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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과 한국전쟁의 전설, 86세 노병 김영옥 미 육군 대령 그의 피엔 뜨거운 조국이 흐르고 있다.
김영옥(1919년 ~ 2005년 12월 29일)은 재미 교포인 미국 군인이었다. 미군에서 최초로 유색인종으로 대대장을 지냈고, 전쟁 영웅으로 불린다. 최종 계급은 대령이었다. | ||||||||||
☞ 긴 내용이므로 간략하게 읽으실 분은 칼라로 된 부분만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김영옥(86) 옹은 그해 7월 12일 미국 LA에 있는 시더스 사이나이 병원에 입원했다. 지난 6월에 이어 방광암 2차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숱한 전쟁터를 누빈 무쇠 같은 몸이지만 전장(戰場)의 상처와 세월의 무게는 노병(老兵)을 놓아두지 않았다.
1.한국전 때 부상으로 수술 40차례
하지만 상처투성이인 80대 노병(老兵)의 몸은 그의 범상치 않은 삶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김영옥이 누구인가. 신문을 꼼꼼히 읽는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 그의 이름 석자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잠깐만 더듬어봐도 그의 범상치 않은 삶을 엿볼 수 있다.
‘미 육군 예비역 대령, 미 역사상 미 육군 전투대대를 지휘한 첫 소수인종 장교,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로마 해방을 앞당긴 주역,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두 차례 받은 전설적 일본계 부대(100대대)를 이끈 장교, 한국전쟁에서 무패의 신화를 남긴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 미국·프랑스·이탈리아 정부로부터 20여개의 무공훈장 수여….’
‘커널(colonel·대령) 김’은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전사(戰史)를 새로 쓰게 한 위대한 군인’으로 각인돼 있다. 프랑스 동북부 브뤼에르 지방 등 그가 2차대전 당시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킨 지역에서는 ‘카피텐 김(김 대위)’이라는 동양인 장교의 이름이 아직도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또 한국전쟁 당시의 ‘김영옥 소령’은 그가 거두고 보살핀 수백 명 전쟁고아들로부터 평생의 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2.佛,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
2차대전과 한국전쟁이라는 20세기의 가장 처참한 전쟁을 온몸으로 뚫고 온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데 삶을 던졌다. 한번은 파시스트 독재로부터, 또 한번은 공산주의 독재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느라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다. 2차대전 종전 60주년, 한국전쟁 휴전 52주년을 맞은 지금도 그의 삶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2월 60년 전 그의 공적을 재평가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하기도 했다.
3.“100% 한국인…프라이드 갖고 살아”
그는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던 심경에 대해 “한국계로서 아버지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돕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도,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이 한국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도 한국으로 가서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소위 ‘애치슨 라인’을 설정, 한국을 극동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이 북한의 남한 침공을 유발한 원인이 되었고, 그래서 미국은 한국인에게 빚을 졌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미국인이면서 왜 한국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평소 “나는 100% 한국인이며, 100% 미국인”이라고 답한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을 갖고 있다는 말이고,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차별을 겪으며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신념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코리안이라는 아이덴티티(identity)와 프라이드(pride)를 갖고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종료와 함께 한국을 떠났던 그는 1960년대 미군 군사고문단 일원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고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 잿더미에서 발돋움하려는 조국의 모습을 봤다. 이후 1970년대의 경제발전을 지켜보면서 그는 “한국에서 피흘린 것에 대해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고 말했다.
4.헐벗고 굶주린 아이들 보며 눈물
그는 “단기간에 걸쳐 공산군과 유엔군이 번갈아 점령을 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서 민간인이 겪은 고초는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경우보다 더 심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전 당시 북한강 지역에서 작전을 하다가 피란을 떠나지 않은 한 노인과 얘기할 기회가 있어 ‘이곳 주민은 공산주의를 지지합니까, 아니면 민주주의를 지지합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며 “그 노인 얘기가 ‘우리는 들풀이오. 어제는 소가 밟고 지나가더니 오늘은 말이 밟고 지나가는군. 소에게 밟히든, 말에게 밟히든 들풀에게는 마찬가지오’라고 해서 그날 이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주민에게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결코 다시 묻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 관련 뉴스를 꼼꼼히 챙기는 그는 한반도를 둘러싼 북핵 문제도 지혜롭게 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북핵 문제가 상당히 걱정스럽지만 전쟁이 재발되어서는 안된다”며 “미국의 대북 정책이 전쟁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면 안된다”고 충고했다. 대북 문제에 관한 한 DJ 정부 이후의 햇볕정책 지지론자다.
