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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인구 조사령
민 26:1-4
1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
3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그들에게 전하여 이르되
4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나온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이십 세 이상 된 자를 계수하라 하니라
민 26:1-4 / [두번째 인구 조사] 전염병 사건이 지난 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 제사장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이르셨다. 2) `이스라엘 공동체 식구들 가운데에서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20세 이상된 남자만 각 집안별로 헤아려 보아라.' 3-4) 모세와 엘르아살 제사장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20세 이상 되는 남자를 모두 불러 모았다. 이들이 모인 곳은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가에 있는 모압 평원이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모세와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두 번째 인구 조사를 시행하도록 명하십니다.
인구 조사를 명하신 하나님(1-2)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에게 1차 인구조사를 명하신적이 있습니다(1-4장). 이때는 광야를 원활하게 행군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의 반역사건으로 40여 년간 광야에서 유리하는 징벌을 받아 가나안 정복 계획이 지연되었습니다. 결국 출애굽 1세대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본 단락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포함하여 광야 2세대들이 다시 가나안 정복을 위한 2차 인구조사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 조사에서도 1차 때와 마찬가지로 20세 이상의 남자만 계수하였고 레위인은 제외되었습니다. 군대의 조직을 위한 인구조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 2차 인구 조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각 지파의 인구수에 따라 적절하게 땅을 분배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성격도 있습니다(52-56). 그리고 하나님께서 2차 인구 조사를 염병 사건 이후에 주신 이유는 첫째, 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가나안 정복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 둘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언약의 땅을 정복할 수 있는 자격은 죄와 단절된 정결한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 셋째,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는 하시지만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계수한 인구조사(3-4) 하나님께서 모세와 엘르아살에게 제 2차 인구조사를 명하신 곳은 요단 가 모압 평지로서, 이스라엘이 40여년의 광야 생활을 마감하고 가나안 정복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너희”는 모세와 엘르아살을 도와 실제적인 인구조사를 담당했던 각 지파의 두령들입니다(1:4-18). 또한 제2차 인구 조사의 대상자들은 광야에서 출생한 사람들로서 애굽의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한 광야 2세대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서 광야 1세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애굽의 종의 근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비록 광야이지만 애굽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 소속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여주십니다. 자유의 땅에서 출생한 참 자유를 일깨워주십니다(요 8:32).
적용: 광야 1세대들이 가나안에 입국하지 못한 것은 애굽에서의 관습과 불평과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옛 관습과 불평, 불신앙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재능에 따라 살아가야만 한다면 인생은 얼마나 재미없을까요? 오늘은 당신이 뒤쳐졌지만 내일은 당신이 앞지를 수도 있기 때문에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과 땅 분배 작업을 위한 인구조사로 서로가 더 좋은 땅, 더 많은 땅을 갖고자 욕심으로 다툴 수 있는 민감한 문제를 원망과 시비가 없이 평등하게 기업을 나누어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재능은 이만큼이지만 내일의 재능도 이만큼이라고 누구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내일은 더 발전할 당신의 모습을 기대해보세요.
< 설 교 >
새 시대의 3대 소망
민수기 26:1-4, 27:6-11, 16-18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백성들의 숫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수기 1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1차 인구조사가 기록되어 있고, 26장에는 제2차 인구조사가 시행되어 그 모든 결과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과 26장의 인구조사가 시행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었는데, 그 내용이 동일합니다. 이스라엘 남자 중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가 싸울만한 사람을 계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장의 인구조사와 26장의 인구조사는 유사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습니다. 먼저 차이점은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구조사를 시행한 시기의 차이입니다. 제1차 인구조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지 1년이 지나고 둘째 해에 시행된 것이고, 제2차 인구조사는 출애굽한지 40년이 되던 해 시행한 인구조사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1장과 26장의 인구조사에는 38년의 시간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구조사의 대상이 차이가 있습니다. 1장에 기록된 1차 인구조사는 광야에 나온 출애굽 1세대 백성들을 계수한 인구조사이고, 26장에 기록된 2차 인구조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출애굽 2세대 백성들을 계수한 것입니다.
셋째, 인구조사를 실시한 장소도 서로 다릅니다. 1차 인구조사는 시내산에서 시행했고, 2차 인구조사는 여리고 맞은 편 요단 강가에 있는 모압 평지에서 시행했습니다. 가나안 땅 입성 직전에 행한 인구조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인구조사의 목적도 다릅니다. 1장에서는 단순히 싸움에 나갈만한 군인을 계수해 보라는 것이었지만, 26장에서는 전쟁에 나갈 군인의 수를 알아보기 위함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에 인구수에 따라 지파별로 땅을 분배할 때 요긴하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섯째, 인구조사의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의 유무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1장에서는 인구조사에 제외된 사람이 없었던 반면, 26장에서는 포함시켜선 안 될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구조사에 계수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들 중에는 반역을 주도했던 다단과 아비람, 족장 250명도 있고, 유다의 아들인 에르와 오난,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계수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은 단순히 머릿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의 문제이기에 이들이 제외된 명단에 포함된다는 것은 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유다로부터 메시아를 보내려는 것이 계획이셨기 때문에 에르와 오난이 자식을 낳으려 하지 않자 이들을 제외할 사람들로 정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사주를 받아 메시아의 계보를 끊으려고 했기에 이들을 죽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통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베레스를 통해 예수님의 계보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에르와 오난은 메시아의 계보를 끊으려 했던 악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인구조사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사한 점도 있었습니다. 유사점은 1장의 제1차 인구조사와 26장의 제2차 인구조사의 결과가 거의 비슷한 수치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장 46절에 “계수함을 입은 자의 총계가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고, 레위인 22,000명을 포함하면 총 62만 5,550명이 됩니다.
