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을 아주 조금만 접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구절이다.
모두들 이 구절을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아니 기쁠손가?"하는 식으로 해석한다.
논어를 처음 접한 학부생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이런 해석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일이 무슨 그렇게 기쁜 일일까? 내가 진정한 학도의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해서 배우고 익히는 일이 별로 기쁜 일이 아닐까? 하고 나 자심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국에 와서 한국식 한문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어찌어찌 하다가 悅(說은 한문에서 悅과 통용된다)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얻어서 비로소 저 구절을 납득하게 되었다.
논어가 정리된 송나라의 주희가 살던 시대와 가장 가까웠던 5대10국시대 남당의 서개(徐鍇)라는 사람이 지은 설문해자계전(說文解字繫傳) 이라는 자전의 제35장에 보면 樂자 밑에 이런 구절이 있다. “悅猶說也,拭也,解脫也,若人心有鬱結能解釋之也。” "열은 설과 같으니라 딲음이오, 해탈이라. 마치 사람의 마음속에 엉킨 답답한 것이 풀리는 것과 같다. " 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 바로 이거다. 悅은 기쁨이기전에 당송시대에 해탈, 납득의 의미인거다.
이 것으로 논어의 첫구절을 해석해보자.
배우고 때때로 익히느라면 깨달음이 있지 않겠는가?
즉, 공자님의 말씀은, 어려운 고전을 공부할 때 이해되지 않는 의문이 너무 많지만 자꾸 익히느라면 반드시 풀릴 것이다라는 뜻이었다.
한문공부와 한문해독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한번 공부해서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한번 읽어봐서 진정한 속뜻을 해독할 수 없다.
자꾸 읽고 익히면 문뜩 그 속뜻이 해독되면서 기분이 상쾌해지면서 무릎을 탁 치면서 "유레카"를 외치게 된다.
원래 공자님은 2천년전에 아르키메데스가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의 기분을 지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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悅을 이렇게 해석하고 보니 음, 논어나 맹자에 나오는 답답한 悅자들이 술술 풀린다.
맹자의 어느편에 나오던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략 어떤 사람의 장례에 간 조문객들이 모두들 상주의 망자에 대한 정성을 내심으로 悅하게 생각한다는 구절이 있다. 만약 悅자를 기쁘다로 해석하면 이건 장례식의 기분과 맞지 않는 표현이다. 상주가 망자에 대한 정성에 감복하다로 해석해야 될 것이다. 이렇게 悅자는 여느 한자와 마찬가지로 다의미를 가진 글자다. 맹자에 나오는 心悅誠服의 悅자도 납득이 되어 탄복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마음속으로 기꺼이 탄복한다로 해석하기보다 훨씬 논리적이다.
대충 이런 관점을 가지고 글을 지어 투고했더니 논문격식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논문격식을 갖추어 悅자에 대한 기존의 해석으로부터 장편대론을 하라고 해서 너무 번잡하여 그만두고 그냥 여기에 잡설로 올린다.
첫댓글 이거참 대단한 통찰입니다. 수십년을 품어온 의문이 풀리는군요.
說乎와 樂乎가 대구를 이룬다는 틀에 같혀 있었습니다.
아래 두 구절의 해석에 대한 의견도 부탁합니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있어 멀리서 스스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사람들이 내 실력을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음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있어 멀리서 스스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이건 한문을 모르는 사람이 옥편을 펼쳐놓고 한글자씩 짜맞춘 해석입니다.
한문에도 문법이 있는데 한국식 한문해석이 문법은 무시하고 글자를 순서대로 짜맞추는 경향이 있죠.
有...自는 일종의 한문의 격식으로 글자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 의미가 강합니다.
[(무엇이) 으로부터]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겁니다.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 싶습니다만
제가 의문을 가지는 건 朋자의 해석과 樂자의 해석입니다.
붕은 벗이나 친구로 해석하기보다는 붕당으로 해석하는 편이 정확할겁니다.
朋은 뜻이 맞는 동지적 의미가 강하고 友는 뜻과는 상관없이 친지적 의미가 강하죠.
공자의 당시의 환경에서는 아마도 공자의 정치적 이론에 공감하는 붕당이 멀리서 찾아와서 무리에 가담하니 즐겁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樂을 낙(즐거움)과 악(음악)의 사이에서 어느것을 취하는 것이 더 좋을 지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만, 아직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즐거움의 樂과 풍류의 樂이 동일한자를 사용하는데는 반드시 통하는 모종의 연관성이 있는데 당송시대의 자전들에서 어렴풋이 그 연관성을 찾아보면 대략~
마음이 즐거우니 자연스럽게 콧노래가 나오고 콧노래가 나오니 자연스레 춤을 추게 된다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뜻이 맞는 동지가 멀리서 찾아와서 나의 정치적 주장을 함께 해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고 해석하면 즐겁다고 표현하는것보다 더욱 적절하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확실한 근거를 못 찾았습니다.
그리고 공자가 유독 풍류를 즐겼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마냥 즐겁다로 해석하기보다는
멀리서 찾아온 붕당을 맞아 풍류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식으로 해석하여도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멀리서 온 붕당을 맞아 춤노래판을 벌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식으로 해석하면 문제가 될까요?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는 공자의 당시 상황과 연결하여 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준대도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군자다운 것이 아니겠는가?]로 해석하면 정확할겁니다.
공자의 정치적 주장이 당시의 제후국의 제후들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걸로 해석하는 것이 아마도 정확하겠죠.
그 때 人은 아주 아주 높은 귀족에 대한 지칭이고 보통의 사람들은 民으로 지칭했죠.
論語十則에 대한 저의 천박한 이해이니 그냥 참조만 해주세요.
도올강좌보다 더 좋은데요 ㅎㅎ
영문판 논어에서도 그렇게 해석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중국인들 조차도 깨닫지 못한 사실인 듯 합니다.
그리고 저는 有를 '어떠한(a, any)'으로도 해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