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31일 오늘의 역사
2024년 중국 강풍에 아파트 잠자던 주민 4명 날아가 사망
중국 남동부 지역에 강풍이 불어 아파트에서 잠을 자던 주민 3명이 밖으로 날아가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중국 장시성 난창 지역에 강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면서 4명이 숨지고 12명이 다쳤다. 강풍의 위력은 아파트 창문이 통째로 뜯겨 나갈 만큼 엄청났다. 난창의 한 아파트에서는 20층 세대의 방 침대에서 잠을 자던 할머니(64)와 손자(11)가 건물 밖으로 날아가 숨졌다. 각각 다른 방에서 자던 나머지 가족들은 새벽 3시경 돌연 요란한 소리에 서로의 안전을 확인하다가 비극을 마주했다. 두 사람이 자던 방 창문은 사라지고 침대에 남은 것은 액자뿐이었다고 유족은 전했다. 이 아파트 11층에 살던 또 다른 60대 여성도 집 밖으로 떨어져 숨졌다.
2023년 인도의 히두교 사원 바닥 붕외 추락사고 47명 사망 18명 부상
인도 중부의 한 사원에서 힌두교 축제 도중 사원 바닥이 꺼지며 기도 중이던 사람들이 바닥 아래 우물로 추락해 최소 35명이 숨지고 18명이 부상당했다.
사원 바닥 아래에는 50년 된 계단식 우물이 있었으며 바닥이 사실상 우물의 덮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고 당시 사원에는 힌두교 축제 ‘람 나바미’를 맞아 많은 인파가 몰린 상태였다. 인파가 불어나면서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바닥이 꺼졌고, 그 위에 있던 이들은 깊이가 7.6m에 달하는 우물로 추락했다. 우물 입구는 몇 년 전 철근과 타일로 덮인 것으로 전해졌다. 시 당국은 지난 1월 안전 문제를 이유로 사원 소유주에게 덮개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지만, 사원 측이 이 경고를 무시했다
2023년 '성추문 입막음' 트럼프, 역대 美 대통령 중 첫 기소 불명예
2022년 강릉에서 경기도 고양시 KTX열차 운행
2020년 백희나 작가 『구름빵』으로 한국작가로는 처음 아동문학계의 노벨상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상금 500만 크로나 약 6억여원)’ 받음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서울구치소 수감.
2017년 네이버 서울모터쇼에서 자율주행차 첫 공개
2014년 북한이 서해 NLL 인근 7곳에 방사포 등 500여발 발사. 백령도에서 추락한 북한무인기 발견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후 첫 부활절 미사에서 한반도 화해 위해 기도
2011년 '한국 마술의 원조' 이흥선씨 별세
한국 첫 프로 마술사 이흥선(87)씨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알렉산더리'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이씨는 1924년 서울 용산구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일하는 남영동 성남극장에서 무성영화를 보며 자랐다. 16세 때 동네 친구들과 콩트와 노래를 곁들인 곡예 공연단을 만들어 한강 모래밭에서 공연했고 이것이 인기를 끌자 전국 순회 공연에 나섰다.
이씨는 24세 때 경영난으로 서커스단 운영권을 남에게 넘기고 평단원으로 내려섰다. 2년 뒤 그는 내한 공연하러 온 대만인 마술사에게 마술을 배워 서커스단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극장이나 천막 밖에 장안의 기생들이 그를 모셔가기 위해 차를 세워놓고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씨는 6·25 종전 후 '후라이보이' 곽규석씨 등과 함께 미군부대에서 공연했다. 서커스단이 쇠락하자 TV로 진출했다. 사람들이 길거리 한가운데 TV를 갖다놓고 다 함께 보던 시절 모자에서 장미와 비둘기가 줄줄이 튀어나오는 그의 마술에 전 국민이 즐거워했다.
그는 비둘기 마술부터 공중부양 마술까지 거의 모든 마술 기법을 국내에 처음 들여온 마술계의 '전설'로 통한다. 직접 개발한 특기만 200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1996년에는 서울에 최초의 마술 상설 공연장 '알렉산더 매직바'를 열기도 했다. 신세대 인기 마술사 최현우가 그의 제자이다.