제2차 인구조사의 결과는 26장 51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육십만 일천칠백삼십 명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인 23,000명을 포함하면 62만 4,730명입니다. 1차 인구조사와 2차 인구조사의 차이가 단지 820명밖에 나지 않습니다. 38년의 시간차가 있었지만 인구가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민수기 25장의 싯딤 사건 이후 24,000명이 염병으로 죽은 것을 감안하면 제2차 인구조사는 1차 때와 비교해 봤을 때 거의 그 수가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만 출애굽 제1세대가 제2세대로 바뀐 것뿐이었습니다. 20세 이상의 남자만 계수한 것이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면 거의 200만 명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바네아 사건이후 40년 세월을 광야에서 낭비한 셈인데도 인구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두 가지 분명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데, 첫째는 죄가 시간낭비를 가져다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4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인구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은 어찌 보면 낭비된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택하신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죄는 깊고 하나님의 은혜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26장에 제2차 인구조사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에 놓인 과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성경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이 순서상 신명기가 기록되어 있지만,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직전에 출애굽의 제2세대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다시 교육한 설교이기에 이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복전쟁을 할 것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던 제1세대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세를 따라 여기까지 와서 죽게 되었노라고, 애굽이 더 좋았다고 하면서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다고 한탄하며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26장 이후에 전개되는 말씀들은 1세대 사람들이 염려했던 것처럼 2세대 사람들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거나 절망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세대인 제2세대 백성들에게는 소망과 승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세대 사람들로 신세대들을 향해 걱정을 참 많이 합니다. 대한민국이 지금까지는 잘 해왔지만, 신세대는 나라를 망치지는 않을까 심히 우려하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저는 신세대가 오히려 구세대보다 더 잘 해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국 교회를 향해서도 염려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기우에 불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망을 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대는 소망의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출애굽 1세대는 지나갔고, 신세대(2세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구세대 백성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고, 노예 기질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1세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광야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은 제2세대가 가나안 땅을 앞두고 있는 것입니다.
신세대는 소망이 있는 세대입니다. 레위 지파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구세대도 약 60만 명이었고, 신세대도 그와 비슷했습니다. 전도서 1장 4절에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대는 지나가게 되어 있지만, 땅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지나가고 싶지 않아도 세대는 다 지나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소용없습니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1세대 사람들에 대해 많은 근심을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편 95편 10~11절에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40년을 근심하셨습니다. 1세대 사람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1세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근심시켰던 세대였습니다.
그러면 왜 구세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히브리서 3장 12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불신앙의 마음, 악한 마음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의 문제는 결국 마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도 마음으로 믿는 것이고 믿지 않는 것도 마음으로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세대 사람들은 불신앙의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들에게 가나안 땅의 안식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과 신앙, 이런 문제에 관해서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았던 구세대가 반드시 신세대보다 앞서나갔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과 신앙의 문제는 나이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믿음이 없을 수 있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아도 악심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멸치 않으셨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역사 속에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웠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주변 강대국들인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와 같은 나라에 얼마든지 국권을 빼앗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마 지금 한국말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국권이 다 사라지고 없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한민국을 소멸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나라를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무궁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에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구세대가 광야에서 모두 죽었어도 신세대에 그에 못지않은 인구수를 유지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제2세대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광야의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신세대들은 자라며 특별히 재밌는 놀잇거리가 있거나 흥미로운 일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컴퓨터 게임이 있었겠습니까? 오락실이 있었겠습니까? 스포츠가 있었겠습니까? 그저 어려서부터 광야에서 뛰어 놀며 혹여나 원수들이 쳐들어오면 그들과 전쟁을 하며 험악한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과정들이 앞으로 도래할 신세대를 사랑하셔서 주신 하나님의 훈련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세대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사람들이고 인구수에 따라서 가나안 땅을 적절히 분배해서 갖게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막강한 군대가 되어 신세대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신세대로 인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가 어둡고 여러 격랑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자라나는 신세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세대를 잘 양육해야 합니다. 신세대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다. 믿지 않는 악심을 물려줘서는 결코 안 됩니다. 신세대를 믿어줘야 합니다. 새로운 세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버릇이 없고 어른 공경할 줄도 모른다며 타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작정 그렇게 말하지 말고 신세대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믿음의 다음세대가 될 수 있도록 키워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복된 신세대가 될 수 있도록 믿음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교회가 다시 부흥하고 국가가 번영하는 시대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대한민국에도 믿음의 신세대를 일으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Ⅱ. 이들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정신, 창의성을 갖고 있었다
신세대는 구세대와 사고방식이 달랐습니다. 민수기 26장 33절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라 그 딸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슬로브핫이라는 사람은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이 있었는데, 이들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민수기 27장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토지 상속법에는 딸에게 줄 토지가 없었습니다. 모두 아들에게 상속하도록 되어 있었고, 장자는 차자에 비해 두 배의 땅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장남에게는 두 배의 땅을 상속하게 했을까요? 오늘날 대한민국 민법에는 장남이나 차남이나 딸이나 모두 똑같이 한 배씩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예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장남에게 두 배의 유산을 물려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장남이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두 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법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21장 17절에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자는 기력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두 배를 준 것입니다. 아버지가 장자를 낳고 나도 이제 자식이 생겼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두 배를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민수기 26장에서 가나안 땅을 분배할 것을 고려해 인구조사를 할 때도 딸들을 계수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땅을 분할할 때 딸들에게 돌아갈 땅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므낫세 지파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구세대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이들은 모세, 엘르아살과 족장들과 온 회중을 모아놓고 토지 상속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아버지 슬로브핫은 이미 광야에서 죽었고 고라의 반역에도 가담하지 않았었는데, 우리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땅을 상속받지 못한다면 아버지의 이름과 땅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우리 아버지는 땅을 분배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신데,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가 땅을 상속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문제제기를 한 것입니다. 역시 신세대의 생각이 합리적이고 신선합니다. 이것은 구세대의 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슬로브핫의 딸들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새로운 법을 제정해 달라고 과감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들의 문제제기가 합당하다고 판단하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이들의 요구가 합당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할 때 합리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작정 아무렇게나 기도한다고 다 들어주시는 불합리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합리적인 분이시고, 기도에 합리적으로 응답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한 문제를 합리적인 제안이라고 판단하시고 새로운 토지 상속법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보호하려는 가정적인 이유로 문제를 제기했지만 하나님은 사회 전체가 개선되는 새로운 법을 제정해 주신 것입니다.
