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4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오늘은 어머니께서 천국 가신지 5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평생을 믿음으로 사셨던 어머니, 살아계실 때 늘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천국소망에 관련된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지금은 그 나라에서 참 평안을 누리고 계실 줄 믿습니다.
우리 자녀손들도 어머니 할머니의 믿음을 본 받아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우소서.
땅에 속한 것에 치심하지 않고 영원한 그 나라에 소망을 두며 살아가는 믿음의 자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주의 날 공동체로 모여 함께 예배하오니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12:1-12
제목 :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 나의 묵상
막 11장은 고난주간의 화요일 곧 성전에서 일어난 예수와 유대 종교지도자들간의 권위 논쟁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을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패역과 위선을 지적한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온다(마 21:28-32).
그 후에 오늘 본문과 병행본문인 포도원 주인과 악한 농부들의 비유가 나온다.
이 또한 고난주간의 화요일에 성전에서 일어난 일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은 1차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한 사람은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이다.
이 포도원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다.
주인에 의해 소출을 받으러 보냄을 받은 종들은 선지자들이다.
마지막으로 보냄을 받은 아들이자 상속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기 전에 먼저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을 능욕하고 때려죽이기까지 하였다.
(살전 2:15-16)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그 일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소작 농부들이 진멸당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 특권으로 알았던 선민의식에 대한 위치를 잃어버리고 멸망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또한 포도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다는 것은 구속사에 있어서 혈통적 이스라엘 대신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영적 이스라엘이 그 지위와 신분을 대신 하게 될 것을 상징한다.
결국 주님께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시편의 말씀(시 118:22)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이 어떻게 되실 것인지에 대하여 예언하신 것이다.
곧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버림받을 것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건축자들에 해당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그 돌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무 데나 방치하고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 말씀을 마태는 좀 더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질 것이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가루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마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여기 나오는 돌은 다름 아니라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반석인 돌이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고 또 깨트리기도 한다.
그 돌로 인하여 온갖 시험을 받는다는 말이다.
(롬 9:30-3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한 농부들을 지칭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의의 법을 따라갔지만 믿음을 따라 가지 않고 자기들의 행위인 율법을 따라갔으므로 온전한 의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런 자들은 부딪힐 돌에 부딪힌다.
그 돌이 바로 반석이신 그리스도라는 돌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 돌에 부딪히는 것이 은혜다.
왜냐하면 돌에 부딪혀서 다치거나 깨지면 부끄럽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씨뿌리는 자 비유가 있다.
그 중에서 돌밭에 씨를 뿌릴 때 그 돌에 흙이 얕게 있어서 잠시는 뿌리를 내리지만 돌 때문에 깊이 내리지를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다는 것이다.
밭은 스스로 개간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런 밭에 해당하는 우리가 스스로 개간하여 좋은 밭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씨앗이 뿌리내리는 것을 막아서는 돌이신 예수님이 말씀의 씨앗에 의해서 깨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내가 아무리 의로울지라도 스스로 좋은 밭이 될 수는 없으나 그런 나를 품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깨지고 쪼개져서 고운 흙이 되어 좋은 밭이 되신 것이다.
우리의 진짜 삶을 만물 안에 있는 이 땅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그 나라를 살아야 한다.
그 삶은 영생이며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아는 것은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렇게 말씀이신 아들과 날마다 영생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요 복이다.
나는 이방인 중에 이방인이요 죄인 중에 괴수이다.
그런 내가 어떻게 영생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실로 아찔하다.
나는 육신으로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것은 아담의 생명으로 아래에서 난 것이다.
이처럼 아래에서 아담의 생명으로 난 자가 아담의 생명으로 살다가 아담의 생명으로 죽게 되면 그것처럼 비참한 인생이 없다.
하지만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거듭남이란 생명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아담의 생명에서 아들의 생명으로 말이다.
그렇게 바뀌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벧전 1:23-25)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될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나는 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였다.
그래서 이 땅에서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받으며 살고자 하였다.
물론 예수를 믿었지만 그 목적은 예수를 통하여 나의 뜻과 필요를 채우는데 있었다.
목사가 된 나는 목회도 그런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보란듯한 목회를 하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허영투성이와 같은 목회를 하던 나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그 죽음은 나를 아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진짜 생명으로 살리는 주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날마다 주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영생을 맛보며 누리고 있다.
정말 돌에 맞아 깨졌을 때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지금은 딱히 하는 일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다.
내가 무엇을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자기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인 것을 알면서도 회개할 줄 모르던 유대 종교지도자들 안에 바로 내가 있습니다.
군중들을 두려워해서 함부로 행하지 못하는 그들은 마치 사무엘 시대의 사울왕과 똑같은 자들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아말렉 사람들의 실한 가축들을 끌고 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무엘이 책망하자 그는 이렇게 변명을 합니다.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닌 것이지요.
내 안에 그런 사울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를 주님께 내어 드립니다.
쓰레기와 같은 자를 주님이 받을 것이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나를 내어드리고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상임을 알기에 자기부인의 모습으로 나아가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푸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