2009년 ‘황성옛터’의 가수 이애리수 별세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대 때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노래 ‘황성옛터’의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씨가 2009년 3월 31일 오후 3시 9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본명은 이음전(李音全)이다.
1932년에 발표된 ‘황성옛터’는 고려 옛 궁궐터 개성 만월대의 쇠락한 모습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아픔에 빗대 노래한 곡.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끝 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같은 가사에 나라 잃은 민초들이 눈시울을 적신 것으로 유명하다.
이씨가 이 노래를 처음 부른 건 1928년 서울 종로 단성사에서다. 당시 18세였던 이씨가 구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자 관객은 술렁였고, 순식간에 그녀는 스타로 떠올랐다. 1932년엔 이 노래로 음반 ‘황성의 적(荒城의 跡)’을 취입, 5만장이나 팔았다.
화려한 인기를 누렸던 이씨지만 젊은 날은 순탄치 않았다. 1933년, 1935년엔 잇따라 자살을 시도했던 사실이 크게 보도된 적도 있다. 연희전문학교 학생이던 남편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하려 했으나 집안식구들이 반대하자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는 것.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후엔 대중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2남7녀를 낳고 산다는 풍문이 전해졌을 뿐이다.
2009년 정부, 제2롯데월드 건설 최종 허용
10여년 동안 논란을 거듭하던 제2롯데월드 건설이 최종 허용됐다.
정부는 2009년 3월 31일 서울 세종로 중앙청사에서 민관 합동 행정협의조정위를 열고, 제2롯데월드 초고층 신축을 허용하기로 최종 확정했다.
정부는 이에 앞서 지난 2007년 7월 개최한 행정협의조정위 본회의에서 “초고층 건물을 건립할 경우 비행안전에 지장을 줄 수 있다” 는 국방부의 의견을 수용, “제2롯데월드 건축고도를 203m이내로 제한한다” 며 112층(555m) 높이의 제2롯데월드 신축 계획을 허가하지 않기로 했었다.
서울시는 이에 따라 향후 체결될 예정인 ‘공군본부 롯데물산 간 합의서’의 이행을 조건으로 100층 이상의 제2롯데월드 초고층 신축을 허가할 수 있게 됐다.
공군과 롯데 측은 이에 앞서 서울공항 동편활주로 방향 3도 변경과 이에 따른 장비·시설물 보완, 서울공항에 배치된 경공격기 KA-1대대의 원주 이전에 대해서도 사실상 합의했었다.
국방부와 서울시는 대신 롯데물산의 합의서 이행 여부를 수시로 점검하고, 롯데물산이 합의서 내용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건축법상 건축공사 중지, 건축물 사용 불승인 등 적극적으로 대처키로 하는데 합의했다.
2005년 식물인간 테리 시아보 사망
미국 플로리다의 식물인간 ‘시아보 케이스’ 의 주인공 테리 시아보가 15년간 영양공급 튜브에 의존해 연명해오다 2005년 3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과체중이었던 시아보는 1990년 무리한 다이어트로 제대로 식사 조절을 못하는 상태에 빠지고, 그로 인한 ‘화학적 불균형’ 으로 심장 박동이 잠시 정지돼 뇌에 치명적인 손상이 가해져 식물인간이 됐다. 그후 아내가 식물 인간인채로 연명하길 바라지 않았다는 남편 마이클과 이에 대해 딸이 회복될 가능성이 있는데도 다른 여자와 딴 살림을 차린 채 그녀의 재산을 노려 ‘죽이려’ 한다는 부모간에 ‘불신과 증오에 찬’ 법정 싸움이 빚어졌다.
