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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느하스의 분노
민 25:6-18
6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7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8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9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14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남자 곧 미디안 여인과 함께 죽임을 당한 자의 이름은 시므리니 살루의 아들이요 시므온인의 조상의 가문 중 한 지도자이며
15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이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는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이었더라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7 미디안인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치라
18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민 25:6-18 /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서 내려와 계시는 만남의 장막문 앞에 서서 울고 있을 때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미디안 여인 한 사람을 데리고 자기 천막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보았다. 7) 아론 제사장의 손자이자 엘르아살 제사장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그것을 보고 8) 창을 들고 나왔다. 비느하스는 그 남자를 뒤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한꺼번에 그 남자와 미디안 여인의 배를 창으로 꿰뚫어 죽였다. 그러자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돌고 있던 전염병이 그쳤다. 9) 이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은 2만 4천 명이나 되었다.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1) `아론 제사장의 손자이자 엘르아살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속에서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알고 그 두 사람을 잘 없앴다. 그러므로 내가 더 이상 너희 이스라엘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 죽는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12) 너는 비느하스에게 전하여라. 내가 비느하스의 후손을 잘살게 해주겠다. 13) 그의 집안이 언제까지나 제사장 일을 볼 수 있도록 하겠다. 그가 내 마음을 잘 알아주어 분노를 멈추게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벗겨졌기 때문이다.' 14) 미디안 여인과 함께 자기 천막 안에서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한 사람은 시므리였다. 시므리는 시므온 지파 사람 살루의 아들로 자기 집안의 우두머리였다. 15) 또한 시므리와 함께 천막 안에서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였다. 고스비는 미디안 일족의 우두머리였던 수르라는 사람의 딸이었다.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7) `미디안 사람을 공격하여 없애 버려라. 18) 그들이 못된 계획을 꾸며 너희를 죄에 빠지게 하였기 때문이다. 브올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렇고 그때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천막으로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고스비의 일이 그렇다. 그들을 반드시 없애 버려라.'
이스라엘 자손의 악행에 대해 분노하는 비느하스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보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디안 사람들을 공격할 것을 명하십니다.
비느하스의 의분(6-9) 이스라엘 백성의 음행 사건으로 이스라엘 진영에는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었습니다(3). 이로 인하여 이만 사천 명이 염병으로 죽었습니다(9). 이러한 심판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끊지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비느하스는 창으로 두 남녀의 배를 꿰뚫어서 죽입니다. 이러한 비느하스의 행위는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한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도덕적 타락과 종교적 부패로 온 민족들이 슬퍼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두령 중 한 사람이 여전히 미디안 여자와 죄악의 쾌락에 빠져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응(10-15) 시므온 지파의 족장 시므이가 미디안 족속의 딸 고스비와 음행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질투심은 하나님을 위한 인간의 투기가 아니라, 우상 숭배에 대한 여호와 자신의 질투를 의미합니다(출 20:5). 그러므로 비느하스의 행위는 인간적인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율법에 근거한 의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진노의 심판을 멈추시고, 비느하스 후손들에게는 영원히 제사장 직분을 계승할 수 있도록 평화의 언약을 주십니다(11-13). 이로써 대제사장 직분이 엘르아살에게서 비느하스에게로 계승됩니다. 그리고 엘리 시대 이후에 잠시 중단된 때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의 왕국시대까지 계속해서 비느하스의 후손들에게 계승됩니다.
하나님의 명령(16-18)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미디안인들을 공격하라고 명하십니다. 이때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부추겼던 발람도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박해하고, 기만하고, 유혹하여 범죄에 빠지도록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심판이며 징벌인 것입니다(31:1-54).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박해하는 사탄과 그 추종 세력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계 20:7-10).
적용: 사탄은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끊임없이 믿음의 사람들을 넘어뜨리려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으면, 이를 일러 잘못이라 한다.’<논어>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어서 살아가는 동안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의도성이 깔린 잘못은 양심을 속이는 것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잘못은 어느 정도 이해를 받기도 합니다. 문제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구구하게 변명을 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은밀하게 다가오는 죄를 분별하여 담대히 끊어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노력을 다하여 죄를 처단하였던 비느하스에게 내려진 축복이 당신의 삶에서도 체험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비느하스의 창
민 25:6-8 / 이익환 목사(욥바교회)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 4개월 정도 남은 상황이다. 드디어 40년 광야 생활의 끝이 보인다. 마라톤으로 치자면 42.195km 가운데 약 300m만 남겨 놓은 상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 진을 친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기까지 아직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모압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 이만 사천명이 죽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들 중에는 가나안 진입이 허락되었던 광야 2세대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왜 가나안 진입을 코 앞에 두고 죽어야 했을까? 그것은 그들을 해하려고 친 원수의 덫에 걸렸기 때문이다.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신앙 경주는 포기될 수 없다. 반드시 완주해야만 천국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원수는 우리의 경주를 방해하기 위해 덫을 놓는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졌던 덫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덫에 걸리지 않는 인생, 신앙 완주를 위한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덫을 놓으려 계획하는 사람이 나온다. 모압왕 발락이다. 민 22:2-3,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모압이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더라” 모압왕 발락은 심히 두려워한다. 자기 주변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무참히 깨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압평지에 진을 치기 전 이스라엘은 아모리왕 시혼을 패배시킨다. 바산왕 옥도 물리친다. 이스라엘을 상대할 나라가 없음을 모압왕은 알았다. 그는 고민 끝에 미디안 장로들을 찾아간다. 그들의 결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의 덫을 놓는 것이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최고의 점술가가 있었다. 발람이라는 사람이다. 그가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으로 유명한 점술가였다. 모압왕 발락은 그를 불러오기로 결정한다.
발람을 불러오기 위해 모압의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많은 복채를 가지고 떠난다. 그러나 이 저주를 막기 위해 하나님은 직접 나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일하신다. 하나님은 꿈에 발람에게 말씀하신다. 민 22:12,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때문에 발람은 장로들을 돌려보낸다. 그러자 모압왕은 더 높은 고관들을 보낸다. 이에 발람이 말한다. 민 22:18,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상당히 신앙적인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가 했던 말,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이라는 표현은 이미 돈에 대한 그의 환상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는 이미 복채에 사로잡혔고, 결국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런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가 아니라 복주기 원하신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발람은 물론 발락이나 다른 신하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복신앙의 문제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하나님을 단지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순복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목적이 너무도 소중하여 복만 구하는 기복신앙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압왕 발락은 아침 일찍 발람을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른다. 거기서 이스라엘의 진영이 다 보였다. 이곳에서 발람은 이제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 때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그 결과 발람의 저주는 축복으로 바뀌어 선포된다. 발락은 장소를 두번 더 옮긴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발락이 놓은 저주의 덫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나고 만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사람은 저주로 건드릴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저주도 축복으로 바꿔 놓으신다. 그것이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다.
민 24:25,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가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 이스라엘은 승승장구했다. 발락이 놓은 저주의 덫도 이스라엘의 행진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때가 위험한 때다. 사탄이 노리기 쉬운 때다. 발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철수했을까? 아니다. 그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뜨릴 실제적인 제안을 하고 돌아간다. 그 사실은 이 사건이 끝난 후인 민수기 31장에 기록되어 있다. 민 31: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발람의 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음행이라는 덫을 놓는 것이었다. 즉, 모압의 여자들을 풀어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덫에 걸려들고 만다. 이것은 하나님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 모든 결과를 볼 때 발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발람은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는 꾀를 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서도 복채를 받은 만큼 맘몬 앞에 절하고 만 것이었다.
민 25:1-3,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기서 ‘음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나(זנה)’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성행위가 아니라 이방신과 관련된 음행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계시록에서도 이 음행의 성격을 말한다.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 행음은 결국 바알숭배와 하나님에 대한 배교까지 연결되는 것이었다.
바알브올에게 가담했다는 말은 브올지역의 바알과 연합했다는 말이다. ‘가담했다’는 단어 ‘짜마드(צמד)’는 ‘함께 멍에를 지다. 짝이 되다. 연합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의 성축제에 참여함으로 바알과 계약을 맺고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어로 ‘진노하다’는 ‘코가 뜨거워졌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 받으신 것이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은 간음한 여인처럼 그들의 남편되신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의 조치는 단호했다. 민 25:4-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이것은 전체 백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다.
