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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4일 묘시(卯時-오전 5시~7시),
황령산 봉수대(荒嶺山 烽燧臺)의 봉수군 배돌이(烽燧軍 裵突伊)는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에 달려와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慶尙左道水軍節度使 朴泓)에게 보고 했습니다.
"오늘 새벽 6시에 부산포 우암(釜山浦 牛岩)에 일본군이 상륙(上陸)하고
3개 부대(部隊)로 나뉘어 부산진(釜山鎭)으로 쳐들어갔습니다!
날이 밝을 무렵에 부산진을 에워싸고 싸우는데 포(砲) 쏘는 소리가 하늘을 흔드는 듯 하옵니다!"
이에 박홍은 배돌이의 보고와
길이 막혀 서평포(西平浦)와 다대포(多大浦)를 지원(支援)을 할 수 없다는 것과
조선의 대전략(大戰略)인 제승방략(制勝方略)에 따라 방비를 튼튼히하고자 한다는 것을 장계에 써서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에 보냈습니다.
1시각(2시간) 후,박홍은 부산진성(釜山鎭城)이 함락(陷落)당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부산진 북쪽 5리 지점의 당천(唐川)에 진(鎭)을 치고
일본군 선봉대(日本軍 先鋒隊)가 동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박홍은 이 정보를 장계로 써서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에 보냈고
경상우수영에 보낸 정보와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날 김해 포구에서 해안 고을들의 위장(衛將)들과
내륙(內陸)의 관리(官吏)들에게 공문(公文)을 보내어
군마(軍馬)를 정비(正備)하고 사변(事變)에 대비(對備)하고 있다는 소식과
경상좌수군도 역시 군사(軍士)와 병선(兵船)을 정비(正備)하여
정세(情勢)에 대비(對備)하다가 적을 무찌르고 사로잡을 것이라는
자신의 방책(防備)을 14일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에 장계로 작성하여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보냈습니다.
이날 진주성(晉州城)에 있던 경상감사 김수(慶尙監使 金睟)도
일본군 전함(日本軍 戰艦) 400여척이 부산을 침입했다는 보고(報告)를 받았습니다.
이보다 하루 전인 4월 13일 저녁무렵, 동래부사 천곡 송상현(東萊府使 泉谷 宋象賢)은
부산진(釜山鎭)에서 온 통인(通人-관의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을 통해
일본군의 침입(侵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장 동래성(東萊城)의 수비(守備)를 강화(强化)하고
양산(梁山),밀양(密陽),기장(機長),울산(蔚山),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 등(等)
동래 주변의 군현(郡縣)들에 지원요청(支援要請)을 하였습니다.
송상현의 요청에 먼저 울산군수 이언성(蔚山郡守 李彦誠)과 양산군수 조영규(梁山郡守 趙英珪)가
소속 고을의 군사들을 이끌고 왔으며
경상좌병사 이각(慶尙左兵使 李珏)도 보병(步兵) 400여명(혹은 수백명)을 이끌고
동래성에 들어왔습니다.
(임진유문壬辰遺聞에 의하면 이각이 동래성에 입성한 때는 4월 15일 아침 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양산군수 조영규는 송상현에게 고하여 양산현(梁山縣)에 돌아가
자신의 노모(老母)를 뵙고 울며 말하기를
`이때야말로 사사(私事)를 돌아볼 수 없나이다.'
라고 하며 작별하고
아들 조정노(趙廷老)에게 피난(避亂)하라고 한 뒤에 동래성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가 동래성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이 동래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조영규는 그 포위를 뚫고 동래성에 입성했다고 합니다.
송상현은 이언성을 좌위장(左衛將),조영규를 중위장(中衛將)에 삼고
주장(主將)엔 이각으로 삼았습니다.
이각은 당시 기대 받고 있던 장수로서 대포(大砲)를 쏠 때
10두(斗)되는 해마석(海磨石)을 포탄(砲彈)으로 사용하니
사람들은 그를 장재(將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도착하자 이각이 송상현에게 말했습니다.
`부사는 이 성을 지키시오.
나는 절제장(節制將)이니 본영(本營-울산 좌병영)을 지켜야지 여기에 있을 수 없소.'
그러고는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성을 빠져나가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송상현이 말했습니다.
`고립(孤立)된 이 성이 함락되려고 하는데 주장이 구원해주려고 왔다가 어찌 버리고 떠난단 말이오?'