1998년 마이클은 보조장치 제거명령 청구 소송을 낸지 6년만인 2004년 “테리가 의식불명 상태이며 회복이 불가능하다” 고 판정한 법원으로 부터 허가를 받아냈다. 이에 그녀의 부모는 물론,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 등이 한시법을 제정해 가며 이를 저지하려다 실패하자 조지 부시 대통령, 연방의회까지 나서 ‘테리 특별법안’ 을 통과시키는 희귀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법적 다툼이 재점화됐으나 부모측은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시아보 사건은 의식이 살아있는 환자가 고통을 덜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죽음을 맞게 하려는 안락사와는 달리 뇌사 판정을 받은 식물인간의 생명 연장 문제로 흔히 가정사로 그칠 사안이었으나, 미국내 보수단체와 부시 형제, 플로리다 주의회, 연방의회가 개입하고 교황청까지 가세하면서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2004년 향고래떼 70여년 만에 동해안에서 목격
2004년 3월 31일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70여년 만에 향고래 무리가 목격됐다. 국립수산과학원은 4월 8일 “지난달 31일 경북 포항 구룡포 앞 10마일 해상에서 어미와 새끼들로 구성된 8마리의 향고래 가족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향고래는 이빨고래류 중에서 유일한 대형 고래로 몸 길이는 13~ 19m, 무게는 최대 57t에 달하며 창자 속에서 생기는 방향성 물질이 고급 향수의 재료로 쓰이면서 과거 무분별하게 남획됐다. 또 향고래는 체내의 기름이 윤활유와 완전 연소유 등으로 쓰이면서 18세기 미국 포경산업의 비약적인 발달 원인이 됐고 소설 ‘백경’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소재 반구대 암각화(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청동기시대에 그려진 바위 그림)에 두 마리의 향고래가 그려져 있고, 1930년 울산 근해에서 다섯 마리가 포획된 기록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다.
2004년 제14회 이해랑연극상에 김삼일씨 선정
이해랑연극재단(이사장 이방주·李邦柱)과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제14회 이해랑(李海浪)연극상 시상식에서 연출가 김삼일(金森一·62·포항시립극단 대표)씨에게 트로피와 상금 2000만원을 수여했다.
2004년 추억의 교외선 마지막 운행
2004년 4월 1일 서울과 의정부를 오가며 추억과 낭만을 실어나르던 교외선이 이날을 마지막으로 바퀴를 멈추었다. 이날 교외선이 운행을 중단함으로써 벽제, 일영, 장흥, 송추 등 낯익은 이름의 역(驛)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자리하게 됐다.
1963년 개통된 교외선은 경기 북부지역 주민들의 요긴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리고 70년대 들어서는 일영과 장흥, 송추 등이 대학생들의 MT와 데이트 장소로 널리 이용되면서, 주말 교외선 열차는 젊은이들의 기타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객차 3량을 편성해 하루 6편(주말·공휴일 4편)씩 운행해왔으나, 최근 평균 탑승객이 50명에 불과해 운행 중단이 불가피하다고 철도청은 밝혔다. 아련한 추억을 뒤로 하고 이날 이후 교외선은 화물열차 전용 선로로 이용됐다.
2003년 미국의 대이라크전 비난기사 게재한 피터 아네트 해고
전쟁 전문기자로 유명한 피터 아네트 (Arnett·68) 기자가 지난달 30일 이라크 국영TV에 출연, 미국의 전쟁 계획을 비난했다가 소속 방송사로부터 해고당했다.
그는 군복 차림의 이라크TV 진행자와 인터뷰에서 “미국의 전쟁 지도부는 이라크군의 항전 의지를 오판했고, 최초의 전쟁 계획은 실패했다”며 “나는 어떻게 그런 일(오판)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바그다드는 잘 통제되고 있으며 시민들은 정부의 지시에 호응하고 있다”며 “이라크 친구들은 내게 민족감정과 미국·영국의 행위에 대한 저항이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고 말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그의 인터뷰에 대해 미국 내에서 비판 여론이 일자, 그의 소속사인 미국 NBC는 처음에는 “아네트는 직업상 예의로 말한 것”이라고 옹호하다가, 31일 아침 “전쟁 중에 이라크 TV에 사견을 얘기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며 그를 해고했다고 방송했다.