만약 땅을 상속할 아들이 없거든 딸에게 주고, 딸도 없거든 형제들에게 주고, 형제도 없거든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주고, 아버지의 형제들도 없거든 가장 가까운 친족들에게 땅을 상속하라는 새로운 친족 토지 상속법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도 않았고, 난공불락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이미 내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아직 요단강도 건너지 않았지만 추호도 의심의 여지없이 굳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구세대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니 올라가서 취하라고 해도 이들은 올라가서 취하지 못했습니다. 다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믿지 못해서 그 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줘도 먹지 못한 사람들이 1세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2세대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새로운 정신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기보다 합리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신세대들의 사고가 이렇게 신선하고 창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36장에 보면 슬로브핫의 딸들이 속해 있는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또 다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딸들이 땅을 상속 받은 것까지는 좋은데 딸들이 결혼을 하면 결과적으로 므낫세 지파의 땅이 줄어들지 않느냐는 문제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제기도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시고 또 다시 법을 개정해 주셨습니다. 민수기 36장 6절에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가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같은 지파 안에서 결혼을 하면 아무 문제가 없지 않겠느냐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신세대가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환경을 마련해 줘야 합니다. 우리가 신세대를 신뢰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 새로운 사고를 통해 소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절대로 신세대에게 악심을 전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세대에게 좋은 조언을 많이 해 주고 용기를 주고 믿음 안에서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법의 합리성이 떨어지면 새로운 법을 제정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신세대가 새로운 정신을 갖게 되면 교회도 소망이 있고, 국가도 소망이 있게 됩니다.
Ⅲ.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이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도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고, 죄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렀습니다. 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불평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가리키라고 말씀하셨는데, 두 번이나 반석을 때렸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비록 이 땅의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늘의 가나안 땅에는 들어갔습니다. 그는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마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 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본 베드로는 깜짝 놀라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살자고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모세는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또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모세와 여호수아의 리더십이 충돌해서 티격태격했을 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죽는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옳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민수기 27장 16~17절에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비난하고 돌로 쳐 죽이려 했던 회중들을 징계해 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자의 마음을 가진 자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도록, 좋은 지도자를 세워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참된 목자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백성들을 인도할 지도자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예비하셨습니다. 물론 모세와 여호수아는 같은 지도자라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사람, 책의 사람이고, 여호수아는 칼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계시를 받아서 책을 저술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야 했기에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만났습니다. 하나님께 물으면 음성으로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받아 적어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대면해서 만나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27장 21절에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좇아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물어봐야 했습니다. 엘르아살에게는 판결흉패라는 조끼 비슷한 옷 속에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여호수아에게 일러주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가야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대하실 때 이렇게 차이를 두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미 주셔야 할 계시들을 다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따로 계시를 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모세와 차이를 두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율법에 대한 계시를 더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여호수아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8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직접 물을 것이 없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책을 부지런히 읽고 그대로 순종하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없는 내용은 엘르아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이미 완성된 신구약 성경이 있으므로, 이 말씀을 늘 가까이에 두고 읽어서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며 살면 됩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여 만날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시를 더 이상 주지 않으십니다. 규범적 계시는 이미 다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결 론
모세는 책의 사람이었지만, 여호수아는 칼의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새로운 지도자를 맞아 소망이 있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과거 구세대는 모두 죽었지만, 신약시대 최고의 지도자가 계십니다. 다윗의 뿌리에서 나온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지도자이십니다.
에스겔 34장 23절에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다윗이 죽은 지 400년 후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 종 다윗을 세워 한 목자가 되게 하리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문자 그대로 다윗 왕이 아니라 다윗의 뿌리에서 나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도자요, 대목자장이십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며 교회를 돌보는 분이십니다.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는 새로운 세대가 양성되고, 새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목자를 맞을 수 있도록 힘써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반드시 소망이 넘치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이 일에 우리 모두 기도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군대
민 26: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뭔가 특이한 단체로 만드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습니다.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의 일을 겪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수만 명이 죽어나가는 무서운 일을 겪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무엇 때문에 그처럼 혹독하게 이스라엘을 다루십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를 만드시고자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쫓아낼 만한 나라로 만드시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군사 훈련을 시켜서 힘이 강한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의 죄를 경고하고 그들의 죄와 싸울 수 있는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세상의 죄를 경고하고 싸우기 위해서는 필히 요구되는 것은 이스라엘은 세상과 같은 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똑같은 죄에 빠져 있으면서 세상의 죄를 경고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죄를 경고하기 전에 오히려 먼저 자신이 경고를 받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신 이스라엘이 세상과 같은 죄에 빠져 있을 때 가차없이 그들을 징벌하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오늘날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한사람 한사람은 우리들 신자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모델로 앞세워서 이스라엘을 때리시고 가르치시고 경고하시고 교훈 하시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이스라엘 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죄를 경고하고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단체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교회가 먼저 죄를 알아야 하고 죄와 멀어져야 하고 죄에 대해서 경고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새이스라엘이면서도 세상과 같은 죄에 빠져있는 모습에 대하여 경고를 받고 그로 인해서 죄를 깨닫고 죄로부터 멀어지면서 세상에서는 죄에 대하여 경고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작 신자인 우리들은 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교회로서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 개인의 일에 푹 빠져서 바쁘다는 핑계만 내뱉은 채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이면서 신자답지 못하고 교회이면서 교회답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솔직히 표현하자면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경고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똑같은 죄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교회, 신자들의 솔직한 모습인데 그런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욕심 내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가난해도 정직하게 살고 낮은 자리에서도 기뻐하며 삽시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호화로운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수입한 돌을 처바르고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혈안이 된 수많은 교회들이 과연 욕심 내지 말고 살자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힘을 잃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신자로서 세상의 죄를 경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도 같은 모습이기에 말을 할 수 없는, 신자로서의 가치와 힘을 잃어버린 상태는 아닙니까?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는 나혼자 천국가면 다 되는 곳이 아닙니다. 신자는 어두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자로서 세상을 경고하는 자가 되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처럼 내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죄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하나님의 경고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상한 것은 신자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받을 때의 태도나 세상이 교회로부터 경고를 받을 때의 태도가 같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마지막을 외쳐도 세상은 눈하나 깜박하지 않습니다. 멸망에 대하여 무척이나 대범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지금 나중 일에 대하여 신경 쓰고 관심둘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바쁜 일이 태산인데 어떻게 나중 일까지 신경 쓰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떠합니까? 똑같습니다. 세상과 똑같이 바쁘게 삽니다. 바쁘게 사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멀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바쁘다는 것이 정당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쁘다 바쁘다 하면서 세상과 똑같이 마지막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살아가고 교회에 와서 경고를 들을 때도 단지 간
바쁘다는 것이 굳이 직장을 다니고 공부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 바쁩니다. 그들에게는 교회보다는 데이트하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일이 더 급합니다. 고전 7:33절에 보면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나누인다는 것은 하나님께 두어야 할 관심이 온통 아내에게로 쏠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바쁜 것입니다. 시집간 여자도 마찬가지로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바쁩니다. 관심이 아내와 남편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세상을 경고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죄로부터 멀어져야 하고 진리와 의로 하나되어야 하며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다른데 관심을 둔 채 교회에 와서는 안되고 다른 것에 욕심을 두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진리와 의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교회는 놀이터가 아닙니다. 다른 할 일이 없으면 찾아오고, 노닥거리고 시간 보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멸망을 향해 가는 세상을 경고하고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되기 위해서 진리와 의로 하나된 단체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교회에 들어오게 된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여겨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교회 다니는 것이 자랑스럽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왔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둘아 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로 모이는 우리부터 이런 마음인데 그런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향해서 마지막을 경고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문제점에 대해 우리는 깊은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죄를 경고하는 것을 가지고 다른 말로 싸움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싸움꾼이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 조상의 집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무릇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 마한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군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민수기는 1장부터 이러한 정신을 선포하고 시작합니다.
