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니∼임”
점심식사를 하고 교무실로 올라오는데 웬 녀석이 뛰어와 뒤에서 와락 껴안습니다. 돌아다보니 지민이입니다.
박지민(가명) – 작년 초에 부산의 某공업고등학교에서 전학 온 녀석. 중국집 요리사로 일하다가 실직하신 아버지를 따라 온가족이 서울로 올라왔다는 녀석. 서울에 왔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한 아버지는 아픈 몸으로 일용직 공사장을 전전하고, 아빠보다 더 몸이 아픈 엄마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못한 채 한 웅큼의 약으로 매일을 버티신다고 고개 숙였던 녀석.
그 지민이를 처음 만난 것도 작년 이 맘께였습니다.
그날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교무실로 올라오려니 저만치 운동장가에 홀로 서 있던 학생 하나가 갑자기 묻습니다.
“선생니∼임, 이거 머라꼬 쓴 거예요오?”
그 돌발질문이 반갑고 기특해 친절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국혼은 살아있다’라고 쓴 거야.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 선생 애국이념’이라고 그 옆에 씌어 있네. 뒷면에는 그 분의 아들이 1983년 4월 5일에 이 은행나무를 심으면서 당신 아버지의 뜻을 전하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다고 씌어 있고...”
설명을 하면서 녀석 이름을 알아 둬야겠다싶어 흘낏 명찰을 보았는데.... 어라? 명찰이 없습니다.
“너 왜 아직도 명찰 안 달았어?”
꾸짖듯 물으니 부산 금정구에 있는 ○○공업고등학교에서 며칠 전에 전학을 왔기 때문에 아직 명찰을 달지 못했다는 대답입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억양이 남다릅니다.
아, 그리고 이어지는 녀석의 풀버전 네버엔딩 스토리-.
서울이 너무 좋다는 둥, 서울 사람들이 광안리해수욕장을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자기는 서울에 꼭 와보고 싶었다는 둥, 반 아이들도 싹싹하고 친절하다는 둥, 자기네 집은 시흥동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 어느 골목으로 나오면 보이는 슈퍼 뒤의 ?층 연립주택인데 전문대학 다니는 형은 이제 곧 군대에 갈 거라는 둥 묻지도 않았고, 전혀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네 집 이야기를 2분 전에 처음 본 선생에게 주절주절 늘어놓습니다.
배는 부르고 봄 햇살은 따뜻해 식사 후 잠깐 눈을 붙여줘야 5교시 수업하기가 한결 수월할 텐데 에고, 녀석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 그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는, 끝 모를 이바구를 20분 가까이 서서 들으려니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히는 듯 정신이 몽롱했습니다.
‘四月의 어느 엮인 날에’.
그렇게 프로포폴 주사를 맞은 듯한 몽환적 첫 만남을 가진 이후 녀석은, 그 특유의 넉살로 시도 때도 없이 달라붙었습니다. 복도 멀리서 내가 보이기라도 하면 멀리서부터 두 팔 두 발 다 벌린 짝벌남으로 “선생니∼임” 달려오기도 하고, 뒤에서 느닷없이 제 어깨를 기습 안마하고는 히히히, 내빼기도 했습니다. 교무실까지 찾아와 실실 웃으며 제 주위를 맴돌이하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저리 가, 시캬!”
꽤액! 소리를 지르면,
“왜 그래요옷? 난, 선생님이 좋아서 그러는데....”
생글생글 웃으며 제 양 어깨를 주무릅니다. 인간야생진드깁니다. 그나마 녀석 학급을 수업하지 않는 게 천만다행입니다.
녀석 넉살에 주위 선생님들은 낄낄 대며 “선생님이 지민이 맨토하세요?” 놀리고, 녀석 담임 선생님은 일부러 찾아와 “왜 지민이가 선생님을 그렇게 따르느냐”며 신기해합니다. 담임에게 녀석 성적을 물으니 말 그대로 녀석 뒤에 아무도 없는(nothing!), 전교 꼴찌라는, 깔끔한 대답이 돌아옵니다. 아, 저 無慾의 섬김 정신이라니!
그 지민이가 보름 전쯤, 1교시가 시작되기도 전에 또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제법 용무를 가지고 왔습니다.