베트남전 취재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네트는 1991년 걸프전 당시 CNN 기자로 맹활약했으나 미군 관련 오보 등으로 경영진과 불화를 빚어 99년 해임됐다. 이번에는 바그다드에서 미국 NBC방송과 내셔널지오그래픽TV의 계약 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2003년 미국, 2002년 세계 각국 인권보고서에서 북한의 인권유린 심각성을 발표
미국 국무부는 3월 31일 2002년도 세계각국 인권 보고서를 발표, “북한은 계속해서 수많은 인권유린 행위들을 저지르고 있다” 면서 북한을 중국·이스라엘·팔레스타인·미얀마 등과 함께 인권상황이 열악한 국가로 지목했다.
이 보고서는 “북한에서는 재판 없는 사형과 실종사건이 계속 보고되고 있다” 면서 여성과 소녀들이 국경 건너 중국에 인신매매되고 있는 데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보고서는 또 “북한 당국이 여성 수감자들을 강제로 낙태시키는가 하면 감옥에서 태어나는 신생아는 즉시 살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고 밝혔다. 보고서는 “국민들은 정부를 평화적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했으며 지도부는 대부분의 국제인권규범, 특히 개인적 인권을 불법적이고 이질적이며 국가와 당의 목표에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고 말했다.
보고서는 한국의 인권과 관련, “전반적으로 시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있다” 면서 “그러나 일부 분야에서는 여전히 문제점이 남아있다” 고 밝혔다. 보고서는 반(反)도청법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일부 시민단체들이 불법 도청과 미행, 감시촬영이 여전히 광범위하게 일어난다고 주장했으며, 몇몇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정부에 의해 감시받고 가정과 사무실 전화, 휴대전화가 도청된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 수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경찰이 피구금자에 대해 신체적 가혹행위와 폭언을 자행하고 있고 국가보안법이 계속 시민 자유를 침해하고 있으며 가정폭력과 강간, 어린이 학대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남아있고 소수민족이 차별받고 있다는 점들을 문제사항으로 열거했다.
2001년 영화 ‘친구’ 개봉
곽경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 ‘친구’ 가 2001년 3월 31일 전국 160개 극장에서 동시 개봉됐다. ‘친구’ 의 개봉은 전국 극장가에 강력한 흥행 돌풍을 몰고 와, 서울 관객 267만명, 전국 818만명이라는 한국영화사상 최대 관객수를 기록했다. ‘친구’ 는 7월 29일 부산 구미 대구 영화관들을 마지막으로 4개월의 대장정을 끝냈다.
영화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를 “복고정서와 남성적 권위에 대한 향수를 절묘하게 자극했고, 두 주연배우의 카리스마가 뛰어났다” 는 점을 들었다. ‘친구’ 는 연출자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마음 속 본향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감독의 영화’ 였지만, 연기자의 열연이 극을 이끄는 ‘배우의 영화’ 이기도 했다. 다시 만나기 쉽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배역을 맡은 건 유오성에게 큰 행운이었지만, 동시에 유오성 같은 배우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의 행운이기도 했다. 장동건은 잘 생긴 외모의 감옥에서 벗어나, 중반 이후 잔혹한 깡패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 스타에서 배우로 옮아간 첫 사례로 평가받았다. 부산 사투리로만 진행되고 부산에서 전 분량을 찍으면서 부산의 매력을 한껏 드러낸 이 영화는 가장 아름다운 ‘부산영화’ 로 기록됐다.
그러나 영화배우 출신인 강신성일 의원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평생을 영화와 함께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러한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영화가 열광적으로 환호받고 있는 우리 사회의 심리학적 배경에 전율을 느낀다” 면서 영화 전편에 흐르는 폭력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영화는 한국 영화 수출사상 최고가인 210만달러에 일본과 판권계약을 맺어 일본에도 상륙했다.