민수기 강해를 시작하면서 맨 먼저 말씀드린 것이 이스라엘은 싸움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민수기는 오늘 본문과 같이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의 숫자를 세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2,3절을 보면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군대대로 계수하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각 종족의 두령과 계수한 숫자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도 같습니다. 5절부터 계수한 숫자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민수기를 시작하면서 숫자를 계수하라 하시고 또 26장에 와서 다시 숫자를 계수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는 시각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국가로서 출발합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군대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군대다워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최우선적인 과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민수기 1장에서 숫자를 계수하는 것은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이 어떤 식으로 살아야 군대다운 군대가 될 수 있는가를 광야의 삶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1장에서부터 25장까지에서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원망과 반역 등 모든 모습들은 하나님이 군대다운 모습이 아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은 군대에서 제외되는 것임을 경고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1장에서 계수한 군대의 숫자보다 26장에서 계수한 군대의 숫자가 적습니다. 전체 이스라엘로서는 1720명이 감소된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염병 후에'라고 합니다. 즉 26장에서 계수된 사람들은 염병을 무사히 통과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에게만 기업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숫자의 변동사항은 하나님이 약속한 기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을 떠난 후 수많은 불평과 원망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동기는 모두가 자기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 힘으로 내가 살아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런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 이스라엘의 원망이요 불평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은 가나안의 모습으로 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군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쫓아내야 할 이스라엘이라면 당연히 그들에게는 생존을 앞세우는 모습은 허락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생존이 아닌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지내면서 생존을 앞세웠던 사람들은 군대에서 제외됩니다.
그런데 군대라는 것은 적이 있어야 생깁니다. 싸울 상대가 없는 군대란 전혀 불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싸워야 할 대상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한 나라를 핍박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원수요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23:8절에서 발람이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라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은 자를 저주하는 자체가 곧 하나님의 원수여 하나님의 저주받을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지고 '누구든 교회를 저주하면 저주받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지상에 세워진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축복하시고 보호하시는 단체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이 축복하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누구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특성을 잃어버린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군대로서, 언약백성으로서 가져야 자세를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의 저주는 그들 안에 임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자세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자기 자신부터 하나님의 군대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를 못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축복한 그리스도의 몸을 핍박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 민족을 몰아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이스라엘 내부를 치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세상을 경고해야 할 군대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먼저 이스라엘 안의 세상의 죄의 모습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갑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할까만 생각하지 먼저 우리의 내부를 치시는 하나님은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치십니다. 우리 안의 죄를 먼저 제거하십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대다운 모습은 자신은 징벌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을 때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놋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는 징벌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이 군대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안다는 것은 '나는 이제 내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군대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교회가 군대로서의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유는 교회도 생존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교회부터 하나님의 원수로 나서면서 어떻게 세상에 죄를 경고하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자부터 십자가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싫어합니다. 오직 생존의 문제가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채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를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말씀이 존재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내부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과 싸우면서 살아갑니까? 여러분이 싸우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행여 생존의 문제, 먹고사는 문제와 싸우며 살지 않습니까? 교회는 분명히 진리와 의를 위해서 싸우는 군대인데 교회로 모이면서도 진리와 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더 많은 것을 확보하고자 싸우는 것은 아닙니까? 어느 것이 진리이고 어느 것이 의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관심을 닫아버리고 외면해 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진리와 의를 위해서 싸우라고 하나님이 선택해서 부르신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경고하라고 부름 받은 단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군대로서의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군대의 모습은 잃어버린 채 세상과 똑같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의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세상에 대해서 아부하고 타협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자라 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이 축복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오히려 핍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 합당하지 않는 것은 군대에서 제외됩니다.
여러분이 모습은 어떻습니까? 과연 군대로서 필요한 모습을 갖추고 살아갑니까? 군대로서 필요한 모습은 죄를 안짓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겪었을 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하게 아는 것이었습니다. 놋뱀을 바라보는 마음이 필요하고, 어린양의 희생을 아는 마음이 필요하고, 비느하스 때문에 염병에서 살아남으로서 나도 죽어야 할 죄인이었음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단지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힘을 동원해서 내 생존의 문제를 내가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반역하는 적의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먼저 자신부터 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신의 가능성은 포기한 채 오직 말씀에 순종하면서 말씀으로 살고자 힘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가나안의 모습을 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곧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치십니다. 세상에서 죄를 경고하고 진리와 의를 드러내는 군대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교회로 부르셔서 우리를 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려고 하고 외면하려고 합니다. 생존의 문제에 전혀 도움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뭔가 자꾸 생존에 도움이 되는 쪽에 고개를 돌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을 저주하고 있는 모습임을 아십니까?
이래도 아무 생각없이, 진리와 의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두지 않은 채 교회로 오시겠습니까? 바쁘다고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외면해 버리시겠습니까? 교회 나오신다고 군대 된 것은 아닙니다. 군대다운 군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압평지에서 만나자
민 26:1-4
우리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가 기록했다는 점에서 모세오경이라 부릅니다. 오경은 그 내용과 주제, 목적 그리고 문체에 있어서 분명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어 모세의 기록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오경은 사실상 한권의 책입니다. 각 권이 ‘그리고’ 라는 접속사로 연결이 되어 있음이 이를 반증합니다.
