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고향
김홍은
무성한 푸른 나뭇잎들이 신선한 산소를 공급하다 지쳐 단풍이 들어버린
찬연한 오솔길을 걷자니 공연히 마음이 숙연해진다.
곱게 물든 잎들을 달고있는 나무들은 또 한해를 허송세월로 보낸 지난
날들을 뒤돌아보게 하는 삶의 교훈을 들려주고 있다. 이런 때는 저녁노
을진 창밖에 서서 알길 없는 허전한 마음을 달랜다. 깊어가는 가을들길
을 걸으면, 축 늘어진 수수목엔 황혼이 잠들고, 바람에 나풀대는 마른잎끝
에는 그리운 고향의 추억들이 들려온다. 어쩌면 가을은 황혼의 언저리에
서 서성이는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나 할까?
자연도 인생도 성숙되고 나면 마냥 찬란하게 보인다. 자연은 자연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그 무엇이 그토록 아름답게 만드는 것일까.
고향의 가을은 생각만해도 즐거우면서 푸근하게 다가오지만 어딘가 모
르게 애수에 젖게 한다. 들일에 찌들려 아침 일찍이 운무를 헤치고 사립
문을 밀고 나서는 늙으신 아버지의 뒷모습은 생각만해도 가슴이 저리다.
지금은 고향에 가도 초라한 그런 아버지의 모습마저도 영원히 볼 수가 없
어 더욱 슬프다.
고향의 산과 들이 언저리에 서서 거닐다보면 어슴푸레 밀물처럼 밀려오
는 기억들은 늘 어린아이로 만들어 놓는다. 봄이면 아지랑이가 아롱거리
는 언덕에서 찔레나무 새순을 꺾어먹기도 하고, 뒷동산에 올라가 칡뿌리
를 캐고, 여름이면 시냇물에서 고기를 잡고, 밤이면 반딧불을 쫓던 친구들
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을걷이하는 날은 품앗이 일꾼들의 점심밥을 광주리에 이고 논둑길을
걸어오시면 바람에 나풀나풀 날리던 어머니의 따사로운 자주색옷고름.
그러면 아버지는 쏜살같이 달려가 광주리를 얼른 받아, 내려놓으시던 정
다움은 푸른 하늘의 낮달을 바라보는 것보다도 아름다웠다. 일꾼들이 논
가에 빙 둘러앉아 뽀얀 바가지에 생채나물, 담북장, 고추장을 넣고 비벼서
맛있게 점심을 드시는 모습도 한 폭의 민화다.
논배미에 세워놓은 볏단 위로 이리 저리 달아나던 메뚜기를 잡으러 살
금살금 뛰어다니던 들판이며, 다정하게 소꿉친구와 논두렁길을 걸을 때면
간간이 울어대던 장끼의 울음이 산울림으로 멀어져가던 그리움도 가슴에
남아돈다.
밤이 이슥하도록 김장거리를 다듬기도 하고, 깍두기 담을 무를 썰던 어
머니 손놀림의 도마소리도 듣고 싶다. 어느 때는 마실 온 이웃집 아주머
니랑 도란도란 대시는 낮은 목소리도, 낭랑한 다듬이질소리도 듣고 싶고,
밤이 깊도록 호롱불 아래 바느질을 하시던 모습도 그립다.
찢어진 문구멍으로 연신 밖을 내다보며 시집간 누님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린 마음이 아직도 아련하게 다가온다.
저물어가는 산모롱이에는 억새풀이 바람에 날리고, 누군가가 어둠을 밟
으며 외롭게 걸어가고 있을 오솔길은 산초향기도 옷깃에 짙게 배여 있을
것 같다.
고향이 무엇이길래 이렇게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인가. 인생
의 주름진 마음탓만은 아니겠지만 우수(憂愁)에 쌓인 수구초심(首邱初心)
은 어쩔 길이 없다. 인생은 생각하는 갈대라 하더니만 고향의 그리움은
성인이 되어 갈수록 더욱 가슴을 무엇인가가 적시어 놓는다.
결실의 계절이라서인지 인생의 가을은 나름대로의 생활을 저울질하게도
한다.
