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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의 3차 예언
민 23:27-24:9
27 발락이 발람에게 또 이르되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하고
28 발락이 발
29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제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30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행하여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24:1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2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5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6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7 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8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의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9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민 23:27-24:9 / [끝내 발락의 뜻대로 되지 않다] 발락이 또 발람에게 간청하였다.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저 이스라엘 녀석들에게 저주가 내리도록 힘써 주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실지 혹시 아오?.' 28) 그러고는 발락이 그를 데리고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브올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29) 그러자 이번에도 발람이 발락에게 일렀다. `이곳에 일곱 제단을 쌓아 올리시오. 또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제물로 마련하시오' 30)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제단마다 수송아지와 숫양을 한 마리씩 바쳤다. 24:1) 발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못마땅해하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그 분의 뜻이 어떠한지 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눈을 광야 쪽으로 돌려 2) 이스라엘 백성이 지파별로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3) 그러고는 이렇게 노래를 읊었다. `브올의 아들 나 발람이 하는 말이다. 맑게 열린 눈으로 나 발람이 말한다. 4) 하나님 하시는 말씀 들을 수 있는 나, 전능하신 분께서 보이시는 신비한 환상을 훤히 들여다보는 나, 그분 앞에 고꾸라져 눈을 뜨게 된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5) 야곱이여, 너희가 쳐놓은 저 장막이 어찌 그리도 보기 좋은고. 이스라엘이여, 너희가 살고 있는 저 천막이 정말 보기 좋구나! 6) 늘어선 골짜기 같고 푸른 초원, 시냇물 끼고 도는 동산과 같다. 여호와 손수 심어 놓아 감미로운 향취 풍기는 느티나무 같고 시냇가에 심어 놓아 은은한 향기 풍겨 내는 송백과 같다. 7) 이스라엘의 우물마다 물이 콸콸 흐르고 넘쳐 들판마다 뿌린 씨 물걱정 없다. 둘러 있는 이웃보다도 훨씬 더 힘이 세어 잇따라 나오는 왕마다 아각왕일지라도 쓰러뜨리겠구나. 8) 애굽에서 저들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 힘찬 들소처럼 저들 편이 되셔서 싸우시는구나. 저들 원수를 마구 집어 삼키시고 원수들 뼈를 으스러뜨리신다. 활시위 당기시어 원수들 살덩이를 꿰뚫으신다. 9) 저 무리는 힘센 사자와도 같아 잠들어 누워 있을때에라도 누구 하나 건드릴 생각도 못하네. 이스라엘이여. 네게 복비는 이마다 복받을지라. 이스라엘이여, 네게 저주를 퍼붓는 이마다 저주를 받을지라.'
미신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1,2차 예언과 달리 발람이 하나님의 영의 임재 가운데 예언합니다.
3차 예언 준비(27-30) 두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발락은 또 다시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을 저주로 바꾸기 위해 장소를 바꾸었습니다. 이번에 발락이 발람을 인도한 브올산 꼭대기는 바알브올로 알려졌으며, 고대로부터 바알을 숭배한 곳이었습니다(민 25:3; 신 4:3; 호 9:10). 이번에도 발람은 일곱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심(1-2) 1차, 2차 예언 때와 달리 발람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란 구절은 이전 1, 2차 예언 때 점술을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교도들의 전통적인 방식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미신을 따르는 인간에게도 진리를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자비가 놀랍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점술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두 차례 예언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발람은 올바른 방법으로, 곧 하나님의 영으로 예언합니다.
3차 예언(3-9) 3차 예언을 하는 발람은 제법 선지자 모습을 갖춘 듯 보입니다. 그는 미신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처럼 말씀과 환상으로 계시를 받습니다. 그의 길을 막던 여호와의 사자도 보지 못했던 발람이 이제는 눈을 떠 복된 진실을 봅니다. 사울 왕의 경우처럼 발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삼상 10:6-13). 그가 계시의 영으로 바라본 이스라엘은 아름답고 힘 있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정착할 가나안 땅이 골짜기, 강가의 동산, 물가에 심은 아름드리나무에 비유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성한 번성은 물이 넘쳐나는 물통과 많은 물가에 뿌려진 씨에 비유되며, 이스라엘의 국력은 들소와 수사자, 암사자에 비유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선지자의 눈을 열어 자기 백성이 받을 아름다운 복의 실상을 심지어 적국의 왕에게 알리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라는 마지막 말씀은 바로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입니다(창 12:3).
적용: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복이 아름다운 자연과 맹수의 힘에 비유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베푸신 아름다운 은혜를 나눠보세요.
F. B. 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여러 층으로 된 선반에 있는 줄로 알고 우리의 키가 높아질수록 그 여러 층의 것을 가질 수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후에 깨닫기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을 받아 가지려고 하면 내가 높아지기를 원할 것이 아니고 더욱 더 나를 굽히고 내려가며 또 내려가기를 힘써야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 설 교 >
축복의 말을 하자
민 23:27-24:9 오정우 목사
우리 지난 4주간동안 말에 대한 설교를 같이 하면서 은혜를 나누었다. 처음에 말에 대한 설교를 해 달라고 누가 요청을 했을 때에는 참 마음이 답답했었다.
왜냐하면, 말에 대한 설교에 특별한 자료들이 없어서 늘 만족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하는 가하고 내 마음엔 항상 하나님 말씀이 증거되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말`이라고 하는 것을 주제로 성경을 보기 시작하니까, 말에 대한 설교가 왜 그리 많은지 그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지난 시간동안 믿음의 말, 삶으로 하는 말, 건설적인 말에 대해 들었고 그리고 오늘 축복의 말이란 주제를 갖고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말의 힘이 크다는 것이다.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말을 잘해야 되겠다는 의미다.