메튜 헨리라는 주석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험상궂는 세상의 두려움에 의해서보다는 미소 짓는 세상의 매력에 의해 더 위협을 당한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것은 그들을 향해 미소 짓는 여자들 때문이었다. 사탄은 음란의 덫, 돈과 명예라는 덫을 놓아 그것에 걸리게 한다. 그 덫에 걸린 사람은 잠시 기쁨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후 깊은 영적인 어둠에 빠지게 된다. 음행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졌다. 그리하여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변질시켜 갔다. 하나님은 공동체에서 음행을 제거하기 위해 바알브올에 가담한 자를 죽이라는 조치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한 사건이 벌어진다. 우리가 처음 읽은 본문이다. 시므리라는 시므온 지파 지도자가 고스비라는 미디안 수령의 딸을 데리고 음행하기 위해 막사로 데리고 들어간 것이다. 음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고 있는 시국에 정말로 정신 나간 행위였다. 이것을 본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진노한다. 그는 막사로 들어가 이 두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인다. 그러자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서 그치게 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민 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 때문에 질투하셨다.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눈이 돌아가는데 질투하지 않는 남편을 보고 관대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과 언약으로 맺은 사랑을 버리고, 다른 우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우셨다. 하나님의 질투는 죄에 대한 분노였고, 그들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거룩한 사랑이었다. 이 때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일어선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내 질투심으로 질투한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여기서 질투는 히브리어로 ‘킨아(קנאה)’인데, 성경에서는 ‘열심’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자기 백성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이 바로 여호와의 질투, 여호와의 열심인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질투하실 때 함께 질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열심을 내시는 대상을 향하여 함께 열심을 내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마음이 합해진 사람이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해진 사람은 원수의 덫에 걸리지 않는다. 모두가 덫에 걸려 들 때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게 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평화의 언약을 맺으신다. 민 25:12-13,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비느하스가 창을 든 건 자신의 야망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 한 분을 향한 열정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빠져가는 것을 보았을 때 비느하스 마음에는 거룩한 질투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긴밀히 연결되었기에 하나님이 느끼시는 질투를 그도 고스란히 느꼈던 것이다.
우리는 비느하스처럼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합되어야 한다. 사랑으로 연합될 때 우리는 원수의 덫에 걸리지 않는다. 사랑으로 연합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 수 있게 된다. 사랑의 연합이 먼저인 것이다. 신랑을 깊이 사랑하는 신부가 될 때, 신랑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용사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후 11:2-3,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 역시 비느하스의 심정으로 고린도교회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교회의 성도들이 원수의 덫에 걸려 부패하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신부가 되길 원했던 것이다.
자, 복채를 받고 이스라엘에게 음행의 덫을 놓았던 발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음행으로 넘어지게 한 미디안 족속에게 원수를 갚게 하신다. 그리고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일 때 발람도 칼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돈에 눈이 멀었던 발람의 최후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정한 기준들이 계속 무너지고 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성도들이 덫에 걸려 넘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맘몬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돈과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모습들이 보인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안심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한다. 그래야 덫에 걸리는 인생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질투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다른 것에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오직 하나님만 갈망하는 사람이다. 우리 마음은 결코 진공 상태가 아니다. 반드시 뭔가로 채워져 있게 된다. 내 안에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내가 하나님과 연합된 것이 아니라 다른 우상과 연합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탄은 지금도 돈과 성공, 음란과 쾌락이라는 덫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이 덫에 걸리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그저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로 전락하고 만다. 모두가 망하는 길이 대세가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비느하스의 열심을 구해야 한다. 내 야망, 내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품는 인생이 되길 구해야 한다. 신앙의 최종 목표는 형통한 삶이 아니다. 복을 많이 받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온전히 연합되어 하나님을 위해 창을 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덫에 걸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생이 아니라 천국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이 느끼시는 질투를 나도 느끼며, 하나님을 위해 분연히 창을 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 비느하스
민 25:6-13 / 김상수 목사
유다의 형들은 왜 축복에서 제외되었을까?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의 큰 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이고, 둘째인 시므온과 셋째인 레위 두 사람은 세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기 때문이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렇게 말했다(창49:5-7).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49:5-7)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이렇게 저주의 말을 들었던 레위의 후손들이 저주는커녕 오히려 출애굽 이후에는 성막이나 성전에서 제사장 직분과 성전을 관리하는 일들을 도맡아 하는 복된 가문이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저주를 받았던 집안이 제사장권의 가진 믿음의 명가를 이루게 되었을까? 바로 여기에 지금 나와 내가 속한 가정이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뀔 수 있는 영적인 비밀이 숨어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레위의 후손들에게 저주가 풀리고 축복이 흘러들어오게 되는 극적인 가문의 터닝 포인트(전환점)가 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광야에서 40여년이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터진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압 여인들과의 음행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광야를 통과하면 받았던 모든 훈련과 은혜들을 한 순간에 물거품을 만들 수 있는 대형 참사였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압 여인들과의 음행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염병을 내리셨다. 염병은 급속히 퍼졌다. 그때 그 짧은 사이에 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무려 24,000명이었다(민25:1-9).
“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9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민25:1-9)
그런데 이러한 극도 혼란의 클라이맥스는 시므리(Zimri)라는 사람이 ‘볼 테면 보라’는 식으로 고스비(Cozbi)라는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공개적으로 장막 안에서 음행을 하는 장면이다. 그때 이들의 더럽고 추잡스런 장면을 본 레위의 후손 비느하스(Phinehas)의 마음에 거룩한 분노의 화산 폭발했다. 그래서 가는 손에 창을 들고 들어가서 그들의 배를 뚫어서 없애버렸다. 그랬더니 마침내 염병이 그쳤다(민25:8).
그때 하나님께서 비느하스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25:10-13)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와 그 후손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셨는데, 그 내용이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위의 후손들에게 내려졌던 저주가 풀리고, 오히려 제사장권을 보장받고 믿음의 명가를 이루게 된 분수령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비느하스와 대비해서 눈여겨서 봐야할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공개적으로 음행을 벌이다가 죽임을 당했던 시므리라는 사람이다. 민수기 25장 14절에 보면, 이 사람이 어느 지파이며, 누구의 후손인지를 밝히고 있다.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남자 곧 미디안 여인과 함께 죽임을 당한 자의 이름은 시므리니 살루의 아들이요 시므온인의 조상의 가문 중 한 지도자(the leader of a Simeonite family)이며”(민25:14)
이 말씀을 보면, 시므리는 시므온 집안의 후손이다. 쉽게 말하면 비느하스는 레위의 후손이고, 시므리는 시므온의 후손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이 두 지파는 야곱에게 함께 저주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레위지파는 비느하스 때문에 저주가 풀렸고, 시므온 지파는 시므리 때문에 더 깊은 저주의 수렁 속에 빠졌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비느하스와 시므리, 이 두 사람 중에 우리들이 어떤 사람처럼 되어야 할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지는 너무도 명확하다. 우리들 중에 어떤 사람은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좋은 환경을 물려받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와는 반대로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어려운 환경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집 안에서 태어났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라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오늘 내 앞에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나는 비느하스가 될 것인지, 시므리가 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몇 년 전에 박 승 전(前) 한국은행 총재가 어느 일간지에 자신의 삶을 연재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부분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분이 한국전쟁 즈음에 이리공고를 졸업했다고 한다. 그는 매일 전북 김제의 어느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김제역까지 4km를 걷고, 다시 김제역에서 익산역까지 40분을 통학열차를 타고, 익산역에서 학교까지 또다시 4km를 걸어서 학교에 갔지만,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박 승 전 총재의 이야기에서 충격적인 것은 그 당시에 그의 집에는 시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시계조차 없는 가난한 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공부시키겠다는 강한 결심으로 새벽 일찍 일어나서 자녀를 위해 새벽밥을 지어서 보냈고, 한 번도 지각하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시계 하나 없는 가난한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새벽을 깨우는 결단을 했다면, 하물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눈에 축복의 사람이 되고, 믿음의 명가를 이루고, 저주스러운 사슬을 끊기 원한다면, 여러분에게 반드시 지금 비느하스같은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내 안에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들(우상숭배, 나태, 음란, 각종 중독, 이단, 잘못된 습관 등)을 과감하게 잘라내야 한다. 그대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일들(예배, 묵상, 기도, 영혼구원, 성도의 교제 등)로 채워야 한다. 이 시간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에 1등이 될 것을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이여, 비느하스는 저주의 가문을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담당하는 믿음의 명가로 바꿨다. 만약 여러분이 비느하스처럼 여러분의 집안의 축복의 가정으로 만들고 싶다면, 지금 하나님 앞에 여러분을 자신을 세우기 바란다. 믿음의 결단에는 엄청난 용기와 희생이 요구된다. 그렇기에 믿음은 곧 모험이다. 그러나 확신컨대 그 모험은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을 위해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룩한 모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을 굳게 붙들자. 이 순간 그런 결심의 마음이 있는 분은 어디에 있든지 자신의 가슴을 손에 대고 주님께 우리의 결심을 고하자.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자. 주님이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은혜 주신다.