교무실 문을 와락 열고는 걸음걸이도 당당하게 일직선으로 제게 다가온 녀석이 운동장에서 스톱워치를 주웠다며 지우개만한 까만 플라스틱 기기를 내놓았습니다.
올해 학교에서 제가 맡은 업무 중의 하나는 ‘분실물 담당’입니다. 학생이 물건을 주워오면 주워온 학생에게 상점 3점을 주고 그 습득물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엥? 녀석에게서 건네받은 ‘스톱워치’가 시원치 않습니다. 빠르게 점멸하던 숫자는 중간에서 번번이 멈추고 건전지를 끼워 넣는 뒷면의 뚜껑은 헐거워 닫히지가 않습니다.
“야, 시캬, 이거, 누가 버린 걸 주워왔다고 사기 치는 것 아냐? 햐아, 지민이 이 시키, 이거, 상점 받으려고 남이 버린 걸 주웠다고 뻥치는 것 같은데?”
녀석을 놀리려고 짐짓 큰소리로 과장되게 윽박지르자
“아니에요. 정말 주운 거예요. 체육시간에 썼던 스톱워치 같아요.”
녀석이 정색을 합니다.
크크크... 저만치 끝자락에 앉은 신임교사가 허리를 꺾고 웃음을 참습니다.
장물이 아닌 바에야 그래도 녀석의 신고정신을 무시할 수 없겠기에 습득물 대장에 습득 날짜와 장소, 녀석의 이름과 학년, 반을 적고 상점을 주겠노라 약속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오후 운동장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옆자리의 체육선생에게 문제의 ‘스톱워치’를 보여주며 “혹시 체육시간에 스톱워치를 잃어버렸어? 학생이 운동장에서 주웠다는데...”고 하자 돌아오는 대답이 허망합니다.
“이게 무슨 스톱워치에요. 만보기지. 만보기로도 못써요. 깨져서...”
이런, 개, 썅!
그랬던 시키가 지금 뒤에서 껴안은 것입니다.
“더위, 시캬, 저리 떨어져!”
짐짓 성가신 듯 몸을 비트는 액션을 취하는데 불룩한 녀석의 바지 주머니가 눈에 들어옵니다.
“야, 이거 뭐야, 매점에서 먹을 거 사왔냐?”
더 세게 몸을 비트는 체하면서 주머니 뒤지려는 시늉을 하니 녀석, 힘껏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한마디 합니다.
“먹을 거 아니에요. 선생님을 향한 제 마음이 들어 있는 거예요”
뜻밖 대답에 내심 놀라면서도 감동하지 않은 척 되레 말을 험하게 합니다.
“개⦾#&$@%....노무시키, 말이나 못하면.”
그러면서 이번에는 손을 들어 녀석 가슴팍을 때리려는 시늉을 하자, 初夜의 열아홉 새색시처럼 자기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전교 꼴찌’가 또 너스레를 떱니다.
“읏아아∼앜, 여긴 손대지 마세요. 선생님 사랑하는 제 마음이 깨져요오옷.”
지나가던 아이들이 화들짝 비켜서며 키득키득 웃습니다.
저도 속웃음을 참으며 찰싹, 엉덩이 한 대 때리는 것으로 녀석을 放生합니다.
토끼처럼, 용궁을 도망쳐 나와 뭍에 오른 토끼처럼 빛의 속도로 달아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래, 그 정도 붙임성이면 어디 가서 무언들 못하랴싶습니다. 心性이 밝으니 주위 사람들에게 미움은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다음에는 내가 녀석 어깨를 나긋나긋 주물러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에너지 바’ 몇 개 책상 속 서랍에 쟁여두었다가 이따금 슬쩍 쥐어 줘야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四月의 어느... 또 엮인 날에’.
첫댓글 고녀석 참 귀엽네요. 언제 형 어울려짓기할 때 데불고 오셔요. 일시키게. ㅋ ㅋ , 맛난거 사주고 노예로 부려먹게. ㅎ ㅎ
담임도 아니고 수업도 안들어가는데, 어찌 그리 형을 좋아할가? 거참 고것도 이상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