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도인가?
당시, 군산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계셨던 한 분과의 만남이 있었는데,
장수에는 독특한 가야유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순간,
수 천 년 전의 선조를 뵌 것 같은 환희와 함께
가슴이 터지고 찢어질 것 같은 감동과 안타까움에 젖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 후 10년이 지난 2007년 6월 16일, 토요일을 기하여 그동안 책으로만 보아 왔던 현장답사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장수의 향토문화연구회장님과, 총무님, 문화원장님, 그리고 여러분의 관심이 있었다. 감사드린다.
오전에는 곽장근 현 군산대학교 사학과 교수께서 가야유적을 ‘지표조사’한 영상물과 함께 설명이 먼저 있었고 오후에 답사로 이어졌다. 다음의 내용은 곽 교수와 함께 답사하고 배운 것을, 나름의 생각으로 정리한 것이다.
가야문화는 단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야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고학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지만 그 틈을 이용해 ‘임나 일본 설’이 주장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금관가야가 532년까지 존속했고, 대가야가 562년까지 지속된 역사에 이미 알려져 있지만, 장수의 가야역사가 구체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이후 곽 교수에 의해서이다.
장수의 가야유적은 장계면 삼봉리를 중심으로 계남면 호덕리, 장수읍 동촌리, 천천면 삼고리에 집중되어 있으며 왕릉(직경10m이상)이 100여기가 있고 중소형 고분을 포함한다면 1,000여기 이상이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북권에서 이만한 유적을 갖고 있는 지역은 없다. 전국적으로 보아도 경주왕릉과 손색이 없을 정도의 단일지역 유적의 밀집도가 높고 장계면 삼봉리를 중심으로 육십령, 남원일부와 곰팁재, 임실 경각산, 금산까지 뻗은 규모와 세력권을 가지고 있지만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도굴되었거나 지금도, 사과농장이나 가축을 키우기 위해 무분별한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장수읍에서 가까운 동촌 가야유적지부터 찾았다. 처음 현장을 찾아간 곳이라 설레는 가슴으로 도착했지만 처음부터 낙담을 해야 했다. 가야고분의 유적을 조사했던 자리가 밭으로 경작하기 위해서, 통째로 파헤쳐졌기 때문이다. 아픈 가슴을 안고 고분이 밀집된 등성이를 올랐다. 두 번째 안타까움이 베인 것은 직경 20m 가 넘는 봉분의 윗자리는 이미 분화구(?)가 만들어져 있었다. 백제는 “횡혈식 석실묘”가 주종을 이룬다면 가야는 “수혈식 석곽묘”가 특징이다. 따라서 도굴도 수직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도로를 내면서 잘린 능선이 고분으로 연결된 자리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파와 더 이상 다닐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참아야 했다.
동촌은 말과도 관련이 있다. 40여기 가야고분이 자리하고 있는 봉우리 이름은 마봉산이다. 가야문화에서 “마영토기”가 발견되는 것은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사자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산 정상으로 오르자 점점 규모가 큰 봉분이 나타난다. 삼국시대이후 풍수지리가성행하여 백제시대의 유적은 대부분 남향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야시대의 유적(봉분)은 방향과 상관없이 사방을 관찰할 수 있는 산봉우리에 가장 높은 직위가 자리하며, 그 주면 및 아래로 내려가면서 직급의 순서로 배열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특히 장수의 가야유적에는 “계세사상” 즉 순장제도가 있어 왕이 죽으면 주변에 왕을 모신 시종들의 무덤도 같이 발견된다. 지배자의 무덤들은 서로 붙어있지 않다. 동촌의 왕릉 고분은 그것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곽 교수는 ‘동촌리 고분’을 다섯 번이나 도전한 끝에 발견한 것이어서 특별한 애정이 있다고 하였다.
“장수는 들판자체가 유적이다”
이동 중에도 설명은 계속되었다. 주변의 노곡리는 물론 노하리의 절터, 선창리의 선사유적, 왕대마을 뒷산의 가야유적(왕창 소실됨), 월곡리 봉화산(지금의 승마장 자리) 주변에 유난히 고분이 많았는데, 여기도 왕창 유실되었다. 다만, 1989년 월곡리에서 발견된 철기유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강돌이 산으로 온 까닭은?”
