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신문 시 당선작>
모란 경전
양점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
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
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
할머니 손끝에서 톡톡 핏빛으로 핀다
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
꽃잎은 빙빙 돌며아랫집 지붕 위로 날아간다
그 집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
모란 꽃잎 불어 날리는 날이면
어디선가는 사람이 죽고 부음이 날아든다
도화도 죽었으면 좋겠어 좋겠어
차마 꽃잎을 뜯지 못한 어린 손가락이 붉다
한밤중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도화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속에는 붉은 말들이 무성했다
제 신발 속에 가시를 잔뜩 집어넣었을 때도
아이의 두 손을 따뜻하게 쥐고 웃었다
죽음을 이해하는 일
떨어진 꽃잎 한 장이
바람도 없이 날아간다는 것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병풍 속 나비는 물처럼 고요하다
첫댓글 양사강 선생님, 많이 축하드려요!
오랫만에 아름다운 시를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