Ⅰ.모세는 오경을 기록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야곱의 식구 70인이 애굽으로 이주하는 일을 기록했습니다.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430년의 세월을 보낸 이후 하나님의 종 모세의 영도로 출애굽하여 시내산까지 도착하는 3개월간의 여행이 기록된 책입니다. 우리는 출애굽의 모든 과정을 기록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애굽을 출발하여 시내산까지의 3개월 동안의 여행과 그곳에서 머물던 때의 일들이 기록된 책입니다.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1년 동안 체류 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과 율례가 기록된 책입니다.
민수기는 시내광야를 출발하여 38년이 지난 다음 모압 평지에 이르는 긴 역사가 기록된 책입니다.
신명기는 광야교회 40년의 시간을 마쳐갈 무렵 즉 요단을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기 한 달 전에 모압평지에서 율법을 다시 가르친 책입니다(신1:3, 31:24-26).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중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에게 정체성과 방향성의 혼란이 있었습니다. 나라 없이 광야에서 출생한 자신들은 누구인가 의아했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는 이들이 언약의 후손임을 깨닫게 했습니다(창15:1-21, 26:4, 28:1-4).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존재임을 알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알았으니 해야 할 일 무엇이고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정확하게 인식한 것입니다.
Ⅱ. 민수기 어떤 책인가?
모세가 기록한 책들 중 네 번째에 위치한 민수기는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책입니다.
한 지명으로부터 시작하여 다른 한 지명으로 끝맺는 책입니다.
즉 시내광야(민1:1)에서 모압평지(민26:3)에 이르는 38년간의 방황의 역사가 기록된 책입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시작된 시내산 언약은 레위기를 관통해 민수기 10장 10절까지 이릅니다. 출애굽 3개월 후 시내광야에 도착해 제2년 2월20일에 구름이 증거막에서 떠올라 출발하게 됩니다. 약10개월 19일간 이스라엘은 시내광야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언약체결준비, 십계명 및 율법의 언약제시, 언약체결, 성막설계도 계시, 성막완성, 제사법 제정, 제사장 위임식 그리고 첫 제사를 시행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민수기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할 준비를 시키십니다. 그때가 출애굽한 지 1년 보름이 되는 날입니다.
두 차례의 인구조사가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게 하십니다. 이때 레위지파를 제외한 열두지파를 계수한 총계가 603,550명이었습니다(민1:46). 431년 전 70명에 불과했던 이들이 장정만 60만 명이니 전체를 계수하면 200만명 정도가 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이로부터 약 40년 정확히 38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모압평지에 도착 시 다시 계수한 숫자는 601,730명(민 26:51)이었습니다. 이런 백성들의 계수 때문에 ‘민수기(民數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내광야 계수시의 603,550명과 모압 평지에서 계수한 601,730명 가운데 양쪽 모두에 포함된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민 26:62-65).
Ⅲ. 민수기는 믿음을 요구하는 책입니다.
1.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가던 길을 가자고 했습니다.
어떻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38년을 사이에 둔 두 곳에서의 계수에 동시에 포함될 수 있었을까요? 이를 민수기 13장과 14장에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파송한 열두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 정복에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명과는 달랐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올라가자고 했습니다(민14:23). 가나안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전투력과 관계없이 그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 약속을 철저히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될 수도 변할 수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두 사람은 가나안땅의 상황에 관계없이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올라가 취할 것을 주장했습니다(민14:11) 여호수아 갈렙은 지난 역사를 통해 얻은 경험에 근거해서 가나안 쟁취를 확신했습니다. 즉 출애굽 이후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한 번도 이스라엘 자신들의 능력이나 지혜로 이 곳까지 이른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차례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에 관계없이 자기 백성을 인도했습니다. 이적과 기사를 통해 그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출애굽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열 가지 재앙을 동원하여 애굽을 공격했습니다(출 7:14-11:10). 이 재앙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추격해오는 바로왕의 애굽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켜 버렸습니다(출 14:15-31).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동원하여 낮과 밤을 지켜주었습니다(출13:21,22).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어 저들의 굶주림을 배부름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출16:1-36). 반석이 토해내는 생수로 저들의 목을 적셔 주었습니다(출 17:1-7).
하나님은 이런 기막힌 역사를 통해 저들의 영원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그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확신에 찬 신앙이 비록 눈앞에 건널 수 없는 강, 넘을 수 없는 산이 있다 해도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민 14:9).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과거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가나안 사람들의 신은 그들에게서 떠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확신에 근거해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확신 있게 말했습니다. 이런 근거들로 두 사람은 다른 열 사람의 정탐꾼과 똑같은 참담한 현실을 보았지만 낙망치 않았습니다. 열 명은 눈앞에 놓인 현실만 보았지만 두 사람은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약속을, 그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동행해 주셨던 하나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있었습니다.
시내 광야를 출발했던 603,550명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사람들이 다 사막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저들이 병들었거나 노쇠해서가 아닙니다. 저들은 불신의 죄 때문에 광야에서 다 쓰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22절 이하에 보면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들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했습니다.
시내 광야를 출발했던 603,550명이 거의 죽고 38년의 세월이 흐른 후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모압 평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무병강건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2. 1차와 2차의 인구조사가 이를 반증합니다.
시내광야에서의 1차 인구조사는 출애굽한 부모세대의 인구수입니다(민1:1-46). 반면에 2차 인구조사 때의 모압평지에서의 조사는 새로운 자식 세대의 인구수입니다(민26:1-51).
1, 2차 인구조사를 비교해보면 그 수가 거의 고정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부모세대의 불신앙의 죄로 광야에서 죽게 되면서 더 이상의 인구수가 증가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12지파들 중 한 지파인 시므온 지파가 급격하게 인구수가 감소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1차시 시므온지파는 59,300명이었습니다(민1:23) 2차시는 22,200명이었습니다(민 26:14). 이는 무려 37,100명이나 감소된 수입니다. 다른 자손들에 비하면 특별한 현상입니다. 이는 모압의 바알에 부속된 자들이 바로 시므온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무려 24,000명이었습니다(민 25:9). 모압의 미혹에 시므온의 지도자들이 넘어가 그 자손이 크게 감소된 것입니다(민 25:14). 이는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한 사건입니다(히 12:6).