데이라는 사람이 쓴 `황금문` 이라는 책 속에 보면 사람은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세 개의 황금문을 지나야 한다. 황금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치있고 귀하고 존귀한 문을 지나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정말 가치있고, 귀하고, 존귀한 말을 하려 하면 세 개의 황금문을 지나가야 하는데
첫째, 그 말이 진실이냐? 그것을 통과해야 한다.
둘째, 그 말이 필요한 말이냐?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
셋째,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를 이야기한다. 친절한 말이냐? 아무리 진실하고 필요
한 말이라 하더라도 친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참말이냐, 필요한 말이냐, 친절한 말이냐, 이 세가지 문을 통과해야 이 말이 좋은 말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을 보면 그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재판정에 선다.
검사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저 패륜아를 보십시오. 아버지를 죽인 자입니다. 러시아의 이름으로 저 사람을 처단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재판정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들끓기 시작한다.
변호사가 나선다. "여러분, 한 남자에게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애인을 뺏아간 아버지를 죽이고 길 잃은 양처럼 헤매고 있는 그 아들에게, 러시아 아버지의 이름으로 돌을 던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또 숙연해 진다.
검사나 변호사는 똑같은 말을 했고, 똑같은 진실을 이야기했다.
검사의 말대로 아들은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그는 패륜아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애인을 뺏아간 아버지를 책망한 그런 아들인 것이다.
똑같은 말이지만 똑같은 진실이지만 과연 그 말이 필요한 말인가?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인가 하는 것을 물었을 때, 두 개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을 잘해야 한다.
오늘 성경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 주일에 한 말씀대로 악평 한마디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년동안 광야에서 형벌을 받는다. 정탐한 날들을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사십년의 광야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 광야의 어려운 생활을 끝내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정 속에서 생겨진 일이다.
모압나라 왕인 발락은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여지없이 패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름대로 기발한 생각을 한다. 그것은 바로 발람이라고 하는 이방인 선지자에게 "내가 너에게 은금보화를 줄테니 너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라." 영적으로 그들을 무너뜨리라는 것이다. 아주 기발한 생각이 아닌가? 내가 저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군대가 많아서도 아니고, 전술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들이니, 영을 죽여야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민22장부터 저주의 계획이 23장 26절까지 두 번의 시도가 실패를 하고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 저주 시도가 있다. 이 저주 시도는 네 번을 했는데, 네 번 다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발락 왕이 발람 선지자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막으셨고, 오히려 축복하셨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축복하는 말과 저주하는 말`, 두 가지의 말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저주하는 말은 23장27절 `발락이 발람에게 또 이르되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하고`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해 달라는 것이다. 저주를 요구하고 있다.
`저주`라는 말은 재앙이나 불행이 닥치기를 빌고 바라는 행위이다.
왜 사람들은 저주를 해야 하는가?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경쟁심 때문이다. 내가 이겨야 하고, 내가 이기려면 상대방을 해하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생존경쟁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서로에게 저주아닌 저주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려서의 경험이지만, 다른 친구가 시험 보는 날에 아파서 안오게 되면 내가 한 등쯤은 올라갈텐데 하고 솔직히 그런 생각을 했었다. 부모님이 나에게 몇등이냐고 물으시니까, 등수는 안 올라가고 다른 친구가 없으면 내가 올라갈텐데 하고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삶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는가? 아무개가 없으면 편할 것 같다. 저주 아닌 저주를 하고 산다. 누구만 이기면 내가 다 이길 것 같은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사탄의 역사다. 죄인 된 모습이 그러하다.
잠 3:33에 보면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했다. 악한 자에게는 저주가 있다. 저주하는 사람은 죄인이다.
베드로후서 2:14에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욕심만 있고 이기려고만 한다.
이사야 8:21에는 `이 땅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죄인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을 저주한다. 하나님을 불평한다.
하나님은 저주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저주가 돌아간다고 하셨다.
시 109:17-18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다윗 왕을 저주하던 시므이는 결국 죽임을 당했다. 죄를 지어 저주받은 인생은 저주의 삶을 살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저주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주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저주가 없다.
스가랴 14:11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이 땅이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은 저주가 없는 -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경쟁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그런 세상인 것이다.
성도에게는 저주가 없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저주가 있어서는 안 된다.
"주여, 저주가 없는 마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다 망하게 되어 있다. 생각해 보자. 내가 저를 이긴다고 다 되는가? `뛰는 자 위에 나는 자`라는 말이 있다. 이긴다고 다 사는 것이 아니다.
엘리야를 보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팔백오십며을 이긴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능력의 선지자가 되었다.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이 비를 주셨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바로 영적 침체에 들어가게 된다.
로뎀 나무에서 자기 자신을 죽여 주시기를 원한다. 왜? 이겼다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더 강한 자가 자기를 치러 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자기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얼마나 대단한가? 그것도 달리기, 마라톤에서. 그러나, 한 번 이기고 나면 이 자리를 지키기가 힘들다. 이긴다는 것은 승리가 아니다. 이긴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침체를 가져오는 것이다. 더 나은 자가 나를 이기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저주한다고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서로 도와주어야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어려서 한자를 처음 배울 때 `사람 인(人)`에 대한 것이다. 막대기 두 개를 세워 놓으시더니, 이것이 사람 인자라는 것이다. 기대는 사람이 있고, 밀어주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남을 밀어 줄 때만 사람이 아니라, 기댈 때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고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부부가 잘 사는 것은 늘 밀어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기대기도 해야 한다. 늘 기대기만 해도 안 되고, 늘 받쳐주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인생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결국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지난 주간에 `영모는 사라졌다`라는 동화책을 보았다. 공지희씨가 쓴 장편동화인데, 황금도깨비 상을 받았다고 신문에 소개가 되어, 사서 읽어 보았다.