이동 중에 한 회원께서 붙여 본 제목이다.
천천면으로 이동하여 삼고리 중동마을에 들어섰다. 마을 중간을 통과하여 야트막한 뒷산에는 온통 가야고분이었다. 모두다 수혈식으로 이 고분은 지배계급이 아닌 백성들의 무덤구역으로 보았다. 조사당시 마을에서는 이 산의 흙을 파서 농사짓는데 사용하여 남아있는 유적이 1/3쯤이라고 한다. 오르는 중간에도 강돌이 여기저기서 노출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가야의 수혈식무덤에는 모두 강돌을 주어 벽석을 쌓고 덮개돌(개석)을 두었기 때문이다.
장수는 들판자체가 온통 “보물섬”이라는 이야기가 가슴을 더욱 후빈다.
사람들은 쉽게 “법고창신”이니, “온고이지신”을 이야기하지만, 옛것을 제대로 익힐 수도 없는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천천을 지나 장계면으로 향하면서 말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고기마을과 요전마을 근방에는 “마무산”이 있는데 ‘말이 춤추는 산’으로 직역할 수 있고, 가야문화 입장에서는 더욱 귀중한 산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회원 중에서 용광주유소 쯤에는 ‘말 무덤’이 있다고 하며 살피니, 말 무덤은 ‘말의 무덤’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보아야한다고 한다. 장수에는 승마장과 종마장이 있는데, 역사를 알아야 활용할 것이 아니겠는가?
“아는 만큼 보인다.”
어느덧 장계면에 들어서고 있다.
백화산 등허리에 올라서니 장계면의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을 볼 수 있는 곳에 무덤을 썼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곳은 일제치하에 “무근수”라는 작자가 아예 집을 짓고 인부들을 동원하여 본격적으로 도굴했다고 전하며, 왕관이 나왔는데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다.
장수에서 가장 중요한 가야문화의 지역은 장계면으로 보는데, 그 근거는 앞에 보이는 봉화산, 수락봉, 할미봉, 장안산 등에 둘러싸인 봉화와 산성들 때문이다. 특히 “침령산성”은 얼핏 백제의 산성 같기도 하지만 성을 쌓는 기법과 가야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가야시대의 유적이다. 또한 침령산 아래는 “옛터”라는 마을이 있는데 원래 이 마을에 원촌이 있다고 전해지는바 가야와의 관련성으로 보아야 하고, 더군다나 40여기의 왕릉은 부여, 공주의 무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를 자랑한다. 원래는 100여기가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도 원래의 형태마저도 간직하지 못한 채 농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옆으로 보이는 “갈번지(갈평 마을)”는 백화산자락이 칡넝쿨로 내려와 꽃을 피웠다는 마을인데, 호덕리 부근으로 또한 어마어마한 고분이 존재한다. 이곳역시 새마을 운동하면서 방천 둑으로, 도랑 길로 사용한, 대부분 훼손된 구역에 해당된다. 뿐만 아니라 이 부근에 고속도로가 지나가는데, 사유가 어찌되었던 간에 가야유적이 통째로 잘려나간 부분이 있다. 김해, 고령가야보다 월등하다하니 역사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안타까움이 절절히 베인다.
내려오는 길에 작은 ‘적갈색 연질 토기 파편’을 주워 물었더니 가야시대의 토기란다.
산성과 봉화가 많은 지역은 장수이며 “반파가야”는 장수지역이 아닐까 판단한다. 아직은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
“이제는 질의 문제이다”
문화재 등록이 유일한 방법으로 보인다.
꼭 필요한 부분이라도 발굴조사를 하고, 외형을 찾아 보호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첫댓글 귀한 글입니다. 저는 정년하면(직장+운동) 고향의 문화유적을 살피면서 살고 싶은데......
수고많으셨습니다.. 우리가족들께도 알리고 싶어서.. 모셔갑니다..
장수에 가야왕능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귀한 유적이 무관심 가운데 없어지고 있군요. 많이 애써주십시요. 보람되실 일에.. 감사합니다.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