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러빕
20년 7월 29일의 A-Z
A
A는 저녁으로 페퍼로니 피자와 마법가루 치킨을 먹었다.
B
B의 일기
엄마가 거나하게 취해 들어오시더니 별안간 낄낄 웃으며 용돈을 주시곤 방으로 들어가셨다. 두 시간 뒤 아빠도 취해 들어오시더니 별안간 미안하다며 용돈을 주시곤 방으로 들어가셨다. ?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평소 가지고 싶던 운동화를 주문했다. 언닌 바보야. 오늘 같은 날 집에 있었어야지. 킥킥.
C
밤에 친구가 찾아왔다. C는 반가운 마음에 친구의 이름을 크게 마주 불렀다. 동거인이 나오는 바람에 더 이상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지만 있는 힘껏 방방 뛰며 친구를 맞이했다.
D
D는 길을 걷다 5만원권 한 장을 발견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그냥 두면 누군가 가져갈 것 같아 일단 주웠다. 혹시 몰라 10분 정도 근처를 서성였다. 사람은 오지 않았다. 돌아서는 길에 동생에게 연락했다. 오늘 저녁은 페퍼로니 피자와 마법가루 치킨이라고.
E
E는 사내 비밀연애 중이었는데, 딱 300일이 된 오늘 반 공개 연애가 되었다. 옆 팀 직원에게 애인과 키스하고 있는 모습을 들켰기 때문이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말할까 봐 하루 종일 전전긍긍했다.
F
F는 밤에 산책을 나갔다. 함께 산책을 나선 사람이 멍 때리는 사이 F는 도망쳤다. 그리곤 짝사랑 상대의 집 앞에 가 이름을 크게 불렀다.
G
G는 피자 배달 갔다가 같은 집에 배달 온 사람과 마주쳤다. 헬멧 때문에 못 알아볼 뻔했지만 ‘19,000원 이요.’ 하는 목소리를 듣고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중학교 동창이자 첫사랑. 그 애다.
H
H는 오늘 5만원권 한 장을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왔던 길을 돌아가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주워갔다면 부디,, 부디,, 조금이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갔기를.
I
“당신 일찍 들어오는 건 좋은데 말이야. 정신 좀 챙기지그래? 나 좀 봐. 멀쩡하잖아. 남의 집 초인종은 왜 그렇게 누르는 거야. 옆집에 누가 있었으면 어쩌려고. 넥타이는 어디다 뒀어?” I는 이제 막 옆집 앞에 널브러진 남편의 두 다리를 집 앞까지 잡아끌며 말했다. 웅크리는 남편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곤 집으로 들어갔다. 아직 입 돌아갈 날씨는 아니기에 좀 더 두기로 했다.
J
J는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300일 된 애인과의 키스 장면을 직장 선배에게 들켜버렸다. 심란한 마음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는데 잠시 멍한 사이 강아지가 도망쳤다. 더 심란해졌다.
K
K는 공원을 지나다 헬멧을 사이에 두고 벤치 양 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았다.
L
신입사원 L은 왠지 모르게 하루가 무척 피곤했다. 양쪽에 앉은 선배들이 계속 자신을 힐끔댔기 때문이다. 왜 자꾸 힐끔대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다듬다가 하루가 다 갔다.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걸까?
M
M에게 오늘은 살면서 가장 창피한 날이었다. 구내식당에서 누군가 흘린 포도 껍질을 밟고 뒤로 나자빠졌기 때문이다. 껍질을 흘린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셔츠를 아름답게 물들인 제육의 향기가 하루 종일 따라다니는 고통을 상대도 꼭 느끼길 바랐다. 순간 풋 하고 웃던 후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참을 수 없는 창피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N
N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방망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웬 푸들이 대문 아래로 코를 내밀고 있었다. 돌아가는 꼬리를 보니 마당에서 키우는 진돗개와 친구인 것 같았다. 산책 줄이 그대로 딸려온 것을 보곤 인식표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했다.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O
O는 바쁜 부모님 대신 치킨 배달을 나섰다. 배달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러 세웠다. 같은 집에 배달 온 사람인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렸다. “안녕” 그 애다. 중학교 동창이자 첫사랑.
P
P는 술자리 내내 후배들의 푸념을 들어줘야 했다. 한 놈은 넘어지고, 한 놈은 돈을 잃어버리고, 한 놈은 무슨 이유인지 짝사랑을 끝내야겠단다. 세 놈이 돌아가며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말하는 통에 넥타이가 젖었다.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P는 넷 중 가장 힘든 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잔을 들이켰다.
Q
Q는 벤치 양 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빤히 보는 고양이를 보았다. 마치 그들의 얘기를 알아듣는 듯한 눈빛에 신이 잠시 고양이 모습으로 변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R
R은 오랜만에 큰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딸의 목소리가 왠지 들뜬 것 같아 좋은 일 있냐고 물었더니 5만원을 주웠다고 한다. 최근 남편이 크게 아프게 되는 바람에 취직 후 7년간 모은 적금까지 탈탈 털어 모두 내놨던 딸이다. 아직 공부 중인 둘째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 분명했다. 복권에라도 당첨된 양 기뻐하는 딸의 목소리에 마음이 아렸다.
S
S는 냉장고 정리를 해야 했다. 온 가족이 귀갓길에 포도를 잔뜩 사 왔기 때문이다.
T
T는 오늘 짝사랑을 끝냈다. 아니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회사 비상계단에서 키스하고 있는 짝사랑 상대를 마주쳤기 때문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두 사람이 모두 여자였다는 것이다. 왜 쫓아갔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U
U는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옆집 아저씨가 옆집 앞에 누워계셨다. 그냥 들어가려다 입 돌아가실까 봐 깨웠더니 머쓱해하시며 집으로 들어가셨다. 옆집 큰딸인 친구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모르는 눈치다.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V
V는 마트 앞을 지나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포도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남편이 웃는 모습을 떠올리며 포도 두 상자를 차에 실었다.
W
W는 벤치 양 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는 고양이의 사진을 찍는 사람을 보았다.
X
X는 배달 나간 딸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딸이 나간 지 한 시간하고도 십분을 넘기고 나서야 알아챘다. 초저녁부터 만취한 손님 넷을 보내고 나니 그제서야 딸이 생각났다.
Y
Y에게 오늘은 꽤나 통쾌한 날이었다. 매일 같이 트집 잡아 갈구는 팀장이 누군가 떨군 포도 껍질을 밟고 자빠졌기 때문이다. 운동신경이 괜찮은 편인지 엉덩방아로 끝났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라도 깨졌으면 웃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Y는 포도요정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일주일 동안 먹을 포도를 사서 귀가했다.
Z
Z는 하루 종일 집에 누워만 있었다. 며칠 전에 허리를 크게 다치는 바람에 거의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고 바깥바람을 쐬었다. 창문 밖으로 피자와 치킨 냄새가 풍겨왔다.
‘아 배고프다.’
배고프다고 생각하는 찰나 동네 개들이 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애들이 친구라도 만났나 보군.’
잠시 후 고요해지더니 별안간 초인종을 연타로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이런 장난을 치나?’
Z는 창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난 오늘 한 것도 없는데,, 그럼에도 세상은 잘 돌아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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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수정
첫댓글 와 재밌당... 단편소설하나 뚝딱한거같아
재밌게 잘 읽었어!
완전재밌어!! 신기하다 ㅎㅎ
정세랑 작가 피프티 피플 엄청 좋아하는데 너무 재밌게 읽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