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다 지고 난 후에는 어찌합니까
體 露 金 風
가을이 깊어 간다. 산중의 새벽은 코끝이 시리다.
얇은 수건을 돌돌 말아서 목에 두르고, 털 모자를 머리에 쓴다.
어느 사이 고무신도 털신으로 바뀌었다.
한 뻔씩 새벽녘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움츠린다.
어스름히 보이는 나무는 벌써 푸른 잎들을 떨어뜨리고는
가지마다 붉은 감을 등불처럼 빍히고 말쑥하게 서 있다.
한 스님이 "낙엽이 다 지고난 후에는 어찌합니까?" 하고 물으니
운문 선사가 "체로금풍(體露金風, 잎이 떨어지니 나무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다)"
이라고 답했다. 가을을 묻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큰 가르침을 주는 선문답이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에 새싹을 튀워낸 나무들이, 푸르고 빽빽하게
하늘은 가리던 여름의 나뭇잎들을 서늘한 가을바람에 일제히 놓아버린다.
나도 언젠가는 이 가을의 나무들처럼 놓아야 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는 애써 만들어 놓을 것들을 놓고
이별해야 할 때가 있다. 아니 어제를 놓아야 오늘을 살 수 있듯이 누구나 순간
순간을 놓고 지금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맞는 말이지만 허망하기
짝이 없다. 그 허망함을 채우고 삶을 값지게 만드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매년 가을이면 마당에 높이 12미터의 크고 오래된 부처님 탱화를 걸고
야단법석을 연다. 하이라이트는 만물공양 시간. 참석한 대중들이 지난 1년 동안
마음을 모아 농사 지은 것을 올리는 시간이다. 햅쌀, 콩, 호박, 깨, 공예품, 떡
등 무엇이든 가능하다. 이렇게 저마다 거둔 것을 공양하며 발원문을 남긴다.
"미황사 참사람의 향기에서 8일동안 수행했던 안성에서 배농사를 짓는 유근식입
니다. 비와 햇볕을 받으며 속살을 키우고, 태풍과 천둥을 견뎌 마침내 한 알
한 알 영근 배를 올립니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배 농사 잘 짓기를 발원합니다."
"미황사 아래 치소마을에서 파프리카 농사를 짓고 있는 박한영입니다.
올해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파프리카 농사를 잘 지었습니다.
가족을 떠나 먼 이국땅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길 발원하며 파프리카를 올립니다."
"50년의 도시 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산면 산막리고 돌아온 조희금, 이개석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에 건강하게 돌아와 좋은 집을 지었습니다.
시골마을 어르신들이 건강하기를 발원하며, 성주한 집 사진을 올립니다."
"해남 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문선지입니다. 저는 부처님의 경전을
사경하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쓴 사경 3권을 올립니다."
"저는 송종리에 사는 이태성입니다.
송종 앞에 있는 섬 화도에서 할머니가 따서 말리신 톳을 올립니다.
섬에서 외롭게 사시는 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전주 "참좋은 우리절'에서 성지순례온 임재훈입니다.
대학원 졸업논문을 준비하던 중 몸이 너무 아파 포기할까 하던 중
아미타불염불정진을 하면서 1주일 만에 논문을 완성하여 최우수논문으로
뽑히기까지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음을
감사드리며 졸업논문을 올립니다."
"절 아래 서정 마을에서 무화가 농사를 짓고 있는 이순기입니다.
태풍으로 작은 피해를 봤습니다.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농사를 지었습니다.
작은 일로 반목하고 있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면서 살아가길 바라며 무화과를 올립니다."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삶을 사랑할 귀중한 시간을 만들어주는 법석은
늘 즐겁다. 우리 모두 봄부터 여름, 가을까지 부지런히 일하고 땀을 흘렸다.
매일 매일 온갖 유혹과 비교의 대상들 속에서 자신을 꿋꿋하게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하면서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순간순간 힘을 만들어내고 기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 해 동안 자신이 가꾼 삶이 수확불을 부처님 앞에 공양하며
많은 사람들과 공덕을 나누는 자리는 그래서 중요하다.
물흐르고 꽃은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