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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통재심(至痛在心) 일모도원(日暮途遠)’의 교훈
“과인(효종대왕)이 좋아하는 것을 끊고 밤낮으로 몸 달아 하면서 조그마한 효과라도 보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말단적(末端的)인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진실로 가슴에 심한 한이 서려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寡人絶嗜欲, 而夙夜焦身, 欲見小利者, 非不知其爲末務, 而誠以至痛在中, 有日暮道遠之意故也.]”
이는 효종 8년 1657년 5월 5일 백강 이경여 선생이 간언(諫言)의 수용과 폐단의 제거를 청하는 글을 올리자 효종대왕이 비답(批答)으로 백강 선생에게 주신 말씀 중에 있는데, 이때는 병자호란으로 효종대왕과 백강 선생은 모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같이 풀려난 지 겨우 수년이 경과한 시점으로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키워서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갚으려는 북벌(北伐)의 결의가 대단하였기 때문에 효종대왕이 이런 말씀을 한 것이다.
효종대왕의 이 비답을 훗날 소재 이이명 선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숙종대왕에게 상언(上言)하였다. “과인(효종대왕)이 공리(功利, 功名과 利慾)가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참으로 사무친 아픔이 가슴에 맺혀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孝廟批曰: 非不知功利之爲非, 而誠以至痛在心, 日暮途遠, 故不得不爾也.”<숙종 12년 1686년 4월 22일 소재 이이명 선생이 상언(上言)한 말씀 에서>.
이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말씀을 기념하여 “지통재심(至痛在心) 일모도원(日暮途遠)[사무친 아픔이 가슴에 맺혀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의 여덟 글자로 줄이고 써서 백강 이경여 선생의 아들 서하 이민서 선생에 주었는데 이후 백강 선생의 손자인 소재 이이명 선생이 이 여덟 글자를 바위에 새겨 백마강변 대재각(大哉閣) 안에 세우니 이것이 오늘날의 대재각 각서석(刻書石)으로, 이후 이 여덟 글자는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상징하는 말로 널리 통용되어 왔다.
이에 우리는 이 ‘지통재심(至痛在心)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여덟 글자를 대할 때 교훈으로 삼아야 할 바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인데 이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라고 본다.
첫째, 국가의 계획 등 큰 계획을 세워 일할 때에는 반드시 계획을 따라 차분히 실행할 일이지 급하고 들뜬 마음에 몸 달아 하면서 조그마한 효과라도 보고자 하는 것과 말단적(末端的)인 일을 서둘러 도모하는 것과 그리고 개인적인 공명(功名)과 이욕(利慾)을 멀리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북벌계획으로 말하자면 백강 이경여 선생은 이후 3개월 후 돌아가시고 노심초사(勞心焦思) 하시던 효종대왕도 2년 후 젊은 나이에 아쉽게도 급서(急逝)하시므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니 후대의 우리가 배울 바가 많다.
