번이나 파괴당해 1949년부터 현재까지 사찰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전의 당우들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 불사를 하고 있다.
이 절은 인도에서 당나라 장안으로 온 승려들이 거주했으며, 이곳에서 역경이 이루어졌다. 특히 불공삼장不空三藏(705~774)이 흥선사에 머물며 번역을 했던 밀교 포교지로도 유명하다.
진언眞言 계통의 밀교는 300년 대 후기부터 중국으로 경전이 유입되어 번역되었다. 그 후 선무외善無畏(637~735)와 금강지金剛智(669~741)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체계적인 밀교(純密)계통 경전을 번역하였다.
[밀교 密敎]란 어떤 특수한 종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 속의 한 흐름으로서, 즉 대승불교의 철저한 후계자로서 오히려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밀교입니다. 밀교가 힌두교 등 인도의 제종교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불교의 흐름 속에서 특수한 발전을 보아온 하나의 [비밀불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밀密]이란 비밀을 의미합니다. [비밀]이라는 말의 산스크리트어(梵語)는 구햐 guhya라는 말이 흔히 쓰이는데 그것을 번역하여 비밀, 또는 밀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밀교] 또는 [비밀불교]는 그 의미하는 바가 종교적 체험의 깊이를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밀교라든가 비밀불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깊고 오묘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밀교라고 할 때는 곧 현교(顯敎)라고 하는 말이 대조적으로 말해집니다. 사실, 홍법대사(弘法大師) 쿠카이(空海) 이후의 일본의 진언밀교에서는 상대적인 의미로 현교와 밀교라고 하는 말이 쓰여지고, 현교에 대하여 밀교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를 강조하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관계된 것으로 쿠카이가 저술한 것, 또는 그 이후의 천태종의 학자들이 쓴 것, 그리고 헤이안(平安) 말기에 가꾸반(覺종;興敎大師)이 현밀차별을 논한 것 등 대단히 많이 있는데 그러한 것을 통하여, 현교에 대한 밀교의 특색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상당히 폭넓게 연구되고 있습니다.
▣ 회족 거리
중국인 특유의 거리로 사람으로 꽉 찬 거리. 사람의 반은 손에 먹을 걸 들고 다니며 먹는다.
우리의 하나투어 회사에서 제공한 ‘양고기꼬치구이’ 하나와 ‘거울떡’ 하나씩 들고 다니며 먹었다. 맛없는 ‘거울떡’이 왜 유명한지 모르겠다.
회족(回族)거리 - 후이족 거리(回坊) 1년 365일 왁자지껄한 야시장
고루 뒤편 베이위안먼(北院门) 거리는 시안에 사는 후이족의 심장부다. 중국에 들어온 아랍인들이 중국인과 결혼을 통해 정착하면서 후이족이 되었다. 후이족이 처음 정착 생활을 한 지역이 산시 성(陕西省)으로, 아편 전쟁 때는 최고 170만 명에 달했다. 현재 산시 성에 거주하는 후이족은 5만여 명에 불과한데, 시안에서 후이족이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지역이 바로 여기다. 베이위안먼 거리를 중심으로 서쪽 다마이스제(大麦市街)와 남쪽 시다제(西大街)까지 집단을 이루어 살아간다.매일 저녁 여행자 행렬이 이곳으로 향한다. 후이족이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음식들이 맛있을 뿐만 아니라, 왁자지껄한 장터 분위기가 나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여름밤에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다. 흥겨운 장터 분위기에 휩쓸려 걷다 보면 소지품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길거리 간식 중에서 납작한 빵 가운데를 반으로 갈라 간장에 조린 고기를 듬뿍 넣어 주는 러우자모(肉夹馍), 각종 꼬치구이(串, 촨), 매콤한 고추기름과 고소한 참깨 소스를 넣어 비벼 먹는 마장냥피(麻酱酿皮)가 인기다. 그러나 이 거리에서 만사 제치고 맛봐야 할 음식은 ‘양러우파오모(羊肉泡馍)’다. 일명 양고기 떡국이라고 불리는 후이족의 고유 음식으로 만드는 방법부터 흥미롭다. 큰 사발에 밀가루 떡을 잘게 뜯어서 직원에게 건네면 주방으로 가져가 편으로 썬 양고기, 건두부, 목이버섯 등을 올려 따뜻한 국물을 담아내 온다. 떡이 국물에 부드럽게 퍼지면 양념장을 곁들어 먹으면 된다. 젓가락으로 마구 휘저으면 국물이 텁텁해지니까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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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루와 고루
종루는 종 치는 곳이고 고루는 북 치는 누각이다. 옛날 시계가 없을 당시 종루와 고루에서 치는 소리를 듣고 성문을 여닫기도 했단다.
그런데 종루와 고루의 건물이 굉장히 크다. 이 건물이 서안의 중심이니 길 찾기의 표적이란다.
