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문
이송희
네 얼굴은 수시로 표정을 바꿨어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한동안 어지러워서 한 곳을 맴돌았지
깍지 낀 연인들이 눈 밖으로 사라지면
가끔씩 멀리서 봄냄새가 흘러왔지
아침을 지나오다가 납빛이 된 네 얼굴
별들이 떨어져도 컵 속 물은 고요해
싸늘한 눈빛이 어제를 돌아 나올 때
모른 척 낯선 얼굴로 너는 또 문을 민다
화이트아웃
누가 날 여기에 데려다 놓았을까?
안개를 건너가면 새 길이 열릴 거라던
귓속에 맴도는 말이
모래알로 흘러내린다.
뭉크의 절규를 저벅저벅 걸었다
허방에 헛디디고 늪지에 빠진 발
경계가 지워진 곳에
덩그러니 몸만 남아
하얗게 물든 밤과 캄캄한 낮의 시간
그 속에 갇혀서 제자리만 맴돌던,
뭉개진 나를 꺼내어
기억을 두드린다
― 이송희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작가/2024)
이송희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고, 《열린시학》 등에 평론을 쓰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대명사들』이 있으며, 평론집 『아달린의 방』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거울과 응시』 『유목의 서사』, 연구서 『현대시와 인지시학』, 그 외 저서로 『눈물로 읽는 사서함』 등이 있다. 가람시조문학상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제20회 고산문학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