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요, ‘마음’이 그대로 ‘법’이다」 하는 말도 너무 많이 들어서, 자칫 또 면역이 생길까 걱정되니, 이제 이 법회의 도미를 장식하는 의미에서 이 말의 ‘참뜻’을 결단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다」라는 말에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까닭은 그 ‘부처’라는 ‘이름’에서 느끼는 <거룩하고 신령스럽다>는 선입견과, ‘마음’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평상해서 조금도 별날 게 없다>는 생각 사이에 가로놓인 괴리감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괴리감’의 ‘감’(感)은 ‘느낌’이 아닙니까? 「온갖 ‘느낌’은 ‘마음’이 아니라, ‘마음의 거울’에 나타난 업식(業識)의 그림자다」라는 말도 넘칠 만큼 많이 들은 말입니다. 이제 이 말도 요정(了定)을 내야 할 땝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 ‘마음’은 ‘거울’에 비유하고, ‘느낌’은 거기 비친 ‘그림자’로 보세요. 분명히 이 ‘거울’ 속엔 본래 아무 것도 없었고, 물론 그건 작용하는 일도 없어요. ‘작용이 없다’곤 하지만 ‘거울’이 어디 잠시라도 비추는 일을 멈추는 일이 있습니까? ― 이 대목에서 그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의 가장 비밀한 이치를 확실히 깨달아 마쳐야 합니다. 이 거울의 ‘비추는 성품’은 종일 온갖 것을 다 비추면서도 그 자체는 끝내 물들거나 깨끗하여지는 일도 없고, 늘고 줄고 하는 일도 물론 없구요. 비록 인연을 따르면서 온갖 것을 비추어 내긴 하지만, 그 ‘비추는 성품’이야 어디 털끝만큼이라도 움직이고 변하는 일이 있습니까?
이와 같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변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참되다’고 하며, 거울의 그림자처럼 ‘인연’ 따라 순간순간 변하는 것을 ‘참되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이 ‘거울의 비추는 성품’에 비유한 게 바로 우리의 ‘본래 마음’이요, ‘성품’이며, 이것이 곧 ‘부처’인 겁니다. 이 ‘본래 마음’이 바로 ‘본래 몸’이요, 이 자리엔 이미 ‘마음’이니, ‘몸’이니 하는 구분도 없어요. 정한 성품도 없고, 정한 모습도 없고, 물론 ‘이름’도 없는, 오직 순일한 허공성일 뿐인데, 이 가운데서 다만 세간 법을 따라서 비슷한 ‘이름’을 빌려서 쓰고 있는 것뿐이니, 그 ‘이름’에 떨어져선 안 됩니다.
여러분이 꿈을 꿀 때, 그 꿈을 엮어내는 건 분명히 여러분의 이 ‘본래 몸’이 아니겠어요? 이 ‘본래 몸’을 여의고는 티끌만한 한 법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 여러분이 보고 듣고 분별하고 운동하고 하는 것이 모두 여러분의 ‘본래 몸’과 결코 다른 것일 수 없다면, ― 비록 그 ‘본래 몸’이라는 것을 딱히 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면 어떻게 꿈이 꾸어지겠어요? 마치 ‘눈’을 가지고 이 ‘눈’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이 ‘눈’이 아니면 어떻게 사물을 이렇게 환히 볼 수 있겠어요? 따라서 ‘보이는 모든 사물’은 바로 이 ‘눈의 보는 성품’이 그와 같이 ‘사물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 밖에 또 무엇이 있겠어요? 그래서 「‘보는 자’가 바로 ‘보이는 것’이다」라는 말에서 비롯해서, 「‘마음’과 ‘경계’는 둘이 아니다」, 「오직 ‘마음뿐’(唯心)이요, ‘마음’ 밖에는 한 법도 없다」는 말까지 있게 된 것입니다. ― 그렇다면 말하고 분별하고 왔다 갔다 하는 이 ‘몸’이 그대로 여러분의 ‘본래 몸’이 틀림이 없으며, 이것이 ‘근본 법신’이요, ‘근본 마음’인 겁니다.