2000년 대우자동차 인천 부평공장서 파업결의대회 갖고 전면 파업에 돌입(-4월 1일)
2000년 일본 홋카이도 우스화산 폭발
일본에서 가장 위험한 활화산의 하나로 분류되는 홋카이도의 우스산(732m)이 2000년 3월 31일 폭발했다. 우스산은 이날 오후 1시11분 서쪽 분화구에서 분화를 시작해 오후 3시 대규모의 화산 연기가 상공 3,200m까지 치솟았고 분출한 용암과 암편이 태평양 바다쪽으로 흘러내렸다. 검은 연기와 화산재는 우스산 삼림은 물론 인근 마을까지 확산돼 주변은 온통 화산재로 뒤덮였다.
우스산의 화산 폭발은 1977년 8월 이후 22년 7개월 만이다. 이날 첫 분화에 이어 이튿날 새벽 2시 50분쯤 2차 분화를 시작했고 20분쯤 뒤 진도 4.8의 중규모 지진이 발생했다. 2차 분화에서는 분화구가 점차 늘어나 우스산 정상과 도야호수 온천마을 쪽으로 분화구 발생이 확대됐다. 이번 분화로 대피소 생활을 하는 주민들은 극도의 불안감 속에 취사나 잠자리 등의 불편을 겪었다.
2000년 미국 암연구학회 회장에 한국인 홍완기 박사 선출
한국인 의학자가 전 세계 암연구를 주도하는 미국 암연구학회 회장에 선출됐다. 미국 암연구학회은 2000년 3월 31일 "미국 텍사스 MD앤더슨 암전문병원 두경부-흉부 종양내과 과장인 홍완기(洪完基 58) 박사가 2000-2001년 학회 회장으로 선출됐다"고 밝혔다.
1907년 창설된 미 암연구학회는 세계 각국 1만5천여명의 암 전문가가 회원으로 등록된 학회로, 암 연구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홍박사는 미국은 물론 각국의 암 전문의들로부터 골고루 지지를 얻어 압도적인 표차로 선출됐다고 암연구학회는 전했다. 홍박사는 1967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암 전문의가 된 후 1988년부터 MD앤더슨 병원의 종양내과 과장으로 일해왔다. 특히 암의 전이와 재발을 막는 항암예방요법을 개발해 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1999년 대구 가천동 고분군서 신라 금동관 출토
1999년 중국의 `어시책(御試策)` 목판원본, 일본에서 발견.
한-중 학계 간에 금속활자 종주국 논쟁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으로 평가돼 온 어시책(御試策) 원본이 일본 미쓰비시 재벌 도서관인 정가당 문고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시책은 원나라 때 과거시험 모범답안 등을 모은 참고서인 유편역거 삼장문선(10부72권)의 제10부에 수록된 일부이며, 1341년 6월 중국 강서성에서 유인초 등에 의해 편찬된 목판본인 것으로 처음 밝혀졌다.
이로써 그동안 중국 학계가 북경도서관에 소장된 후대의 어시책을 우리 직지심경(1377년)보다 앞선 동활자본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이 금속활자 종주국이라고 강변해 왔으나, 이번에 발견된 원본이 목판본임이 밝혀짐으로써 허구임이 드러났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직지심경이 발견됐을 때도 중국학계는 이것이 현존 최고 금속활자본이란 걸 인정하는 데 인색했다.
이번의 발견으로 원본 어시책은 1341년 간행된 목판본이고 북경도서관 소장본은 우리 학계의 주장대로 16세기 조선시대 중종 연간에 편찬된 목활자본임이 드러나 중국이 세계 금속활자의 종주국이라는 중국학계의 끈질긴 주장은 근거를 잃게 됐다.