둘째, 청나라를 포함한 중국으로 부터 당했던 길고 긴 고난과 착취와 억압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당한 것은 잠간이지만 중국에 당한 것은 너무나도 긴 세월이다. 이런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장래가 없다. 오늘날 우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넘쳐나는 ,사사로운 이해(利害)에 빠져 나라의 장래를 가볍게 여기는, 친중국공산당파(親中國共産黨派)의 사람들은 반드시 각성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25. 1.24. 素澹
* 효종 8년 1657년 5월 5일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차자를 올려 간언의 수용과 폐단의 제거를 청하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상차하기를,
“조정에서 옳게 한 일을 백성들이 옳다고 하는 것은 치세(治世)이며, 조정에서 그르게 한 일을 백성들이 그르다고 하는 것도 치세입니다. 조정이 일을 하고서 스스로 옳다고 하면 백성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점이 자사(子思)가 위(衛)나라 임금을 위해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남달리 총명하시며, 기쁘거나 노한 감정을 절제하지 않습니다. 남달리 총명하면 아랫사람을 경시하는 병통이 있으며, 기쁘거나 노한 감정을 절제하지 않으면 상벌에서 당연한 원칙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기가 죽어 물러나 귀에 거슬리는 바른 말이 날로 전하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전에 죄를 지은 언관은 진실로 크게 거슬린 것도 없는데, 억측을 너무 심하게 하여 바람과 우레 같이 갑자기 진노하였으며, 한마디 말이 뜻에 거슬리자 형벌과 출척이 잇따랐던 것입니다. 대간의 직책은 우리 조종조로부터 예의로써 대우하여 왔습니다. 임금이 먼저 각별한 은혜와 예의로 대우하여 백관들이 모두 그 위세에 눌리므로써 공론(公論)를 주장하고 기강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소나 말을 속박하듯이 자신의 귀와 눈을 못쓰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또 기세 등등한 연소배들의 말은 비록 과격한 것 같기는 하나 나라의 형세를 부축하고 쇠퇴함을 일으키는 데 있어 그 공 또한 적지 않습니다. 임금은 가상히 여겨 장려하여 그 기백을 길러주고, 채택하여 그 중도를 선택해야지 들뜨고 조급한 것으로 보아 싫어하고 박대하는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실로 충고를 받아들이는 길을 넓히고자 한다면 잘 따르는 아름다움을 다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옛날의 잘못된 정신과 풍채가 크게 변해 지극한 말을 매일 듣게 되고 임금의 덕에 흠이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서는 매양 인재가 없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일세의 인재를 탄생시키매 넉넉히 일세의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데, 어찌 세상을 크게 속여 좋은 사람이 없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다만 임금이 좋아할 것인가 싫어할 것인가, 쓸 것인가 버릴 것인가에 달렸을 뿐입니다. 시험삼아 오늘날을 보면 빽빽한 조정에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민첩한 인사가 노성한 사람보다 많고 재간있는 신하가 경학(經學)의 신하보다 우세하며, 기개있게 감히 말하는 자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시세에 빌붙는 자만 조정의 자리에 많이 있습니다. 이는 성명께서 공을 세운 신하는 좋아하고 장려하면서 강직한 선비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본받아 길들여져서 점점 이처럼 된 것이니, 의향이 한번 달라지는 데에 따라 어찌 그 관계된 바가 적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정하고 충실한 선비를 힘써 발탁하여 자신의 덕을 돕게 하고, 임금의 비위를 거스리며 간쟁하는 선비를 장려하고 나오게 하여 자신의 허물을 고치소서.