그가 조국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이었다. 그는 전방의 7사단을 찾아가기 위해 부산역에 들렀을 때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눈 덮인 부산역은 100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아이들로 가득했는데 사내아이 계집아이 할 것 없이 추위에 옷이라곤 러닝 셔츠나 걸쳤을 정도고 온몸에는 땟물이 흘렀다. 아이들은 기차를 향해 손을 내밀기도 하고 석탄을 구하기 위해 기차 밑을 기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새로 도착한 미군이 역 안으로 들어서면 떼를 지어 쫓아와 먹을 것을 구걸하곤 했다.”
그는 열차에 오르자 전투식량인 시레이션 더미에서 자기 몫을 꺼내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객실에 있던 25~30명 가량의 미군 장교에게 호소했다. “여러분, 나는 육군 17연대로 가는 대위 김영옥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지요. 지금 저 밖에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이 우리만 쳐다보고 있습니다.…여기 쌓여있는 시레이션은 여러분들 것입니다. 한두끼쯤 배불리 먹지 않아도 죽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앞에 깡통 한두 개씩만 빼고 나머지를 내게 주십시오. 아이들에게 주겠습니다.”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담배 다섯 개비에 몸을 파는 여자도 보고, 잘려나간 팔다리를 부여잡고 어머니를 찾으며 울부짖는 병사도 본 그였지만 “2차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틀어 전쟁과 관련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참담한 순간은 그때였다”고 한다. 그는 “내 평생 그렇게 많이 울어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5.부대원 도움받아 고아원 후원
전장에서의 부상 후유증으로 1972년 샌프란시스코의 군병원에서 대령으로 전역한 그는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와서도 LA 한인사회를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그는 한 달에 7500달러에 이르는 적지 않은 연금을 받지만 LA 새턴(saturn) 거리의 월세 1200달러짜리 아파트에 혼자 살며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을 사회봉사활동에 쓰고 있다. LA 한인사회에 대한 그의 헌신 때문에 많은 동포들이 그를 따르며 존경하고 있고, 투병생활을 하는 그를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6.한인권익단체 밑거름 만들어
그는 1978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최대의 자선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의 LA 지부(chapter) 이사를 지냈다. 당시 미국은 정부 예산 삭감 바람이 거셌는데 그 와중에서도 그는 한인사회를 위한 많은 예산을 따냈다. 미국 최대의 한인 봉사단체로 성장한 한인 정신건강정보센터(KHEIR), 한인 2세들을 위한 한인청소년회관(KYCC), 한미연합회(KAC) 등의 권익보호단체들이 그의 지원 아래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가 이러한 자신의 공적을 절대 알리는 일이 없다고 한다. 때문에 LA 한인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스스로 떠벌리는 인사들에 의해 그의 공적이 가려져온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는 불만이 없다. 그는 평소 “일을 할 때는 처음에 잘 디자인하고 토대를 닦아 다른 사람이 ‘내가 했다’고 자랑할 수 있게 하는 게 오히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의 훈장 경력에서 아쉬운 점은 정작 그가 스스럼없이 조국으로 여기고 있는 한국으로부터는 아직 무공훈장 소식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에서 그는 중부전선을 책임지던 미 육군 7사단의 선봉부대를 맡아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며 북쪽으로 60㎞를 치고올라가 현재의 휴전선을 긋는 데 기여를 했다. 이런 공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아직 아무런 무공훈장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조국에 불만이 없다”고 말한다. 한우성씨는 “당초 일대기를 쓰자고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도 김 대령은 ‘자랑하고 싶은 인생이 아니다’며 취재를 거부했었다”며 “숱한 설득 끝에 ‘당신의 인생을 기록하는 게 한국을 위한 마지막 큰 봉사로 생각해 달라’는 말로 인터뷰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7.일본인 사회에서도 전설로
