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중엽 비상비재의 정치가 김극성
청소면 늑적골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극성(金克成)의 사당이 있다. 김극성(金克成)은 이조중종(李朝中宗)때의 문신으로서 우의정을 지낸 정치가였다. 그이 자(字)는 성지(成之)이고 호는 청라(靑蘿)우정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진사 김맹권의 아들로 성종 5년 (1474)에 태어나서 연산군(燕山君) 4년(1489)에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처음은 전적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다음엔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선 북평사가 되었다.
그는 벼슬길에 올라서도 사람이 사는 양심의 해방에 대해서 많은 논의를 하는 문산으로서 선비들이 어질고 어지러울 때 참으로 고고하게 풍파를 넘긴 사람이었다. 북평사 이후엔 수찬(修撰) 병조좌랑(兵曹佐郞)등을 거쳤고 1506년 중종반정때 크게 공을 세워 정국공신으로서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하였다.
그후 의주목사(義州牧使) 경상도병마절도사 관찰사 공조참판 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후 우참찬 이조판서를 거쳐 1537년에 우의정에 올랐으나 당시의 세력가 김안로(金安老)에게 쫓기어 흥덕(興德)에서 7년간 귀양살이를 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전통적으로 정사에 임해오던 왕족 부근의 문신들이 대대로 그 맥을 이어올 때 였으므로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도 실상 남의 힘을 입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사를 이끌어 나가는데 애로가 많았다.
그래서 중종(中宗)은 이상주의적 정치를 해보려고 지방의 유명한 도학자들을 제수하고 정치를 하려할 때 였다. 이때부터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박순(朴淳)등을 불시로 채용하고 육품직을 줄때였다. 허나 김극성(金克成)은 정치에 변혁을 따라야 한다고 젊은 도학자들의 정치에 호응하였으니 개혁이 차츰 다른 곳으로 착안되는 것을보고 그는 말하기를「한 나라의 대감은 세력을 잡기위해 군림하는 처사는 옳지 못하오. 한 나라의 대감은 한 나라의 편안과 임금님을 제대로 받드는데 있는 것이요. 물론 백성의 힘을 뿌리로 하고 말이요.」하곤 개혁일변도에서 권세를 잡는데 힘을 쏟는 신진세력의 대감에게 실토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만치 모든일에 정통하였기에 연산군(燕山君)때에도 연산군이 심순문(沈順門)을 죽이라 할 때에 죽기를 무릅쓰고 이를 말렸었다.
그는 흥덕에서 7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김안로(金安老)가 조정에서 쫓겨나게 되자 좌의정으로 정사에 임하게 되었었다. 그는 하루는 집에 들어오더니 그렇게 통쾌한 웃음을 웃어본 일이 없었는데 혼자서 크게 웃음을 웃더니 집안식구들이 모여들자 앉으라고 하더니 이렇게 하나의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자…들 알겠지만 형조판서 반석평 대감을 잘아시지 아, 참 기막힌 일이로다. 그 반대감이 노비출신이야!」가족들은 깜짝놀랬다. 노비는 일생동안을 노비로 생애를 마치는 것이 당시의 정치제도였고 또한 노비가 판서까지 오르다니 이것은 기막힌 산연없이는 이뤄질수 없는 일이였기에 큰 화제거리 였던 것이다.
김극성(金克成)의 말대로 반석평은 학자들이 파당싸움이 한창일 때 그는 세도가 당당할때의 이참판댁 종이었다. 이참판으로부터 귀여움을 받던 그는 글을 잘해서 어렸을 때 이참판이 집안 자식없는 집으로 양자로 보냈고 노비문서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그는 양자로 가서 열심히 공부한 끝에 그래서 영예롭게도 소년등과하여 벼슬길에 올라선 검열 그리고 교리를 거쳐 지방관으로 있다가 선치하였으므로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감사로 돌아다니다가 호조판서로 돌아왔다.