일전에 이조에서 죄적(罪籍)에 들어 있는 자를 서용하자고 청하였는데 진실로 좋은 뜻이었습니다. 부족한 자리를 구차하게 메꾸기보다는 차라리 죄과(罪過)를 용서하고 앞으로 잘 하도록 하는 것이 낫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정상과 죄를 참작하여 재주에 따라 쓰도록 하여 성명의 시대에 버려진 자가 없게 하소서. 그리고 서울 명문가의 후예라 하여 어찌 다 쓸 만한 자들이겠으며, 시골의 천한 자라 하여 어찌 다 쓰지 못할 자들이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비록 문벌이 좋은 사람을 쓰기는 하였으나 수십 년전만 하여도 오늘날처럼 이들만을 등용하지는 않아 호남·경상도 선비들이 조정의 반이나 차지하였습니다. 인재의 많고 적음이 비록 고금(古今)이 다르기는 하나 어진이가 진출하는 길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또 요즈음 주의(注擬)에 신진의 젊은이가 노성한 사람보다 많으며, 본디 명성과 기절이 드러난 사람이 한직에 있기도 하니 이 역시 인재 등용이 전도된 것입니다. 또 근일 문신(文臣)으로서 시골에 적체되어 벼슬길에 나가보지도 못한 사람이 거의 수백 명이나 되는데, 여기에도 기이한 재능을 가진 자가 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장구(章句)에 힘을 쏟아 각고의 노력으로 과거에 합격한 자를 권세 있는 집 자제 중 어리석어 분수넘게 벼슬하는 자에게 비해 볼 때 어찌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안으로는 보통 관직이나 밖으로는 군수나 현령 같은 관직은 권세 있는 집 자제들이 땅에서 물건을 줍듯이 차지하는 것이나 이들은 감히 바라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형관(銓衡官)들로 하여금 제도를 고쳐서 공정하게 듣고 모두 수렴하여 한갓 사람을 위해 관직을 설치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억울한 죄수를 심리하는 것은 한재를 막는 매우 시급한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유사(有司)에게 억울한 죄수를 심리하라고 하시었지만 하늘이 응하지 않아 전과 마찬가지로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으니, 이는 한갓 석방한다는 이름만 있을 뿐이지 억울함을 다스린 실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은 원컨대 대신과 금부 및 형부의 여러 신하가 죄수들의 명단을 모두 기록하여 탑전(榻前)에 모여 회의하되 죄명의 경중과 내외 원근에 대해 한 사람씩 심사하여, 만일 정상이 용서할 만하거나 법으로 볼 때 내보낼 만한 자가 있으면 비록 여러 해 동안 구금당해 원판결을 받지 못한 자라도 죄명이 너무 무겁다고 핑계대지 말고 반드시 정상을 따져 사실을 밝혀내 흔쾌히 용서하소서. 그러면 인심을 위로하고 원한의 기를 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근년 이래로 법의 뜻이 점점 무너져서 악을 징계하는 법은 너무 무겁고 생명을 중시하는 인애(仁愛)는 미덥지 못하여, 한 여름에 사람을 죽여도 유사는 왕명을 받들어 이행할 뿐 간쟁하지 않고 전하께서는 한 마디로 결단하고 의심이 없습니다. 공경이 삼복(三覆)968) 할 때 임금이 풍악을 듣지 않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뜻인데 오늘에 이르러 실추될까 염려됩니다. 근래에 작상(爵賞)이 너무 지나치고 형벌이 공정하지 못합니다. 지금 제가 어떤 상이 너무 지나치고 어떤 형벌이 공정하지 못한지에 대해 열거할 필요는 없으나 성상의 명령과 토죄가 혹 일시의 기쁨이나 성냄에서 나온다면 유사와 법은 장차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대저 지나친 상은 권장하는 효과가 없고 남발하는 형벌은 징계하는 실효를 볼 수 없는 것이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아집이 없이 공평하게 하여 경중(輕重)을 대상에 따라 공정하게 함으로써 반드시 선행을 한 자는 모두 장려되고 악행을 한 자는 모두 징계되게 하소서.