아직 모릅니다
민수기 25:10-13
ㅇ 질 문 – 경기가 끝났는데도 순위가 바뀔 수 있을까요 ?
I. 서 론
저희가 대학교에 들어가던 40년 전에는 한국이 매연문제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오다가보면 청계산 고개를 넘으면 서울 쪽이 내려다보이는데 푸른 하늘 아래 매연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미세먼지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약 20년 전에 이 교회에 왔을 때에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제 방에 들어가면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와서 커튼을 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제 방에 커튼을 친 기억이 없습니다.
이제는 일 년에 약 3개월 정도 미세먼지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미세먼지는 우리나라의 암울한 현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1) 미세먼지로 앞이 잘 안 보이는 것과 같이 요즘은 나라의 앞이 잘 안 보입니다.
개인의 앞도 안 보입니다.
희망이 안 보입니다.
(2) 국민들의 마음이 우울합니다.
미세먼지가 덮인 것과 같이 국민들의 마음이 우울합니다.
(3)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난 13년 동안 OECD 국가 중에 자살률 1위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리투아니아가 OECD에 가입을 해서 그 일위 자리를 리투아니아에 넘겨주어서 자살률 일위라는 오명을 벗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불가능해도 가능하다는 신앙을 가져라.
아론은 4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출 6:23)
① 나답 ② 아비후 ③ 엘르아살 ④ 이다말
그런데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이 4아들로 제사장을 삼으셨습니다.(출 28:1ff)
그런데 아버지 아론이 살아 있을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아론이 대제사장이 되고 4아들은 대제사장 아론을 돕는 제사장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론이 죽으면 이 4명의 아들들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장남 나답에게 물려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셋째 엘르아살, 특히 그의 아들들은 대제사장이 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과는 거리가 먼 운명의 젊은이들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들이 생깁니다.
① 장남 나답과 둘째 아비후가 향로를 가져다가 하나님께 분향을 하는데,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서 분향을 합니다.(레 10:1ff)
그러자 불이 제단에서 나와서 이 두 아들을 살라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더 이상 이 두 아들의 족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아들은 자식을 낳지 않은 가운데 죽었거나, 아니면 자식을 낳았어도 그들이 죽었거나, 아니면 딸들만 낳은 것으로 봅니다.
1-2등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꿈엔들 생각을 해겠습니까 ?
②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싯딤에 왔을 때 오래 머물게 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인들과 눈이 맞게 됩니다.
그러자 모압 여인들이 자들의 신 그모스에게 제사를 지낼 때 이스라엘 남자들을 초청을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우상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크게 화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신없이 치셨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염병으로 죽어나갔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을 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죽어나가서 백성들이 울고 있는데 한 사람이 모압 여인을 데리고 와서는 자기 장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아론의 세 번째 아들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창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 남녀를 한 창에 꿰뚫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그러나 염병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셋째 아들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의 후손이 대제사장의 직을 이어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그 사람들을 창으로 찔러죽일 때 자기가 대제사장의 대를 잇는 자가 되리라고 꿈엔들 생각을 해겠습니까 ?
그러면 이 약속의 말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대상 6:1ff)을 보면 아론에게는 4명의 아들이 나오는데, 아론의 대를 이어서 제사장의 직분을 이어간 자는 세 번째 아들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인 것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가문인 사독의 가문이 바로 이 비느하스의 후손입니다.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대제사장의 직분이 주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였습니다.
자기 아버지 엘르아살에게는 두 형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3번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는 대제사장의 직분을 받을 수 없습니다.
비느하스가 대제사장의 직분을 받기 위해서는 큰 아버지 두 사람이 다 아들이 없이 죽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비느하스가 대제사장의 직을 이어갔습니다.
이렇게 불가능해도 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아라비아에 셰헤라자드(Scheherazade)라는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임금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공포의 부름이었다. 왜냐하면 이 못된 임금은 하룻밤을 지낸 뒤에는 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셰헤라자드의 경우는 달랐다. 첫날밤 임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하고는 끝을 맺지 않았다. 애기의 속편을 듣기 위해 하루씩 생명을 연장시켜 준 것이 1천 하루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천일야화 혹은 아라비안 나이트라고 불리운다. 셰헤라자드의 이야기는 1천 하루만에 끝났지만 이때는 이미 임금이 셰헤라자드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아라비아 여자들의 비극도 사라지고 셰헤라제드는 오래오래 행복한 왕후로 잘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애기를 들려준다는 것은 별거 아니지만 꾸준함의 마술이 변칙적인 폭군을 사랑의 포로로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세헤라자드가 불가능하다고 포기했으며, 그녀도 죽었고, 매일 죽어가는 아라비아 여인들의 비극도 막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불가능하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해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죽었어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희망이 없어도,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아도 우리는 믿음과 희망을 갖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 자에게 하나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비느하스가 대제사장의 가문을 잇게 된 것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24,000명이나 죽이기까지,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는 모압 여인들과 놀아나는 것을 보고 비느하스가 창을 갖고 들어가 그 남녀를 한 창에 꿰뚫어 죽였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을 볼 때 화가 나는 하나님의 그 화를 가지고 비느하스가 이스라엘 백성을 처단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 마음을 갖고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이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 그러나 그렇게 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이 답답한 마음을 알고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던 것입니다.
1)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분노하는 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신가를 알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2)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 자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으면,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럴 때 기회가 주어집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화가 나는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동을 했습니다.
그럴 때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낼 수 있을까요 ?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자는 주님의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성령님과 함께 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함께 한 자는 불가능한 가운데 있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함께 한 자는 절망 가운데서도 길이 열립니다.
저는 비느하스는 바로 이 성령 충만 자였다고 봅니다.
필립 윌리암 오터바인(Philip William Otterbein)은 주님을 위한 뜨거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의 믿음은 너무 뜨거워서 어떤 사람은 그가 공격적이라고 생각을 할 정도였다.
오터바인은 1726년 독일에서 목회자를 많이 배출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여 1749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너무 뜨거운 마음으로 목회를 했고, 그래서 3년 후에는 그의 목회를 저항하는 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새로운 목회를 시작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도 그는 복음을 위한 담대함과 열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교인들의 형편도 좀 고려 해달라는 청중들의 도전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회개하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뜨겁게 복음을 전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에게로 인도해야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 그는 존 웨슬리가 미국에 파송한 감리교 선교사 프란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가 목회하는 것을 보고 전도에 중요한 통찰력을 얻게 된다. 그가 배운 것을 자기의 전도의 방법에 접목한 오터바인은 전도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그가 유럽에서 직면했던 것과 같이 어떤 자들은 그의 뜨거운 목회를 반대를 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강단에서 그는 불을 토하듯 설교를 했고, 청중들은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며 눈물바다가 되곤 했다. 그는 설교할 때마다 계속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의지했다.
그의 마지막 설교를 할 무렵 한 번은 너무 약해져서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때에 그는 “주님 한 번만 더 설교할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라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새 힘을 얻어서 힘 있게 설교를 마쳤다. 그리고 그 설교 후에 곧 세상을 떠났다(1813년)
오터바인에게 전도에 관한 귀한 가르침을 주었던 애즈베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오터바인의 열정에 놀랐다.
애즈베리는 오터바인이 얼마나 오직 하나님에게와 그의 백성에게만 알려지기를 구했는가를 알게 되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복음 전도에 오터바인과 같은 열정으로 헌신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 하나님께 성령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구령열을 붙여달라고 기도하라.
이 오터바인을 기념하기 위하여 오하이오주 웨스터빌(Westerville OH)에는 오터바인대학교가 세워졌다. 감리교대학교다.
아무리 반대가 많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환경이 절망적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일하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길이 열립니다.
III. 결 론
아무리 힘들고 절망적이어도 하나님을 믿고 희망을 갖고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나를 위하여 뜨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뜨겁게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하나님의 열심으로
민 25:10-13 / 전종태 목사(2010.12.11.)