1999년 현대상선 `듀크호`, 북한 `만폭호`와 인도양 스리랑카 앞 공해상에서 충돌
현대상선 소속 컨테이너선 `듀크호`(5만2천t급)와 북한 화물선 `만폭호`(1만5천t급 추정)가 1999년 3월 31일 오후 8시20분쯤 인도양 해상에서 충돌, 북한 만폭호가 침몰했다. 남한과 북한의 선박이 공해상에서 충돌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고 당시 북한 만폭호에는 39명의 북한선원이 승선해 있었고, 이 중 박용운씨(42)와 황정호씨(41) 등 2명은 사고 직후 듀크호에 의해 구조됐고 나머지 37명은 실종됐다. 듀크호에는 22명이 승선해 있었으나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파나마 국적의 현대 듀크호는 1992년 10월에 건조된 4,40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으로 지난달 21일 광양항을 출발해 홍콩, 싱가포르를 거쳐 프랑스 르아브르항으로 가던 중이었다. 이번 사고는 북한 만폭호가 북위 5도56분, 동경 86도52분 사고해역의 직진항로를 따라 항해하던 현대 듀크호 앞에서 무리한 횡단을 시도하다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8년 원로 영화배우 김신재씨 별세
원로 여배우 김신재(79)씨가 지난달 31일 오전10시(한국시각)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병원에서 별세했다.
평북 영변 출생인 고인은 만주안동현 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영화감독 최인규(崔寅奎)씨와 결혼했다. 이듬해 열여덟살의 나이로 안석영 감독의 ‘심청전’에서 심청역으로 영화에 데뷔,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고인의 남편 최감독은 ‘자유만세’‘독립전야’ 등을 통해 영화계의 스타 감독으로 활동하던 중 1950년 6·25 때 납북됐다.
1996년 `복싱백작` 아르게요 은퇴 선언
불멸의 테크니션 복서 알레히스 아르게요(44)가 링을 떠났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조국 니카라과 국민들을 열광케 했던 노복서 아르게요는 1996년 3월 31일 "나는 이제 27년간 정들었던 링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1968년 16세 때 링에 오른 아르게요는 1974년과 1980년 사이 WBA 페더급과 WBC 라이트급, 주니어 라이트급을 차례로 석권하며 1995년까지 96전90승(73KO)의 대기록을 남겼다. 니카라과는 물론 세계의 복싱팬들은 아르게요의 활화산 같은 폭발력과 화려한 테크닉에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다.
마지막 경기이자 6번째 패배는 43세이던 1995년 6월 21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인 스콧 워커스와의 대결이었다. WBA와 WBC는 각각 그를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1996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35세 연하와 결혼
1995년 귀순교포 오수룡씨 기자회견 통해 북한실상 폭로
1995년 김용식 전 외무장관 별세
일본중앙대 법학부를 졸업한 김용식 전 외무장관은 지난 1948년 정부수립 후 외교관으로 시작, 1963년 외무장관을 역임한 뒤 주유엔대사, 대통령 외교담당특보를 거쳐 1971년 다시 외무장관을 지냈다.
이후 통일원장관, 주영-주미대사, 적십자사 총재,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최근까지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서울평화상위원장 등으로 활동해왔다.
1949년부터 1981년까지 33년간의 외교관 생활동안 외무장관 두 번(63년, 71-73년), 통일원장관(74년), 주영대사, 주미대사 등 요직을 거친 그의 경력만으로도, 그가 개척기 한국외교의 큰 별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1년 알바니아 첫 다당제 총선 실시 - 노동당이 재집권
1990년 KAL, 소련에 첫 취항
1990년 소련, 사상 첫 야당인 소련 신자유민주당(LDPSU) 창당
1990년 남북음악인,일본 동경에서 `한겨레울림특별연주회` 공동개최
1989년 주가지수 1,000포인트 돌파
1983년 콜롬비아 강진
1982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 소련 핵무기 동결안 거부.
1981년 국가보위입법회의 폐지
1981년 경향신문 창립총회, 문화방송과 분리키로
1981년 언론중재위원회 발족
1981년 청탁배격 범국민운동 개시.
1976년 미국 뉴저지주 최고재판소, 부분적 뇌사 인정 판결
1971년 서울~부산 자동전화 개통
1970년 일본 적군파 소속 학생 9명, 일본 여객기 `요도호` 하이재킹
1970년 3월 31일 일본 나리타공항발 후쿠오카행 일본항공 소속 보잉 727기 `요도호`가 후지산 부근을 비행하던 중 적군파 소속 학생 9명에 의해 하이재킹됐다. 요도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131명이 타고 있었고 적군파는 기장을 권총으로 위협, 북한 평양으로 갈 것을 명령했다. 기장이 연료부족을 이유로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자 적군파는 노약자 23명을 석방했다.