그는 정 2품(正二品) 벼슬로서 초헌을 타고 하루는 등청하다가 길에서 자기를 출세시켜준 이참판의 아들 이오성(李五成)을 만났다. 이오성(李五成)은 역모사건에 관련되어 옥고의 몸이었을 때 그가 호조판서로서 목숨을 걸고 풀어준 일이 있었다.
그가 지금 거지꼴을 하고 자기앞을 지나는것이었다. 호조판서 반평석은 초헌에서 내리자마자 거지꼴을 하고있는 이오성(李五成)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생 몸종 반석평 문안드리옵니다. 제가 바로 몸종이었던 반석평(潘碩枰)입니다.」
이오성(李五成)이 모를 까닭이 없었다. 허나「대감 왜 이러시오. 그렇잖아도 한번 인사를 하러가려 하였었소이다. 옥고의 몸이었을 때 고마웠습니다.」이오성(李五成)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호조판서는 이오성(李五成)을 초헌에 태워서 자기집에 데리고 가선 그후부턴 극진한 대우를 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사실을 알게된 좌의정 김극성(金克成)은 하루는 어전에서 여러 대감들이 임금님과 정사를 논의할 때 임금님 앞으로 한발자욱 나와선 머리를 수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대왕마마 오늘은 소생이 이 나라에 있어서 자장 충절이 깊은 한 충신을 소개할까 하옵니다.」하고는 반석평이 노비출신으로서 관직에 올라 청백리였고 옛주인을 지금도 잊지 않고 상전으로 모신다는 말을 낱낱히 말했다. 그때 반석평(潘碩枰)은 울고 있었지만 조정에서는 인재는 한구석에만 있는게 아니라 삼천리(三千里) 방방곡곡에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임금도 눈물을 흘렸고 그후 이오성(李五成)에게도 큰 공이 떨어졌다. 김극성(金克成)은 비상비재의 정치가였다. 어려운 고비에서도 어려움을 나누워 가졌고 불의를 모르는 수완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고른정치를 베푼 제상(宰相)이었다.
출처:보령시 홈페이지
▶지 정 별: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제143호 ▶지정년월일: 1984.5.17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27-2 ▶수 량: 사당1동(5.1평),외문1동(1.41평) ▶소 유 자: 광산김씨종중 ▶관 리 자: 광산김씨종중 ▶구조: 건조
본 사당은 중종반정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으로 광성부원군에 봉해진 좌의정을 지낸 조선초기 문무를 겸비한 정치가 김극성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청라면 장산리 청천저수지 수몰지구에 있었던 것을 1960년2월16일 현위치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김극성(金克成)(1474∼1540) 67歲. 조선의 문신. 字는 성지(成之), 호는 청라(靑羅), 우정(憂亭) , 아버지는 封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맹권(孟權)이다.
1469년(연산군2) 사마시(司馬試)와 149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각각 장원,전적(典籍)이 되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수찬(修撰) 헌납(獻納) 병조 정랑(兵曹正郎) 사인(舍入)을 거쳐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請國功臣) 4등으로 광성부원군(光城席院君)에 봉해졌다.
의주 목사(義州牧使) 경상도 병마절도사 경상도 관찰사, 공조참판 (工曹參判) 등을 지내고, 1521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523년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어 우참찬(右參贊) 이조판서(吏曹判書)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찬성(贊成)이 되어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으로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흥덕(輿德)에 유배 되었다. 1537년(중종32)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기용되어 찬성 우의정(贊成 右議政)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광성부원군 비문내용]
중종임금 즉위 32년 가정 정유년에 상께서 권행을 처단하고 원로명철을 예로써 크게 불러들이셨다.
이때 전 좌찬성 김극성송도 유배지에서 기용되어 다시 천성이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의정부 우의정에 오르게 되니
상께서 바야흐로 공을 향하여 중히 여기심이요 조야가 그 위엄과 풍채를 상망하였다. 그 후 3년 경자년에 공께서 돌아가셨다. 상께서 크게 슬퍼하시며 사흘간 조회를 철폐하고 조의와 부의며 제례에 임금으로서의 넉넉한 예를 내려 주셨다. 그 해 8월에 보령현의 오서산 기슭에 장사 지내니 대체로 공이 돌아가신지 지금으로부터 74년이 되었다.