영모라고 하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주인공인데, 이 아버지가 영모를 많이 때렸다.
그 이유는 공부 잘해서 출세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조각도 못하게 하고, 학원을 수없이 다니게 해서 지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한번 때렸다 하면 엄청나게 때리는 것이다. 하루는 영모가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는 드디어 가출을 한다. 그리고 친구가 영모를 찾아 나서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영모가 어디에 갔는가 했더니, `레온제나`에 갔다. `레온제나`는 `즐거운 나`라는 뜻이다. 동화니까, 이렇게 험악하고 힘든 세상이 아니라, 나만이 꿈꾸는 자기의 집이라는 세상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곳에서 로아 할머니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할머니, 이제 저 지겨운 집에는 가지 않고 여기에 살래요."그러자, 로아 할머니는 "나도 너와 같이 살고 싶단다. 그런데, 영모야! 너에겐 가족이 있잖니? 가족을 잃는 것은 뿌리를 잃는 것과 같단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날 때 자기 혼자 태어나는 것이 아니란다. 그 아기 속에는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어머니의 어머니...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태어나는 것이란다. 네 속에는 아버지가 들어있고 어머니가 들어있단다. 그게 부모와 자식이란다."
나는 나 혼자 세상에 태어났고 혼자인줄 알았더니, 내 속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혼자 살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구절에 참으로 감동이 되었다.
사도바울이 어떤 말을 했는가?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가 계심이라`
오늘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늘 나라는 그리스도의 존재가 있는 줄 믿는다.
목사가 잘나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는 장로님도 있고 권사님도 있고, 여러분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로 세워지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여러분 속에도 목사도 있고 다른 장로님도 있고 권사님도 있고 집사님도 교인들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나를 때려도 그 분이 내 아버지이고, 그 분이 내 안에 있고, 나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혼자 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혼자 살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경쟁을 하고 이겨야만 산다고 생각을 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기려고 경쟁을 하고 저주를 하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만드실 때 아담을 만드셨다. 그런데, 그 사람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해서 또 다른 사람을 지으시는데, 그때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배필은 알맞은 짝이고 돕는다는 것이다. 돕는데 알맞은 짝을 지으신 것이다.
시너지효과란 말이 있다. 힘을 합쳐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큰 결과가 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힘을 합쳐 좋은 세상을 만들자. 힘을 합쳐 좋은 교회를 만들고, 힘을 합쳐 부모 자식간에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자.
경쟁하는 가정, 경쟁하는 교회, 그리고 저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저주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축복하는 것을 선히 여기신다고 했다.
축복
민 24장1절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축복하는 것을 선히 여기신다는 것을 보았다. 발람은 발락 왕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해서 돈을 벌려 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를 막으시고 오히려 축복하게 하셨다. 그래서 발람은 발락의 일군이 아니고 축복하라는 하나님의 의도대로 사용되어 지는 것이다.
2절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하나님의 영이 발람에게 임하고,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신다.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니, 그때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때에 제자들이 모여 기도했다. 무엇이라고 했을까? 부자되게 해달라? 내 병 고쳐달라? 집 사게 해달라? 우리 아들 출세하게 해달라? 그게 아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이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그러자, 성령이 임하고 `젊은이가 환상을 보고 늙은이가 꿈을 꾼다`고 했다.
똑같은 말씀이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므로, 눈이 뜨여진다.
3-4절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발람이 이렇게 변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환상을 보게 되고, 엎드려 눈을 뜨는 자 -기도하는 자-가 된 것이다.
지금 우리는 뒤돌아 보아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면 성령이 임해야 된다. 성령이 임하려면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 한다. 그래야 성령이 임하고, 환상을 보게 되고, 영의 눈이 뜨여 지고, 영의 귀가 열리는 것이다.
오늘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이 임했고, 영적인 눈과 귀가 열어지자, 축복을 하게 하신 것이다.
악한 영의 역사와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악한 영의 역사는 특별히 간구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 물이 있다. 이 물을 다 마시고 나면 컵 속의 물이 사라진다. 이 컵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 속에는 공기가 있다.
우리 마음에는 영적 진공상태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악한 영이 있는 것이다. 악한 영의 역사다.
악한 영의 역사는 남도 죽게 하고 자기도 죽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을 사모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사모하자,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영생과 평안을 주고, 살리우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의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 열매가 나타나고 그 열매를 통해서 그 나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바라건대, 악령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란다.
그 후 축복을 하는데, 5-9절 말씀이다.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 우리 가정, 교회, 민족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고 읽어 보자.
5절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6절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7절 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의 왕이 아각보
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8절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의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9절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
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알고자 했더니, 성령이 임했고, 그 후 말씀이 들리고, 환상을 보게 되고, 그 다음에 축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남을 이기거나 저주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왜? 축복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발람이 아무리 많은 금은보화를 준다고 해도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신다는데 말이다.
왜 축복해야 하는지 발람은 민23장 19-21절에 이야기한다.
19절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
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20절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21절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 하나님은 거짓말도 아니하시고 후회도 아니 하신다.
변덕스럽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창조때 창12:28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르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축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전부터 택하셨다. 이것은 창세기 때에,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축복이 우리에게도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 말씀의 의미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약속 받았고, 우리는 그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지, `내가 능력이 있어서 산다?` 그것이 아니다. 능력이 있어도 못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능력없어도 사는 줄로 믿는다. 그것이 소망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부족함을 아신다는 것이다.