도시의 동서남북이 특징 있는 도시로 꾸밈
종루(鐘樓) 고대에도 현대에도 변함없는 시안의 랜드마크 시안의 동서남북 4개 대로가 만나는 중심에 있어서, 언뜻 보면 외딴 섬처럼 고립되어 보인다. 오래 전 종루는 새벽을 깨우는 역할을 했었다. 종루에서 타종을 하면 밤새 닫혀 있던 성문이 일제히 열렸던 것이다. 1384년 종루가 처음 세워졌을 땐 지금 위치에서 서쪽으로 두 블록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1582년에 건물을 통째로 현재 위치로 이동해 왔다. 중국 전역에 있는 수많은 종루 중에서 역사와 예술적 가치가 으뜸으로 꼽힌다. 높이 36m의 3층 누각 꼭대기에 솟은, 상투처럼 생긴 나무 심지가 해질 녘이면 아름답게 빛난다. 구리를 덧씌우고 도금까지 해서 멀리서도 반짝반짝 빛난다. 어둠이 내리면 320개의 조명을 환하게 밝혀서 낮보다 자태가 훨씬 수려하다.이제 종루는 운전자에게는 방위를 가늠하는 나침반 역할을, 여행자에게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북쪽 지하도를 통해서 종루에 오르면 바둑판처럼 말끔하게 조성된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1384년 명나라 때 주조하여 시간을 알리던 대형 종의 진품은 비림 박물관에 있고, 현재 종루에는 복제품이 걸려 있다. 지척에 있는 종고루 광장(钟鼓楼广场, 중구러우 광창)은 삭막한 도심 속의 오아시스다. 스타벅스를 비롯해 분위기 좋은 카페와 쇼핑센터가 즐비하다. 시안의 대표 음식 ‘교자연(饺子宴)’으로 유명한 식당인 덕발장(德发长, 더파창) 본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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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루(鼓樓) 시계가 없던 시절 밤을 알리던 장소 종루에서 서쪽으로 200m 떨어진 고루는 종루보다 4년 앞선 1380년에 축조되어서, ‘밤을 알리는 시계’ 역할을 했다. 고루에서 북을 치면 시안의 성문이 일제히 닫혔던 것이다. 전체 높이가 33m로 종루보다 약간 작지만 명나라 초기 목조 건축의 정수로 꼽힌다. 현재 모습은 1740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한 것이다. 종루와 마찬가지로 직접 고루에 올라갈 수 있으나, 경치가 종루만 못하니 굳이 돈들여 오를 필요는 없다.고루보다 주목할 것은 고루의 북문(北门) 뒤로 이어진 베이위안먼(北院门) 거리이다. 시안을 대표하는 이슬람 구역으로, 7세기경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와 정착 생활을 해온 후이족(回族)들이 집단거주하면서 독특한 문화 거리가 조성됐다. 이 거리에 가려고 고루를 지나쳐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고루(鼓樓) ↓
종루와 고루의 구별은 지붕을 보니 구별이 되었다.
가이드가 자유시간이니 종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유명한 만두집 「덕발장 교자연」으로 들어오란다. 종루와 길거리 풍광을 열심히 찍었다. 나중 찍은 사진을 보니 멋지게 잘 찍혔다. 꽃탑이 기발했다.
▣ 덕발장 교자연
세상에... 한가지만 특출나게 잘 해도 잘 먹고 살 수 있고 유명인사도 되는 세상이다.
서안 호텔에서 우연히 TV에 ‘덕발장 교자연’ 요리사가 기막히게 예쁜 오리 모양의 만두를 들고 츨연하여 대담하는 걸 보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진열장 안에 진열해 놓은 모형 만두에게 혼이 빼앗겼다. 예술품이었다.
우리들에게 제공된 만두만 18가지!!! 1개씩 먹게 사람 수대로 나오는데 나중에는 구경만 하고 다 먹지 못했다.
1인당 한화로 28,000원이라는데도 그 넓은 홀에 손님들로 가득하니 떼돈 벌겠다.
“교자연‘이란 이름이 붙은 연유
- 중국인들이 만두(饅頭)라 부르는 음식은 정식 식사 메뉴가 아니고 야식으로 주로 먹는 음식이었다. 밤 12시, 즉 자시(子時)가 넘어서 날이 다음 날로 넘어가는 交차점, 즉 출출할 때 먹었기에 交子연이라 했단다.
중국인들 - 집안에서는 가난하게
- 집 나오면 부유하게(외국 여행 시)
아래 사진 두 컷은 「하나투어」관광객 일행 18명
▣ 란시 인터네셔널 호텔
LANXI INTERNATIONAL HOTEL(藍溪國際酒店)
나흘 밤을 같은 호텔에 묵었다. 호텔 건물을 처음 대하자 입이 쩌억 벌어졌다. 건물이 엄청 컸다. 우리 방이 9002호이고 이영자 친구네 방이 9017호인데 새 건물이고 대리석으로 삐까번쩍 거렸다. 엘리베이터가 8대나 되어 쉽게 오르내렸다.
방도 널찍하고 화장실, 차 끓이는 도구, 수납장 등 모두 만족 했다.
5층 식당에서 4번 식사를 했는데 메뉴도 상당히 좋았다. 이영자 친구가 밥 먹는 자리를 오늘은 이쪽에서 내일는 저쪽에서, 다음 날에는 앉는 방을 바꾸어서 즐겁게 식사를 하였다. 후식으로 아주 시원한 수박을 맘껏 먹었다.
1층 프론트 층 장식이 아주 호화롭고 호텔 주인이 일부러 수집한듯한 토우(土偶)나 옥 공예품으로 꾸민 진영장도 잘 꾸며져 있었다.
아침 일찍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촬영을 했는데 와우! 호텔 뿐만 아니라 주변 건물도 초고층으로 중국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 전엔 가난한 중국이었는데 엄창나게 성장한 중국이 두렵게 느껴졌다.
- 중국 국민들의 옷차림, 몸매까지 옛날 중국이 아니었다. 엄청 세련되었다.
