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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원문보기 글쓴이: 보 원
“.... 미국사회는 활기에 넘치고 미국인들은 인상도 밝고 해서 우리보다 업장이 가볍지 않나 하고 느낄 정도입니다. 서구적인 사고방식인 이원적인 삿된 가치관만 지양되면 우리 한국보다 더 열성적으로 불교가 퍼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퇴폐적인 면도 많겠지요. 이런 면은 불교인들이 앞장서서 앞으로 좋은 방향으로 이끌면 될 것입니다........” ('정통선의 향훈' p355)
… 청화큰스님 책을 보면, 이렇게 미국인들이 업장이 가볍게 느껴지신다는 대목이 나온다. 처음 그 문장을 만났던 때부터 그 이유를 찾는 것이 내 숙제처럼 느껴졌었다. 어째서 그러셨을까. 그리고 나도 정말 그렇게 느끼는가….
한국 혹은 한국살기를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미국 또는 미국살기도 처한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이어서, “너 미국 3년 살았지? 10년만 지나봐라. 멀리오는 미국인만 봐도 역겹다”라고 했던 동부친구의 말을 늘 유념하고 살았지만, 이제 10년넘게 살았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흔히 미국이 여자 아이 노인 장애인의 천국이라고 하는데, 수없는 문제들과 사건들이 가득한 신문 등을 보며 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머리가 알고 있어도, 주로 학교다니는 자식들을 관찰하는 소극적인 삶, 자신을 찾는 진지한 불자들로 둘러쌓인 교우관계, 가족에게 긍정의 화신이라 불리는 성향 때문에 체험의 눈은 미국살이도 한국과 똑같다고 별다르게 교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미국이 어떻다 하는 말에 늘 곰곰하다. 실은 불교공부까지 날개를 달아준 셈이니, 내 눈에 비쳐지는 모든 것이 내 지난 필름의 투영일 뿐이라는 관점이란 미래에 닥칠 예정된 편견까지 이미 설 땅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석양실은 아름다운 금빛배 - 산타바바라
너무 붐벼 예약해야만 들어갈수있다는 이 클럽이름은 도道. – 라스베가스
꼬리를 흔들며 인사하는 고래 – 샌디에이고 동물원
모든 놀이공원은 인내의 연습장. 줄 줄 줄서기
내게 그들 업장의 가벼움이란 ‘질서’ 부문으로 다가왔다고 느낀다. 단순히 법이, 벌금이 무서워 지키는 질서보다, 도도하게 암묵적으로 흐르는 것 혹은 비상시에 불쑥 튀어나오는 것들이 무척이나 어른스럽고 후련하고 때론 되새겨지도록 따스했다. 때로 화가 나는 것은 그 흐름을 방해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떠난 후 남은 자들이 받아야하는 크레딧이다. 때로 코리안 이미지가 이렇구나 얼굴 앞에 입혀진 크레딧을 늘 세금처럼 갚느라 더 양보를 하고, 애들을 단속하고, 자원봉사를 하고, 상쇄되기를 애를 쓰는 착한 한인들이 받는 가장 큰 선물은 늘 주변에 맑은 정화의 에너지가 그득하다는 것일 것이다.
..거대한 미국의 질서, 어떻게 지켜지는가를 여행온 아이들에게 보여준 부처님이 나타나셨다.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케이블카를 타는 날. 관광성수기이니 표를 사는 줄도 길고,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줄도 무척 길었다. 그런데 다음역에서 새치기하는 할머니가 등장했다. 직원은 출발한지 얼마 안되던 케이블카를 무한정지시켰다. 안내린다는 고집에 직원은 결국 전화로 경찰을 불렀는데, 참던 한 승객의 ‘내려요’ 비난이 일어날 때에야 온 시선과 함께 후다닥 내려사라졌다. 작은 질서라도 어기면 불편을 모두 감수해서라도 교정한다는 후련함에다 영어실랑이까지 아이들은 눈이 동그래졌다.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케이블카
상황이 종료되어 관광객들의 시간이 다시 흐른 케이블카 속에서 바라본 SF시내
토요일 인파로 뮈어우즈 국립공원에서 주차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주차하는 동안 아이들은 사람들이 줄서서 입장권을 사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그런데 정작 입구를 통과하는데 연패스를 보거나 표를 받는 사람이 없다고 놀란다. “검사를 안헤요!“ “응. 패스가 있으면 그냥 들어가고 아니면 저렇게 사서 들어가고.” 이 모습 익히 보아오신 할머니 말씀, “모두가 양심대로 사서 들어가는거야.”