그는 LA 한인사회뿐 아니라 일본인 사회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2차대전이 터진 후 입대할 때 ‘일본인’으로 분류돼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로 발령을 받았고, 이후 숱한 전쟁에서 일본계 미국인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다. 미국으로 망명해 편의점을 운영하며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부모로부터 “일본 아이들과는 놀지도 말고 일본 음식은 먹지도 말라”는 엄한 민족 교육을 받은 그로서는 무척이나 역설적인 일이지만, 그의 일본계 전우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를 ‘사무라이 김’으로 부르며 존경했고, 지금도 그의 무공은 LA 일본사회에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미국의 일본계 교육재단인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재단은 그의 일대기를 담은 ‘잊혀진 용맹(Forgotten Valor)’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LA 등지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미래는 “나와 일본계 미국인과의 프렌드십(friendship) 같은 게 돼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일본의 잘못된 과거에 대해서는 간과할 수 없다는 입장도 분명하다. 그는 1999년 캘리포니아 주의회 의원인 마이클 혼다(현 연방 하원의원)가 2차대전 종군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정신대 결의안’(AJR 7)을 추진했을 때 지지의사를 분명히 했다. 당시 일본계 사회는 결의안을 저지하기 위해 반대 로비를 벌였지만 ‘2차대전 참전용사회’ 회장인 김 대령이 “반대하면 안된다”고 설득하자 “지지한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노병 김영옥. 그의 주목할 만한 삶은 뒤늦게나마 한국에서도 점차 인정받는 분위기다. 인천광역시는 최근 2007년 개관 예정인 이민사 박물관에 ‘김영옥 부스’를 설치하는 것을 고려 중이다. 이민 2세로서 조국을 빛낸 그의 업적과 인생을 영구전시해 알리겠다는 취지다. 그는 2003년 미국 이민 100년을 맞아 선정된 ‘이민영웅’에 문대양 하와이대법원장, 야구선수 박찬호 등과 함께 선정되기도 했다. 한우성씨는 “할리우드나 국내 관계자들이 김 대령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자고 접촉해온다”고 말했다.
“한국의 미래를 낙관한다”고 말하는 그의 말년은 앞서 세상을 떠난 한 유명한 군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1)유년 시절 김영옥은 191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아버지 김순권과 어머니 노라 고 사이에서 4남 2녀 중 위로 누나 한 명이 있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김순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하와이에서 출범시킨 대한인동지회의 북미총회의 일원으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벨몬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로스앤젤레스 시립 대학에 들어갔지만 1년 후 자퇴하고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였으나 인종차별이 심했던 당시 사회에서 살아남기는 힘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육군 모병소를 찾아갔으나 같은 이유로 거절당했지만, 1941년 아시아계도 징집대상으로 포함되는 법이 미국 연방의회에 의해 제정되어, 입대 영장을 받은 김영옥은 22세의 나이로 미국 육군 사병으로 입대하였다. (2)제2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은 하와이에 거주하던 일본계 2세들로 100대대를 창설한다. 이 부대는 속칭 ‘니세이 부대’라고도 불렸고, 뒤에 일본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442 연대전투단의 1대대로 편입되었다. 사실 100대대는 하와이의 젊은 일본계 이민자들이 일본의 침략에 협조하여 사보타주 등을 행할까봐 두려워 사실상 인질로 삼은 것이었다. 이 조치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에 감금한 정책의 연장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장교후보생 학교를 나와 장교가 되어 있던 김영옥은 한국계가 아닌 일본계로 분류되어 이 100대대에 배치되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던 대대장의 전출 제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정하고 100대대 B중대 2소대장을 맡았다. 이후 미 5군에 배속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다. 그들을 훈련시킨 장교(초기 지휘관은 모두 백인 장교였다)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던 일본계 병사들이 실전 투입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볼투르노 강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특히 엄폐물이 전혀 없는 평지에 대낮에 단둘이 침투해, 독일군을 잡아 정보를 빼냄으로서 로마 함락에 큰 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기상천외한 전략으로 독일의 방어선이었던 구스타프 라인과 고딕 라인의 붕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탈리아 전선 참전 후에는 남프랑스에 투입되었다. 