우리가 5일간 이용한 호텔 식당↓
✼제2일(6월 2일 토)✼
모닝콜 - 07:00
아침식사 - 06:30부터 가능
출발 - 09:00
월요일과 금요일 저녁은 차가 엄청 정체됨
택시 요금이 쌈 - 기본 요금 저렴
- 택시운전기사 옆 철창 - 방범용
중국인들 대부분 아침밥 사서 먹음
- 아침 식사 대금, 한화로 1000원 정도 - 들고 다니며 먹음
- 아이스크림 - 앉아 먹는 일 없음
- 점심, 저녁도 사 먹는 일 많음
한국 - 의, 식, 주,
중국 - 식, 의, 주,
중국 식당의 식대 : 200위안 안팍
중국 식당에서 - 물, 술 소지 사절(사 먹어야 함)
- 자기네 식당에서 팔지 않는 소주는 예외
▣ 팔로군 기념관
팔로군 서안 변사소 기념관 -항일운동의 정신이 담겨있는 곳 팔로군 서안 변사소 기념관은 해방이후에 건설된 전쟁기념관으로 항일전쟁 당시의 혁명근거지 입니다. 이곳에는 공산당 설립 이전부터 항일전쟁 전후까지의 현대사가 연루된 역사적인 곳입니다. 서안 기차역 주변의 혁명공원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거엔 외관상으로는 독일 치과의사의 병원인 척 하면서 실제로는 연안(延安)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주은래, 주덕, 등소평 등 공산당 간부들이 묶었던 곳이기도 하며,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작품의 저자인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스노도 이곳에서 묵었다고 전해집니다. - 1935년 10월, 모택동이 이만오천리장정(兩萬五千里長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연안(延安)에 입성하면서 연안은 중국 공산당 혁명의 총사령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국민당의 장개석도 서안을 섬서성과 감수성 침공의 주요기지로서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 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 전쟁정책의 영향아래 전국 항일운동이 고조되면서 국민당의 동북군과 서북군이 발병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나고 이어 모택동과 장개석의 제 2차 국공합작이 진행되면서 농공민들로 이루어진 홍군이 집합한 '홍군연락처(紅軍聯絡處)'가 집합되었습니다. 이 기관은 이후 1년 뒤에 이름을 '팔로군주서안반사처'로 바꿨는데, 이 곳은 공산당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현재 이곳은 그당시 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으로서 항일전쟁 당시의 비참한 중국의 상황을 담은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일본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
1930년대에 지은 건물
당시 - 도시 : 국민당이 지배
시골 : 공산당. 근거지가 연안
공산당 - 독일 공산당원이 치과의사가 경영
좁은 공간, 좁은 계단을 내려가 지하 공간에 위치한 침실
판대기를 이어서 만든 탁구대가 이색적임
▣ 화청지
● 화청지(華淸池:화칭츠) 화청지(華淸池)는 양귀비의 별장(別莊)으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또 역대 황제들의 온천장이었고요. 이곳은 려산(麗山)이 뒤에 있어 산세(山勢)가 좋고 항상 43도의 수온을 유지하는 온천수(溫泉水)가 솟아나 당(唐)나라 현종(顯宗)이 궁(宮)으로 조성하여 양귀비(楊貴妃)와 생활했던 곳입니다. 구조는 4문(門),10전(殿),4루(樓),2각(閣),5탕(湯)으로 되어 있고 양귀비 (楊貴妃)가 목욕했다는 부용탕(芙蓉湯)과 현종(顯宗)이 목욕한 구룡탕(九龍湯)이 있는데 현종은 양귀비가 목욕하는 부용탕(芙蓉湯)안을 구멍으로 드려다 보고 그의 몸매에 늘 감탄하곤 했다고 합니다. 당(唐)현종과 양귀비는 만남부터가 이상했다고 합니다. 원래 그의 18번째 아들인 수왕(壽王)의 비(妃)가 양귀비였는데 국모(國母)인 그의 부인(婦人) 수혜비가 죽자, 아들의 비(妃)인 며느리 양귀비의 미색(美色)에 홀딱 빠져 그를 총애하게 되었는데 아무리 황제(皇帝)라지만 며느리와 사랑에 빠져, 세간의 눈을 의식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종(顯宗) 즉 시아버지와 사랑에 빠진 그녀가 편법으로 남편인 수왕(壽王)의 저택을 나와 여도사(女道士)행세를 하며 현종과 비밀리에 접촉했다고 합니다. 그후 양귀비가 27세 되던 해 정식으로 현종(顯宗)의 귀비(貴妃)가 되었다고 하며 그녀의 오빠도 양귀비(楊貴妃)의 권세를 악용(惡用)하여 남용(濫用)을 부리다 결국은 이에 불만(不滿)을 품은 안녹산(安錄山)이라는 사람이 난(亂)을 일으켜 두 사람의 로맨스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것 입니다. 그림으로 보는 양귀비의 모습은 풍만한 여자로 묘사되었고 요즘의 늘씬한 미녀(美女)와는 차이가 있어 보였습니다. 화청궁(華淸宮)안에는 오간청(五間廳)이란 건물이 있는데 1936년 서안사변(西安事變)때 장개석이 여기서 잠깐 숙박하다가 장학량에게 체포당하면서 생긴 총탄의 구멍 흔적이 유리창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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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화청궁. 역대 황제의 별장
중국 3대 온천장 중 1곳
들어가는 입구부터 양귀비의 조각작품이 이채로움. 비천상 비슷한 양귀비 조각을 배경으로 일행들 다투어 촬영함
3000년 역사의 욕탕
1시간에 온천수 113 t 분출
온천수가 솟는 여러 건물을 둘러보았다. 많은 관광객들이 온천탕 건물 순례를 하느라 난리 법석!!!