요도호는 후쿠오카를 출발 북으로 가던 중 다시 남하해 오후 3시경 김포공항에 비상착륙했다. 적군파는 승무원 7명과 승객 99명을 포함한 106명의 인질을 잡고 북한으로 안전 비행할 것을 요구했다.
인질범들은 일본 운수성 차관 야마무라(山寸新治郞)가 인질을 석방하면 대신 인질로 평양으로 동행하겠다는 제안을 수락하고, 승무원 3인을 제외한 전원을 석방, 79시간 만에 야마무라 차관을 인질로 잡고 북한으로 떠났다.
1969년 한미간 위성중계 직통전화 개통.
1969년 부정공무원 880명 적발. 사무관급이상 102명
1969년 한국-튀니지 국교 수립
1968년 존슨 대통령, 월남 北暴 중지와 평화협상 호소하고 차기 대통령 불출마 성명.
1967년 미국-소련 영사협정 서명
1966년 베트남 반미. 반정부 데모 격화
1964년 브라질 군부 반란
1963년 과테말라에 무혈 군사혁명.
1959년 달라이 라마 2600km 대장정 끝에 인도로 망명
1959년 3월 31일, 티베트의 정치·종교 지도자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히말라야를 넘어 2600km의 대장정 끝에 인도로 망명했다. 그가 수도 라싸를 떠난 것은 3월 17일, 중국이 그의 궁에 포격을 가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티베트는 18세기 이래 중국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가 20세기 들어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일시적이나마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1949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를 자국 영토라고 선언함으로써 저항과 무력진압이 끊이질 않았다.
1950년 10월 중국의 침공 이후 달라이 라마는 한때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고, ‘민주개혁’의 이름으로 공산화를 진행하려는 중국과 이에 항의하는 민중들 틈에 끼어 고뇌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결정적으로 티베트인들의 감정에 불을 붙인 것은 1959년 3월 서쪽 잠무카슈미르에서 들려온 중국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소식이었다. 달라이 라마를 체포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자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고, 그 와중에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탈출한 것이다. 폭동은 1962년 3월이 돼서야 가까스로 진압됐지만 수만명이 살해되고 10만여명이 망명했다. 1965년 시짱(西藏)자치구로 승격되면서 한때 자치권을 존중받는 듯 했으나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은 6200여개의 라마사원을 파괴하며 티베트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다.
1959년 한국-덴마크, 국교 수립
1959년 세계탁구대회서 한국여자 2위 입상.
1958년 소련 핵실험 일방 중지 선언.
1953년 유엔군. 중국의 한국휴전회담 재개 제안 수락
1952년 한미석유협정 체결
1949년 대북 교역 금지
1948년 미국의 정치가 앨버트 고어 출생
1939년 일본, 신남군도 영유 선언.
1930년 최승희 무용 창작 발표회
최승희는 한국 무용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 예술가`이자 근대무용의 틀을 만든 공이었다. 일제하에 이미 미국과 유럽, 중남미 등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우리 문화계의 큰 별이었다.
일본에서 3년간의 무용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최승희가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갖고 3월 31일 창작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26년 공연차 내한한 일본의 이시이 바쿠 문하생으로 들어가 3년간 그를 사사했으며 1929년 귀국해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 국내에서만 9차례 무용발표를 가졌다.
하지만 전성기의 화려한 명성과 달리 남쪽에서는 월북 예술가라는 이유로, 또 북쪽에서는 반혁명분자로 1967년 숙청당해 기억속에서 사라져갔다.
때문에 3백편이 넘는 작품을 만들었으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1백여가지의 작품명과 흑백사진 등이 몇 점 있을 뿐이다.