21절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허물을 보지 않고 반역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시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하시는 것이다.
아이언 싸드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요, 목사님이 있다. 이분이 한번은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는데, 한 청년이 손을 번쩍 들더니 `목사님, 법대로 합시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 것에는 용서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고, 용납도 안 되고, 긍휼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은 `법대로 꼭 하기를 원하는가?` 물었다. 청년은 꼭 그렇게 해야겠다는 것이다.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젊은이, 만약에 하나님이 법대로 우리를 다루셨다면 너는 아마 지금쯤 지옥에 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법대로 해 주기를 원하는가?"
그러자, 청년은 잠잠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법보다도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긍휼의 원리이고 은혜의 원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의 원리보다 용서의 원리로 지금까지 살게 하셨다.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다.
예례미야 애가 3장 22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야곱의 허물도 보지 아니하시고, 반역도 보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살게 되었음을 깨닫기 바란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마귀는 오늘 우리에게 축복을 저주로 바꾸고자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약점과 허물이 많고 때로는 죄를 범할 때도 있지만, 그 누구도 이미 약속되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법이 나온다. 그런데, 제사 드리는 법에 보면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 속죄제다. 모든 제사에 속죄제가 다 들어간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용서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사랑 때문에 사는 것이다. 무엇이 대단한 것 같아도 그 사랑이 없으면 못 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축복의 말을 하며 살아야 한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인도 켈거타에서 어려운 빈민들을 위해 살았다. 요즘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라는 책을 보고 있다.
조병준씨가 쓴 책인데, 이 분이 세계여행을 하다가 테레사 수녀님이 하는 사랑선교회에 가서 봉사를 하다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책이다. 두권이 나왔는데, `나는 천사를 믿지 않지만`, `오후 네시의 평화`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렇게 대단하구나!" 마더 테레사 수녀가 우리처럼 가진 것도 없고 좋은 집도 없지만, 사람이 그렇게 커보일수가 없다.
오늘 장로신보를 보는데, 교회 사학자인 김수진 목사님이 `일본 교회가 한국 교회보다 더 크게 보이는 이유는?` 이 제목으로 글을 썼다. 내용인즉, 교인이 50명 모이는데 양로원을 하고, 교인이 100명 모이는데 아이들을 위한 탁아방도 하고, 어린이집도 하고, 또 그들을 가르치는 공부방도 하는 것이다. 힘이 있고, 교회를 향한 기대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교회당이 큰가? 몇 평인가? 헌금이 얼마나 되는가? 교인수는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이 우리들의 판단기준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보는가 말이다.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작지만 커야 한다. 존재가치가 커 보여야 한다.
테레사 수녀가 그랬고, 예수님이 그러하셨다. 우리도 마땅히 작지만 큰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축복의 말을 하는 사람이다.
축복의 말은, 모든 사람을 복받을 자로 여겨야 한다.
그 중에 저 사람이 없으면 되겠다?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 원수도 있다는 것이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핍박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하나님의 자녀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도 내리우심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자라도 내가 볼 때 필요없는 자라도, 하나님은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것처럼, 사랑하고 기대하고 계신다. 내가 정죄하면 안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 아닌데 말이다. 모든 자를 복 받을 자로 여기자.
두 번째로 우리는 축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벧전3장9절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성경 후에 보면 하나님이 네 번이나 저주를 막아서 축복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를 알았다. 그런데, 이들은 모압의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고, 모압의 여인들과 간음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그래서, 전염병으로 이만사천명이 죽는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복을 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내가 복을 빌지 않으면, 악령의 종 노릇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크리스토 윌슨이라고 하는 분이 있다. 이곳에 갑자기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양떼들이 죽기 시작했다. 이 나라에 중요한 사업이 양사업인데, 양들이 죽게 되자, 나라가 무너지게 되었다. 문제는 전염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윌슨 선교사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어떻게 해야 이들을 도와 줄수 있겠습니까?" 기도중에 응답해 주시길 친구들에게 롱아일랜드 산 오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라고 하셨다.
전염병 때문에 기도하는데, 난데없이 오리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라니,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응답이고, 잘못하면 망신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럼에도 선교사는 순종하면서 미국에 오리알을 보내달라고 요청해서, 24개의 오리알이 뉴욕에서 항공편으로 보내졌는데, 잘못해서 인도의 캘거타로 가고 말았다. 창고에 여러날 묵혀 있다 알이 상해 버렸고, 선교사는 안타까워 기도하면서 "적어도 두 개는 부화해서, 하나는 수놈이고, 하나는 암놈 되도록 허락해 주소서."라고 했다.
기도가 응답되어서, 한 쌍의 오리가 태어났고, 수개월동안 번식을 하는데, 기적이 나타났다. 이 오리떼들이 양들이 물마시던 연못에 살던 뱀들을 잡아먹으면서 전염병이 사라진 것이다. 나중에 발표가 되면서, 전염병을 옮긴 것이 뱀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업적 때문에 선교사는 정부로부터 큰 상을 받게 되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상을 응답을 주시는 것이다. 기도해야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이고, 남을 축복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도하자.
더 나아가 우리도 하나님의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엡1장 3-5절
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되게 하셨으니
축복의 말을 하는 사람이 참으로 복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저주가 아닌 축복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바란다.
아브라함 안에 있기에 축복받는 이스라엘
민 23: 27-24:9 / 조용호 목사
◈ 주해
1.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의 요청은 2번이나 좌절된다.
1) 하나님은 첫 번째 하신 축복을 반드시 실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한다.