서안은 13개 왕조의 수도
- 서주, 진, 한, 서위, 북주, 북제, 수, 당 등
72개의 능이 현존
당나라의 능 - 산을 뚫고 들어 감
중국의 3대 여장부 : 여황후, 측천무후, 서태후
당 현종 : 盛唐 時代
- 황제가 3개월간 화청지에서 정무 봄
양귀비 : 본명 ‘양옥환’
- 사천성에서 출생
- 춤을 썩 잘 추고 노래를 잘 했다 함
- 현종의 아들의 부인 즉, 며느리였는데 5년간 도교 사찰로 出家시켜 여승이 되게 함
- 양귀비가 37살에 현종은 貴妃로 책봉
- 당시 사회 풍조 : “양귀비처럼 예쁜 딸 하나 낳아라”
양귀비의 몸매 : 풍만. 키가 1m 58cm ∼1m 64cm 추정
‘화청지’하면 새하얀 양귀비의 나신(裸身) 조각상이 떠오르는데 약간 풍만한 양귀비 나신 조각상을 배경으로 많은 사진을 찍었다.
여자의 3대 美 : 가슴, 엉덩이, 작은 배
미인은 시대를 맞춰서 태어나야 함
- 당나라 미인 : 통통한 여인
사천
- 샤브샤브로 유명, 우리도 ‘서안 샷브샤브’로 점심을 먹엇다.
- 사천 여자 : 부지런해 1등 며느리
서안 : 연간 강우량 300mm
- 큰 재해가 없어 사람들이 표정이 없고 무뚝뚝
낙양 : 낙양 목단이 유명(중국 國花)
- 6월에 목단이 핌
- 낙양에 소림사 있음
▣ 「서안 채선당」에서 점심식사하다
業態는 한국의 채선당과 같으나 샤브샤브할 재료가 벨트를 타고 이동해 자기 앞에 오면 기호에 맞는 걸 골라 끓는 탕에 넣어 즐기는 식당이었다. 벨트를 타고 지나갈 때 놓지면 다시 언젠가 내 앞을 지나가게 마련...
재료가 무척 다양하고 무한 리필이라 흡족한 식사를 함
음료수는 모두 제 돈 내고 사먹어야 함.
앉을 의자가 엄청 높아 자세 잡기도 힘들고 드나들기가 어려움.
▣ 애금해리조트에서 저녁식사
이번 여행 중 가장 우아한 분위기에서 한 식사
중국 전통 볶음요리로 섬서요리로 한 식사 중 가장 질이 괜찮았다.
리조트 건물 앞에 예쁜 분수도 있고 꽃으로 분위기를 살린 게 맘에 들어 몇 컷 촬영함
애금해리조트는 임동현에 위치한 병마용 유적지에 있는 식당 중에서 제일 고급식당으로 소문이 나 있으며 맛 또한 좋아 많은 자유여행객과 단체 손님들이 자주 찾는 식당이란다. 식사 후에는 애금해리조트의 녹지대의 산책로를 따라 걷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 장한가(長限歌)
歌舞 쇼
70분간 공연
입장료 : 70 us$
좌석 수 : 1,700석이 만석(滿席)이었음
화청지가 무대이고 뒷산이 배경인 장중한 쇼
저녁 식사 후 어둑어둑하기 시작할 때 공연 개시
여행사에서 잡아 준 자리가 중앙 앞자리라 멋진 VIP석
멋진 공연 장면을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많이 촬영했다.
준비해 간 내 카메라에 장착된 표준렌즈(17-55mm)는 집에 두고 교환렌즈로 줌렌즈(18-200mm)를 장착해 가서 공연 모습을 효과적으로 촬영할 수 있었다. 200mm라 어느 정도 먼 거리의 장면을 당겨 찍을 수 있었다.
唐 3賢 : 이태백, 두보, 백거이
양귀비 책봉 후 예술 문화 크게 발전
★장한가의 스토리
- 백거이가 지은 長詩를 바탕으로 꾸민 가무극인 바 당 현종이 양귀비와 사랑에 빠져 혼미할 때 안록산이 현종을 속여 조정에 들어와 양귀비와 사통을 하게 된다. 나중 안록산이 양귀비를 차지할려고 ‘안록산의 난’을 일으켜 현종이 궁지에 몰려 쫓겨 다닐 때 백성들이 양귀비를 죽이라 하며 피난길을 가로 막자 현종은 어쩔 수 없어 양귀비를 자결하게 하고, 결국 현종은 아들에게 양위를 하게 된다.
양귀비의 무덤에는 유품을 넣어 묘를 조성했다 함
「장한가 가무 쇼」 장한가쇼는 당나라 때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쓴 장한가라는 시에 근거하여 만든 야외 공연으로 주요내용은 당현중과 양귀비의 사랑이야기 및 당현종 말년에 안록산의 난, 양귀비의 죽음 등을 묘사한 쇼입니다. 당나라의 화려한 복장 및 가무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매년 4~10월 밤이 되면 화청지는 현종과 양 귀비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공연 ‘장한가(长恨歌)’의 무대로 변신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를 바탕으로 장이모우 감독이 연출했다. 화청지를 병풍처럼 감싼 리 산에 조명을 설치해 화려한 무대를 연출하며, 장중한 음악이 춤동작과 조화를 이룬다. 저녁 8시에 시작하여 1시간 10분간 공연한다. 티켓 가격은 USD 60이다. 화려한 장한가쇼의 매력에 푹 빠져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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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 병마용갱(秦始皇 兵馬俑坑)
진시황 병마용박물관(秦始皇 兵馬俑坑博物館) 관람함
박물관 관람은 사람들이 하도 많아 막무가내로 뚫고 비집고 들어가야 관람이 가능했다.
여기서 뿐만 아니라 관광지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기에 편리한 기구를 사용했는데 바로 「무선송수신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무선송수신기」를 목에 걸고 리시버는 귀에 꽂으면 상당한 거리에서 해설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잘 들을 수 있었다. 단 너무 멀리 떨어지거나 모퉁이를 돌아 건물에 가리면 수신이 되지 않았다.
