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한경화 소설
저 자 : 한경화
쪽 수 : 224쪽
판 형 : 140*205
ISBN : 978-89-6545-745-9 03810
가 격 : 15,000원
발행일 : 2021년 9월 6일
분 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예리한 시선으로 보통의 사람들을 조망하는
한경화의 첫 번째 단편집
2017년 단편소설 「종점」으로 등단한 한경화 소설가의 첫 번째 단편집. 한경화의 시선은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을 향한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상실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은 자신이 밟고 있는 땅, 혹은 믿음으로부터 밀려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한경화는 마치 일상의 스펙트럼에서 에리한 면도칼로 단면을 잘라낸 자리처럼 ‘평범하지만’, 그렇다고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동반하는 풍경을 제시하며 서사의 첫 붓을 긋는다. _해설 중에서
치열한 현실을 담담하게 그러나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작가는 ‘평범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통해 삶의 가치에 대해 되묻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을 더듬고 자신의 현실을 파헤치며 그 물음에 답하려 한다.
▶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이상을 달리다
「봄비」는 사회복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상우의 하루를 담고 있다.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는 새벽 상우는 친구 창수의 전화에 잠에서 깬다.
새벽에 눈을 뜬 것은 창수 전화 때문이었다. 상우가 전화를 받았을 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뒤척이는 희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리자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오후에 희영과 창수를 만나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였다. (p.41)
상우는 창수의 전화를 뒤로 하고 상담자들의 집을 방문할 채비를 한다. 오늘은 알코올 중독자 남성의 집과 효부라 이름난 며느리의 집을 방문할 예정이다. 하늘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 상우의 오늘 하루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비린내」의 ‘나’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다. 화가를 꿈꾸었으나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꿈을 유예한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항운노조의 서기로 일한다. 관행처럼 이리저리 난무하는 비리에 눈 감고 몰래 가담하는 ‘나’는 물고기들이 낭자한 항구에서 일하는 자신의 몸에서 이따금 비린내가 풍긴다고 느낀다. 점점 뒤숭숭해지는 사무실의 분위기를 심상치 않게 여기던 어느 날, 경찰이 지부장실로 들이닥친다.
▶ 너에게서 ‘나’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
「종점」의 ‘나’는 실연의 아픔을 지닌 채 종점에 미용실을 차리며 거처를 옮긴다. 그곳에서 만나게 된 옆집의 예슬은 임신 중이다. 예슬은 가난한 뮤지션과의 결혼과 출산이 자신을 계속 종점에 묶어 놓는 선택이 될까 봐 쉽사리 출산을 결심하지 못한다. 밝고 친화력이 있는 예슬은 ‘나’의 미용실로 찾아와 일을 돕고, 불러오는 예슬의 배를 보며 ‘나’는 종점에 오기 전의 일들을 회상한다.
「달이 머무는 곳」의 ‘나’는 조리 고등학교 교사이다. ‘나’는 반 학생인 ‘현’이 남자친구 ‘규’와의 연애에 빠져 수업도 빼먹고 자신에게 불손하게 구는 것이 걱정스럽고 못마땅하다. 못 견디게 아픈 치통 때문에 학교 근처 약국을 방문한 ‘나’는 약국에서 아이들이 피임기구 사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약사 ‘란’을 통해 ‘현’이 약국에서 임신진단 테스트기를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 불온한 의뢰와 ‘나’의 기억
한경화의 작품들은 잃어버린 기억들에서 삶의 소중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 구질구질한 삶에서도 우리에게 속삭이면서 무엇이 참된 윤리이며, 또한 무엇이 우리 삶을 좀먹게 하는 달콤한 유혹인지 가려내게끔 부추긴다. _해설 중에서
「가려진 시간」의 ‘나’는 에이전트의 의뢰를 받고 약속 장소로 나간다. 평소와 달리 남성이 아닌 중년 여성의 수상한 의뢰. 하지만 단위가 다른 액수에 ‘나’는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부유하고 우아함이 넘치는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남편을 유혹해 달라 말하고,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제공하는 기회를 이용해 부부의 침실에 발을 들인다.