지금 흉년이 해마다 계속되어 전에 저축했던 것은 죄다 바닥이 난데다 햇보리 농사마저 이미 망쳤습니다. 애처로운 우리 백성들이 모두 성명께서 먹여주기를 바랄 것인데 모르겠습니다만 국가에서는 장차 어떻게 곤궁한 백성들을 먹여 죽음에서 구할 것입니까? 경기는 상평청에서 으레 지급한 것에 힘입어서 혹 조금은 지탱할 수 있겠지만 양서(兩西)는 초미(焦眉)의 위급한 형세입니다. 신은 두 도에 산재한 관향(管餉)의 원곡(元穀) 수가 막대하다고 들었는데 만일 상평청의 예에 따라 가격을 계산하여 나누어 준다면 어찌 한푼의 실질적인 혜택이 없겠습니까. 더욱이 역로(驛路)의 지탱키 어려움은 주(州)나 군(郡)보다도 심하니 역시 묘당으로 하여금 모두 헤아려 처리하여 혜택이 고르게 베풀어지도록 하소서. 또 서로(西路)의 원곡은 그 모곡(耗穀)을 해마다 늘려 받으므로 백성들이 조적곡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고, 받지 못한 곡물을 이웃과 친족에게 대신 물게 하는데, 겨우 살아 남은 피폐한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져 떠나는 것은 태반이 이 때문입니다. 국가가 창름과 부고(府庫)를 세운 것은 본래 백성을 위한 것인데, 비록 낙구창(洛口倉)969) 과 같이 큰 창고가 천개 만개 있더라도 곡식은 있으나 백성이 없다면 나라가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더구나 이미 지켜낼 수 있는 요새도 없는데 쌓아 놓기만 한들 훗날 위급할 때에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이니, 이미 지난 일의 징험에서 훤히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모곡은 도백으로 하여금 칙사(勅使) 행차 때의 수용에 헤아려 지급해주게 하되, 대략 상평청의 규례와 같이 하여 백성의 힘을 덜어 주게 하고 대농가에서 그 나머지를 취해 경상의 비용을 보태게 한다면 어찌 공(公)과 사(私)가 함께 구제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육지(陸贄)가 ‘지금 급한 일은 여론을 자세히 살피는 데에 있습니다. 여론이 매우 갈망하는 것은 폐하께서 먼저 시행하시고, 여론이 심히 미워하는 것은 폐하께서 먼저 제거하십시오.’라는 말을 하였다 합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오늘날 여론이 심히 미워하는 것은 추쇄(推刷)만한 것이 없습니다. 백년간 폐지되었던 법을 거행하여 감춰지고 빠진 것을 수만 명이나 들추어내니 팔도가 소란한 지 지금 3년이 되었습니다. 혹은 여러 해 동안 사환 노릇을 하던 자나 여러 대 양민이 되었던 자들을 하루아침에 샅샅히 찾아 내어 관에서 모두 몰수하였는데 이미 입법이 엄한데다 위아래가 뜻이 맞으니 혹시라도 곡직(曲直)을 분명하게 처리하지 못하여 원통함이 있어도 풀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분주히 돌아다니며 관가에 호소하며, 가슴을 치고 울면서 살아 있는 것을 괴로워 합니다. 보고 듣는 것마다 놀랍지 않은 것이 없으니, 또한 위로 하늘의 화기를 거스릴 수 있습니다. 어찌 일체의 법만 고수한 채 상황에 따라 변통하는 도리를 생각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 중에 더욱 변통해야 할 것은 도감이 송사를 판결할 때 오로지 양적(良籍)으로만 대조하고 있는 점입니다. 난리를 겪은 이후로 문서가 산실되었는데 만일 이 한 가지만 가지고 공사(公私)를 분변한다면 오늘날 노비를 거느린 자가 누군들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성명께서 병사(兵事)에 유의하여 군영을 두고 단속하고 계시므로 이미 규율이 성립되어 군정(軍政)이 펼쳐지고 있는데 신료들로서 누가 전하의 뜻을 우러러 도우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오늘날 군졸은 모두 농사짓던 백성들입니다. 한창 김매고 거름 주는 시기에 양식을 싸가지고 병기를 들고 매일 관문 앞에 모입니다. 대저 조그만 농토에서 농사를 지어서 어버이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고 있는데 이미 그 때를 놓쳤으니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만일 모든 군영으로 하여금 겨울에만 훈련하고 그 이외는 모두 농사를 짓게 한다면 병사의 훈련도 미비되지 않고 백성도 다소 소생할 것입니다. 또 군사를 다스리는 방도는 관할권을 서로 이어지게 하되 책임의 한계가 분명해야만 위급할 때 힘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영장(營將)은 위세와 기력이 두 영과 비슷하여 위를 능멸하고 아래를 짓밟고 있으나 감히 말 한마디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정의 주장이 너무 지나치고 사목이 너무 중대해 일군(一軍)에 장수를 세 명이나 둔 데에 말미암은 것인데 주현(州縣)이 어느 곳을 따라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러하니 나중 일은 알 만합니다. 여러 해 동안 경영하여 조금 질서가 잡혔으므로 갑자기 혁파하는 것을 비록 어렵게 여기고 있으나 그 절목을 가감하는 것은 또 시의를 따르기에 달렸습니다. 