오늘은 제490주년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교회의 생일을 오순절 성령강림절이라고 한다면 종교개혁기념주일은 개신교회의 생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을 매년 맞이하지만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교회의 참 모습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열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젊은 성직자 마틴 루터가 교권주의와 인간의 행위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변질되고 탈선된 천주교의 교리를 비판하고, 면죄부 판매의 그릇됨 등을 지적하고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독일 비텐베르그 대학 성당 문에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게 되었습니다.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만,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만, Sola gratia 오직 은혜로만, 그리고 All gemeines Priestertum 만인제사장의 원리로”라는 4대 명제를 가지고 인간의 죄 용서와 구원의 관계는 면죄부로 대치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천주교는 말할 수 없이 부패되어 있었습니다.
교권주의와 교직주의가 성행해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행위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성경을 왜곡하였습니다.
그래서 면죄부를 매매하는 등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타락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이 일반교인들에게 허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눈먼 말이 방울 소리만 듣고 따라가는 것과 같이 맹목적으로 따라가곤 했던 것입니다.
이때에 젊은 수도사요 신학자였던 마틴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든 것입니다.
그 뒤를 이어 화란의 칼빈, 쯔빙글리 등이 일어남으로 종교개혁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잘못된 신앙을 고쳐 나가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참된 뜻은 변질된 교회의 모습을 바로 잡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천주교회가 본래의 교회에서 탈선되어서 제도화되고 형식화되고 또 부패하고 타락했기에 초대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오늘의 천주교회를 비난하거나 비방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종교개혁은 교회를 교회답게 회복시키려는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젊은 성직자 마틴 루터의 가슴에 하나님의 열심을 불붙게 하시니까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하는 종교개혁의 선봉장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열심의 불이 타오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가 세워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들의 가슴에 화산처럼 솟아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진젠돌프 백작은 박물관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성화를 관람하던 중 성화 아래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열심을 그 가슴에 품게 되었을 때에 유럽의 교회를 개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
오늘 본문 말씀 민 25:11절에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나의 질투심”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하나님 여호와의 질투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번역된 이 구절은 1984년에 번역된 NIV 영어성경에는 "Phinehas, son of Eleazar, son of Aaron the priest, hath turned back My fury from the sons of Israel, by his being zealous with My zeal in their midst, and I have not consumed the sons of Israel in My zeal."라고 하여 하나님의 질투심을 "My zeal"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1989년에 번역된 YLT(Young's Literal Translation) 성경에도 “Phinehas son of Eleazar, the son of Aaron, the priest, has turned my anger away from the Israelites; for he was as zealous as I am for my honor among them, so that in my zeal I did not put an end to them.”라고 하여 역시 “My zeal"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Zeal"이라는 단어는 ”질투“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열심“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질투심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칸아”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열심과 질투라는 말에 공통적으로 사용됩니다.
이 말의 동사는 “카나”인데 이는 “열심히 하다, 질투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구약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어떠한 경쟁적 위치의 신에 대해서도 인정도 용납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의 유일무이성에 대해 열심을 다해 질투하시면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출 20:5, 신 5:9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을 숭배함은 여호와의 강렬한 열심을 자극합니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신 32:16절)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신 32:16절)
또한 하나님의 열심은 그의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겔 39:25절에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해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지라”고 하였으며, 욜 2:18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열심 및 순수성을 나타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계약을 세운 십계명 중에서, 자기를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명시하셨습니다(출 20:5, 34:14,신 4:24,절)
단지 타인의 성공 및 탁월한 지위을 질투하는 인간적 질투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소유하는 영광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 대한 주권을 다른 거짓된 우상에게 내어주시는 것을 극히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절)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절)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의 신신을 섬기는 것은, 부부의 관계에 있어서의 불윤이나 부정행위 같은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하여 진실하신 하나님에의 배반행위인 것입니다.
신약 약 4:5절에도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라고 하였는데,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 것을 강력히 원하시며, 우리 속에 두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를 강력히 원하심을 표현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을 품은 사람이 나타나면 우상을 파하고 우상숭배자들을 죽이며,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은 어린 목동에 불과하였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의 열심이 불붙게 되니까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짱돌 하나로 쓰러뜨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의 장수들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독하고 있을 때 벌벌 떨고 두려워하여 숨어 있었을 때 하나님의 열심으로 가슴이 뜨거워진 다윗은 “할례받지 못한 저 짐승만도 못한 놈이 감히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하다니 내 그냥 둘 수 없다”하고 “네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하면서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돌을 던졌더니 하나님께서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게 하시므로 그냥 쓰러지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또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왕비 이세벨로 인하여 온 나라에 우상숭배가 만연하였을 때, 이를 보고 견디다 못해 하나님의 열심이 가슴에 불붙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 850명과 기도 대결을 벌이는데, 하나님의 불의 응답을 받고 그들을 모두 죽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느하스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부디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여 얻은 아들이었습니다.(출 6:25, 삿 20:28절).
싯딤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고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할 때 초청을 받아 먹고 마시고 이방신들에게 절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자손의 한 사람이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막에 들어온 것을 목격한 비느하스는 그 남녀를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참으로 참혹하고 잔인한 이야기이지만 이 비느하스의 가슴에 타오르고 있는 하나님의 열심을 하나님께서는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거룩한 백성이 이방 사람과 음행을 저지르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돌고 있던 염병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이었더라”(민 25:9절)고 하였습니다.
신약 고전 10:8절에는 23,000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비느하스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그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비느하스에게 후손이 대대토록 대제사장이 될 것을 보장하시는 언약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 25:12,13절)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시 106:29-31절)
비느하스와 그의 자손은 엘리 가문이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한 얼마 동안을 제외하고는 예루살렘 함락에 의해 희생이 그치기까지 줄곧 그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모세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을 때 각 지파에서 택한 1만 2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 남자를 다 죽이고 그밖에 미디안 다섯 왕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민 31:1-12절).
또 요단 강 동쪽 언덕에 제단을 쌓아 여호와의 제단 외에 자기를 위해 단을 쌓는 줄로 오해를 받은 요단 강 동쪽 지파(르우벤,˙갓,˙므낫세 반)에 항의하기 위해 열 방백과 같이 여호수아에 의해 파송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는 벧엘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고 있었습니다(삿 20:27,28절)
이러한 말씀들을 종합하여 볼 때에 비느하스는 맡은 바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주의 종 모세의 명을 순종하였으며, 죽음도 불사하고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진실히 섬기고자 하였으며, 우상숭배와 그 백성들의 타락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가슴앓이 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비느하스와 같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가슴이 뜨거운 사람을 들어서 이 시대를, 이 민족을, 한국교회를 변화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가슴에 하나님의 열심을 품고 이 시대를 보며, 한국교회를 보며, 자신을 보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그 주인공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호와를 위한 열심이 특심한 엘리야와 같은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0절)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4절)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개혁은 교회를 교회답게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종교개혁은 참된 믿음을 회복하자는 운동입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우리의 삶 속에서 회복하자는 운동입니다.
종교개혁은 우리의 교만을 꺾고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자는 운동입니다.
종교개혁은 참된 진리를 회복하자는 운동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천주교의 거대한 세력에 도전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슴 속에 주님의 교회의 타락과 그의 백성의 죄를 아파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불붙고 있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여호와의 열심으로 불붙게 하셔서 믿음이 변질되고, 교회의 참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먼저 나의, 요나의 신앙을 회복시키시며, 우리의 가정을 살리고,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하며, 나아가서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세상을 질투하라
민 25:6-13
야누스 같은 하나님
이스라엘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그들의 우상 제사에 참여한 것은 하나님의 극렬한 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두령들부터 나무에 매달리는 심판을 받았고 수많은 백성들은 염병으로 죽어나갔습니다. 그런 와중에 오늘날의 신자가 보기에는 끔찍하면서도 조금 이상한 사건이 하나 발생했습니다.
회중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회막에 모여 슬퍼하는 중에 어떤 사람이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아론의 손자 즉, 대제사장이 될 비느하스가 그 남녀 둘을 장막에까지 쫓아가서 창으로 배를 꿰뚫어서 죽여 버렸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목사, 아니 교단총회장이 교인 중의 한 사람을 살인한 셈입니다. 그들이 물론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지만 꼭 그렇게 잔인한 방식의 심판이어야만 했는지 의아해집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이 비참하게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염병의 심판을 그치고 살인자 비느하스에겐 평화의 언약을 주며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워줍니다. 백성들을 이만사천명이나 죽였던 그 냉혹한 심판이 언제 있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모든 상황이 순간적으로 극과 극으로 오갔습니다. 슬픔에 빠진 연약한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 혼자서 엄청난 분노를 퍼부었다가 금방 다시 방끗 웃는 것 같습니다.