가나안 정복이 끝났을 때 계수된 명수대로 땅을 제비뽑아 분배했습니다. 결국 자식이 번성한 지파는 더 많은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범죄로 인해 자식의 숫자가 줄어든 족속은 그만큼 적은 땅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민 26:53,33:54). 이는 선대의 믿음이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1, 2차 인구조사를 통해 나타난 시므온 지파의 이런 급격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총수는 비슷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이 땅을 정복할 군사들을 적절하게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출12:41). 특별히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게 하시는 일에 사용 받게 하셨습니다.
40년을 사이에 둔 두 차례의 계수 사건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을 줍니다. 불신은 이미 주기로 약속하신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게 합니다. 기업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리로 들어가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축복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것을 받게 만들어 주는 것은 믿음의 그릇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어간에 갖가지 어려움을 만납니다. 이런 어려움은 육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도 수다하게 찾아옵니다. 우리 앞에 어떤 난제가 있어도 과거(애굽)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해 오셨던 하나님, 지금까지 나와 동행해 주셨던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앞으로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는 애굽을 떠났고, 시내광야를 출발했습니다. 603,550명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속에서 살다가 한 사람도 낙오자 없이 모압 평지에서 다시 만나야 합니다. 새 예배당을 허락받고 새 가족을 만나게 되는 일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섭리 앞에 믿음으로 사느냐 불신으로 사느냐는 우리의 몫입니다.
염병 이후의 계수
민수기 26:1-4 /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오늘 말씀은 민수기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의 숫자를 세었다는 의미에서 민수기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세라고 하십니다. 민수기에는 가나안 땅의 입성을 앞두고 두 번의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출애굽 1세대이고 오늘 본문 26:은 두 번째로 출애굽 2세대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1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 오늘 설교 제목은 “염병 후에 계수”입니다. 두 가지를 생각하는데..하나는 전염병의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계수의 의미입니다. 특히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전염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와 교인들이 가져야할 신앙과 삶의 방향은 무엇인가? 입니다.
첫쩨, ‘염병 후’의 염병은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1절에 “염병 후에”하셨습니다. 염병의 사건을 보겠습니다.
민25:1-3, 9입니다.
“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9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염병 후의 염병은 민25: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는 형벌입니다. 이같은 형벌은 다윗이 임의대로 인구조사를 한 죄를 범하여..다윗이 선택한대로 3일의 전염병으로 7만 명이 죽은 일도 있습니다. 블레셋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가 전염병이 돈 것도..애굽의 10재앙도..앗수르의 18만 5천만 명이 죽은 것도 히스기야왕의 기도의 응답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징벌과 심판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염병을 통해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주인 됨을 고백했습니다. 애굽의 바로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 보냄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순종했습니다. 블레셋도 법궤를 하나님의 주인 되심에 이스라엘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고라의 일당에 동조한 백성들의 질병도 아론의 속죄제사로 멈췄습니다. 민수기25:의 염병도 백성들의 회개와 비느하스의 속죄함을 통해 멈췄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6)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8)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13) 염병 후..의 염병은 분명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일이기 때문에 죄를 묻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십계명의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입니다.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20:3-5)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의 여인들의 유혹을 따라 바알의 제사에 참여하여 절을 하고 바알브올에 가담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물으신 것이 바로 염병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육번성의 신이라고 하는 거짓의 신 바알에게 무릎을 굻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생육하고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창1:28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고 생육번성하게 하십니다.
욥의 경우를 보면 모든 질병이나 자연재해 등 재앙을 모두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수 없습니다. 욥은 분명히 하나님께서도 인정한 의인이지만 최악의 재앙을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재산과 자녀들 그리고 아내까지 잃어 버렸습니다. 죄가 있다고 정죄하는 친구들의 잘못을 보았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못하시는 것이 없다는..주인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고난이 그치고 복을 배나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각장애인의 눈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질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기 위해서라고 하시면서 인간의 질병이나 신체적 장애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재앙으로 인간을 통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을 위해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셔서 십자가로 구원하신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목회자 가정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엘리 제사장 집안의 불행이나 웃시아 왕의 질병 등을 근거로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는 것은 안 됩니다. 코로나와 같은 현대 염병사건도 쉽게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쉽게 단정을 짓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염병 후의 염병은..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고 하나님만 믿기를 고백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입니다.
1-2절입니다.
“1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
‘전쟁에 능히 나갈 만 한 자’는..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자입니다.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입성을 앞두고 12명의 정탐군을 보내서 가나안의 형편을 둘러보고 오게 했습니다. 정탐결과 이구동성으로 가나안은 사람살기에 좋은 땅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가나안에 살고 있던 7족속을 물리쳐야만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들어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10명의 정탐군은 가나안의 거인들과 난공불락의 성이 있어 들어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들어가자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지 않고 가나안 사람과 비교하여 우리는 메뚜기 떼와 같으니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실망하여 밤새 울었습니다. ‘이렇게 끝내려고 살기 좋은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고생고생하여..여기까지 왔는가?’ 낙심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백성들이 원망불편의 말대로..불신앙의 믿음대로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자기들의 말과 믿음대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자는 살리시고 믿지 않고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자들은 들어 갈 수 없게..죽이심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광야로 보내셔서 40년을 살게 하시면서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셨습니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홍수와 태풍이라는 자연재해나 코로나19의 전염병과 같은 재난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쫓아내십니다. “10..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수3:10,신7:1)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에 순종하며 삽시다. 신8:1에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하십니다.
전쟁에 능히 나갈만한 자는 가증한 것을 진멸하는 자입니다. 신7:26에 가나안에서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여리고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중에 아간이 내일을 위해 전리품을 숨겨 두었다가..아이성 전투에 지고 아간과 그 가족은 심판받아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렇게 아간의 가증함이 진멸되고 나서야 다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바알신앙을 유혹한 미디안 족속도 다 쳐서 멸하고 가증한 신앙을 따르는 자들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여호수아는“그 온 땅..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하여 바쳤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수10:40) 가나안의 가증한 것들을 진멸할 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왕은 아말렉을 쳐부수고 진멸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죽었습니다.“22..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불순종은 점치는 것과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은 죄입니다. 가증한 것은 하나님이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젠 버려야 삽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가증한 것들을..깨끗이 버립시다.