만약 도백은 상벌권만 갖게 하고, 또 병사(兵使)는 지휘권만 갖게 하되 단지 훈련하는 책임만 맡기어 서울의 장관(將官)이 하는 것처럼 하게 하고, 선발하는 일들은 주현(州縣)에 일임한다면 지위의 서열과 권한의 기강이 도치되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병사는 정예화에 힘쓰고 다량화에는 힘쓰지 않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백 명의 농부가 한 명의 전사를 기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옛날 목릉(穆陵)970) 께서 국난을 당했지만 구병력을 훈련시켰는데 그 수가 3천 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군량을 걱정해 정예화에 힘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일 늘린 병력수가 6천 명에 이르는데도 여전히 마지 않고 늘리고 있는데 삼수미(三手米)는 겨우 반년 정도 지급할 수 있고, 포보(砲保)의 요역은 그 해독이 팔도에 퍼졌으며, 둔전의 설치로 인해 공세(公稅)는 날로 감축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구병력의 수를 그대로 두는 게 낫다고 여겨지는데 그래도 넉넉히 안으로는 궁궐을 호위할 수 있고 밖으로는 국가의 위용을 갖출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정전을 피해 거처하는 것이 궁궐의 출입을 통제하여 청탁하는 길을 막는 것만 못하며, 수라의 찬수를 줄이는 것이 검소한 덕을 숭상하여 낭비를 줄이는 것만 못하며, 해마다 좋은 말을 구하는 것이 한 가지 일을 실행하는 것만 못하며, 조정에 임하여 애통해 하시는 것이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하늘이 내게 경고한 것은 왜 그런 것이며 내가 하늘을 받드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반드시 살펴서 어떤 일이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강구하여 체득하고 힘써 행하되, 오랫동안 유지하고 일관성 있게 해 나가 반드시 감응하는 실적이 있게 하고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소서. 신이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기력이 얼마나 되기에 밝은 세상을 영원히 하직하는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이 상소는 곧 유표(遺表)와 같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장차 죽을 자의 구구한 성의를 살피어 불쌍히 여기소서.”하니,
답하기를,
“차자에서 논의한 것은 흉금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닌 것이 없으니 만약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충심이 아니면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아, 과인이 좋아하는 것을 끊고 밤낮으로 몸달아 하면서 조그마한 효과라도 보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말단적인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진실로 가슴에 심한 한이 서려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과인이 어리석어 어긋난 일이 많으니, 대인 선생이 우려해 잊지 못할 만도 하다. 스스로 반성하여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자 중에 재간있는 신하가 경학이 있는 신하보다 많다고 한 말이 있는데, 언제 재간있는 신하가 있었는가. 진실로 아직 보지 못했다. 근래 대각의 신하가 매양 당론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있으므로 과인이 심히 미워하고 있는데, 점점 격동되어 혹 지나친 거조를 면치 못하기도 하니 자못 한탄스럽다. 선생이나 어른들이 이끌고 권면하여 이 악습을 없앨 수 없겠는가. 폐단을 구제할 대책을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와 매일 서로 강구하여 노경(老卿)의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몸조리를 잘하여 아름다운 말과 직언을 매일 들려주기 바란다.”하였다.
【조선왕조실록태백산사고본】
[註 968]삼복(三覆) : 중죄인을 세 번 심리하는 일.
[註 969]낙구창(洛口倉) : 중국 수(隋)나라 때 낙수 가에 지은 창고 겸 성곽으로서 8천 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
[註 970]목릉(穆陵) : 선조(宣祖)의 능호.