‘거울’ 속엔 본래 한 물건도 없지만, 능히 온갖 것을 비추어 내듯이, 우리의 ‘마음’ 속에도 본래 한 법도 없지만, 인연을 따르면서 온갖 법을 능히 비추어 내는, 이것이 바로 ‘작용 없는 작용’의 비밀한 뜻입니다. 따라서 ‘거울’ 속의 그림자가 실다운 게 아니듯이, ‘마음’ 가운데 나타난 모든 법은 어느 것 하나 실다운 게 없는 겁니다. 그것이 ‘중생’이건 ‘부처’건, 또 ‘생사’건 ‘열반’이건, 모두가 ‘빈 이름’뿐이요, 그 모든 것을 감응(感應)으로 나툰(顯) ‘참 부처’야 어찌 생멸하고 왕래하고 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진정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래불거(不來不去)하면서, 하늘과 땅을 다해 이 모두가 오직 꼼짝도 하지 않는 ‘참 부처’의 천백억 분신인 겁니다.
세존이 어느 날 ‘빛을 따르는 마니주’(隨色摩尼珠)를 오방천왕(五方天王)들에게 보이고 묻기를, ???
『이 구슬이 무슨 빛깔이냐?』 했더니, 오방천왕들이 제각기 「갖가지의 다른 빛깔로 보인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세존께서 그 구슬을 소매 속에 집어넣고, 이번에는 다시 <손을 흔들면서> 말하기를, ???
『‘이 구슬’은 무슨 빛깔이냐?』 했어요. 그랬더니 오방천왕들이 대답하기를, ???
『부처님 수중에는 지금 구슬이 없거늘 어디에 빛깔이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이에 세존께서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
『그대들은 어찌하여 그다지도 미혹과 뒤바뀜이 심한가? 내가 세간의 구슬을 보여줄 때에는 문득 저마다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희고 검음’(靑黃赤白黑) 등의 빛깔이 있다고 우기더니, 막상 내가 ‘참된 구슬’을 보여 주었더니 전혀 알지 못하는구나.』 했습니다. 이 말 끝에 오방천왕들이 모두 ‘도’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모든 사물이 다 이 ‘참된 구슬’이 비추어낸 그림자인 겁니다. 당장 눈앞에 아무리 많은 금은보화(金銀寶貨)가 쌓였고, 빼어난 인걸(人傑)들이 기라성같이 늘어섰다 하더라도, 이것들이 모두 눈을 뜨면 보이고,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이렇게 눈을 뜨면 보이고,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 즉 인연 따라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이 세상의 온갖 법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몽땅 다 이 ‘참된 구슬’에 의해서 비추어진 그림자라는 걸 잊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다 중생의 망상(妄想)으로 난 것이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능히 나투는 여러분의 ‘참 성품’이야 눈을 뜨건 감건, 또 보건 보지 않건, 어찌 변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달마 혈맥론(達磨血脈論)에서 조사(祖師)가 혜가(慧可)에게 말합니다.
『이 ‘마음’이 끝없는 예부터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전혀 나고 죽은 적이 없는지라,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남자와 여자의 모습도 없으며, 중과 속인, 늙은이와 젊은이의 모습도 없으며, 성인도 없고 범부도 없으며,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증득할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으며, 인(因)도 없고 과(果)도 없으며, 힘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도 같아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느니라.
산이나 강이나 석벽(石壁)이라도 장애하지 못하고, 출입과 왕래에 자재하고 신통하니라. ‘오온의 산’(五蘊山)을 능히 벗어나고, ‘생사의 바다’(生死海)를 능히 건너리니, 온갖 업(業)이 이 ‘법신’(法身)을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이 ‘마음’은 미묘하여 보기 어려우니라. 이 ‘마음’은 물질의 모습과는 같지 않나니, 이 ‘마음’이 곧 ‘부처’니라. 사람들은 모두가 이 ‘마음’을 보고자 하거니와, 이 밝은 광명 가운데서 손을 흔들고 발을 움직이는 일이 항하의 모래와도 같은데, 물어보면 전혀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허수아비 같나니, 이 모두가 ‘자기의 수용’(自己受用, 自己活動)이거늘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이 ‘마음의 궁량’(心量)이 광대하여 응용이 무궁하니라. 곧 눈에 응하여는 빛을 보고, 귀에 응하여는 소리를 듣고, 코에 응하여는 냄새를 맡고, 혀에 응하여는 맛을 알며, 나아가서는 온갖 활동이 모두가 ‘자기 마음’이며, 일체시 (一切時) 가운데, <말 길이 끊어지고, 마음으로 헤아려 따질 곳이 없어졌으니>(言語道斷 心行處滅), 이것이 곧 ‘자기의 마음’이니라.