비느하스의 단호한 사형 집행과 그런 심판에 대해 하나님이 평화의 언약으로 반응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사건의 전후 사정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먼저 미디안 여인들도 이스라엘의 음행 사건에 적극 연루되었습니다. 나중에 여호와가 모세더러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고 명했습니다,(민31:1) 모세도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민31:16)라고 확인했습니다.
모압이 이스라엘의 친척 국가이긴 해도 하나님이 모압보다 미디안을 심판하신 까닭은 분명히 이스라엘 음행에 더 주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디안 장로들이 발람을 발락에게 추천했는데.(민22:4) 결과적으로 그 저주의 신탁은 실패했습니다.
미디안으로선 모압에게 큰 빚을 진 셈이고 당시 중근동의 최고 정보통이자 중재자라고 자부했던 자기들 체면이 완전히 꾸겨졌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거기다 미디안은 약대 타고 여러 족속들에게 장사하러 다녔기에 이번에 그냥 넘어가면 자기들의 장래 영업에 큰 지장이 있겠다는 판단도 했을 것입니다.
흔히 직접 피해를 당한 장본인보다 주위의 공범자들이 더 적극 나서서 반발하는 법입니다 미디안도 발람과 모압 족속과 별도로 나름대로 이스라엘에게 어떤 형식으로든 복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끔찍한 심판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은 가족들을 애도하고 자기들 잘못에 대해 회개하는 중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회개 집회이자 추모 예배를 드리는 중입니다. 그런 심각하고 진지한 시간과 장소에 한 이스라엘 남자가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다가 그 추모의 현장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장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남자는 시므온 족속의 한 족장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14절)
성경의 세밀한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창으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8절)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을 창 하나로 단번에 죽였다는 뜻입니다. 죄송하지만 그 두 사람은 장막으로 들어가서 배를 맞대고 음행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 남자는 비유를 하자면 부모의 장례식장에 상주가 부모의 원수의 딸을 불러다가 다른 방에서 음행을 한 꼴입니다. 실제로 상대 여자는 미디안의 한 족장의 딸이었습니다.(15절) 어떻게 여호와를 아는 백성이 이런 추악한 죄악을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끔찍하고도 냉혹한 심판에 대해 의아해하기 이전에 도무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사악한 큰 죄입니다. 불신자라도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늘에서 벼락 맞아 죽어야 될 놈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염병으로 죽은 이스라엘도 이제 곧 가나안 땅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기쁨과 소망과 열정에 가득 찬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거역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미디안 여자들과의 음행은 비유하자면 결혼식 직전에 신부가 신랑 대신에 다른 남자와 음행을 한 꼴입니다.
나무에 매달린 두령들이나, 염병으로 죽은 이만사천 명이나, 본문의 한 남자나 죄의 질에서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발람의 소원대로 하나님을 이방 신에게 굴복시키고 심지어 절하게 만든 자들입니다. 모두가 당장 죽어 마땅했고 하나님의 심판에 변명도 핑계도 댈 수 없고 대서도 안 됩니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독자들 또한 하나님의 이런 엄위하신 심판 앞에 겸손히 고개 숙여야 하고 그분의 공의에 한 치도 불만 의심을 가져선 안 됩니다. 어떤 신자가 저에게 가장 이해가 안 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은 아무 이유 없이 어린이들이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살인자들은 정말로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재앙은 실은 신자들의 잘못을 포함해 사람들의 죄악의 결과로서 우리 모두가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래서 어린이 즉,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고 당장 지금이라도 지구를 폭파 멸망시켜도 인간 쪽에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전혀 없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출발이자 핵심입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이것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이런 대전제가 확고히 서있지 않으면 어린이의 요절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고난은 불합리해지고 하나님의 공의에도 원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로는 이해되어도 심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이는 영원불변의 진리이자 엄연한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충성된 종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비느하스가 그 두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이자 성경은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8절)고 선언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그 순간만을 기다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분명히 사실입니다. 그분은 이 땅의 추악한 죄악을 제거하려는 헌신된 종이 단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길 목매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타깝게도 그 전까지는 인간 세상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에는 더더욱 온갖 고난과 재앙들이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거룩한 율법을 주시면서 당신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비느하스의 의로운 행동이 끝나자 바로 염병도 끝났다는 것은 그만큼 거룩하신 그분께서 더 열렬한 소망과 넘치는 긍휼을 품고서 자기 백성이 거룩해지길 간절히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본심이 재앙과 심판이 아니라 용서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어폐가 있는 설명이지만 하나님으로서도 당신의 본심대로 재앙을 그치고 구원을 주시려면 그럴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당신의 백성들이 심판 받았던 그 죄를 실제로 백성들 스스로 진멸해야만 심판을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회개란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면서 마음으로 반성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그치면 그 역시 종교적 도덕적 정서적 자기 위로요 자기 의일 뿐입니다.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 근본요인을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범죄한 행동을 깨끗이 씻고 다시는 재범하지 않도록 뼈를 깎는 노력과 수고와 희생을 해야 합니다. 이전의 추악한 행동, 말, 생각과는 완전한 단절을 이뤄내야 합니다. 신자의 회개가 충만하게 완성되어야만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도 임합니다.
하나님이 일일이 우리가 범죄 하는 대로 벌을 주시진 않지만 절대로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미지근한 분이 아닙니다. 일상적으로는 넘치는 긍휼로 인내해주시지만 무조건 끝까지 그러지 않습니다. 회개가 찰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회개할 기미가 전혀 없으면 그 인내는 곧바로 거두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 특정 죄악을 거룩하게 고쳐보려는 충성된 종이 단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즉각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시내 산 금송아지 사건에선 모세로 인해 계획하고 있던 심판을 취소했고, 본문사건에선 비느하스로 인해 이미 시행하고 있던 심판을 곧바로 중지하셨습니다.
한두 번의 경건한 순종은 인간적 윤리와 신앙 양심에 따라 비교적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참 순종이란 하나님이 어디로 이끌지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도 의심 불평은 물론 인간적 계산이 일절 개입하지 않고 주저함 없이 곧바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원래 식당의 waiter처럼 누가 부르면 곧바로 뛰어가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충성된 종이란 항상 깨어서 자신의 중심이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해 있는 자입니다.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이 그분의 마음과 말에 맞춰져 있기에 행동도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필연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결코 부득이함으로 행하지 않고 넘치는 기쁨으로 저절로 주님을 닮아가는 일상의 삶이 충성입니다.
비느하스는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종교적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요, 자기 공을 세워서 나중에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요,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응답을 받은 것도 아니요, 그 두 사람을 인간적 개인적으로 증오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 두 사람의 음란한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이며 다른 백성들의 회개를 훼방하며 순전한 애도의 감정마저 쓰레기 통으로 던져 넣는 일이라고 절감한 것입니다. 결코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는 확신이 순간적으로 들면서 자연스레 심판의 행동이 이어진 것입니다.
만약 그 남자가 미디안 여자 혼자만 먼저 장막으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남아서 동족들을 위로하거나 그 슬픔의 현장에 동참만 했어도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둘이 함께 장막으로 가는 것을 보고는 비느하스는 곧바로 창을 들고 쫓아간 것입니다. 그 짧은 순간 동안에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준행함으로써 모두가 그분의 백성으로 회복되어야만 한다는 생각 외에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한 비느하스
기억할 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그러하듯이 비느하스의 그런 생각과 행동의 배경에도 성령님의 의로운 인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비느하스더러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11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언뜻 질투가 부정적인 감정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적용할 때는 도리어 아주 긍정적인 의미가 됩니다. 비느하스가 당신의 마음을 갖고 당신이 행할 바를 행하였기에 이스라엘을 향한 극렬한 진노가 해소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비느하스를 극찬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가 당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질투란 반드시 세 당사자가 있어야 합니다. 본인과 사랑하는 연인과 그 연인을 두고 사랑을 다투는 연적입니다. 설령 질투가 나중에 분노 저주 복수로 이어진다 해도 처음 발단은 아주 선한 의도에 따른 것입니다. 연인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결코 연적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감정이 질투입니다. 사랑하는 상대를 더욱 뜨겁게 사랑하면서 독점하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는 것이 질투입니다. 필연적으로 연적에 대해선 불같은 분노와 저주가 따릅니다.