여기 병마용 박물관에서는 무선송수신기 덕을 톡톡히 보았다. 박물관 안에서 사람들이 하도 많아 항상 가이드 곁에 닥아서 있을 수가 없더라도 가이드의 헤설을 들을 수 있고 말 소리가 들리면 내 근처에 가이드가 있구나 라고 안심하고 구경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박물관 안에서 기념으로 병마용상(兵馬俑像) 기념품을 50$를 주고 샀는데 매장 직원이 달러 계산에 서툴러 상당히 먼 곳까지 나를 데리고 가서 계산을 마쳤는데 속으로 오늘 가이드를 놓쳐 혼자 좀 애를 먹겠구나라고 생각할 때 무선송수신기에서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 가이드가 있다는 증거!!! 얼른 우리 팀을 찾아 합류했다.
박물관 안에는 「제1갱 전시실」, 「제2갱 전시실」, 「제3갱 전시실」이 있고 「특별 전시실」에서는 전차(戰車) 등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 진시황 병마용(兵馬俑)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진시황이 사후에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거리에 있으며,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제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 중입니다. 갱 내에는 60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이 묻혀 있었으며, 현재에는 1000개 정도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더욱 놀랄만한 점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것 입니다.
병마용갱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호갱은 당시 농민이 발견한 것이고, 후에 2, 3호갱이 발견되었습니다. 1호갱은 세 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230m, 넓이는 612m로 총 면적이 12㎢입니다. 1호갱은 동서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있고, 2호갱은 면적이 약 6000㎡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2호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습니다. 3호갱은 면적이 520㎡으로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역시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중 입니다. 3개의 전시관 모두 갱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 개관시간 ; 08:30-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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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릉
진시황릉에 가는 도중 가이드가 말하길
- ‘진시황릉에 안 가보면 1번 후회하고’
- '진시황릉에 가 보면 2번 후회한다.’
결론은 진시황릉은 작은 산 하나일 뿐 아무것도 볼 것이 없다는 말.
진시황릉은 많은 사람들이 도굴을 시도하기도 했고 어느 시대인가 왕이 주도하여 발굴을 시도 했으나 모두 실패함
황릉을 조성할 당시 엄청 많은 水銀으로 차벽을 해 인간이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해 두었다고 함
진시황은 재위 기간 37년간 능을 포함하여 병마용갱(兵馬俑坑)을 조성했다고 함
●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진시황릉(秦始皇陵)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여기에 묻혀 있습니다. 능묘는 37년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둘레가 6㎞, 높이는 40m에 달합니다.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 입니다. 하지만 아직 내부는 개발이 되지 않아 있어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고 해도 내부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훗날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시황릉 앞까지 간다고 해도 내부에 들어갈 수는 없고, 밖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정도의 관광을 할 수 있습니다. 1987년 유네스코는 진시황릉을 <세계유산목록>에 넣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3개의 지하수층을 지나, 지하 50m에 설치되어 있으며 수은으로 강바닥과 호수를 축조하였다 합니다.
현대의 과학으로 발굴이 가능하나 발굴하면 유물이 없어질 가능성 크므로 발굴은 후대로 미루기로 결론 내림
▣ 진시황 지하 궁전
진시황 지하궁전(秦始皇 地下宮殿) 진황지궁(秦皇地宮), 이 궁은 사마천의 사기에 의거 재현된 것이란다. 실제로 건축 당시 참여한 인원과 비빈들을 함께 산 채로 지하에 밀폐시켰다 한다.진시황의 신비성과 상품성을 높이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이다. 병마용 박물관 도착 직전 낮은 야산으로 보이는 것이 진시황릉이다. 진시황 즉위 때부터 37년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주변의 둘레가 25km 정도 되는 거대 규모다.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로 산처럼 보인다. 진시황릉은 영화에 나올법한 ‘지하궁전’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수은이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돼 있다. 지하 궁전 내부는 천상과 지상을 모방해 만들어 졌다. 또 궁전 입구에는 영화 ‘인디아나존스와 최후의 성전’처럼 무단침입자에 대해 가차 없이 화살이 자동 발사되도록 ‘부비 트랩’이 장치돼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위한 것으로 진시황릉의 신비감을 더 높이고 있다. 2002년 12월에는 진시황릉의 신비를 벗기기 위한 대대적인 과학탐사가 시작됐다. 중국 당국은 진시황릉에 대해 지구물리 종합탐측기술을 이용한 원격탐지를 실시했다. 거액이 투입된 이번 조사에는 지면탄성·파동·자기파·고밀도전자파·중력 등 과학기술부가 개발한 최첨단기술이 총동원됐다. 이는 진시황릉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고 경계·모양·구조·깊이와 파괴 여부 등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다. 진시황릉 주변에는 ‘지하궁전’이 만들어져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중국은 진시황릉의 뚜껑을 열지는 않을 것이다. 진시황릉의 비밀을 캐는 것은 진시황의 ‘살아있는 전설’을 망가뜨리는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진시황을 영원한 전설 속의 신비한 인물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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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지하궁전(秦始皇 地下宮殿)은 우리 여행의 일정표에는 없는데 선택관광으로 탐방했다. 입장료는 15US$, 우리 한화로 16,000원 정도니 싼 곳도 아니다.
지하 궁전은 실제의 모습이 아니다. 진시황제의 능 속은 발굴이 안 되어 아무도 모른다. 문헌을 참고로 하여 추측하여 만든 모형이다.
그러나 실제와 다르건 말건 그 규모는 엄청나다. 陵 안이 모형이라 할 지라도 대단히 화려하고 장대하다.