2) 연약한 이스라엘의 허물과 반역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영적으로 보호하신다.
3) 이스라엘은 사자 같이 일어나는 힘 있는 민족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축복하신다.
4) 발락의 2번의 저주 요청은 오히려 하나님에 의하여 2번의 축복이 되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 왕 발락의 요구는 중단되지 않는다.
1) 발락은 발람을 다시 다른 곳으로 데려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청한다.
2) 그러면서 이 저주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발람에게 말한다.
3)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므로 축복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고 선포하셔도 발락은 저주를 포기하지 않는다.
4) 사단도 우리를 정죄하는 일, 시험에 빠지게 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5) 그러나 발락의 3번째 시도가 헛되듯이, 사단의 정죄는 헛되다.
롬 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3.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를 범할 때 징계하심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1) 그렇다고 이방 나라의 왕 앞에서 자기 백성을 결코 저주하지 않는다.
2) 부모가 자기자식은 징계하여도, 다른 사람이 자기자식을 홀대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4. 발락은 발람을 브올 산 꼭대기에 데리고 갔고, 발람은 이전처럼 제단을 쌓고 수송아지와 숫양을 제물로 바치게 한다.
1) 그런데 발람은 이스라엘이 축복받기를 여호와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2)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고자 ‘점술’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그의 얼굴을 광야로 향하였다.
3) 발람이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지파대로 천막에 거주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그를 사로잡는다.
5. 발람은 3번째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1) 그런데,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소개”한다.
민 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 24: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2) 발람은 자신을 굉장히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 말씀의 선지자로 스스로를 말한다.
3) 자신은 전에는 눈을 감았던 자였으나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서 눈을 뜬 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진짜 선지자라고 자화자찬한다.
6. 성경은 한결같이 발람의 실체를 악하고 불의하다고 증거한다.
1)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칼로 비참하게 죽은 자이다.
- 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범죄하게 한 장본인으로써, 하나님의 원수이다.
2) 더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을 알고도, 계속해서 불의의 삯을 사랑하고,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다는 것은 더 악하다는 것이다.
3) 발락처럼 전쟁의 두려움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을 알고도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하는 발람이 더 악하다.
- 그래서 성경은 발락의 악함보다 발람의 악을 더 많이 고발한다. 그리고 발람의 길을 가지 말라고 교훈한다.
7. 발람이 자화자찬하는 것을 보면, 발람의 외식은 자기 자신마저 속였음을 알 수 있다.
1) 교만 중에서 최고의 교만은 발람처럼 자신의 실체를 모르고 “자화자찬”하는 것이다.
2)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고 칭찬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발람처럼 중심이 악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선하거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착각하여 “자화자찬”하는 것은 교만의 최고봉에 선 자의 모습이다(CS루이스)
3) 발람은 일부분 깨닫기도 하고, 일부분 순종하기도 하고, 일부분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외식은 자신마저도 속이고 자신을 지옥으로 몰고 간다.
8.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자신을 아는 지식이 생긴다고 하였다.
1) 하나님을 알면, 자신의 비참함과 교만과 악함을 알게 된다.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다.
2)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알게 되면,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생긴다.
3) 이렇게 비참하고 타락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과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된다.
9. 발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나,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1)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사망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헛되다.
2) 진실로 하나님을 경험하거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지식이 생기게 되어 겸손하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모세처럼...
10. 하나님은 발람 같은 외식하는 자를 통하여서도 이스라엘을 축복하신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과연 좋구나!
이스라엘아, 굽이굽이 펼쳐진 계곡 같고 강물을 끼고 꾸며진 동산 같구나.
두레박에서는 물이 넘쳐 나와 땅에 뿌린 씨가 물을 듬뿍 먹는구나.
왕은 아각을 누르리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그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께서 들소 뿔처럼 지켜 주시어 적국을 집어 삼키고 그 뼈들을 짓부수시고 그의 활들을 꺾는도다.
그가 사자같이 웅크리고 있는데 그 사자 같은 자들을 누가 감히 건드리랴!
11. 하나님은 야곱이 거처하는 장막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말씀하신다.
1) 이스라엘은 지금 광야 생활 40년째다. 텐트에서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
2)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스라엘의 장막이 가장 아름다운 장소다.
-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막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
3) 이스라엘의 장막은 굽이굽이 펼쳐진 계곡 같고 4개의 강이 발원한 에덴동산과 같다(창 2:10-14). 두레박 물의 넘침은 물이 풍성함을 표상한다.
- 물이 풍성함으로 들판에 파종된 씨들도 무성하게 자란다.
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근거는 출애굽 구원에 근거한다.
1) 어린양의 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기에 축복하시고, 보호하시며, 들소 뿔과 사자처럼 강하게 하신다.
2) 불신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이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받는 근거가 출애굽 구원이듯이, 연약한 우리가 놀라운 축복을 받는 근거는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에 있다.
3)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은총을 베푸셔서, 왕의 식탁에 초대하여 주신다.
4) 축복받는 이유가 나의 어떠함이 아님을 분명히 알자.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나 같은 자도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와 인도를 받는 다는 것도 분명히 알자.
13. 하나님은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복을 그대로 선언한다.
1)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안에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그대로 받는다.
-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2) 신자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받은 복을 그대로 받는다.
-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받고, 아들처럼 자녀된 권세를 누리며, 아들이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하며, 아들처럼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받는 복을 그대로 받는다.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14. 이 은혜를 아는 자는 광야와 같은 삶, 원망하는 연약한 믿음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아간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2-4).