한 잎, 한 잎 바람에 날리는 단풍잎을 바라보고 있으면 때로는 정처없
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충동질한다. 이런 날에는 허허로운 고
향의 들판을 바라보며 속절없이 마냥 서있고 싶어진다.
마음끝은 어느새 날개를 달고 고향의 시골길을 달린다. 황금벌판을 가
르며 굽이진 고갯길을 돌아 강물이 흐르는 언덕너머로 치닫는다. 강물이
출렁이고 외로운 돛단배가 떠있는 강가에 서면, 차가운 강바람이 나들이
하는 낯선 사람들을 싣고 노를 젓는 소리만 가득히 들릴뿐이다.
잊혀간 고향사람들의 이런저런 착한 마음들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젖어
옴은 나이탓으로 미루어야 할까?
잃어버린 고향.
물 속에 잠든 추억. 호수가 되어버린 강물위로 저녁노을이 진다. 깊은
물에 빠져있는 저 석양을 어찌 건질거나. 하염없이 가슴으로 젖어드는
그리움만이 애달프다.
추억의 물살을 가르며 인생의 배를 띄어 놓고 노를 저어본다. 고향의
소리를 들으며 잊혀간 사람들을 만난다. 강물을 가슴으로 만지며 정을
느낀다. 나는 왜 따돌림을 당한 사람처럼 살아야 하였던가.
인생은 홀로 왔다 홀로 떠나가는 나그네이던가. 이제 나는 푸르름이
다 바래버린 단풍든 사람이 되어 인생의 텅 빈 들녘에 서서 차가운 바람
소리에 낙엽을 떨구고 서있는 한 그루의 나목(裸木)에 불과하다.
인생은 나그네라고 왜 그랬을까.
푸른 창공으로 날개깃을 퍼덕여보고도 싶다. 한 마리의 기러기가 되어
고향의 달밤을 끼룩끼룩 울면서 날고도 싶다. 인생은 어차피 나그네인가.
고향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나를 붙잡아 매는 아픔으로 밀려오는걸까.
토요일 오후의 연구실은 조용하다 못해 외롭다. 어쩌다 누군가가 창
밖 멀리서 도란거리며 지나가는 발걸음소리를 들을 때는 문득 홀로임을
알려주고 있다. 점점 멀어져가는 발자국소리가 왠지 고독을 던져주고 간
다.
이런 날은 누군가에게라도 전화를 걸고 싶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그의 전화를 받고도 싶다. 그보다는 생각지 않은 고향사람으로부터 참으
로 오래간만에 걸려오는 수화기를 통한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오늘만이라도 모든 상념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고향같은 여인이 그리워
몸부림치는 가을남자가 되고 싶다.
1998
첫댓글 토요일 오후의 연구실은 조용하다 못해 외롭다. 어쩌다 누군가가 창
밖 멀리서 도란거리며 지나가는 발걸음소리를 들을 때는 문득 홀로임을
알려주고 있다. 점점 멀어져가는 발자국소리가 왠지 고독을 던져주고 간
다.
이런 날은 누군가에게라도 전화를 걸고 싶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그의 전화를 받고도 싶다
추억의 물살을 가르며 인생의 배를 띄어 놓고 노를 저어본다. 고향의 소리를 들으며 잊혀간 사람들을 만난다. 강물을 가슴으로 만지며 정을 느낀다. 나는 왜 따돌림을 당한 사람처럼 살아야 하였던가.
인생은 홀로 왔다 홀로 떠나가는 나그네이던가. 이제 나는 푸르름이 다 바래버린 단풍 든 사람이 되어 인생의 텅 빈 들녘에 서서 차가운 바람 소리에 낙엽을 떨구고 서있는 한 그루의 나목(裸木)에 불과하다.
인생은 나그네라고 왜 그랬을까.
물 속에 잠든 추억. 호수가 되어버린 강물위로 저녁노을이 진다. 깊은
물에 빠져있는 저 석양을 어찌 건질거나. 하염없이 가슴으로 젖어드는
그리움만이 애달프다.
추억의 물살을 가르며 인생의 배를 띄어 놓고 노를 저어본다. 고향의
소리를 들으며 잊혀간 사람들을 만난다. 강물을 가슴으로 만지며 정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