○領中樞府事李敬輿上箚曰:
夫朝廷之擧措是, 而衆亦是之者, 治世也, 朝廷之擧措非, 而衆亦非之者, 亦治世也。 朝廷擧措, 自以爲是, 而衆莫敢議者, 此子思之所以憂衛君也。 殿下聰明出類, 喜怒任情。 聰明出類, 則待下有輕視之病, 喜怒任情, 則賞罰失當施之則。 此群下所以消沮却步, 而逆耳之言, 日遠於軒陛之下也。 前此言者之得罪, 固未有大有矯拂, 而億逆太過, 風霆遽震; 一言忤意, 刑黜相繼。 臺諫之職, 自我祖宗, 待以禮貌, 君上旣異其恩禮, 百僚皆憚其風稜, 以主公議, 以振綱紀, 豈可牛維馬縶, 自虧其耳目耶。 且少年風生之論, 雖似過激, 然其挾持國勢, 激揚頹靡, 功亦不細, 人主當嘉奬以養其氣, 採擇(而)〔以〕執其中, 不可目以浮躁, 遽示厭薄。 誠欲廣聽納之道, 莫如盡如流之美, 庶幾精神風采, 丕變舊汚, 至言日聞, 君德無虧矣。 今日朝廷, 每以乏人爲歎, 天生一世才, 足了一世事, 豈可厚誣一世, 爲無好人耶。 只在人主好惡用舍而已。 試以今日觀之, 濟濟朝廷。 夫豈乏人。 而敏銳之士, 多於老成, 才幹之臣, 富於經術, 慷慨敢言者, 不見於世, 浮沈取容者, 多位於朝。 蓋由聖明好奬事功之臣, 不悅鯁直之士, 風聲習尙, 漸致如此, 意向一異, 所係豈少耶。 伏願殿下, 務選公正忠實之賢, 以輔己德, 奬進犯顔廷爭之士, 以補己過焉。 前日吏曹請敍罪籍中人者, 誠爲好意, 與其承乏而苟充, 曷若赦過而責效。 伏願斟酌情罪, 隨才備用, 不使聖朝有棄物也。 且京華世冑, 豈盡可用, 草澤踈賤, 豈盡可棄。 我國雖用閥閱, 前此數十年前, 亦不至如今日之專用, 而湖嶺之士, 半籍於朝。 雖人才盛衰, 或有古今, 而賢路崎嶇, 亦甚阨矣。 且近日注擬之間, 新進年少, 多先於老成, 素著名節者, 或處以散班, 此亦取舍顚倒處也。 且近日文臣之積滯鄕曲, 未沾一命, 殆數百人。 此有奇才異能, 固不可知, 其盡力章句, 勤苦決科, 至比貴勢子弟癡騃冒仕者, 何遽不若? 內而庶僚, 外而州縣, 彼所俯拾者, 此不敢望, 竝令銓衡之地, 有所改轍, 而公聽竝收, 毋徒爲人擇官而已也。 冤獄之理, 尤爲弭旱之急務。 殿下纔令有司, 審理冤獄矣, 而天心不應, 杲杲猶昔者, 此徒有疏釋之名, 而無理冤之實也。 臣願大臣及禁府刑部諸臣, 畢錄囚徒, 會于榻前, 僉議罪名輕重及內外遠近, 逐名覈閱, 如情有可恕, 法有可出者, 雖積年久囚, 未得原決者, 亦無諉於罪名甚重, 必考情得實, 快施大霈, 則人心可慰, 怨氣可消。 且近年以來, 法意寢壞, 懲惡之典太過, 而好生之仁未孚。 至於盛夏殺人, 有司奉命而不爭, 殿下句斷而無疑。 凡公卿三覆, 君不擧樂者, 先王美意, 恐自今日墜也。 近來爵賞太濫, 刑罰不中, 今臣不必擧某事爲太濫, 某刑爲不中, 而天命天討, 或出於一時之喜怒, 而有司三尺, 將爲無用之虛具。 夫僭賞無勸, 淫刑不懲, 此非細故也。 伏願殿下公平無我, 輕重係物, 必使爲善者皆勸, 爲惡者皆懲也。 今者飢荒連歲, 舊蓄一洗, 新麥已失, 哀我民斯, 皆將望哺於聖明, 不知國家將何以煦濡涸轍, 以救其死乎? 京畿賴有常平例給, 或能小支, 兩西之勢, 方急於燃眉。 臣竊聞管餉元穀, 散在兩道者, 數逾巨萬, 若依常平例, 計價分給, 豈無一分之實惠也? 況驛路之難支, 又甚於州郡, 亦令廟堂, 一體料理, 俾均其施也。 且西路元穀, 計秏歲增, 糶糴之苦, 民將不堪, 逋闕之徵, 橫被隣族, 孑遺殘氓, 散而之四者, 半由於此, 國家設倉廩府庫, 本以爲民, 雖使洛口回洛, 千囷萬斯, 而有粟無民, 國何賴焉? 況旣無城池, 徒事儲峙, 異時緩急, 不爲我有, 已事之懲, 灼然可見。 自今耗穀, 令道臣計給, 勑行需用, 略如常平例, 以紓民力, 大農取其餘, 以補經用, 則豈不公私兩濟乎? 臣聞陸贄曰: “當今急務, 在於審察群情, 群情之所甚欲, 陛下先行之; 群情之所甚惡, 陛下先去之。” 