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1년‘제1회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최우량아로
뽑혔던 한영만씨가 아기 때 사진이 담긴 앨범을 들고 있
다. 세월은‘우량아’를‘우량 아저씨’로 바꿔놓았을 뿐
이다. / 채승우 기자
"예전에 분유깡통에 새겨졌던 토실토실한 아기 기억하시죠? 그 아이가 바로 접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난 한영만(39)씨가 고개 들어 명함을 내미는 순간 깜짝 놀랐다. 동글동글한 얼굴형에 큼직한 이목구비, 웃을 때 생기는 보조개까지, 분유 깡통에 있던 '원조 우량아'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도 '우리 어디서 만났더라' 하는 분들이 많아요. 고향, 출신 학교 다 물어보고 나서야 '혹시 그 때 그 우량아?' 하시죠."
한씨는 1971년 남양유업 주최 '제1회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최(最)우량아에 뽑혔다. 못 먹던 시절, 건강한 아기는 모든 엄마들의 희망이었다. 전국의 토실토실한 아기들 가운데 강원도 대표 '한영만 아기'는 단연 으뜸이었다. 만 2세였던 당시 그는 키 85㎝에 몸무게 13㎏, 머리둘레 50㎝였으며 생후 11개월부터 걸었다고 한다.
"태어날 때 4㎏ 나갔어요. 당시로선 드문 일이죠. 병원 의사가 '20년 동안 아기를 받아봤지만 이렇게 무거운 아기는 처음'이라며 우량아 선발대회 출전을 권했답니다." 당시 한씨의 어머니는 "모유와 우유를 함께 먹였고 과일즙, 달걀 노른자 반숙을 간식으로 먹였다"고 말했다.
"그 시절엔 지역별로 크고 작은 우량아 대회가 많았어요. 저희 형도 강원도 우량아 출신이죠. 제가 나간 건 남양유업에서 주최한 전국 대회였고 고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참석했어요. 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나중에 수상자들이 청와대 초청을 받았는데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이놈 얼굴을 보니 나중에 크게 되겠다'고 하셨다더군요."
튼튼한 아기의 대명사로 유명세를 치렀지만 그는 제대 전까지 별다른 연예 활동은 하지 않았다. "제가 4형제 중 막내인데 아버지가 저를 무척 아꼈어요. 딴따라는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셨죠."
하지만 '타고난 끼'는 어쩔 수 없었다. 제대 후 르네상스 호텔에서 근무하던 그는 우연히 한국모델협회 회장을 만났다. "그분이 명함을 주면서 '혹시 그 우량아 아니냐. 프로필 사진 한번 찍어보자' 하더군요. 그 뒤 2년간 CF모델로 활동하면서 100여 편 찍었죠. '스타 쇼핑'이라는 데서 쇼핑호스트도 했고요. 데뷔작품이던 정장 바지가 30분 만에 1억6000만원어치 팔렸어요. 돈은 잘 벌 수 있었지만 제 사업을 해보고 싶어서 넉 달 만에 그만뒀습니다."
그는 "곧바로 피자 프랜차이즈 회사를 차렸다가 망해 10억 빚을 졌다"고 했다. "200원이 없어서 길거리 어묵도 못 먹었던 시절이었죠. 죽으려고 한강에도 갔었는데 물이 너무 차가워 돌아왔어요. 2003년 외식업체인 베니건스에 들어가 120만원 월급을 받으며 다시 시작했어요."
2년 후 다시 사업을 시작한 그는 직원 38명을 거느린 사장이 됐다. 외식 창업 전문업체 핌코리아 대표이사가 현재 그의 직함이다. 시장 조사 후 개인의 성향, 자금력, 트렌드를 고려해 외식 창업을 컨설팅하는 일이다. "제가 워낙 먹는 걸 좋아해요. 어렸을 때부터 과일이며 야채 고르는 법을 알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 포장마차 가서 혼자 꼼장어를 시켜 먹었으니까요. 오지랖이 넓어 식당에 가도 '이렇게 하면 더 잘 팔릴 거다' 이런 얘기를 잘 해요. 전 맛을 보면 한우 한 마리 등급 구분 다 해요."
그는 "올해 초에 남양유업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요새 복고풍 광고가 유행인데, '그때 그 우량아가 이렇게 커서 두 아들의 아빠가 됐다'는 콘셉트로 CF를 하나 찍자고 하더라"고 했다.
그는 187㎝에 98㎏ 나가는 체구다. "올 연말까지 85㎏으로 감량하는 게 목표"라는 그는 "건강관리를 위해 마라톤을 하고 있는데 내년쯤 풀코스에 도전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