관광인도 일상 혹은 운전매너로 질서를 만나겠지만, 10년 넘게 살다보니 뭉근한 경험이 다소 쌓인 것 같다. 처음 엘에이 동네탐방 때 한국습성으로 아이들이 뒤에 처져 따라오는데, 미국사람이 깜짝 놀라며 사고나 유괴로 큰일나며 법에도 위반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곧 우리 버릇은 없어졌다 (그 후 한국가서 신호등에서 아이들을 케어하지않고 사람들이 길을 건너는 것에 큰아이는 매우 화를 내기도 했다^^). 당시 한인타운에 일부러 접촉사고를 내는 운전자가 있다고 하여 나는 아예 운전하지 않았는데, 카트삼아 빈 유모차로 시장갈 때, 두 번이나 지나던 사람이 전율하며 “아악! 아이가 없어요!”하며 자기 일처럼 소리를 질렀다. 법적으로 13세 이하가 돌아다니는 것이란 있을 수가 없으므로, 이제 내 눈에도 거슬린다. 그러니 차에 어린이만 남겨졌다면 즉시 신고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눈과 마음이 벌써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에도 불구하고 지금 사는 밀밸리는 달랐다. 분위기가 환경오염 방지를 우선하는 탓에 초등생들도 걷거나 자전거 등교를 권장하니, 이는 도시치안 사정에 따라 다른것 같다) 북가주 월넛크릭 동네탐방 때, 건널목을 내려서려는 우리 앞으로 한 차가 스윽 좌회전을 했다. 그 정도의 시간차는 한국서 익숙하니 무리가 없었는데, 마침 반대편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할아버지가 “서라!”며 소리치며 차를 세웠다. 둘이 아는 동네사람인 것 같았는데, ‘애들이 있는데’ 위협운전했다는 것을 견디시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가 가서 괜찮다고 해서야 그는 풀려났다. 실은 예민하기로 치면 맞는 얘기인데, 노약자가 건널목을 걷다 인도로 완전히 올라가기 전에 자신의 실수로 넘어졌다 하더라도, 혹 운전자의 위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처벌된다는 얘기가 생각난다.
차보다 사람 우선, 자전거 우선인 사회에서 늘 상대편에게 양보하며 살다보니 나는 우스운 폐해를 발견하였다. 아상我相이 짙어진다는 것이었다. 운전 때 양보란 내가 먼저 당신에게 편의를 준다는 것으로 슬 명령의 마음이 들어가 있었던것인가. 결국 10년을 미국인에게 지시하며 살았다고 웃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매우 옳은 일을 하고 살거나 남 못하는 것을 지키고 산다는 마음이 확고한 수행자나 수행단체가 지도력을 발휘하는 경우, '내가 옳다'는 배타적인 성향으로 발전하여 실은 불법과 멀어지는 결과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청화큰스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무아無我의 수행’을 늘 염두에 두지 않아서라 생각한다. 내가 도와준다, 봐준다, 해준다…, 이런 식은 무서운 독이다. 전에 아르바이트에서 ‘내 일이 아니지만 종종 도와줬던’ 어린 직원이 어느날 자기 일인데도 명령투로 말하자 기분이 상해지는 경험을 하곤, 이 ‘~준다’란 자신이 우위라 여기는 독한 아상의 출발이구나 깨달은 적이 있다.
미국인 개개인 속고민이야 어떻든, 고개돌려 바로 안면이 바뀔지라도, 일단 마주치면 늘 밝고 환한 미소로 인사를 하고 덕담을 하는 습성은 세상을 맑히는 순간순간이었다. 물론 자기 이익을 조금이라도 침범하면 깜짝 놀랄만큼 빨리 본실체가 드러나고, 얼마나 이민자에게 편견을 갖고 유리천장이 심한지 넌더리나고 환멸스럽다 토로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열지않고 산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시민정신을 생각할때, 자원봉사자들이 병원이나 도서관, 학교에서 발벗고 나서고, 배려의 매너가 매우 일상적이라 때로 무감각하게까지 느껴지겠지만, 이 ‘버릇된다’는 차원은 결국 작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업보로서 존재한다는 참 나의 개념을 생각할 때 훨씬 불법의 수행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내게 그들의 첫인상은, 석양이 유명한 캘리포니아 서해안 1번 프리웨이에서 중고차가 서버렸을 때, 한 블럭 건너 파라솔에서 쉬던 예닐곱명 남녀가 보자마자 동시에 엉덩이를 떼고 달려오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상태가 무념無念상태라고 표현하셨다면 그게 맞을 것이다. 운이 좋아 선인을 만나서가 아닌 것이, 그 후로도 우린 여러 난처한 상황을 맞았고, 도로가 혼잡하던 비가 오던, 수시로 멈추고 무슨 일이냐며 도와줄 것이 없냐는 질문에 수없이 답변을 반복하면서 이들에게 크레딧이 쌓였다.
