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 임금과 스피넘랜드법
1795년 봄, 영국 노동자와 빈민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한 해 전 농사가 흉작인데다가 프랑스에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어 곡물 수입도 막혔다. 대중은 기아에 지치고 분노했다. 혁명의 불씨가 곧 영국으로 넘어올 기세였다.
영국 남부 버크셔주 치안판사들은 무언가 혁신적인 빈민구제책이 없으면 곧 큰일이 닥치려하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치안 판사들은 스피넘랜드에 있는 한 여관에 회합해 머리를 맞댔다.
그들은 성인 남자를 기준으로 1주일에 빵 12키로그램에 해당하는 소득이 최소한으로 필요하다고 보고, 노동자의 임금이 그 소득에 못 미칠 때는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보조금의 액수는 가족 수대로, 빵 가격의 변동에 따라 정하기로 했다. (...) 보조금은 지방의 구빈세로 충당하기로 했다. 누구든 노동 여부에 상관없이 최소소득을 보장하기로 한 이 제도는 ’스피넘랜드법‘으로 불렸다.
그러나 보수파는 스피넘랜드법에 반대했다. 그들은 빈민은 굶주려야만 일을 한다고 주장했다.
토머스 맬서스는 인구 증가 속도가 항상 식량 생산 속도보다 빠르므로 빈민을 원조하면 그 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 결국 기아의 고통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데이비ㅡ 리카도 역시 스피넘랜드법 때문에 사람들이 노동을 기피하고 생산이 떨어질 것이며, 그러면 프랑스혁명 같은 재앙이 온다고 비판했다.
1834년, 스피넘랜드법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최저생계 보장을 인간의 기본권으로 본 법, 최초로 현금 지급 방식을 택한 복지제도는 사라졌다
영국 정부는 빈민을 나태와 타락에서 구한다는 명분 아래 다시 강제 노역장에 보내어 노예보다 심하게 일을 시켰다. 강제 노역장에서는 아침과 저녁 두 끼 식사와 허름한 옷을 제공했고, 남자 수용자는 머리를 박박 밀었으며, 노동시간은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였다.
돌을 깨고 연자방아를 돌리는 중노동이 강제됐으며, 식사시간을 넘겨 밥을 먹거나 작업장을 무단으로 이탈하거나 감독관에게 저항할 경우 채찍질. 배식 중단. 지하감옥 감금 등 형벌이 가해졌다. 강제노역장에 가면 가족과도 헤어져야 했고, 아이들은 헐값에 공장에 넘겨지곤 했다.
죽은 아이는 외과 병원에 해부용 시신으로 판매되었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최저임금을 이야기 한다.
“10년 만에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임금 근로자의 최소생계를 보호하겠다는 선의로 도입된 최저임금이 필요 이상 과잉상승하면서 부작용을 낳고 있다. 최저임금만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생계유지가 가능해지자, 청년들이 조직에 매여 있는 정규직보다 자유로운 시간제 비정규직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최저임금의 역설이다.”
과거 영국의 스피넘랜드법의 결과를 봐야 한다.
최저임금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고 기본소득이 완성되어야 한다.
선별복지 시스템을 넘어서자
기본소득으로 바닥을 높이자
꽃에는 물과 햇빛, 사람에겐 기본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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