뒤바뀐 중생이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하여 구하되, 종일토록 설치면서 ‘부처를 생각하고’(念佛), ‘부처에게 예배하나니’(禮佛), ‘부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결코 이런 소견을 짓지 말지니라. 다만 ‘자기의 마음’을 알기만 하면 마음 밖에 딴 부처가 없느니라. ‘자기 마음’이 ‘부처’인지라, 결코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을 하지 말지니라.
만약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홀연히 나타나거든 절대로 예경(禮敬)하지 말라. 나의 ‘마음’이 공적(空寂)하여 본래 이런 모습이 없나니, 만약 형상을 취하면 곧 마(魔)에 포섭되어서 모두가 삿된 도(邪道)에 떨어지느니라. 만약 허깨비가 ‘마음’에서 일어난 줄 안다면 결코 예경할 필요가 없나니, 절을 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절을 하지 않느니라. 예경하면 곧 마에 포섭되리니, 학인(學人)이 행여 알지 못할까 걱정되어서 이렇게 밝혀두노라.
모든 ‘부처’의 ‘본래 성품’에는 도무지 이런 모습이 없나니, 반드시 명심할지어다. 만약 기이한 경계가 나타나거든 결코 채근하지도 말고, 또한 두려워하지도 말며, 의혹을 내지도 말라. 내 마음이 본래 청정하거늘 어디에 이런 모습이 있으리요? 내지 천룡(天龍), 야차(夜叉), 귀신(鬼神), 제석(帝釋), 범왕(梵王) 등에게도 공경할 생각을 내지 말며, 두려워하지도 말지니라.
내 ‘마음’이 본래 공적한지라, 모든 모습이 다 ‘망령된 모습’(妄相)이니, 다만 ‘모습’(相; 마음에 像과 想을 이끈다)을 취하지만 말라. 만약 ‘부처’라는 견해나, ‘법’이라는 견해를 일으키거나, 또는 ‘부처’나 ‘보살’의 모습에 대하여 공경할 생각을 낸다면 이것은 스스로가 중생 축에 떨어지는 것이니라. 만약 참되게 알고자 한다면 다만 온갖 형상에 집착하지 않기만 하면 되나니, 다시 딴 말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야흐로 선불장(選佛場)의 마지막 낙점(落點)이 떨어지려는 순간입니다. 이 말 끝에 티끌 하나 남김 없이 홀연히 뛰쳐나면 당장에 훤칠한 ‘부처’요, 만약 그렇지 못하면 여전히 문 밖에서 서성이는 가엾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요는 우리 범부들의 마음 밑바닥에 짙게 깔려 있는 범정(凡情)이 늘 발목을 잡고 놓아 주지 않는 겁니다. 실로 오랜 세월 동안 오직 ‘순히 따르는 일’(隨順)과 겸양, 공경 등을 으뜸가는 덕목으로 알고, 그렇게 철저히 길들여진 이 마음이 그 모든 걸 하루아침에 훌훌 떨쳐버리는 것을 몹시 망설여 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일이 잘못돼서 상놈 신세로 오랜 세월을 보냈던 양반이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본래 양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그 동안 몸에 배인 상놈의 습기가 좀처럼 빠지지 않아서 양반님들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는 형국과 흡사합니다. 결국 알고 보면, 여기서도 역시 <공경해야 되는가, 하지 않아야 되는가?> 하는 ‘두 법’이 대두되었기 때문에 어찌 할 바를 몰라서 망설이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나 ‘일승의 최상승 법문’은 마음 밖에 털끝만한 한 법도 없다는 걸 분명히 알지만, 다시 말해서 공경해야 할 만한 대상이 도무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그러나 현재에 행해지고 있는 어떤 한 법도 허물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분명히 아는, 그런 법문(法門)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예경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데 대한 해답을 주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거북 털’을 빗어야 하는가, 빗을 필요가 없는가?」 하는 따위의 논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가장 속(俗)된 것이 가장 고귀한 것과 더불어 가지런한, 그래서 티끌 하나 빠뜨림 없이 모든 걸 고스란히 껴잡아 굴리면서도 전혀 껄끄러움이 없는, 그런 솜씨라야 비로소 조금은 비슷해졌다고 할 만하겠지요.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섞였느니라」 하던 문수사리(文殊舍利)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왜 완전무결함을 기하지 않고 늘 어정쩡하게 넘어가느냐고 묻고 싶겠죠? 그러나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취하는 순간, ‘본분’(本分)을 저버리고 둘째 자리에 떨어지게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항상 반쪽이면서 언제나 꽉 차 있는 게 바로 달인(達人)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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