臣以爲今日群情之所甚惡, 莫如推刷。 修擧百年廢典, 括盡累萬隱漏, 八路騷然, 三年於此。 或積年使喚, 或累世爲良, 而一朝窮搜, 盡沒於官, 立法旣嚴, 上下相承, 曲直或眩, 有冤莫伸, 奔走道路, 叫號官司, 推胸泣血, 不樂有生。 耳目所接, 莫不驚心, 亦足以上干天和, 豈可徒守一切, 不思弛張之道乎? 其中尤可變通者, 都監決訟, 全以良籍爲驗, 亂離之餘, 文案散失, 若執此一槪, 以辨公私, 則今之有臧獲者, 誰能免也。 今者聖明, 留意兵事, 置營團束, 旣有成規, 張皇克詰之政, 凡在具僚, 孰不欲仰佐下風。 而但今日操戈之卒, 皆是執耒之民, 正於滌場糞田之日, 贏糧備械, 日聚公門。 夫以百畝之産, 持以事育, 而旣失其時, 何以爲生? 若令諸營, 只於冬月操鍊, 餘時則竝令在田, 則兵無廢備, 而民亦少蘇矣。 且治兵之道, 必管轄相承, 分數分明, 然後可以得力於緩急。 今之營將, 威勢氣力, 與兩營相埒, 上淩下轢, 莫敢誰何。 此由朝廷主張太過, 事目太重, 一軍三將, 州縣不知所適。 始初如此, 末流可知。 數年經營, 稍成頭緖, 遽爾停罷, 雖以爲難, 然其節目損益, 又在隨時。 若令道臣, 得專黜陟, 且令兵使, 專其號令, 只使任操鍊之責, 如京中將官之爲, 而抄定等事, 一委州縣, 則位序權綱, 不至倒置。 古人曰: “兵務精不務多。” 又曰: “農夫百, 不能養戰士一。” 昔在穆陵, 時當板蕩, 而訓鍊舊額, 不過三千, 豈不以糧餉爲憂, 而務精爲要也。 近日增額之數, 至於六千, 而猶且不已, 三手之米, 僅給半年, 砲保之役, 毒遍八路, 屯田之設, 公稅日縮。 臣意以爲: ‘不如存舊額。’ 亦足以內衛周廬, 外備國容矣。 臣意以爲: ‘避殿不如嚴宮闈, 而杜私徑, 減膳不如崇儉德, 而節浮費, 每歲求言, 不如實行一事, 臨朝哀痛, 不如夙夜祗懼。’ 伏願聖明, 必察天心之所以警告我者, 何故而然, 我所以奉承天心者, 何事而可, 無不深思熟講, 體認力行。 持之以久, 而執之以一, 必使有感格之實而毋徒爲應文之具也。 臣自量氣力, 幾何而不爲永辭明時也, 今日此疏, 卽同遺表, 伏惟聖明, 或察將死區區之誠, 而哀憐焉。
答曰: “箚中所論, 無非出於肝膈, 若非卿愛君之血忱, 何以至此? 嗚呼! 寡人絶嗜欲, 而夙夜焦身, 欲見小利者, 非不知其爲末務, 而誠以至痛在中, 有日暮道遠之意故也。 寧不戚然。 寡人愚昏, 事多顚錯, 宜乎大人先生之憂慮不能忘也, 可不自反而服膺焉。 箚中有才幹之臣, 富於經術之言, 而何嘗有才幹之臣乎? 固未之見也。 近來臺閣之臣, 每以黨論相勝, 寡人甚惡之, 輾轉激動, 或不免過中之擧, 殊可歎也。 先生長者, 未可以誘掖勉勵, 使無此習也乎? 救弊之策, 當與大臣及備局諸臣, 日相講究, 不負老卿之至意, 卿其安心善攝, 使嘉言讜論, 日有聞也。”
【조선왕조실록태백산사고본】
* 숙종 12년 1686년 윤4월 22일 주강에서 소축괘에 대해 이이명이 글뜻을 설명하다
주강에 나아갔다. 소축(小畜)괘(卦)를 강의하는데, 시독관 이이명이 글뜻을 설명하며 아뢰기를,
“초구(初九)는 양효(陽爻)로서 양위(陽位)에 있으며 정도(正道)를 지키고, 또 앞의 음효(陰爻)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쌓이는 것을 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일로 말하더라도 병자년5638) ·정축년5639) 이후 오늘날까지 점점 음유(陰幽)로 들어가서 양복(陽復)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다 같이 위로 나아가겠다는 뜻을 잊지 않은 뒤에야 국사를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조부 