✼제3일(6월 3일 일요일)✼
관광 패턴
- 중국 : 어린 자녀를 대동한 젊은 부부 - 자녀를 위한 여행
- 한국 : 40대 이상 - 자녀 키워 놓고 자기 자신을 위한 투자
중국 관광 피크 - 국경절, 노동절, 명절, 8월 자녀 방학 때
*명절 때 - 고속도로는 주차장
- 국도는 고속도로
▣ 화산(華山)
화산도 우리 여행의 정식 일정에 없는 관광지로 선택관광으로 오르게 되었다. 1인당 선택관광료가 무려 120 US$로 나처럼 다리가 고장나 산행이 어려운 사람도 케이블카로 북봉 정상 가까이 까지 갈 수 있다고 가이드가 권하고 일행이 한사람도 빠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묻어 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일행은 서안을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타고 달려 2시간이 소요되어 쉽게 갈 수 있었다.
화산은 도교(道敎)의 성지로 무협소설이나 무협지 VIDIO에 자주 등장하는 산으로 화산파(華山派)의 본거지다.
유명 무협소설가 김용 - 작품 모두가 영화나 무협지(武俠誌)VIDIO로 제작되었음
우리가 타고 온 관광버스에서 내려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험준한 산악도로를 2∼30분이나 올라 케이블카를 타는 곳까지 갔다.
화산의 연화봉은 마치 활짝 핀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 우리가 오르는 북봉은 1604m로 케이블카는 1550m까지 실어 올린다.
우리 관광버스 안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웅대한 화산(華山), 그리고 셔틀버스로 오르는 동안과 케이블카 안에서 많은 사진을 찍었다.
소수의 일행 빼고는 거의가 케이블카에서 내려 발걸음도 가볍게 산행을 시작했지만 나와 집사람은 케이블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반경 안에만 다니며 무료한 두 시간을 보냈다.
화산(華山) 화산(중국어 정체자: 華山, 간체자: 华山, 병음: Huà Shān,)은 중국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이다. 시안 시 동쪽으로 약 120 km, 시안(西安)과 정저우(鄭州)의 중간인 '화인 시(华阴市)'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속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서안에서 1시간 3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화산은 북악 헝산, 동악 타이산, 남악 형산, 중악 쑹산과 더불어 오악 중의 서악으로 불리며 남봉이 해발 2154.9m에 달하고 험준하기로는 오악 중의 첫 번째다.
높이 2,437m의 험준한 바위산으로 조양봉(동봉, 2,090m), 낙안봉(남봉, 2160m), 연화봉(서봉, 2,080m), 운대봉(북봉, 1,614m), 옥녀봉의 다섯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며, 험준한 산길과 가파른 계단길, 철난간이 걸려 있는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곳을 지나 산정에 이르면 위하평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최고 해발이 2,160m에 불과하지만 중국의 5대 명산인 ‘오악(五岳)’ 중 하나로 꼽힌다. 산이 평원에 수직으로 우뚝 솟아 있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5개의 기이한 봉우리를 위에서 바라보면 활짝 핀 연꽃처럼 생겼다고 한다. 예부터 도교의 명산이고 무협 소설에도 자주 등장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산이 험해서 오르기가 쉽지 않고, 특히 겨울철에 얼음이 얼면 위험하기로 악명이 높아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단 오르고 나면 풍경이 매우 아름답고 웅장하며, 암벽과 구부러진 소나무가 무척 근사하다. 화산의 5개 봉우리를 일주하려면 시안에서 당일로 오가는 여행으로는 불가능하고, 1박 2일이 필요하다. (산의 높이가 제각인데 봉마다 높이가 다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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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은 1개의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졌고 험준하기로 이름나 얼음이 언 겨울철 등반은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산이란다.
화산에는 하루에 입장객을 5만 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케이블카는 하루에 24,000명을 운송한단다. 와우!!!
✼제4일(6월 4일 월)✼
▣ 와룡사(臥龍寺)
중국인들 사이에 ‘사주팔자를 잘 보는 곳’으로 유명함
서태후가 다녀 간 곳
안에 소안탑(小雁塔)이 있는데 현장법사가 천축국에서 갖어온 657권의 불경을 보존하고 역경(譯經)을 한 탑이라 한다.
소안탑(小雁塔)이란 이름을 갖게 된 연유는?
- 스님이 “고기가 먹고 싶다.”라고 하자 하늘을 날아가던 기러기가 땅으로 떨어져 죽어서 그 기러기 고기를 먹고 탑을 쌓아서 기러기 안(雁)자가 들어 간 ‘소안탑(小雁塔)’ 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한다. 살생을 금하는 불도(佛徒)가 기러기 고기를 먹었는다는 이야기는 좀....
당나라 시기에 쌓은 탑
- 이 절에는 1300년, 1000년 묵은 고목이 많음
와룡사(臥龍寺) 한나라 영제시기인 168년에서 189년 사이에 창건하였다. 1,800년 전통의 섬서성 최초의 불교사원이다. 보통 부처가 누워 있으면 와불(臥佛)이라 하고 용이 누워 있으면 와룡(臥龍)이라 하는데 이곳은 스님이 누워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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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는 돈을 받고 관광객이 大鐘을 치게 하는 곳도 있었다.
가이드가 안내한 곳을 따라 가니 소안탑(小雁塔)을 촬영하기에 좋은 장소라서 사진을 여러 컷 찍었다.
소안탑(小雁塔)은 지진으로 중앙부가 완전 옆으로 쪼개진 적도 있었단다. 지금은 탑 모서리만 제법 깨진 채로 서 있었다.
▣ 서안박물관(西安博物館)
와룡사보다 서안박물관 관람이 훨씬 더 보람 있었다. 먼 당나라의 유물들은 우리로선 아주 보기 드문 유물이었다.
귀부인들, 마차, 말이나 낙타 등의 채색 토우(土偶)가 이채로웠고 청동기 솥, 자기등도 보기 드문 유물이었다.