발람의 세 번의 신탁 사건과 이어지는 이방 여인과의 음행 사건에서 질투를 하는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연인은 이스라엘입니다. 당신과 함께 이스라엘의 사랑을 다투는 연적은 이방 신, 바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 여인들과 행음하고 바알의 제사에 참여해 절까지 했으니 사랑 다툼에서 결과적으로 또 논리적으로는 여호와가 바알에게 패배한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적에 해당되는 바알 신과 그 하수인들에게 당장 앙갚음을 하지 않고 당신의 연인인 이스라엘부터 먼저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이 질투하는 방식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선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두고 바알을 상대로 질투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오직 연인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칩니다. 이전에 발람이 저주의 신탁을 세 번 시도한 일이나, 이방 여인들이 이스라엘을 꾀어 음행하고 바알 제사에 참여케 한 것은 바알 신으로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뜻이었습니다. 사탄은 절대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고 철저하게 미워할 뿐입니다.
그리고 발람의 세 번의 신탁처럼 사탄이 대놓고 당신의 백성을 멸망시키려 덤빌 때는 아무래도 인간이 사탄보다 능력이 약하므로 하나님이 대신 막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방 여인들과 음행사건처럼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서 접근할 때는 즉, 사탄이 당장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지 않고 죄로 타락시켜 서서히 영적 죽음으로 몰아가려고 할 때는 신자들더러 스스로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물리치라고 버려둡니다.
아담의 타락 때에 자유의지를 주시고 그의 판단에 맡겨 두었듯이 말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모든 거짓된 수단을 동원해 시험 유혹할 때는 신자는 성경에 이미 계시된 절대적 진리로 얼마든지 구별하고 상종 교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발람이 결과적으로는 세 번이나 이스라엘에게 공을 세웠지만 그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탐욕스런 사탄의 종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영적인 분별력을 미처 갖지 못했다 쳐도 시내 산 금송아지 사건 때에 하나님이 우상숭배에 대해 얼마나 극렬히 진노하셨는지 이미 체험했습니다.
하나님 당신 외에 다른 신을 절대로 두지 말라는 첫 계명이 바로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가 모든 경우에 영적으로 분별하는 절대적인 진리이자 첫째 기준입니다. 이번에 만약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제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단순히 일회성 음행으로만 그쳤어도 염병의 형벌까지는 내리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지 말라.
하나님은 신자를 두고 사탄과 경쟁할 위치에 설만큼 시시하고 연약한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사탄 스스로도 감히 그분과 맞설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들은 전부 무저갱에 멸망시키지만 말아달라고 사정사정했습니다. 사탄은 그 때까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로 예수님의 십자가구원 은혜를 등지게 만듦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증오를 대신 해소하려듭니다. 사탄다운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한 분풀이입니다.
영계에서 최고 위치의 천사장이었던 사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다 그분의 진노를 사고 지상으로 쫓겨 내려왔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또 마지막 날 심판 때까지 사탄은 그분의 철천지원수이고 또 그분의 백성과도 철천지원수일 뿐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이었던 적은 한 순간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사탄은 오직 그분의 심판만 기다리고 있으며, 더 중요하게는 골고다 언덕에서 이미 철저한 패배를 당해습니다. 신자가 사탄을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그 유혹과 시험에 져서도 안 됩니다.
본문에서 질투심으로 질투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이해하기 쉽게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너무나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실감나게 말한 것입니다. 당신께로만 향해야 할 신자들의 경배와 감사와 찬양이 다른 존재에게 돌려지는 것을 결코 두고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음란죄를 범하고 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본 사건을 들어 음행은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행위라고 엄격히 정죄했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5-18)
본문의 이스라엘 남자는 여호와의 지체인 자기 몸을 창기의 지체로 만들었습니다. 이방 여인과 성관계를 갖는 것은 이방 신과 완전히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여호와를 바알 신과 한 몸이 되게 한 꼴입니다.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였습니다. 엄청난 힘이 아니고는 창 하나로 두 사람의 배를 꿰뚫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가 비느하스의 창에 함께 실렸다는 것입니다.
비느하스의 심판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온전했고 거룩하기까지 했습니다. 비느하스야말로 당신께서 거룩한 소망을 갖고 기다리셨던 정말로 영적으로 깨어있는 한 사람의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그의 평소 품고 있던 믿음은 물론 대제사장 직분에 대한 소명 의식을 그 심판 행위로 증명했습니다.
충성된 종이 나타나길 기다린다고 해서 그 동안에 하나님이 완전히 손을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발람 사건 전반에 당신만의 절대적인 주권과 완전한 섭리가 작용했습니다. 일련의 과정은 사탄의 최고 영험한 종 발람이 시작해서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마무리를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대제사장 비느하스입니다. 백성들의 철저한 타락을 당신만의 철저한 은혜로 덮으려고 당신께서 이미 계획해 놓으신 종이었습니다. 언뜻 대제사장보다 일반 백성이 그를 심판하는 것이 이방 족속들 보기에 그분의 영광이 더 높아질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압과 미디안은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권능은 일차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로만 집중됩니다. 대제사장이 반드시 나서야 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하나님은 다시 받아드리려고 이미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염병을 그쳐야 하는데 그러려면 반드시 백성의 대표자 대제사장이 그 죄를 반드시 피로서 씻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그런 뜻에서 당신께서 이미 예비해 놓은 대제사장인 비느하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평화의 언약을 수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의 대속 심판의 제사로 인해서 하나님과 완전히 다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염병으로 심판하기 이전의 관계로 되돌려진 것입니다. 죄악을 완전히 제거하여 완전한 회개가 달성되었을 때에, 그것도 대제사장이 솔선해서 먼저 행했을 때에만 가능한 구원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십자가 대속제사를 상징 예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
비느하스에게 주신 평화의 언약을 두고 하나님은 그와 그 후손의 영원한 제사장의 언약이라고 선언했습니다.(13절) 아론 가문의 대제사장직분을 보장하는 일차적인 의미를 넘어서 믿음의 후손인 오늘날의 신자들도 영원한 제사장으로 서야 한다는 언약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그 질투를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그분의 백성을 뜨겁게 사랑해야 하고 그와 동시에 그 백성을 거짓으로 훼방하는 흑암의 세력은 철두철미 증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바로 그 소명에 충성 헌신해야만 신자와 신자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어서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교회 안에 음행하는 자들을 비판 정죄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미디안 여자가 유혹했던 성적 음행은 영적 음행으로 이끄는 미끼였을 뿐입니다. 본문 표현대로 하자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아까지 않고 내어주신 그 사랑을 언제 어디서나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와 그 공동체는 오직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로 남아야만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순수성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그 진리의 절대성 유일성 영원성 완전성에 다른 어떤 것들과도 섞지 않아야 합니다. 복음의 참 생명이 거짓 생명에 의해 타협 조종 변개 포기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은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은혜가 넘치고 그분의 사랑 앞에 모든 심령이 무릎꿇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주변 성도와 이웃 사회에까지 흘러나가게 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세상 모든 이를 외모로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 중에 있는 자라도 그 죄는 어떻게든 성령의 씻음을 받게 하면서 그 죄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겨주어야 합니다. 교인 각자는 물론 그들이 모이는 공동체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고 그들의 행하는 모든 삶과 사역은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인도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 말씀이 철저하게 순전히 그대로 증거 되고 그 받은 말씀을 기도하며 삶에 실천해야 합니다. 특별히 지도자가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죽는 대제사장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최근에 예수 십자가 순전한 복음은 너무나 인기가 없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물론 목사들마저 영적 분별력이 많이 무디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 죽음이 강조되지 않고 있으니 사탄은 구태여 광명한 천사 노릇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들을 전혀 시험 방해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됩니다.