전쟁에 능히 나갈 자의 숫자대로 가나안 땅의 분배했습니다. 민26:에서 ‘능히 전쟁에 나갈 만한 자’로 이스라엘 12지파에서 20세 이상 된 자들을 계수하니..601,730명으로 출애굽1세대의 603,550명보다 1,820명만 줄어..거의 비슷한 숫자입니다. 조금 늘어난 지파도 있고, 조금 줄어든 지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54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이 계수된 수대로 각기 기업을 주되”(민26:54) 수대로 땅을 분배했다는 것입니다. 전쟁에 능히 나갈 자인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증한 것을 제거함으로 염병을 그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가증한 남녀를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이 백성의 죄를 대속한 것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에..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와 하나님과 평화의 언약을 맺고 영원한 제사장이 되는 축복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전쟁에 능히 나갈 자가 되는 것은 축복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축복받게 살아야 합니다. 시므리가 속한 시므온 지파는 처음보다 37,000명이 줄어 분배될 땅도 줄었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긴 자는 저주를 받고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가증한 것을 진멸한 자는 복을 받습니다. 전쟁에 능히 나갈 자들은 수만큼 헤아려 축복도 받습니다.
한국교회는 전쟁에 능히 나갈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부흥성장으로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역사를 만들고 대형교회들도 많아 졌지만 코로나 이후에도 성장만이 목표가 된다면..남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자신은 도리어 자격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바울사도의 말하잖아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의 지도하에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신령한 식물인 만나와 기적으로 낸 ‘신령한 음료’를 마시는 등 온갖 신령한 경험을 다 한 자들이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백성들이었으나 결국은 민25:의 ‘바알 브올’ 사건처럼(고전10:8)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염병으로 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삶을 절제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삶을 살게 해야 합니다. 코로나19는 우리들로 하여금 전쟁에 능히 나갈 자가 되고 비느하스가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전염병은 앞으로도 계속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340년대에 유럽의 페스트, 중국의 흑사병, 최근에는 후천성면역결핍증 (AIDS), 2003년의 사스, 2005년의 조류독감 현재는 코로나19 등 지금은 기후변화로 지구 온난화가 예측 못하는 변종바이러스가 갑자기 나타나는 ‘이머징 바이러스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연재해로 볼 수 있지만 인간의 욕심이 불러일으킨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환경과 기후변화에 따른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습니다.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도 관점과 삶이 변화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준비하는 삶으로 변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그 교회처럼..세상을 구원하는 교회로 다시 설 때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아닙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3가지 직분을 가졌던 것처럼 교회도 예수님의 그리스도 3중직의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역의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중보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과 교인 그리고 지역을 하나님과 연결하는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적 교회입니다. 마땅히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역을 다스리는 왕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왕이셨습니다. 교회공동체인 우리자신은 물론 교회공간도 섬김의 왕으로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나눔으로 구원하는 성찬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여러분의 섬김과 봉사를 통해..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역에 하나님을 전하는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증거 하는 선지자이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전으로 선교의 지평을 넓혀 하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한남제일교회의 선교의 지경은 넓습니다. 정부에서 위탁받은 요양원, 어린이집, 키움센터..저소득 가정들과의 자매결연 후원, 용산구푸드뱅크마켓, 마을공동체 문화센터 행복한 한남동 만들기 등에서 하나님의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터내셔널처치라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교회와 상담센터가 주변의 선교단체와 교회들과 좋은 협력 속에 이슬람선교에 열매들이 많습니다. 용산의 교회들과 함께 하는 용산교구협의회, 용산시찰회 등과 선교연합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국내의 8개 이상의 자립대상교회들과 작은교회살리기연합..해외의 미얀마, 동티모르, 러시아, 몽골, 이제 저 멀리 칠레 등의 선교사님들, 그리고 북한선교를 위한 오도선교회, 기쁜 소식 중국선교를 위해 동북아선교회, 아시아를 위한 한아봉사회, 탈북자 자녀를 위한 버켄 장학회, 총회순교자사업회, 총회외국인근로자성교후원회 등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비전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함께 힘써 충성합시다. 코로나 이후..우리는 더욱 능히 전쟁에 나갈 자로 힘써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코로나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정죄대신에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하며 간절히 기도해 주는 교회공동체로 사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자신도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 앞에..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세우신 그 교회제사장, 왕, 선지자가 되는 기쁨으로 살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함께 가나안으로 갑시다!
염병 후 계수의 결과는 비슷했듯이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염병이라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지 않도록 하나님만 믿어야 합니다. 전쟁에 능히 나갈 만 한 자, 비느하스가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증한 것을 버려 영원한 복의 주인공이 되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이 말씀으로 한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과연 2백만이 넘었는가?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 조상의 집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무릇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민 26:1, 2)
민수기에는 두 번의 인구조사가 나옵니다. 출애굽한 후 얼마 안 되어 가데스 바네야에서의 실패가 있기 전에 1차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40년간의 광야 방황이 끝나는 시점에 2차 조사를 했습니다. 이 두 인구조사의 일차적인 목적은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한 군사력을 점검하여 군대 조직을 편성하고 신정국가체제를 형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특별히 이 두 번째 인구조사는 바알브올을 섬겼던 사람들이 여호와로부터 염병의 징계를 받은 후에 이뤄졌습니다. 말하자면 그 염병 사건을 끝으로 가나안 입국이 금지된 자들의 죽음이 종식되었고 죄로 얼룩진 광야 생활을 마감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인구조사가 아주 정밀하게 진행되었음을 그 수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의 숫자가 장정만 60만이 되었을 리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인구조사의 결과를 면밀히 비교해보면 오히려 그 주장의 타당성은 줄고 성경 기록의 정확성만 더 늘어납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603,550에서 601,730으로 1,820명이 줄었습니다. 상식적으로 40년, 즉 약 두 세대가 지나갔다면 당연히 인구가 늘어나야 합니다. 비록 당시의 수명이 지금과 비교해서 짧지만 가족계획을 하지 않아 일반적으로 다산(多産)이었고 또 광야 생활에 전쟁을 겪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인구가 많이 늘어나 있어야 함에도 줄었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하여 징벌을 받은 결과가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각 지파별로 그 가감이 정확하게 나타나 있어 더욱 그 수치의 정확성을 제고시켜 줍니다. 특별히 징계를 받았던 르우벤, 시므온, 갓, 납달리 지파들이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지파들의 감소분의 합계는 53,020인데 광야(16:49)에서, 고라 자손의 반역 때(21:6)에, 불 뱀 사건(25:9)과, 바알브올 사건(25:9) 때의 죽은 자들의 합계와 거의 맞아 떨어집니다. 물론 이들 지파만 범죄한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죄로 죽은 숫자도 많겠지만 수치들이 아주 구체적이고도 당시의 전후 사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아 객관타당성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모든 상황을 보아 이스라엘 인구가 장정 60만, 전체 2백만이라는 것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수치라고들 합니다. 이를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에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 자손의 숫자는 70명 남짓 했습니다. 그리고 약 400년간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출1:12)했던 민족이었습니다.