귀부인들의 토우는 하나 같이 비만한데 당시 백성들은 먹을 것이 부족하여 날씬했으나 풍족한 생활을 한 귀부인들은 잘 먹어 퉁실퉁실 했다.
서안의 옛 지도에서 진시황 시대의 영토, 서안의 옛 지도에서 왕조 별로 구분된 지도도 볼만 했다. 여기는 아방궁 터, 저기는 화청지... 등
흥미로웠다.
오늘 점심은 「따판지」라고 우리나라 ‘닭복음탕’ 비슷한 걸로 먹었다. 이 음식은 신장 위구르의 특식아라고 하는데 주인이 여러 해 전에 신장 위구르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식당을 열었다고 했다. 식사 후 나오다가 보니 그 골목이 모두 ‘신장 위구르인’들의 사업장이었다.
▣ 대안탑과 북광장(大雁塔과 北廣場)
대안탑 앞 광장에서는 다양한 음악 공연이 열리고 밤에는 현란한 레이저분수쇼를 즐길 수 있는 곳
북광장에는 대안탑이 있고 삼장법사 현장의 거대한 상이 광장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여기서도 여러 컷의 인증 샷!!!
현장법사상을 지나자 중국 역사상 이름을 드날린 여러 시인과 학자들의 조각상이 길게 세워진 조각사우 거리가 이어졌다.
대안탑은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세워진 탑이란다.
조각상으로 세겨진 賢人들은 염입본, 두목, 두보, 이백, 이상은, 왕유, 백거이, 장욱, 유공권, 안진경, 구양순, 저수량 등 많이 들어 본 이름들이다.
백거이(白居易) 조각상↓
▣ 흥경궁(興慶宮)
흥경궁공원(興慶宮公園) 흥경궁공원은 서안에서 제일 큰 공원이다. 당 현종과 양귀비가 목단 꽃을 감상하며 거닐던 곳이다. 흥경궁 공원 안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 노래와 요가와 춤을 추며 즐겁게 보내고 있다. 이곳에서 시민들의 표정은 밝고 활기가 있다. 저수지가 있고 정자가 있고, 능수버들이 늘어져 있다. 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데 굉장히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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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경궁공원(興慶宮公園)에 들어서자 요란한 음악이 울려 퍼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가니 2-30명의 남녀가 유려한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전문 춤꾼이라 표현하기에 적당하다. 동작도 세련되고 ·화려하고 의상까지 갖춘 춤꾼들의 무대였다. 리더 격인 남자가 우리 일행들을 불러모아 시범을 보이며 따라 추란다. 우리 일행 몇몇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안으로 들어가니 대궐의 전각이 높이 서 있고 그 주위에는 목단꽃(모란꽃)밭이 쭈욱 이어졌다. 전각 뒤편에는 상당히 넓은 호수가 멋지게 자리하고 있었다.
첫머리에 춤꾼들이 보였는데 공원 안을 걸어 들어가자 교회의 찬양대 혼성 취주악단이 성가(聖歌)를 연습을 하고 있었고 거기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는 남성 관악 연주단이 연주에 몰두하고 자기들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산등성이 숲속에서는 전자 반주기 (伴奏機)의 음악에 맞춰 여성을 포함한 무리들이 대중음악인듯한 노래 부르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모두가 메니아들로 스스로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나라 공원은 휴식 또는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들뿐인데 중국의 공원은 취미를 가지고 기능을 연마하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어 본받을 만했다.
▣ 진2세 호해의 능(秦2世 호해의 능)
진 2세 묘(호해의 무덤) 진 2세 묘는 서안에서 진시황의 대를 이어 진나라의 황제가 된 아들 호해의 무덤으로, 직경 25M, 높이 5M 로 아버지 진시황의 어마어마한 능 규모에 비하면 한없이 소박하고 작은 무덤입니다. 이곳에서는 진시황릉에 버금가는 웅장한 규모와는 다르게 소박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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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2세 호해는 재위 기간이 2년이라 자신이 큰 묘를 꾸밀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 시황제의 능에 비할 때 너무나 초라하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버려진 잡초가 무성한 폐허에 가까운 묘였으나 나라에서 손을 보아 능으로 승격하여 지금의 묘를 꾸몄다고 한다.
▣ 남호공원(곡강 유적지공원)
남호공원(곡강 유적지 공원)
곡강 유적지 공원이라고도 불리우는 남호공원은 역사문화, 생태원림, 산수경관, 여행, 민속전승, 예술 등이 하나로 뭉쳐진 곳입니다. 잔디나 광장이나 언덕 심지어 물속에도 있으며, 온 공원이 당나라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원 곳곳에서 당나라 때의 조각상들을 보실 수 있으며, 그 당시 번영했던 당나라 생활을 연상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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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가이드가 아무 준비 없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우리를 그냥 데리고 다닌 격이다. ‘곡강 유적지’라면 뭔가 설명할 것이 있을텐데 그냥 쉬란다. 지루하고 따분하고 무료한 시간을 돈 주고 낭비하고 왔다.
▣ 섬서성미술박물관
이곳은 미술박물관이란 이름을 붙였으나 사실은 물건 파는 매장이었다. 우리 가이드가 미술관 직원에게 우리를 인계하자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 작품을 전시해 놓은 곳으로 안내하더니 얼씨구, 옥 공예품 전시장으로 이끌고 가 옥 공예품 해설에 장광설을 늘여 놓았다. 그리고 이웃 방으로 안내해 따라가니 가격표가 붙은 옥 제품 판매장이었다. 거기에 나 혼자 제대로 걸려들었다. 옥으로 만든 잔(盞) 세트(3개)에 120만원이란 정찰이 붙어 있어 거기에 끌려 그걸 80만원이면 사겠다고 하자 얼른 사란다. 그 옥 공예품이 지금 우리 거실 「김정태 박물관(???)」진열장에 진열 되어 있다. 내가 잘한 짓이냐?