◈ 나의 묵상
회개: 말씀의 검이 드러낸 비참한 존재
하나님을 반복하여 경험하고도 불의의 삯을 버리지 못하는 발람,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알고도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하는 발람, 그러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외식하며 위선적인지를 모르는 발람의 모습이 참으로 두렵다. 내 모습이 아니던가? 지적으로는 나의 외식과 위석과 악함을 아는데, 생각의 영역에 머물 뿐, 내 마음의 중심으로 그 지식이 내려오지 못한다. 그리하여 회개하지 못하고, 통회하지 못하며, 회개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문제라고 인식하는 차원에 계속 머문다. 하나님을 앎에서 오는 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 중심으로 알게 된다. 생각으로 하는 죄인식과 비참함은 힘이 없다. 말씀의 검이 드러내는 비참함, 빛되신 주님이 드러내는 어둠, 생명이 드러내는 사망, 말씀이 드러내는 교만만이 십자가에 의하여 처리된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나 자신을 알 수 없다. 나의 외식으로 나 조차도 속이는 자다. 그러니 어찌 스스로 회개할 수 있겠는가? 전적으로 무력하고 무지하며 무능하다. 그러기에 주의 긍휼을 구하며 십자가로 나아간다.
2. 복음을 통하여 생명이 환하게 나타나다.
발람도 한심하고 이스라엘도 한심하다. 그런데, 아브라함안에 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은 거듭 거듭 축복에 축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받아야 할복을 몽땅 광야의 이스라엘이 받는다. 참으로 놀라운 신비다. 언약관계라는 것, 누구 안에 있다는 것이 이렇게 전 존재와 하나님의 은혜를 다르게 받는 다는 것이 놀랍다.
내가 어찌 발람보다 나으며, 내가 어찌 원망하는 이스라엘보다 낫겠는가? 그런데, 이스라엘처럼 나도 예수님 안에 있다. 그리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 아들안에 있던 그 생명을 하나님은 나에게 주셨고, 나를 자녀 삼아 주셨다. 존재 때문에, 관계 때문에, 낳았기 때문에, 언약 때문에 주어지는 이 축복과 사랑과 은혜와 돌보심이 주어진다. 이 또한 나의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다만 주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을 뿐이다. 주신 은혜를 받는 것이 겸손이다.
여전히 나를 축복하시는 하늘 아버지, 있는 모습 그대로 십자가로 나아가, 그 사랑안에 거한다.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고백한다. 내 안에 사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나의 생명이며 나의 주인이며 나의 사랑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내 마음과 생각과 존재를 드린다. 토기장이 되신 주님의 손으로 나를 빚으시기를, 축복받기에 합당한 자로, 생명으로 행하고, 생명으로 섬기는 자로 빚어주시기를 엎드려 간구한다.
◈ 묵상 기도
주님, 발람처럼 멸망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처럼 축복을 받습니다. 발람이나 이스라엘이나 비슷한데, 발람은 멸망하고,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과 긍휼과 인자와 자비를 모르는 자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아야 하는데, 은혜를 이용하는 자입니다. 주님, 이 완악한 마음을 십자가로 귀경하사 예수생명이 충만하게 드러나게 하옵소서. 묶여진 마음을 주님이 풀어주시고,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외식하고 교만한 마음을 정직한 마음, 겸손한 마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생명으로 주 안에 누리는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의 영광을 보게 하사,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세워지게 하옵소서. 주일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는 교회, 다음세대가 세워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배와 식사교제, 그리고 셀모임 가운데 예수생명이 충만하게 나타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신 하나님
민수기 22:1-24:25
요 절 23:19,20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오늘 말씀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발락 왕의 부탁을 받고 모압으로 갔으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신 사건입니다. 모압 왕 발락은 소떼같이 몰려오는 이스라엘을 보고 심한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당시 세계에서 유명한 복술가인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발람은 예물에 미혹되어 불의의 삯을 좇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 발람을 꾸짖으시고 발람의 입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내면에 있는 발람과 같은 마음을 회개하고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당나귀의 입을 여신 하나님(22:1-35)
첫째,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 발람(1-14)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아모리 사람들을 쳐서 멸하고 모압 근방까지 올라오자 이스라엘 백성(21:21-31)은 모압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두려움에 시달려 번민하였습니다.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가나안 땅을 야금야금 정복해 올라오는 이스라엘 군대를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디안 사람들과 연합하여 메소포타미아 브돌에 있는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든데 그들이 지면을 덮어서 우리 맞은 편에 거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리고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6b)."고 했습니다. 7절을 보면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복술의 예물을 가지고 발람에게 갔습니다.
발람은 그에게 온 사절을 맞아 여호와의 뜻을 알아보는 동안 그 밤에 거기에 유숙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8). 발람이 여호와께 알아보겠다고 한 것을 보면 출애굽한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사실과 그들의 신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12)." 그런데 13절을 보십시오. 발락은 아침에 일어나서 사절단들에게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복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저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자들이 돌아가서 발락에게 발람이 일방적으로 거절한 것으로 보고했습니다(14). 그래서 발락 왕은 복술의 예물이 적어서 오지 않은 것으로 오해하고 더 많은 예물로 발람을 유혹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발람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끈질긴 발락 왕의 유혹을 받게 되었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민 31:8).