공의 여러 자손이 상의하여 돌을 다듬어 공의 행장을 영원히 전하려 불초한 이 사람을 찾아와 말하였다. 우리 선조께서 다행히 장상의 위를 갖추어 관작이나 계급이 모두 제일이요, 훈작이 맹부에 있으니 법도에 맞추어 비를 세움이 마땅하겠습니다.
가령 입조하신 이래 이룩한 사업이 세상에 전해져 뒷날에까지 행하여 지기 넉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묘소를 돌아보건대 아직 비를 새겨 세우지를 못하였습니다. 저의 자손들은 세월이 오래 지나다 보면 그 자취가 아주 임멸될까 더욱 두려운 것입니다. 선생님의 훌륭한 정론을 감히 청하옵니다. 그 말에 나는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옛 기록을 살펴보았다.
분의 정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의 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 광성부원군 김고의 휘는 극성이요 자는 성지이며 광주인이시다.
고려 왕조에서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던 김주정이 바로 그 비조이고, 감찰어사를 지낸 김류를 거쳐 판도상서를 지낸 김윤장이 전라도 도만호를 지낸 김성우를 낳으니 이 분이 바로 김극성 공의 고조이시다 일찍이 왜구를 치라는 명을 받들어 보령을 지나다 그 땅을 좋아하게 되어 자리를 잡고 마침내 보령인이 되었다.
증조 김남호에게는 이조판서가, 감찰이었던 할아버지 김중로에게는 좌찬성이, 진사였던 아버지 김맹권에게는 영의정이 각각추중되었는데 모두 공이 귀하게 됨으로 인한 것이었다.
의정공은 일찍부터 명망이 중하여 문종대왕이 말년에 불러 가상히 여기시며 반궁에 넣었으나 곧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나주전씨에게 장가들어 성화 겁오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바 있어 병진년의 사마시에 장원하고, 무오년의 대과에서도 장원급제하였으니 나이 겨우 스물다섯에 전적에 임명되고 종학의 사회를 겸하였다.
경신년에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조부상을 당하였다. 그후 상복을 벗자 북평사의 직이 주어지니 조정은 공이문무를 겸한 것을 시험해 보고자 함이었다. 임기가 차자 홍문관의 수찬에 올랐으며 얼마 뒤에 헌납에 발탁되었다. 당시 임금 연산군은 심순문이 죄가 없음에도 죽이고자 하여 여러 신하에게 물어오니 다들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다.
공께서 대사간 성세순에게 벼슬이 간관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 죄 없는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도 입을 다물고 있기만 하는 것은 비록 몸을 아껴 그런다지만 직분을 저 버리게 됨을 어찌 하시려요?" 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잠자코 있다가 누군가 "반드시 심순분과 함께 죽는다고 해도 득될 것이 없을 것이요." 라고 하였다.
공께서 성세순과 담소하며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죽고 사는 것은 큰문제이니 제각기 자기 뜻에 맡기는 것이 옳겠소. 오늘 먼저 죽을 사람은 반드시 우리 두 사람니지 어찌 다른 사람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하리요!"라 하고 마침내 심순분의 원통한 형편을 아뢰니 임금 연산군은 비록 들어 주지는 아니하였으나 공등에게 벌을 내리지는 아니하였다.