고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與)가 효종조에 차자를 올려 국사를 말하자, 효종께서 비답하시기를, ‘공리(功利)가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참으로 사무친 아픔이 가슴에 맺혀 있어 날은 저물고 길은 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성조(聖祖)의 이 교지를 본받아 힘써 일을 만들어서 양복(陽復)의 뜻을 저버리지 마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매우 좋다. 내가 깊이 유념하리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태백산사고본】
[註 5638]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5639]정축년 : 1637 인조 15년.
o 소축괘: 육십사괘의 하나. 손괘와 건괘가 거듭된 것으로 바람이 하늘위에 다님을 상징한다.
o 초구: 역괘에서 맨 아랫자리의 양효. 초아흐랫날
o 양효: 역의 괘를 이루는 효(爻)의 하나
o 공리: 功名과 利慾을 아울러 이르는 말
○御晝講, 講《小畜卦》, 侍讀官李頤命說文義曰: "初以陽爻居陽守正, 而前遠於陰, 故不受所畜而進復也。 以國家事言之, 丙丁以後, 至于今日, 漸入陰幽, 陽復難期, 君臣上下, 勿忘上進之義然後, 國事可爲也。 臣之祖父故相臣敬輿, 當孝廟朝, 上箚言事, 孝廟批曰: ‘非不知功利之爲非, 而誠以至痛在心, 日暮途遠, 故不得不爾也。’ 今宜法聖祖之此敎, 勉强作事, 勿替陽復之義也。" 上曰: "此言甚好, 予當體念焉。"
【조선왕조실록태백산사고본】
첫댓글 두레 김진홍의 아침묵상 〈옥중에서 성경 읽는 대통령〉
어제 윤석열 대통령의 비서관이 찾아와서 나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대통령께서 옥중에서 성경을 읽기를 원하시면서 김진홍 목사의 싸인이 있는 성경을 넣어 달라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내가 일러주기를 그렇다면 성경은 자네가 사오면 싸인을 해서 보내겠다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낮에 만나 정성을 기울여 싸인을 하고 성경구절 한 구절을 적어 보냈습니다.
내가 적은 성경구절은 시편 37편 23절, 2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라〉
나는 성경에 싸인을 하면서 교도소 독방에서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넘어지나 다시 일어나는 신앙이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선포되었던 계엄령에 저항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가 15년 형을 받고 옥살이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정치범 독방에서 성경을 읽고, 읽고 또 읽었드랬습니다.
그런 중에 예레미야서 4장 3절, 4절을 읽을 즈음에 영적 체험을 하고 감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