송상현은 이각이 동래성에 남아서 성을 같이 지켜주기를 원했지만
이각은 동래성 북쪽 소산역(蘇山驛)에 나가서 지원(支援)해주겠다고 말하고는
아병(牙兵) 20여명만 동래성에 남긴채 북문으로 빠져나갔습니다.
(혹은 허약한 군사 30여명만 남기고 빠져나갔다고도 합니다.)
4월 15일 아침,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동래성 남문 농주산 취병장(弄珠山 聚兵場)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동래성을 공격하는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 군뿐만 아니라
일본 수군(日本水軍)과 후속부대(後續部隊)도 포함(包含)되어
군세(軍勢)가 약 300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제외하고 수군이나 후속부대는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어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탈(掠奪)과 도둑질을 통해 전리품(戰利品)을 확보하는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동래성 공격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만 맡고
수군과 후속부대는 동래성 주변에서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일본군이 동래성에 도착하기 전에
동래부사 송상현은 조방장 홍윤관(助防將 洪允寬)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살피게 했는데
홍윤관이 동래성에서 남쪽으로 10리 정도 가다가 일본군을 발견(發見)하고
성으로 되돌아와서 보고(報告) 하였습니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사태가 위급(危急)하오니 일단 소산(蘇山)에 물러나
험고(險高)한 지형(地型)에 의지(依支)하여 적을 막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송상현이 대답(對答)했습니다.
"성주(城主)가 자기 성을 지키지 않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임진유문에 의하면 이각이 홍윤관의 보고를 듣고
동래성에서 나와 소산역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말하길
"나라에서 나에게 이 성을 맡겼으니 내가 살고 성이 함락될 수는 없다.
나는 성과 운명을 같이할 것이다."
라고 하니 군사들도 죽음으로서 성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 공격하기에 앞서 군졸들을 동래성에 보냈습니다.
일본군 병사들은 동래성 남문에 와서 이런 팻말을 보였습니다.
[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전즉전의 불전즉가아도
싸울테면 싸우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
군관 송봉수(宋鳳壽)가 그것을 보고 송상현에게 보고 하니
송상현은 이런 팻말을 써서 성 위에서 떨어뜨리게 하였습니다.
[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긴 어렵다.]
곧 온갖 귀신 형상으로 치장(治粧)을 한 일본군이 기치창검(旗幟槍劍)을 세우고
성을 몇 겹으로 포위(包圍)하였습니다.
그들은 붉은 옷에 푸른 두건을 쓰고 허수아비를 세우고 온갖 요란(搖亂)을 떨며
성 안 사람들을 공포(恐怖)에 떨게 하고 수많은 사다리를 동원하여 맹렬하게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때가 4월 14일 저녁이라는 기록과 4월 15일 오전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송상현은 정발(鄭撥)처럼 앞장서서 지휘(指揮)하여 일본군의 공세(攻勢)에 맞섰습니다.
동래성의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사격(鳥銃射擊)을 무력화(無力化)하는 방법으로
나무판자를 동원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등 뒤쪽 허리띠에 꽃는 깃발을 대나무에 달고
사다리를 탈 때에 한 손으로 깃발 달린 대나무를 잡고
대나무의 깃발을 흔들어 조선군의 시야(視野)를 가리게 하여
화살의 겨냥을 빗나가게 하며 성벽(城壁) 위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2시간 동안 일본군의 공격(攻擊)을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일본군은 성을 좀 더 쉽게 함락할 방법은 생각해냈습니다.
그들은 성의 북동쪽 인생문(人生門)의 방비(防備)가 상대적(相對的)으로 허술한 것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전력(戰力)을 집중(集中)하여 마침내 성 안으로 진입(進入)하였습니다.
동래성은 성을 지키는 조선군(朝鮮軍)과 동래부 백성(東萊府 百姓)들과
성 안으로 쳐들어온 수만(數萬)의 일본군으로 메워졌습니다.
성 안에 진입한 일본군은 대검(大劍)으로 저항(抵抗)하는 조선인들을 베고 쓰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조선군과 조선 백성들은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포기(抛棄)하지 않았습니다.
무기가 없는 백성들은 맨 손으로 적과 싸우거나 막대기나 농기구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동래부민 김상(東萊釜民 金祥)은 이촌녀(二寸女-이름 없는 두 여인,
혹은 김상의 아내와 딸이라고도 합니다.)와 함께 기와집 옥상에 올라가서 일본군에게 저항하니
두 여인이 기와를 깨뜨리고 김상은 그 기와를 일본군에게 던져 쳐죽였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김상의 어머니가 김상이 싸우던 곳에 가니
김상과 두 여인은 일본군 몇 명과 함께 죽어 있었습니다.