오늘 저녁 식사 메뉴는 「천하제일면」....
- 면은 너비가 10cm 가까이 되고 길이가 3.8m의 길고 넙적한 면(麵)으로 이 집은 이 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잘라서 먹는 방법을 종업원이 시범을 보이는데 면을 당겨 그릇 가장자리에 대고 적당한 길이의 면을 국자의 등으로 눌러 자른 후 소스 국물에 풍덩 잠궈서 먹는다.
- 맛은? 이름값을 못했다. 별로라 이 말씀!!! 「천하제일면」은 한 젓갈 맛보고 그냥 남기고 딴 음식으로 배 채우고 나왔다. 나쁜 놈들!!!
◈중국은???
밥 먹는 공기와 세숫대야는 구별이 안된다.
- 밥 먹는 공기가 크다란 뜻
죽도 숟가락 안 쓰고 젓가락만 사용
- 면도 젓가락만 사용
한국 삼섬그룹의 어느 회사가 서안에 진출
- 중국인들 1년 계약한 후 입사했으나 1년 후 상당수가 퇴사함.
- 이유는 노동 강도가 높아 중국인들 감내 못함.
그리고 휴식시간이 너무 짧아 불만.
중국인들 점심시간이 보통 2시간. 한국인들은 20분 이내
- 중국인들 일 하는 도중 휴식시간이 길다.
아파트 : 10년 전 보다 10배 이상 오름
- 아파트의 소유권은 70년.
- 땅 이용권도 70년
- 땅의 주인은 국가
중국의 4대 문화 도시 : 북경, 상해, 서안, 무한
중국의 1자녀 정책 : 포기하고 해제함
- 해제했으나 출산율 높아지지 않아 정부가 고민.
- 1자녀에 익숙해졌고 엄청난 교육비 때문
중국 가정에서 큰돈 들어가는 곳 : 교육비와 의료비
중국의 교육
- 입학하면 졸업까지 담임이 안 바뀜
- 숙제 안한 아이 →부모에게 3번 알려도 계속 안 해 오면→부모가 포기한 자녀 담임도 포기
- 숙제 안한 아이 → 부모가 학교에 나와 자녀가 숙제하는 옆에 서서 다 할 때 까지 기다림
- 학부모는 맘대로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함. 용무 있는 부모가 신청하면 담임이 교문까지 나와 동행하면 가능
- 방과 후 학생은 전부 학교 밖으로 나가야 함.
- 중국 정부 : 교육 중시 - 교사 보수 매우 높다.
중국의 병원비가 엄청남. 입원하지 않으면 보험이 안됨,
- 단 아동병원은 모두 보험 됨. 그러나 의료 숫가가 높음
중국 : 敬老 대상자는 무료
- 단 전철은 출퇴근 시간에는 할인 안 되고 10시 이후에야 무료
중국 : 아침식사 - 죽을 많이 먹으며 죽 종류 다양함
- 아침식사 시간은 짧고 점심은 2시간동안 먹음
- 저녁식사는 사서 비닐봉지에 넣어 집에 가서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함
서안 : 야채 기름으로 조리 - 유채 등 식물성 기름 다양(옥수수, 땅콩, 해바라기 등)
북경 : 돼지기름으로 조리
임산부 : 복지 않은 해바라기씨 복용 권장, 칼슘 다분
중국 : 한국보다 냉장고가 작음, 볶음요리는 냉장고에 넣으면 기름기가 굳음. 볶음요리는 요리 후 금방 먹음
서안 : 덥기 때문에 방마다 에어컨 있음
- 도시의 변두리보다 도심이 2∼3℃ 더 높음. 에어컨 外器 때문
서안 사람 : 쪼그리고 앉는 풍속 있음. 푹신한 소파 두고...
- 농사 짓다가 논밭뚝에 쪼그리고 앉는 버릇 때문
표준말 - 북경말
지방말 - 사투리
일본 문화가 당나라 문화 배워 감 - 90년대
- 당시 일본인 관광객 엄청 많았음
중국의 관광 형태
- 토·일요일에 농가관광 유행 : 고가의 상품
- 북경, 항주, 소주 코스 좋아함
- 서안, 계림 코스도 인기
중국인들 : 국민들이 조경(造景)에 들어가는 국고 지출에 반대 않음
차(茶)를 즐겨 마시는 중국인들
茶 艹 + 八 + 十+ 八 = 20+80+8= 108
- 차를 늘상 마시면 108세까지 사는 것은 문제없음
중국 여인들 - 평소에 화장을 안함
- 학부모 회의 시 화장하고 나가면 주목 받음
- 자녀가 “엄마, 화장하고 학교에 나오지 마.”
티벳 : 산악인들 물이 귀해 씻는 것 어려움
택시 : 초록색 - 눈에 잘 띔
초록 모자 : 마누라가 바람 피웠다는 의미
- 초록모자 보기 어려움
✼제5일(6월 5일 화)✼
마지막 날이다. 모든 짐 큰 가방에 꾸려 관광버스에 싣고 출발...
도중 한군데엘 더 들렸다. ‘농산물 매장’...
- 3년 묵힌 보이차 한 덩어리를 3만원 주고 구입...
- 적어도 6년 이상 묵혀 발효한 걸 사야 하는데 너무 싼 걸 샀어!!!
서안공항 출발 13:10
인천공항 도착 17:00
박창서 선배님, 이영자 벗님아!! 훌륭한 여행 보람 있는 시간 함께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여행 같이 합시다, 약속해요!!!
첫댓글 덕택에 앉아서 서안 구경 잘 하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