한 세대를 20-25년으로 잡으면 4백년은 20-16세대가 지나가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나면 간단하게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난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시는 야곱의 예에서 보듯이 자식을 많이 낫는 것이 축복을 받은 상징이자 실제로 많이 낳았습니다. 야곱 한 명이 2대 만에 무려 70명이 넘었지 않습니까? 그럼 70명을 단순 계산으로 2배씩 곱해 나가 2백만이 넘는데 몇 대가 소요되는지 아십니까? 정확하게 15세대가 지나면 2,293,760명이 됩니다. (안 믿어지면 실제 계산을 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정밀한 성경의 기록입니까?
그러나 성경 수치가 정확하다는 것에만 감탄해선 안 됩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출애굽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특별히 바다가 갈라져 홍해를 육지같이 걸어서 지나가는 그 장엄한 모습을 말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들을 40년간 광야를 방황시키면서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며 반석의 생수로 먹이시는 엄청난 은혜를 말입니다.
광야 방황 중에 전쟁이 없었던 이유는 주변의 이방 민족들은 그들을 안중에도 안 두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를 건넌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굶어죽고 병들어 죽고 더위나 추위에 곧 다 죽어 없어지리라 예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름기둥 불기둥을 인도하고 보호하셨습니다. 그것도 열 번이나 넘게 반역한 그 완악한 백성들을 말입니다.
가나안 전쟁을 보면 자기들의 죄 때문에 패배한 아이성 전투를 빼고는 연전연승했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가나안 족속들의 간담이 미리부터 녹아져 내렸기 때문(수2:9-11)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물론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당시 최고 강국 애굽을 상대로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는 광야에서 2백만이 넘는 백성들이 40년간 거의 줄지 않고 그대로 다 살아남았다는 것이 더 큰 이유일 수 있습니다. 자기들 상식으론 상상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연히 다 죽어 없어졌을 것이라 믿었던 백성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대로 생생하게 자기들 눈앞에 나타났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그런데 이 두 번째 인구조사에는 전쟁 준비 말고 또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명수대로 땅을 나눠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이 계수함을 입은 수대로 각기 기업을 주되.”(민26:52-54) 땅을 분배할 준비로 인구 조사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땅 분배를 위한 조사라면 가나안 정복 전쟁 후에 해야 원칙입니다. 그 전쟁에서 얼마나 희생이 날지 모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 능력과 상관없이 가나안 땅을 당신의 권능으로 반드시 주실 것을 보장했으므로 구태여 전쟁 후에 조사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큰 희생 없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보증이 이만큼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구절도 없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됩니다. 비유컨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미리 김칫국부터 마시는 셈이지 않습니까? 땅을 빼앗기도 전에 나눌 계획부터 세웠지 않습니까? 신자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시키는 일을 종종 이런, 상식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수행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 안 되는 일이 발생하면 오히려 하나님이 뭔가 이루시려는가 보다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레 겁부터 먹고 빨리 상식 수준으로 되돌려 놓으라고 아우성만 치는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으로 인구가 줄 것과 그래서 땅의 분배 계획이 달라질 것에 관해선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광야를 방황할 때에 지파별로 인구의 숫자에 어떤 가감이 있었는지 이스라엘더러 정확하게 알라는 것입니다. 많이 늘어난 지파는 그만큼 벌을 받지 않았고 줄게 된 지파는 그동안 배역한 적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은 국가의 기초 체계를 세웠습니다. 각 지파 별로 지도자로 세운 장로들의 지도력에 따라 그 지파가 번성하느냐 쇠퇴하느냐가 결정되었습니다. 고라당의 반역 때에도 회중의 유명한 족장 250명이 참여했습니다.(16:3), 그때에 참여한 종족(clan)과 지파(tribe)의 인구 숫자는 당연히 줄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두 번째 인구 조사의 경우는 전쟁과 땅 분배를 위한 통상적 조사가 아니었습니다. 조사를 끝낸 후 각 지파별로 손익계산을 하고 그 원인을 따져 보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과거의 죄악이 여실히 드러났을 것이며 그래서 새로운 영적 부흥을 위한 계기로 삼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배역과 방황의 시기를 청산하고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왕국을 향해 온전한 믿음으로 진군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출애굽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겪었던 하나님의 모든 인도와 보호를, 그것이 축복이었든 징벌이었든, 재정리하여 온전한 신정국가를 세울 영적인 기초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2백만이 넘는 한 공동체가 동시에 동일한 믿음으로 동일한 (홍해의) 물 세례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너무나 기이한 체험과 풍성한 은혜들을 헤아려서 가나안 땅에 거룩한 백성으로 제사장 나라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도 이런 인구 조사가 때때로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가진 실력과 자원을 조사해 마음의 위로를 얻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벌을 받지만, 지금껏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징벌을 회상하여 영적 부흥의 계기로 삼는 조사는 아무리 자주해도 상관없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두 번째 인구조사는 하나님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신자에게도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인구 조사를 시킬 때가 있습니다. 바로 환난이 닥칠 때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 불평과 간구만 하기 이전에 자신의 여러 영적인 측면에 혹시 어떤 가감(加減)이 있지나 않았는지, 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 없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새롭게 믿음을 소생시켜서 영적 부흥 아니 도약의 계기를 마련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전쟁 전에 벌써 땅 분배 계획을 다 세웠듯이 환난이 끝나기 전에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케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