병조 정랑과 의정부 사인 등의 벼슬을 지내다 중종 임금이 즉위하시자 공께서는 정국공신에는 품계가 정3품인 통정대부에 올랐다. 어버이 봉양에 편의할까 하여 외직을 희망 서천군수가 되었다. 봉양한 지 얼마 안 되어 갖가지 방법도 효험없이 의정공께서 돌아가시니 그 슬퍼하는 정이 지극하여 고을에서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판결사 병조참의를 역임하고 가선대부에 올라 의주목사가 되었다. 당시 의주는 해를 이은 오랑캐의 대침에 시달린 터라 조정의 대신 모두가 공을 적임자로 천거하여 일을 맡긴 것인데 부임하자 의롭게 어루만져 정성을 다하니 백성들이 복종하여 한 해 만에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
무인년에 조정에 들어 에조참판이 되었다가 그 해 겨울 다시 경상병사로 나가고 경진년에 관찰사로 옮기어 송사를 오래도록 묵혀둔 탐관오리를 제거하니 백성들은 한결같이 숙연한 마음으로 송의 높은 덕망을 우러러 사모하였다
이듬해 공조참판이 되고, 정조사로 명나라 연건에 다녀온 뒤 대사헌 겸 세자 빈객이 되었다. 계미년에 일약 예조판서에 오르고 다시 우참찬 이조판서를 지내다 서북지방에 경계할 일이 있어 마침내 공은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기한이 차자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갑신년에 계모상을 당하여 상기를 마치자 다시 예조판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기축견에 찬성에 오르고 다시 대사마와 경연의 지사,세자 시강원의 이사등을 역임하고 신묘년에는 다시 이공이 되었다.
김안로가 영상 정광필을 음해할 때 공도 함께 폄적되어 흥덕에서 귀양사는 7년동안 문을 걸어 닫고, 비록 친구가 찾아오거나 또 무엇을 보내와도 일체 사절하였다. 정유년에 김안로가 복죄되자 공은 정부로 돌아와 곧 우의정에 올랐다. 공이 다시 부름을 받자 도성의 부로들은 이마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리며 "다시 선량한 어른을 보게 되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였다.
공은 용모와 풍채가 수려하고 도량이 넓어 남과 화친은 하지 아니하고, 침착 신중하며 대범하고 엄숙한 성격으로 평상시 거처함에 항상 행동거지가 일정하고, 기쁜 일이나 성나는 경우를 당하여도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그 깊은 마음속을 감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남의 허물을 보면 오로지 가려 덮어 주기를 힘쓰고, 비록 자제에게 잘못이 있어도 완고한 말씨로 타일렀으며 일찍이 노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남을 대할 때는 항상 지극한 정서으로 이르기를 "사람의 근심은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는 데 있다. 일의 곡직에 이르러서는 더욱 굳이 가리려 들지 말 것이며 스스로 반성하여 바로잡을 것이며 비록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나에게 손될 것이 무엇이겠는가?"하였다.
성품이 검소하여 누군가가 집에 칠을 하시라고 권하자 "사치는 뒷날에 상서롭지 못한 것을 남기게 된다."며 물리치고, 가정은 반드시 의로운 방법으로만 가르쳤고 평생 잇속에 대하여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벼슬에 계실 때는 청렴결백하고, 관리의 사무를 판단함에는 반드시 상세히 살피고 신중하였으며 중한 범죄를 처단함에는 밝기가 신과 같았다.
부인 이씨는 부사직 이문충의 따님으로 맑고 아름다운 덕을 지녔으며 아들하나 딸 셋을 낳으니 아들은 양근 군수를 지낸 김인사요, 큰 딸은 별좌 이좌명에게, 둘째 딸은 충의위 윤지양에게, 막내 셋째 딸은 생원 이몽규에게 시집 갔다.
양근이 아들 다섯 딸 셋을 낳으니 아들은 내륜경록, 경지,경사,경조이며 큰딸은 청원도정간에게, 둘째 딸은 이유에게, 막내 셋째 딸은 찰방 조후에게 시집갔다. 이좌명은 아들 하나 딸 넷을 두고, 윤지양은 딸만 둘,이몽규는 아들 딸 하나씩을 두었다. 내륜이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으니 큰 아들이 정준 둘째 아들이 정걸이요, 경록이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으니 아들이 정직이요, 경지가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으니 아들이 정엽이요, 경상이 아들 하나를 낳으니 정열이요, 경조가 아들 딸 둘씩을 낳으니, 큰아들은 정식 둘째 아들은 정석이다. 청원 도정이 아들 딸 둘씩을 낳으니 큰 아들이 광산수 효윤 작은 아들이 금산군 성윤이요, 이유가 아들 둘을 낳으니 큰 아들은 수란 작은 아들이 수원이요, 조후가 아들 하나를 낳으니 국필이다. 공의 친손자,손녀,외손자,손녀가 고루 여러명이다.