브뤼에르와 비퐁텐느란 두 마을의 해방에 앞장섰으며, 이 중 남프랑스의 비퐁텐느의 교회 벽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마을 노인들도 그를 전쟁영웅으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까피텐 김”(김 대위)으로 불린다. 비퐁텐느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1944년 말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휴식을 가졌다. 이후 유럽으로 돌아가려 하는 찰나,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다. (3)한국 전쟁제2차 세계 대전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김영옥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대위 계급으로 군에 복귀했다[1]. 한국인 유격대인 배내대 유격대[2]를 지휘하며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배내대 유격대는 흥남 철수 때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 중에서 선발한 유격대였다. 이 임무를 마친 후 김영옥 대위는 7 보병사단 31연대의 정보참모가 되었다. 1951년 4월, 31연대가 소양강을 건너 17연대와 임무 교대하자마자, 중국군의 춘계 공세가 개시되었다. 31연대는 다시 소양강을 건너 철수했는데, 김영옥 대위에게 미군 및 한국군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인제군 계운동 계곡의 다리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전차 1개 소대를 이끌고 완전히 후퇴할 때까지 최소한 몇 시간을 버티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차 소대를 다리 남쪽에 세워 놓고 김영옥 대위는 후퇴하던 중대급 한국군 보병들을 멈춰세운 후, 그들과 함께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여 후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3]. 1951년 10월, 김영옥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하고 1대대 대대장이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유색인종으로 백인 병사들을 지휘하는 보병대대장이 된 사람은 미군 역사상 김영옥 소령이 최초였다. 그만큼 김영옥 소령이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31연대장 맥카프리 대령의 지시로 5월 23일부터 실전 경험이 없던 대대장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이 조치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미국에서 유색인종 최초 대대장이라는 수식어는 현재도 남아 있다. 1951년 5월 무렵, 31연대의 사기는 최악이었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대와 함께 흥남으로 철수하면서 연대장까지 전사하는 등 큰 패배를 당한 휴우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김영옥 대위가 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되면서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병사들의 사기 고양이었다. 구만산·탑골 전투에서는 전진하기를 주저하던 병사들을 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고, 금병산 전투에서는 총탄이 빗발치는데 팔짱을 끼고 태연히 돌아다니며 엄폐물에 숨어 총만 높이 들어 마구잡이 사격을 하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등, 자기 목숨을 내놓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부대 사기는 다시 올라갔고, 그가 담당한 구역은 처음과 달리 5월 31일 이후 다른 대대들과 달리 북쪽으로 불쑥 솟아오른 형태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철의 삼각지대에서 아군의 오인 포격으로 중상을 입은 김영옥 대위는 일본의 오사카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8월 27일에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 그 후 10월에 소령으로 진급하고 은성무공훈장 및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정식으로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연대장이 병사들을 무리하게 전투에 내모는 것에 반대했고, 그 때문에 1952년 9월에 미국으로 귀국했다. (4)한국전쟁 이후귀국 후 김영옥은 여러 보직을 거쳤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포트 베닝의 미국 보병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으며, 1956년부터 1959년까지는 독일에서 7사단 86연대 2대대장으로 근무했다. 1959년 중령으로 진급한 후 캔자스 주의 포트 리브에서 교관으로 근무한 후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주한 미국 군사고문단(KMAG)의 일원으로 다시 대한민국에 부임했다. 