한편 전황(戰況)이 불리(不利)해지자 송상현은 조복(弔服)으로 갈아입고
남문성루(南門城樓)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종자(從者) 신여로(申汝櫓)를 불러 말하길
'나는 이 곳을 지켜야 할 신하이니 의리상 마땅히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지 못할 것이다.
너는 노모(老母)가 있으니 헛되이 죽어서는 안된다. 빨리 떠나라.」라고 하였으나
신여로는 끝까지 송상현을 모시다가 죽었습니다.
일본군이 성을 넘어 들어와서 성내를 유린(蹂躪)하자 송상현은 조용히 동래성 안의 집에 연락하여
조복(朝服-혹은 단령을 입었다고 합니다.)을 가져와 갑옷 위에 입고 투구를 벗고 사모(紗帽)를 쓴 뒤
호상(胡床)에 기대어 손을 모으고 단정히 앉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송흥교에게 남기는 시를 한 수 썼습니다.
孤城月暈-고성월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大鎭不救-대진불구(列陣高沈-열진고침:이웃 진은 고요히 잠들어)
큰 진을 구할 방법이 없어
君臣義重 -군신의중
군신간의 의를 중히 여기고
父子恩輕-부자은경
부모의 자식에 대한 은혜를 가벼이 여겼나이다.
(이 시를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고 북향사배를 하니 이때 양산 군수 조영규가 함께 북향사배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臣)은 살아서 적을 치지 못하였으니
죽어서 마땅히 이 성의 귀신(鬼神)이 되어 적(敵)을 죽이겠나이다!"
그리고 장렬히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 했습니다.
이때 향리(鄕吏) 대송백(大宋伯),소송백(小宋伯)과
관노(官奴) 철수(鐵壽),매동(邁同),
군관(軍官) 송봉수(宋鳳壽)와 김희수(金希壽)을 포함한 관군(官軍) 4~5명이
송상현의 좌우에 서있어서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맞서 싸우다가 모두 전사 했습니다.
조방장 홍윤관이 성을 빠져나가 소산으로 가서 훗날을 도모하라고 말했으나 송상현은 거절하였고
잠시 뒤에 일본군 장수 노리마스(平調益 -평조익,타이라 시게마스)가 그를 발견(發見)했습니다.
노리마스는 예전에 조선에 사신단(使臣團)의 일원(一員)으로 왔을 때에
송상현에게서 좋은 접대(接待)를 받은 적이 있어서 개인적(個人的)으로 그를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피하라는 제안(提案-혹은 숨어있으라는 제안)을 했지만 송상현은 거절(拒絶)했습니다.
노리마스는 송상현이 자신의 말을 이해(理解)하지 못했다고 여겨 다시 피하라는 제안했으나
송상현은 다시 거절했습니다.
잠시 후 일본군이 몰려와서 송상현을 생포(生捕)하려 했으나
이번에도 송상현은 체포(體捕)되는 것을 거절하고
가죽신으로 일본군 병사를 차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웃나라의 도의(道義)가 대체 이러하느냐!
우리가 그대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었거늘 그대들이 이같이 하는 것이
과연 도리(道理)에 합당(合當)한 것이냐!'
결국 송상현은 일본군에게 참수(斬首)되었지만
일본군은 송상현의 충절(忠節)에 경의(敬意)를 표했습니다.
일본군은 그의 시체를 동래성 동문 밖에 묻어주고
조선충신송공상현지묘(朝鮮忠臣宋公象賢之墓)라는 묘명(墓名)을 지었습니다.
(난중잡록에 의하면 송상현은 달려드는 일본군 1명을 칼로 베고 일본군 2명을 활로 쏴 죽인 후,
장렬히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은 죽인 일본군을 죽였다고 합니다.)
송상현의 첩(妾) 2명이 이때 송상현과 운명(運命)을 같이하기로 했는데
한명은 함흥기생 출신(咸興妓生 出身)의 김섬(金蟾-금섬이라고도 합니다.)으로서
전투 중에 송상현이 김섬에게 관복(官服)을 가져오라 하여
김섬이 여종 금춘(今春)과 함께 관복을 가지고 찾아가니
송상현은 이미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뒤였고, 일본군은 그녀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3일 동안 계속 일본군에게 욕을 하며 저항하니
마침내 일본군은 그녀를 죽여버렸습니다.
또 한명은 이양녀(李良女-이소사라고도 합니다.)로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동래성에서 피난하고 있었으나
다시 돌아와 송상현과 함께 있겠다고 했는데
일본군은 그녀의 당당함에 감동(感動)하여
죽이거나 해(害)를 가하지 않고 일본에 보냈다가 2년뒤에 조선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일본으로 끌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앞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서도 정조를 지켰다고 합니다.)