「기찻길」의 ‘나’는 한 보험회사의 센터장을 맡고 있다. 언제나 최하위를 기록하는 그의 센터를 지켜보던 지점장은 최후의 수단으로 그에게 배 사장을 소개시켜주고, 지점장의 채근에 ‘나’는 배 사장과의 계약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지점장과 함께 약속 장소로 향하는 ‘나’. 옛 송정역 근처의 밥집에 도착한 ‘나’는 자신이 예전에 살던 송정역 기찻길에 대한 추억에 잠기고, 그곳에서 기찻길의 처우에 대해 논의하고 시위하는 시민들을 만나게 된다.
한참이나 그렇게 파도의 하얀 포말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깨달았다. 내 속에 실려온 불덩어리. 그건 다름 아니라 어떤 부끄러움이라는 걸. (p.164)
한경화는 섬세한 문장으로 암시적 분위기와 배경을 축조한다. 그녀가 표현하는 세계는 인물들에게 유쾌한 일들로 넘쳐나는 행복한 세계는 아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삶의 가치를 되묻는 인물들을 지켜보는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이 여실히 담겨 있다.
키워드
#단편소설 #일상 #한국문학 #소설 #보통사람들 #조망 #현실 #암시 #이상
첫 문장
이삿짐이라고 해봐야 트렁크 하나가 전부였다.
책속으로 / 밑줄긋기
p.37 순간 나는 그 옷을 향해 돌진했다. 최대한 빨리 내 손아귀에 옷을 넣어야만 할 것 같은 강한 의지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그 옷을 낚아채듯 재빨리 움켜잡는 손이 있었다. 굵은 웨이브의 그 여자. 산부인과 여의사였다. 나팔관이 막혀 정작 자기 아이는 갖지 못한다는 그 여자. 그녀는 그 연한 노란 아이 옷 하나를 재빨리 자신의 가방 속에 쑤셔 넣었다. 나는 그녀가 훔치는 것을 누가 보지나 않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박쥐 날개처럼 바바리 자락을 활짝 펼쳐 그녀를 온몸으로 감쌌다.
p.41 새벽에 눈을 뜬 것은 창수 전화 때문이었다. 상우가 전화를 받았을 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뒤척이는 희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리자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오후에 희영과 창수를 만나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였다.
p.70 그 그림들을 내가 그렸다는 걸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본의 아니게 지부장실의 그림 담당이었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것은 하나의 불문율로 굳어졌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크기에 따라 내가 필요한 만큼의 영수증을 만들어 붙이면 되었다.
p.118 가끔 그녀의 주치의가 다녀갔다. 그럴 때면 그녀는 키홀더 프라다 키링 마리를 내 방 화장대 위에 조용히 올려두고 밖으로 나갔다. 무언의 약속처럼 그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키링 마리의 몸통을 있는 힘껏 움켜쥐고 차고로 가서 그녀의 까만 자동차를 조심스럽게 몰고 해안선을 달렸다. 집을 나선 지 두어 시간 후면 의사는 돌아갔다. 그녀의 호흡이 안정되고 혈색이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두어 시간이면 족했다. 그러면 나는 다시 그녀의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p.149 “시끄럽고 요란하게 돌아가던 세상이 아버지의 수신호에 일제히 조용해졌다. 달리던 버스도 택시도, 심지어는 자전거나 걷던 사람들까지도. 멀리서 희미하게 기차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으면 삽시간에 기차는 쌩하고 건널목을 통과해버렸다. 그러면 아버지는 파란 깃발을 흔들며 차단기를 올려줬다. 그 짧은 순간의 고요와 적막이 깨어졌다. 지켜보는 나는 숨조차 맘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수신호에 세상이 요란해질 때 나는 안도하며 휴 하고 숨을 뱉어냈다.
p.149 현의 배는 날마다 그 모양을 달리했다. 달처럼 조금씩 차오를 때는 그 변화를 알아채기 힘들었지만 한번 차오른 배는 터질 듯 부풀어 아슬했다. 거실 창에 커다란 겨울 달이 떠 있다. 달은 살아 있는 생물이다. 그 달이 창을 넘어 내 방 전체를 가득 채웠다. 이상하게 그 달이 자꾸만 내 배 속으로 차오르는 것 같다.
저자
한경화
2017년 한국소설에 단편소설 「종점」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동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동서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종점
봄비
비린내
가려진 시간
기찻길
달이 머무는 곳
해설: 중력의 한통속에서 피워 올리는 꿈-정훈 문학평론가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