1946년 좌익문학가인 안막(安漠)을 따라 월북한 이후 한국에서는 이름을 거론하기조차 껄끄러웠던 최승희에 대한 국내연구가 1990년대 들어 남북한 해빙무드를 타고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28년 불교전수학교 서울 명륜동에 설립(현 동국대학교)
1924년 시대일보 창간
1920년 조선 태형령 폐지
1920년 3월31일, 일제가 태형(笞刑)을 공식 폐지함으로써 이 땅에서 태형이 완전히 사라졌다. 전 근대적인 태형이 이때서야 사라진 것은 일제가 그 유효성에 집착, 1912년 3월에 ‘조선태형령’을 제정ㆍ유지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인에게만 적용하고 비밀리에 집행해 식민지정책의 도구로 활용한다는 비난을 샀다.
삼국시대 때 도입돼 조선조를 거쳐 한말에 이르기까지 주요 형벌로 사용돼온 태형은 가벼운 죄를 범한 죄인에게 가하는 형벌로, 5형(五刑) 즉 태(笞)ㆍ장(杖)ㆍ도(徒)ㆍ유(流)ㆍ사(死) 등 다섯가지 형벌 가운데 하나다.
태형은 작고 가는 가시나무 몽둥이(소형장ㆍ小荊杖)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때 몽둥이는 옹이나 눈을 깎아버리고 힘줄이나 아교 등을 붙이지 못하도록 했다. 또 교판(較板ㆍ규격에 맞춘 모형검사기)대로 만들어 굵기가 가는 쪽으로 볼기를 쳐야 했다. 집행은 하의를 내리고 둔부를 노출시켜 때렸으나 여자는 간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벗기지 않았다.
1919년 인도 간디, 영국의 치안유지법 반대 불복종운동 지휘
1909년 프랑스 작가 로베르 브라지야크 출생
1906년 장지연- 윤효정 등 대한자강회 발족
1905년 독일군, 탄치한 상륙. 제1차 모로코사건 발발
1889년 파리 에펠탑 개관
파리의 명물 에펠탑이 1889년 3월 31일 건립됐다. 에펠탑이 파리 한복판에 건립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오히려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재계의 비협조로 자금을 확보할 수 없었던 설계자 구스타브 에펠은 별수없이 건축비의 80%를 자신이 직접 조달해야 했다.
당시로서는 세계최고인 높이 320.75m(안테나 포함)의 이 탑이 세워지자 `전혀 쓸모없는 철제 괴물`이라는 여론의 비난이 쏟아져 해체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에펠과 파리시는 궁리 끝에 당시 새로 탄생한 방송을 위한 `전파중계탑`으로 그 용도를 전환, 에펠탑을 부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에펠탑은 송신용 안테나가 설치돼 높이가 20m가량 높아졌다. 현재 프랑스 6개 TV와 8개 라디오가 에펠탑을 이용하고 있다.
1887년 1월 28일 착공해 25개월간의 공사 끝에 완공된 에펠탑은 당시 최고 건물보다 2배나 높았고, 1930년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이 세워지기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1만 5천여 개의 철구조물을 250만개의 나사못으로 연결해 놓은 에펠탑은 그 중량만도 7,000t이나 됐다.
에펠탑은 '과학과 산업의 승리'라는 기술자들의 옹호와는 달리 예술가들에게는 '추악한 철덩어리'라고 헐뜯겼는데 시인 베를렌은 에펠탑이 보기 싫다며 길을 돌아서 다녔고, 소설가 모파상은 자신의 기념상이 에펠탑을 보지 못하도록 등을 돌려 세웠다.
에펠탑은 2002년 11월 28일 2억 번째 손님을 맞았고 2004년 12월에는 지상 57m의 높이에 스케이트장을 개장했다.
1855년 영국 소설가 샬롯 브론테 사망
1855년 작가 S 브론디 출생
1854년 미국 페리 제독 일본서 개항 조약 체결
1809년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리 출생
1801년 신유사옥
1732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프란츠 요셉 하이든 출생
1631년 영국 시인 존 단 사망
1621년 영국 시인 정치가 마넬 출생
1596년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