부임 후, 전시 방어 체제, 예비 병력 동원 체제, 청와대 방어 등의 기초를 고안했고, 영공 방어를 위한 대공미사일부대 창설을 군사고문단 내에 건의하여 호크 미사일부대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65년 대령으로 진급한 김영옥은 유럽과 하와이를 돌며 근무하다가 1972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여러 사회 봉사활동을 하며 지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입은 부상이 50여 년 동안 그를 괴롭혔고, 말년에는 방광암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다. 2005년 7월, 방광암 수술을 위해 입원했던 김영옥은 그해 말에 결국 사망했다. 사망 후 그의 시신은 하와이 주 호놀룰루 근처 펀치볼 국립묘지의 100대대 묘지 근처에 매장되었다. (5)사회 봉사 활동김영옥이 미국에서 존경받는 것은 전쟁에서 공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때부터 김영옥은 여러 사회 봉사활동을 해온 것이 인정을 받았고, 그로 인해 존경받게 된 것이다. 보병대대장으로 근무하던 김영옥은 부대 군목이었던 샘 닐이 고아 몇 명을 데려오자, 직접 고아원을 설립하여 그곳에서 고아들을 보호하도록 했다. 또 재정 면에서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그들을 지원했다. 휴가를 나가는 병사들에게 위문품을 들고 고아원을 방문하여 고아들과 어울리도록 했다. 이는 고아원을 도울 뿐 아니라, 병사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김영옥의 대대 장병들은 자기 봉급에서 1~2달러씩 갹출하기도 했다.[4] 이런 경험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지역 사회에서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등이 김영옥의 노력으로 탄생한 단체이며, 인종 차별 철폐 운동과 미국에서 가정 폭력을 당한 아시아계 여성들을 위한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을 건설했다. 이런 노력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국민훈장 모란장과 한국방송공사의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했다. 노령과 좋지 않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김영옥은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조사를 위한 조사 위원회에도 직접 참여했으며, 442연대를 기념하기 위한 고 포 브로크 재단(Go For Broke)[5] 설립,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활동했다. (6)사후
(7)관련 매체
(8)평가▷ 사람들의 말
▷ 훈장
■ 김영옥 연표
1919년 미국 LA에서 이민 1세대인 아버지 김순권과 어머니 노라(Nora) 고 사이에서 4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36년 LA 벨몬트고등학교 졸업
1937년 LA 시립대학 입학
1938년 LA 시립대학 중퇴 후 프랭크 위긴스 국립 디젤엔진학교 입학
1941년 미 육군 사병으로 입대
1942년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보병장교 후보생으로 선발(당시 유일한 유색인 후보생)
1943년 소위 임관 후 일본계 미국인 부대인 100대대 부임. 9월에 유럽 전선으로 파병돼 이탈리아 살레르노에 상륙. 이후 1945년 4월 본국 귀환 때까지 로마·피사 해방전투 등을 치름. 1944년 1월 중위, 6월 대위 진급
1946년 명예제대
1946~1950년 LA에서 세탁소 운영
1950년 9월 한국전 발발 소식을 듣고 재입대
1951년 3월 한국 도착. 이후 유엔군 9군단 산하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에 부임해 구만산·탑골·청병산·금대리·노동리 전투 등을 치름. 1951년 9월 소령 진급, 10월 1대대장 부임
1952년 9월 한국을 떠남
1952~1956년 포트 베닝 보병학교 교관
1956~1959년 7사단 86연대 2대대장으로 독일 근무
1959년 중령 진급
1959~1963년 캔사스 포트 리브에서 교관
1963~1965년 미군 고문으로 한국 근무. 1965년 대령 진급
1965~1971년 유럽, 하와이 등지에서 근무
1971년 부상 후유증으로 입원
1972년 예비역 대령으로 전역
1978~1988년 미국 최대 자선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 LA 지부 이사로 근무
2000~2001년 ‘노근리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한 외부전문가위원회 활동
미국의 두 번째 등급 무공훈장인 특별무공훈장, 프랑스 최고무공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인 십자무공훈장 등 20여개의 무공훈장 받음. 2003년 한국의 국민훈장 모란장, KBS 해외동포상 수상
☞ 여러 곳에서 수집하여 편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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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영옥옹의 연표까지? (과연 리향님의 향기가 예까지 전해져오네요)제대신 힘든 일을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궁금증을 풀고자 알아본 내용을 올렸습니다. 수목원이 알고자 하는 동기부여를 해 주어서 고맙군요. 덕분에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훌룡한 분이 있었구나. 재미있게 읽었어. 그런 이분 약력에 결혼, 가정에 대해서는 전혀없네. 독신이었나? 전장터에서 많은 세월을 보내라 가정을 갖을 여유가 없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