이를 보면 유혹의 손길이 가까이 올 때 하나님의 종들은 명확하게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발람이 처음부터 태도를 분명하게 했으면 발락이 다시는 사람을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부터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의 체면이나 물질적인 유혹이나 사람에 대한 미련 때문에 신앙적인 태도를 분명히 취하지 않으면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제들이 군에 가서 처음부터 술을 마시지 않는다든지, 유행가를 부르지 않는다든지, 분명한 태도를 취하면 처음에는 놀림도 받고, 핍박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이고 반드시 신앙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면 계속해서 많은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영혼이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직장 생활에서도 처음부터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만이 많은 유혹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길입니다. 가정 생활이나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밝히고,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임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죄의 유혹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둘째, 불의의 삯을 사랑한 발람(22:15-21)
14,15절을 보십시오. 발락은 이전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발람이 오기만 하면 재물뿐만 아니라 높은 벼슬도 주고, 크게 존귀케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만 해 주면 부와 권세와 명예와 세상 영광을 다 누리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18절을 보면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자기에게 줄지라도 능히 여호와의 말씀을 더하거나 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천하만국을 모든 권세를 다 주겠다고 하는 사단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고 하신 것처럼 분명하게 발락 왕의 청을 거절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19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발람은 머리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불의 삯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고 거스르고 싶지 않고 세상의 부귀영화도 누리고 싶었습니다. 재물의 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려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과 하나님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차 여호와의 말씀을 듣겠다고 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 밤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조건부로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발람의 마음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발람이 가지 말라고 해도 갈 사람이기 때문에 허락하셨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았지만 사람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 고집을 부리면 마지못해 허락하십니다(삼상 8:5-9). 그러나 결국은 사람의 계획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발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모압 귀족들과 함께 행하였습니다(21). 사도 베드로는 모압 귀족들을 좇아 간 발람을 가리켜 불의의 삯을 좇아 간 미친 선지자라고 했습니다(벧후 2:15,16).
우리도 발람의 경우와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평신도로서 직장을 구할 때 여러 길이 있습니다. 사명을 떠나면 인간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직장도 있습니다. 또 직장 생활에서도 조금만 타협하면 많은 물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재물과 세상에 마음이 미혹되고 나면 그 때부터는 생각이 영적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상대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분은 욕심에 사로잡혀 부르심이 없다고도 하고 목자 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다고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미혹하여 죄에 빠지게 한 후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버팁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 사도 베드로는 이런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와 같으며, 그들에게는 캄캄한 어두움만이 예비되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벧후 2:17). 우리가 계속하여 정욕에 기초한 기도나, 불의의 삯을 좇는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십니다(롬 1:24).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고, 절대적인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투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나귀의 입을 여신 하나님(22:22-41)
22a절을 보십시오. "그가 행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그의 마음에 숨겨진 동기나 의도에 대한 진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 자신의 현현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을 막으려고 칼을 들고 길에 서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적인 눈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23). 발람은 길을 떠나 밭으로 들어가는 나귀를 돌이키려고 채찍질하였습니다. 또 한참 가다가 포도원 사이 좁은 길이 있었고, 좌우에는 담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좁은 길에 서 있었습니다.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주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려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비비어 상하게 했습니다(25). 그러나 발람은 몹시 화가 나서 또 채찍질했습니다. 다시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서 있었습니다.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아주 엎드려 버렸습니다. 발람은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습니다(26). 이 때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28)?" 그러자 발람이 나귀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29)." 나귀가 발람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발람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 발람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습니다(31).
32,3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을 어떻게 책망했습니까?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의 가는 길이 멸망으로 뛰어드는 멸망의 길이었기 때문에 막으려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귀가 아니었더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발람의 죄를 깨우쳐 주고자 했습니다. 발람은 그제서야 자기의 죄를 깨닫고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34)" 발람은 여호와의 뜻을 거스리는 죄와 나귀의 이상한 행동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려내지 못한 무지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브돌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계속하여 가도록 명하셨습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그래서 발람이 발락의 귀족들과 함께 모압 왕 발락에게로 함께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귀의 입을 여시고 발람의 양심을 일깨우쳐 주셨습니다. 나귀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패역할 길로 갈 때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회개할 수 있도록 싸인을 주십니다. 작게는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놓치게도 하시고, 크게는 교통사고를 당하게도 하십니다. 또 질병으로 자신이 가는 길을 돌아보게도 하십니다. 동역자들과 양들을 통해서, 학문을 통해서, 직장 상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브레이크를 거실 때도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살피고 마음에 숨은 죄악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발람과 같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영적인 위험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고, 마음의 죄악을 회개하고 생명의 길로 돌이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과연 여호와 보시기에 옳은 길인지 아니면 다시 한번 살피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굳게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신 하나님(22:36-24:25)
22장 36절을 보십시오. 발락 왕은 발람이 온다는 말을 듣고 모압 변경의 끝 아론 가에 있는 성읍까지 직접 가서 영접하고 발람에게 온갖 부와 명예를 다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자기가 오기는 왔지만 임의로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발락은 발람에게 우양을 잡아 풍성히 대접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그와 함께 바알 산당에 오르니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다 보였습니다. 발락은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부탁했습니다. 발락은 세 번이나 장소를 옮겨가면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발람의 저주를 막으시고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발람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되었습니까?
첫째,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은 자를 내 어찌 저주하랴(23:1-12)
23장 1절을 보면 발람은 발락에게 일곱 단을 쌓게 하고 매 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번제로 드리게 했습니다. 제사를 드린 후 발람은 발락을 번제물 곁에 세우고, 자기는 사태난 산으로 갔습니다(24:1). 그러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임하셔서 발락에게 전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발람이 돌아오니 발락은 모압의 모든 귀족들과 함께 번제물 곁에 서 있었습니다. 발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노래를 지어 말했습니다. 7-10절을 보십시오. 발락이 자기를 데려와서 야곱을 저주하라 꾸짖으라 하는데, "하나님이 저주하시지 않은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고 했습니다(7,8).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홀로 처하는 민족, 곧 다른 민족과 동일시 될 수 없는 특별한 민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홀로 처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 세계로부터 내면적으로 구별된 백성이라는 뜻이며, '열방 중의 하나로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열방의 운명을 함께 나누지 않는 특별한 백성임을 말해 줍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복과 은총을 크게 입은 백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티끌같이 많으니 누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으랴?" 이 말씀은 창세기 13장 16절에 있는 약속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심히 번성할 것을 말해 줍니다. 발람은 자신도 이스라엘 백성 중의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발람의 말을 듣고 있던 발락은 화가 났습니다.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비용을 투자했는데 오히려 이스라엘을 온전히 축복하니 어찌 이같이 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11).