오호라! 공께서 사마시와 대과의 양과에 장원한 명성이 일찍부터 무성하여 조정에 올랐으나 조정은 공을 오르지 문한으로만 쓰지 아니하고 더러는 군막에서 몸을 구부려야 했고 어떤때는 변방에서 몸이 이슬에 젖어야 했으니 하루라도 경연에서 편안할 수가 없었던 것은 대개 공의 경륜과 지략이 재상.대신이 되어 정사를 맡아 볼 만한 재능을 스스로 이미 갖춘 까닭이었다.
조정에서 공에게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았으니 오랑캐의 침입으로 서쪽이 급하게 되면 공은 서로, 왜구의 출몰로 남쪽이 급하면 남으로 내달려야 했다. 전례의 면에서도 공이 아니면 아니되어 세 차례나 종백이 되었고, 인물을 전형하고 국정을 관장함에 공이 아니면 아니되어 오래도록 양전의 임무를 맡아 이미 외직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들어오자마자 다시 나가야 했으니 나라에서 크고 작은 일에 공을 쓴 것은 거의 30년, 참으로 옳은 일이었다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공의 기개를 논함에 부족하디. 연산군의 불꽃같은 성미에도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곧 바로 솥에 넣어져 삶아 죽이는 형별을 당하는 지경인데도 공은 일개간관으로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위하여 항론하며 직분상 죽음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는 공의 맡은 바 직분에 얼마나 충실하였던가를 알 수 있으며 절조가 없고 간사한 무리나 붕당을 이루는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아 끝내 그들에게 배척당해 7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하는 중에도 그 지조를 변치 않았으니 이는 공의 기개는 알 수 있게 하니 다 비에 새겨 전 할 일이다.
시중에게 자손 있으니 선비로서 뜻을 지켰도다. 빛을 감추고 세상에 숨어 본분을 좇으며 자족해 하도다. 학문과 덕을 쌓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발양되나니 이에 상공을 낳았도다. 공은 오직 선조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자신의 경사를 펼쳐 나갔도다. 심성은 너그럽고 용모는 준수하며 화기가 봄바람 같았네. 많은 선비 중에 두 차례나 장원급제 그 향기로운 명성 멀리 멀리 퍼져 나가고 동렬 중에 우뚝 솟으니 많은 사람들의 신망이 쏠리도다. 몸이 위태로운 조정에서도 바른 말 하며 의롭게 죽는 것 두려워하지 않았네 우리 중종 임금 등극하시자 도와 공훈이 크게 나타나도다.
이에 장상의 지위에 올라 국사를 도맡았네. 변방과 조정을 들고 나며 많은 일 보살피느라 온갖 고생 무릅썼네. 여러 차례 종백되어 덕화를 널리 펴니 좌우가 모두 마땅하게 되었네. 참소하는 무리들의 해를 당해 일곱 해나 남쪽에 유배당하고 유배가 풀리니 임금께서 공의 충성 생각하여셨네. 공이 적소에서 돌아오니 상공의 수레가 모이고 백성들은 거리에서 손뼉치며 좋아하고 선비들은 조정에서 경사로 여겼네.
이에 금현을 점치어 백간을 거느리며 지덕이 완비하여 통하지 않는 일 없고 사사로운 욕심하나 없으니 벼슬길의 어진 선비들 눈을 씻고 바라보네. 훌륭하신 나라의 원로정승을 하늘은 어찌 그리 빨리도 데려가시나? 공이 우상의 벼슬에서 돌아가시니 슬픔과 영화에 다하였네. 명성이 사방에 전해지고 공적은 기상에 기록되도다! 젊어서부터 근면하여 그 말년을 온전히 누리셨네. 공께서 지니셨던 그 영명한 덕은 높고 멀기도 하여라. 명으로 기술하니 나의 말에 큰 잘못은 없으리라!
명나라 연호로 만력41년 숭록대부 행 에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우빈객 이정귀 짓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