양산군수 조영규의 아들 조정노는 아버지가 동래성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흙집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굶어죽었습니다.
울산군수 이언함은 생포(生捕-혹은 군사들을 데리고 항복했다고도 합니다.)되었는데
고니시는 그를 풀어주고 서신을 주며 말하길
`이덕형 공(李德馨 公)을 내려보내게 하여 우리와 협상(協商)하게 하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언함은 석방된 후 자신이 일본군에게 붙잡혔던 사실을 숨기기 위해 편지를 없애버렸습니다.
동래교수 노개방(東萊敎授 盧盖邦)은 동래 향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밀양에 계시는 노모(老母)를 뵈러 어머니를 뵈러 밀양에 가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 동래성이 포위(包圍)되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동래로 돌아와 향교(鄕校)로 갔으나,
이미 선성(先聖)의 위패(位牌)를 동래성중(東萊城中)의 정원루(靖遠樓)로 옮겼으므로 통곡(慟哭)하고
동래성에 찾아가 성문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성문(城門)이 열리자 노개방은 곧장 위패 앞으로 나아가서 예(禮)를 올리고
위패를 모셔서 한 발짝도 옮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투가 벌어져 일본군이 성 안으로 쳐들어오니
그는 마침내 정원루(靖遠樓)에서 유생(儒生)문덕겸(文德謙),양조한(梁潮漢)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노개방의 처 이씨(李氏)도 또한 밀양(密陽)에서 일본군을 만나자
그의 과거합격증(科擧合格證)을 안고 벼랑에서 투신자살(投身自殺)을 하였습니다.
4월 15일 동래성 전투에서 죽은 조선인들은
백성과 군졸들을 합(合)하여 3000여명에 포로는 500여명 이었다고 합니다.
(혹은 전사자 5000여명 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부산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함락할 때까지 일본군의 피해(被害)는
전사자(戰死者)가 100여명에 가깝고 부상자(負傷者)가 400여명 정도 였다고 합니다.
동래성을 차지한 일본군은 창고(倉庫) 16군데를 점령(占領)하였는데
창고마다 천장(天障)에 다다를 만큼 물자(物資)가 가득 있었고
쌀,보리,말 먹이,활,화살,대포 6문,화전(火箭),소와 말 등을 많아 획득하였습니다.
여기서 일본군이 얻은 식량(食糧)은 일본군 선단을 통해 일본으로 보내졌습니다.
전투(戰鬪)가 끝난 뒤, 일본군은 경내(境內-동래성 안을 가리킴)에 모여 있다가
포로(捕虜)가 된 조선의 여인들을 문루(門樓) 위에 오르게 하고
기생(妓生)과 악공(樂工)을 불러 풍악(諷樂)을 울리고 술잔치를 열어 승리(勝利)를 자축(自祝)하고
2일간 전투의 노고(勞苦)를 위로(慰勞)하였습니다.
동래성 함락후(東萊城 陷落後) 2일간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동래성에 머무르며
부상자들을 치료(治療)하고
일본군 몇 개 부대(部隊)는 양산(梁山),기장(機長) 방면(方面)으로 진격(進擊) 하였습니다.
동래성전투 전략도(東萊城戰鬪戰略圖)
동래성전투 상황도(東萊城戰鬪 狀況圖)
1592년 4월 13일~15일 개전초기상황도(開戰初期狀況圖)
참고 자료: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영남의 의병항쟁
재조번방지
난중잡록
징비록
이순신의 두 얼굴
이충무공전서
정만록
임진전란사
KBS-역사추적(조선판 킬링필드-동래성엔 무슨 일이 있었나?)
임진왜란은 우리가 이긴 전쟁 이었다.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프로이스의 일본사)
난중일기
파워꼬레아-고립화전략에 궤멸된 동래성(권순삼-산하)
충렬사 홈페이지
기록화 자료 제공:KBS-역사추적
지도 제공:파워꼬레아 KDN 자주국방네트워크 권순삼(산하)
첫댓글 비장한 최후군요. 이런 용감한 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었겠죠.
제승방략이라면 군을 대규모로 모아 격파한다 아닌가욤 이로운점은 대규모 적을상대할때 대응할수있으나 한번깨지면 파죽지세로밀린다고 배운기억이
어찌됬든 임진왜란 공부하면서 송상현이 제일 멋있었음.
장렬히 전사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