둘째,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23:13-30)
발락은 발람이 벌떼같이 많은 이스라엘을 보고 겁에 질려서 축복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끄트머리만 보이는 비스가 산 꼭대기로 장소를 옮겼습니다(14; 21:20). 발람은 그곳에서 일곱 단을 쌓고 매 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번제로 드렸습니다. 발람은 다시 외딴 곳에 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발람에게 임하여 그 입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18-24절을 보십시오. 발람은 첫째로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아니하시고, 인자가 아니시므로 후회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신 말씀을 반드시 행하시며 실행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처럼 희생 제사와 주문에 넘어가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19).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축복의 명을 주셨기 때문에 자기는 그 축복을 돌이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발람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축복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신 축복을 자신이 돌이킬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허물과 패역(悖逆)을 눈감아주시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21)"는 말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왕이 되사 그들 중에 거하시며, 그들을 다스리시는 사실에 이스라엘이 기뻐 외치는 환성을 가립니다(출 15:18; 신 33:5). 넷째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며, 그 힘이 들소와 같으니 야곱을 해할 사술(邪術)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卜術)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암사자같이 일어나고 수사자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지 전에는 눕지 않는다고 노래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사나운 사자들과 대면하는 것 같이 스스로 파멸을 초래하는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발락은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려거든 축복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25).
셋째,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23:27-24:9)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발락은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27)." 발락은 발람을 인도하여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에 이르렀습니다. 발람은 거기에 다시 일곱 단을 쌓게 하고 각 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로 번제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발람은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사술(邪術)을 쓰지 아니하였습니다. 발람이 사술을 쓸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 입에 말씀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마음이 순수해졌을 때 하나님의 신이 직접 그 위에 임하셨습니다(2). 하나님의 신이 예언자들에게 있었던 것처럼 발람을 황홀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3,4)" 발람은 눈을 감고 황홀경에 들어가 놀라운 영적인 세계를 보고 장차 이스라엘이 누릴 영광과 번영을 노래했습니다.
5-9절을 보십시오.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5)?" 5절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회당에서 매일 아침 예배를 시작할 때 큰 소리로 읽혀지고 있는 구절입니다. 6절은 에덴의 낙원 생활을 암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사 58:11). 발람은 이스라엘의 주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습니다. 천막을 치고 있는 모습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같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 나라가 번성할 것이며 들소와 같이 힘이 세고,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건드릴 자가 아무도 없다고 노래했습니다(8,9). 9절을 보십시오.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선포함으로서 예언의 절정에 이릅니다(창 12:1-3). 발람은 누구든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들을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에게 저주를 선포하는 말과 같았습니다.
넷째,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24:10-25)
10,11절을 보십시오. 발락이 노하여 손뼉을 치며 발람을 꾸짖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 함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10)."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훗날에 모압 백성에게 행할 일을 고하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15-24절은 발람이 발락에게 마지막으로 한 예언이었습니다. 이 예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15-19절로 야곱의 별에 관한 예언입니다. 곧 한 왕이 탄생하여 이스라엘은 강국이 되고, 주변의 여러 백성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는 것이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17)." 고대 사회에 홀은 왕의 치리권을 상징했으며, 별은 고대 근동지방에서 왕의 인격이나 왕실의 운명을 상징했습니다. 이 예언은 다윗 왕이 모압과 에돔을 격파함으로서 성취되었습니다(삼하 8:2, 13-14). 뿐만 아니라 이 예언은 다윗의 왕위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계시록 22장 16절에는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이 '빛나는 새벽별'로 찬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복술가 발람의 입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둘째는 20-24절로 당시의 여러 민족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아말렉은 열국 중 으뜸이지만 결국은 멸망에 이른다고 했습니다(20). 아말렉은 이스라엘과 싸웠던 첫 번째 가나안 민족이었습니다(출 17:8-15).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히기시야 왕 때 전멸되었습니다(삼상 5:8; 삼하 8:12, 대상 4:41-43). 21-22절에는 가인 족속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이들은 가인 족속은 겐족속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아말렉인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민족이었습니다(삼상 15:6). 또한 모세의 장인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삿 4:11). 그래서 사울과 다윗은 모두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했습니다(삼상 15:16; 30:29). 그러나 이들도 결국 쇠미하고 나중에는 앗수르의 포로가 된다고 했습니다. 24절의 깃딤 해변은 구부르 해변을 가리키는 말로서 지중해 연안을 제패한 제국이 등장하여 앗수르와 에벨을 괴롭게 할 것이지만 그들도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그후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갔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습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 사건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네 하나님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신 23:4,5)." 모세는 브올의 아들 발람의 사건을 통해서 저주를 변하게 복이 되게 하시는 축복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택한 백성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축복하는 자마다 축복하시고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아브라함과 같은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저주를 멸하시고, 저주가 복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누가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이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한국과 세계 캠퍼스 정복 역사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고, 아브라함과 같은 복의 근원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발람과 같이 불의의 삯을 좇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여 처음부터 유혹의 손길을 뿌리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