교회 밖 세상은 항상 그러하듯이 사탄의 조종 농간에 맞추어 춤추며 절대적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세속의 관습 문화 윤리 종교 등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도 막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적극 도입하고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편리하고 쾌적한 예배당에서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감정적 설교만 성행합니다. 죄책감을 심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제거해주는 값싼 복음만 세련된 말솜씨에 담겨서 많은 교회의 강단마다 홍수처럼 넘칩니다. 주일 예배가 기독교적 겉옷만 입은 세속 문화와 윤리와 종교를 공연하는 쇼가 되었습니다. 교인들도 죽을죄에서 구원 받아 절대적 하나님에게 전부를 바쳐 헌신하고 사탄을 절대적으로 저주하라는 메시지에는 귀를 닫습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완전히 비인기 종목이 되었고 그런 메시지를 아직도 고지식하게 전하는 교회들은 비주류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교회와 교인들이 아무리 그 세상에 오염 동화되어도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으로 영원한 진리로 남습니다. 십자가 복음 자체는 결코 변화 축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영원한 평화의 언약은 동시에 영원한 저주의 언약이기도 합니다. 심판은 구원의 완성이며, 구원도 심판의 완성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질투심으로 이 땅을 특별히 교회와 교인들을 질투하고 계심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의 순전한 신부가 되지 않고는 아무리 예배가 장엄하고 화하고 경건해도 하늘에 열납 되지 않습니다. 겉으로만 교인이고 교회이지 실제로는 거짓 복음, 번영 복음 등과 손을 잡고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극렬한 분노의 질투를 받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 밖에선 영원한 멸망이요, 하나님 안에선 영원한 생명인데 그 둘을 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사람들에겐 하나님이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지닌 것같이 보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하나님이 싫어서 하나님 얼굴의 한 쪽만 바라보면 이단으로 빠져서 멸망으로 치닫게 될 뿐입니다.
비느하스의 거룩한 분노
민 25:1-18 / 주병열 목사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가나안 진입을 보면서 두려움을 갖던 모압은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해서라도 자기 나라에 대한 위협을 이겨보려고 발람이라는 사람을 초청해서 저주를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난데없이 오늘 본문으로 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로 인해 음행의 죄를 짓습니다. 모압 여자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꼬드겨서 모압의 신들에게 제사하는 자리에 초청했고, 그들에게 맛난 음식을 대접하면서 자기 신들에게 절하여 제사하도록 유혹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방에는 대부분 이방신을 섬기는데는 성적인 문란이 함께 따라왔습니다. 이런 모습은 대부분의 지방 어디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의 고대 민속신아을 보면 그 안에 성적인 상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가나안 주변 지방에는 이런 일들이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했고 문란했었던 것 같습니다.
모압은 여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합니다. 그들을 자기들의 성전으로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하고 제사에 참여시켰으며, 성적인 문란한 행위를 했습니다. 그것이 모압 민족에게는 종교적 행위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치명적인 죄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죄 가운데 빠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거룩함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고, 민수기는 광야의 힘든 삶의 자리에서 그들이 지켜야 하는 것이 곧 거룩함이라는 사실을 실제의 삶 가운데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에게 유혹을 받아 너도 나도 그곳으로 달려가서 그들의 제의에 참여하고 그들의 대접을 받으면서 신상들에게 절하고 음행을 함으로 그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죄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치명적인 함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압이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해집니다. 여기서 발람의 역할이 있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발람이라는 사람은 모압의 초청을 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요청받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발람이 마지막으로 모압 지방을 떠나면서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있는 한 가지 비방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을 저주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큰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2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2:14)
그래서 민수기 3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영적으로 재정비하게 하신 후 미디안을 치라고 하시면서 발람도 함께 죽게 했습니다. 발람이라는 사람은 본래 사술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야웨 종교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음행과 우상숭배로 끌어들여 멸망시키려고 도모한 것입니다.
그래서 발람의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여자들의 꾀임이 빠져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육체적 쾌락을 즐기고 영적인 타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이스라엘 진영 전체를 다시 한 번 완전히 혼란의 도가리로 만들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고, 이스라엘 진영에는 무려 24,000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내리신 염병으로 죽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적어도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 일이 발람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면 왜 본장에서 발람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일이 모압 여자들의 유혹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들을 먼저 심판하셨어야 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신체로 먼저 자기 백성들을 향해 수 많은 사람들을 염병으로 쓸어가시는 것입니다. 마치 옛날 어른들이 자기 자식이 남의 자식과 싸우면 분명 잘못은 남의 자식이 했어도 내 자식을 먼저 혼내시던 모습과 흡사합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사실 하나의 초점에서 만납니다. 즉 하나님은 이 문제의 원인 제공자가 발람이었다는 사실을 민수기 31장에서 슬쩍 비추시고, 요한계시록, 즉 성경 제일 끝에 가서 그 정체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안타까워하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타락입니다. 죄로 인해 어이없이 무너지는 자기 백성의 모습을 주님을 치유하셔야만 했었습니다. 모압 백성들이 나빴든, 그들의 술책이 교활했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거룩함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유혹하고 타락하게 하는 영적, 육적 공격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쩌면 오늘날은 더 많은 것들이 성도들의 몸과 정신, 영적인 삶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세상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인터넷을 들어가면 수많은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과 혼을 빼앗아가는 일들이 나타납니다. 물질과 신앙을 혼란으로 빠트립니다. 수많은 곤경으로 빠져가게 합니다. 수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서서히 이런 세상적인 일들에 빠져들어 간다고 많은 사람들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압 여자들에게 빠져서 죄를 범하는 이스라엘에게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 중에 죄에 빠진 자들을 태양을 향해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라고 말씀합니다. 모세는 이 명령을 받아 각 사사들, 즉 천부장과 백부장, 오십부장과 같이 군대 장군들로 하여금 바알에게 매수된 사람들을 모두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죽이는 것을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처음 대하게 되면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전쟁 기록에 대해 놀라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범죄한 일로 인해 자기 백성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란한 일을 행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픈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십니다. 그들을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을 매어 달라고 하십니다. 아픈 현실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더욱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십자군 전쟁과 같이 바르지 못하게 피를 흘린 역사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성경을 바르게 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정직하게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들을 죽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악을 끊어야 했습니다. 생명을 위해 몸의 죽은 부분을 도려내야 합니다.
우리의 다리가 썩어가면 의사는 그 다리를 자릅니다. 다리를 살리려다는 몸 전체가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살기 위해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하면 아프지만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누구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영적으로 병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잘라 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잘라내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교회만은 세상의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에 누룩같이 번지는 죄의 영향을 보면서도 그것을 도려내지 못합니다.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긍휼히 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졌습니다. 죄에 대해 저항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무조건 달래고 무조건 위로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도려내야 하는 상처를 그냥 가지고 있습니다. 상처좀 보자고 하면 아프다고, 건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죄와 더러움은 계속 공동체 안에 번져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몸과 영혼 깊은 곳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인줄 압니다. 결국 오늘날 교회는 굶주리고 상처받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져서 고통 당하고 있고, 더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곧 교회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세상에서 받지 못한 대접을 교회에 와서 받으려고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결국 교회는 점차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더 감싸야 하지 않겠냐고… 속에 무슨 상처가 곪아터져도 무조건 감싸야 한다고만 말합니다. 상처좀 보자고 하면 너무 아프다고, 건들이지 말라고,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고 하면서 진총제만을 원합니다. 한 두 마디의 격려성 메세지로 한 주간의 통증을 잊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잘 될거야. 잘 될거야. 하면서 살아갑니다.
더 안타까운 일이 이어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기들의 죄로 인해 곪아터지고 상처입은 자들이 있는데,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그 일을 자행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온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죄로 인해 징계를 받고 있습디다. 수많은 사람들이 염병으로 죽어갑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여서 울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시므온 지파의 한 족장이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본래 미디안 족속은 모세의 장인이 속한 족속입니다. 그들은 시내산 동편에 살고 있는데, 아마도 그들 중 일부가 북쪽으로 올라와서 모압과 통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그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지금 죄로 인해 염병으로 죽어가고 있고, 이런 슬픔으로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족장이라는 자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람이 한 번 죄에 빠지면 좌우를 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무감각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무뎌집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어집니다.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멈춰야 할 때도 멈출 수 없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 수 없습니다.
비느하스가 이 일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따라 들어가 두 남여를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죄에 대한 분노가 비느하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민수기 2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건이 정리된 후 다시 한 번 인구조사를 합니다. 40년 전에 했던 조사를 다시 하는데, 어느 지파는 인구가 조금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든 지파도 있습니다. 일곱 지파가 늘어났고, 다섯 지파가 줄었습니다. 그런데 치명적으로 줄어든 지파가 있습니다. 그 지파가 바로 시므온 지파입니다.