이것이 그들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는구나 느낀 것이, 지난봄 큰아이 친구(고교)들을 데리고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데려갔을때, 바로 앞차가 사고가 나니 잠시 재잘거리더니 한 명은 911에 전화를 하고 다른 두 명은 도로에 나가 사고가 났음을 알리는 제스쳐를 하는 등 ‘아무도 맡기지 않은 제 역할’을 하기에 분주한 것이다. 창피하게도 차에 앉아있던 이는 나와 내 큰아이로 해결책에 대한 생각 뿐 실전에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때에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하늘땅 차이라고 느꼈다.
한인 사건때 때로 위축되지만 정작 미국인들이 너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은 초등 2학년때부터 교과과정인 ‘미국인 우리는 모두 이민자이다’라고 전 학생들의 조상과 가계도를 발표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이겠구나 느낀다. 2001년 9. 11.사건이 터진 바로 다음날에 전국적으로 뿌려진 학교의 가정통신문. 판단력 흐린 어린이들에게 뉴스동영상을 반복하지말아 과거와 현재를 혼동케하지 말 것이며, 특히 특정인종을 거론하는 편견과 유언비어를 심지말라는 어른들을 향한 세세한 지침이 적혀있어, 이 큰 땅덩어리가 무섭도록 일사불란하게 문제를 대처한다는 강한 인상이 남았다.
...20여년 전 혜거스님께선, 미국인들이 잘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기본기에 충실하기 때문이라고 종종 맥아더장군의 예를 드셨었다. 라이터를 왼쪽 주머니에 넣는 버릇인데, 1초후 곧바로 꺼낼지라도 단추를 잠그고, 다시 단추를 풀고하는 순서를 절대 건너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기서 절대공감이었다. 규율의 문제보다도, 지키지 않으면 저 속에서 마음이, 정말 마음이 챙피하다. 마음 저 깊은 속에서 챙피함을 느끼도록 하는 사회에서, 번연히 죄를 짓고도 안하무인인 사람을 바라볼 때란 오로지 측은함과 동정이다. 지난 몇 스님의 비리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그 분들께 제일 미안한 것이 그 점이었다. ‘슬 이래도 될까’, ‘쓱 이래보자’ 하마 마음낼 수 있는 소지의 분위기에 내가 존재했다니 나야말로 그를 그런 사회로 내몰아 귀한 마음을 버리게 한 장본인이다. 도반이 나의 전부라는 말씀, 사회적 차원에서 얼마나 생생한 말씀인지 모른다.
이렇게 다들 케잌의 데코레이션을 어떻게 해야 멋질까 얘기하고 있는데, 저기선 아직 속빵의 배율을 못지켜 굽지도 못하고 있다면 지체없이 기본기부터 어서 회복해야 한다. 자기로부터만 잘 출발하면 그리 어렵지않은 일일게다. 그리고 청화큰스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삿된 가치관이 미국에서 잘 고쳐지도록 하는 것은, 불자보다 더 불자같이 사는 이 미국인들보다 바르게 정견으로 살아야하는 미국불자들의 숙제이기도 하다. 거기에 내가 밝다고 믿고있는 것은, 고등학교까지 졸업하면 이미 교과과정상 불교의 사성제, 팔정도를 알게 된다는 것이어서 실로 미국엔 엄청난 전법의 힘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행온 조카들은 무엇을 보고갔을까. 이제 개학의 초입에서 다들 열심히 살겠지. 이번에 많은 의자들을 관찰했었다. 금강도반님들과 함께 앉고싶은 의자. 옆에 앉아서 세상을 어떻게 봐야할지 우리의 여정은 어떠한 것인지 오래오래 듣고 나누고 배우려 앉을 의자.
그 중에 제일은 역시 그랜드캐년의 벤치였다!
그랜드캐년 벤치
감사합니다.
보원합장
첫댓글 미국인의 질서지킴과 남에대한 배려심등 기본기가 잘되었다고 평할만 하네요
몸은 좀 나아지셨어요?
예, 뇌물이나 새치기, 편법, 그런게 없다고 할 만 합니다.
그것이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미국을 움직이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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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