시므온 지파가 40년 전 애굽에서 처음 나왔을 때는 59,300명이었는데, 40년이 거의 지난 지금 다시 조사한 바로는 22,200명이었습니다. 거의 3분의 1로 줄어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큰 재앙으로 인해 울고 있을 때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자기 형제의 장막으로 들어가던 사람이 바로 시므온 지파였습니다. 그런 것으로 보아 아마도 모압 여인들에게 유혹을 받아 죄를 지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므온 지파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들은 이 일로 거의 지파 전체가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이 일 이후로 스므온 지파는 거의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받을 때도 자기 땅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땅을 찾아갈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득이 유다 지파가 이미 확보해 놓은 땅을 얻었습니다. 자기 지파의 경계가 없습니다. 유다 지파의 보호를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지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죄에 대한 경각심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분노가 없습니다. 죄에 자꾸 빠져드는 자신을 용납하고 용서하라고만 합니다. 그리고 정말 결단하고 주님 앞에서 서려는 몸부림을 없어졌습니다.
본문에서 비느하스는 이 두 사람의 범죄의 모습을 보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따라 들어가 그 두 남녀을 죽입니다. 죄에 대한 분노가 비느하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이 마음이 필요합니다. 비느하스의 분노가 필요합니다. 죄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창세기 4장 7절에서 하나님은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의 문앞에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노리고 우리가 문을 열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성도는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로마서 6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마태복음 5장 29-3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오늘날 교회에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죄를 멀리하는 결단입니다. 죄와 단절되는 결단입니다. 11-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죄로 인해 혼탁해진 이스라엘 진영에 여호와의 열심으로 죄를 처단하는 것을 보시고는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와 그의 자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연약을 주겠노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비느하스는 아론의 장손자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은 당연한 일이 될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로 하여금 영원한 제사장 가문으로 세우신다는 약속을 확실하게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세우셨음을 믿습니다. 이미 31년 전에 샬롯츠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말씀을 공부하면서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런 결단으로 주님 앞에 다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평화의 언약
민 25:6-18
하나님의 진노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문 앞에 모여 회개의 눈물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죄악은 몇 사람의 음행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 일은 국가적인 사활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죄악을 차단시키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영적, 육적으로 병들게 될 것입니다. 단 한 번의 돌풍이 거대한 함선을 좌초시킬 수 있듯이 죄로 빠져들어 가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제재를 가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백성들의 두령들을 태양을 향하여 목매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비상 계엄령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 중에 간이 부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시므온 종족의 족장 가운데 한 사람인 시므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 시므리의 범죄(6절)
우리 번역 성경에는 없지만 원어성경을 보면 6절 초두에 “그런데, 보라(And behold)"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다음에 소개될 사건이 얼마나 크고 괴악한 것인가를 말해 줍니다. 지금 백성들이 얼마나 곤경을 겪고 있습니까? 백성의 두령들이 공개 처형되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염병으로 죽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건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막문에 모여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이 보는 앞에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자기 천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시므온 지파의 한 족장이었기에 백성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동료 족장들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염병으로 수많은 백성이 죽어 가고, 백성들은 회막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뻔뻔스럽게도 이방여인을 데리고 자기 침실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 여인이 누구였습니까? 이 여인은 미디안 종족의 두령이었던 수르의 딸 고스비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고스비’라는 이름의 뜻은 ‘속이는 자’입니다. 고스비의 아버지는 미디안 종족의 다섯 왕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왕의 딸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아마도 시므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고스비를 데리고 왔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미디안 왕의 사위가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당당하게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반역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경멸히 여기는 가증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족장은 백성의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의 지파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화인 맞은 양심의 소유자였습니다. 그의 행위가 그 지파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시므온 지파의 수가 1차 계수할 때 59,300명이었습니다(1:23). 그런데 26장에서 2차 인구조사를 하였을 때 22,000명으로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지파의 족장이 범죄하니 많은 백성들이 담대하게 따라서 같은 범죄를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그 많은 수가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제 2, 제 3의 시므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들은 어찌 살든 나만 편하게 잘 살겠다는 인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구현되든 말든 악에 편승해서 쾌락과 방종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도자의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지도자들을 넘어뜨리려고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2. 비느하스의 통분(7-15절)
이 일을 통분이 여기고 창을 잡고 일어선 자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였습니다. 엘르아살이 누구입니까? 아론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임을 당하였고 아론이 죽은 후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직을 승계 하였습니다. 비느하스는 아론의 손자였습니다. 그가 창을 가지고 그들의 뒤를 따라 장막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장막에 들어가 음행 하는 시므리와 고스비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시편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 106:28-31 /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29)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30)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31)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비느하스의 창은 죄 많은 쾌락의 중심을 꿰뚫었습니다. 비느하스의 행동이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켰습니까?
민 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행동을 기뻐하셨습니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시므리를 죽인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비느하스의 영적 분노는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한 것입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진노로 범죄자를 처벌한 것입니다. 그의 행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과 충성심에서 나온 의로운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노를 누그러뜨리시고 이스라엘에 임한 염병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비느하스의 행위를 칭찬하시고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민 25:12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민 25:13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질투와 분노의 감정은 증오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는 백성들이 하나님께만 헌신할 것을 요구하시는 열정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성취시키고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하기 위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질투를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비느하스의 질투는 개인적인 증오나 감정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질투였습니다. 하나님의 형벌을 대신 집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제사장의 대속적 직책을 수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행위를 높게 평가하시고 그에게 ‘평화의 언약’을 선포하셨습니다. 평화의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와 그 후손들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직분을 수행하게 되는 축복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비느하스의 열심 때문에 그와 그 후손들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비느하스의 조상이 누구입니까? 레위입니다. 그가 죽인 시므리의 조상은 시므온이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레아에게서 난 친 형제였습니다. 이들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아주 친밀하였습니다. 창세기 29장에 보면 야곱의 딸 디나 사건이 나옵니다. 이때 레위와 시므온이 합작하여 세겜 사람을 무참하게 죽이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일 때문에 두 지파는 하나님의 축복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저주받은 지파가 된 것입니다. 조상들의 저주를 돌려놓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비느하스였습니다. 그는 제사장적 열심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비느하스는 사람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와 그 후손에게 영영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은혜는 죄악을 도말 함으로써 주어진 것으로서 하나님과 인간간의 참된 평화는 죄의 청산으로 인해 성취될 수 있음을 강력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완벽한 평화를 성취하신 분이 계십니다. 자신을 대속제물로 친히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비느하스가 범죄자를 찔러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을 속죄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려 찔리고 죽임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속죄하셨습니다. 우리도 본질상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와 맺은 평화의 언약은 엘리 시대의 일시적인 단절을 제외하고는 신약 시대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초토화될 때까지 비느하스의 가문을 통해서 그 명맥을 유지해나갔습니다. 사실 대제사장의 직분이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직분으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명예스러운 직분입니다.
3. 미디안인을 박해하라(16-18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디안인을 박해하며 그들을 치라” 사실 상대국 왕의 가족을 살해하는 것은 곧 전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남자들을 적극적으로 미혹했던 미디안 여인들에 대한 징벌로써 그 나라를 초토화시킬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박해하며’라는 말은 원래 ‘꺾쇠로 죄다’, ‘괴롭히다’는 뜻으로 적군을 포위하여 서서히 멸망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치다’라는 말은 ‘도리깨로 무엇을 친다’는 뜻으로 ‘대학살’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미디안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파멸 의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모세가 이스라엘 지도자로서 받은 마지막 전투의 임무로서(31:2) 이 사명을 마치고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느보 산상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민 31:8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모세는 각 지파에서 일 천명씩 총 12,000명을 동원하여 미디안을 쳤습니다. 그때 모든 남자들을 죽였고 또 다섯 왕도 죽였습니다. 발람도 그때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모세가 미디안을 친 것은 바알 브올의 사건, 특히 고스비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이 전쟁을 치른 천부장, 백부장들에게 모세는 크게 노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인들을 살려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들 중 많은 여자가 행음함으로 이스라엘을 범죄케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남자와 동침한 자는 다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명을 앞장서 순종하였습니다(민 31:13-18).
사단은 이스라엘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욕의 시험에 약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성적인 문제로 이스라엘 백성을 올가미 씌었습니다. 사단이 노리는 여러분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성적인 시험을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장소를 피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곳을 떠난 것처럼 유혹의 장소를 피하는 것이 시험을 이기는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어쨌든 사단이 던지는 미끼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들에게 발람의 교훈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계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을 위한 열심히 사십시오. 그러면 저주가 떠나고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는 유혹하는 고스비는 지금도 곳곳에 있습니다. 그들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승리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