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장에서는 대 선제후의 뒤를 이어서 프로이센의 기반을 닦아, 그 후에 프리드리히 대왕이 프로이센 왕국을 유럽 최강의 군사강국으로 만들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병사왕"(Seargent King)에 대한 부분입니다. 사실 프로이센의 군주 하면 다들 프리드리히 대왕만 떠올리는데, 만약 대 선제후와 병사왕의 노력이 없었다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렇게 뛰어난 업적을 쌓지는 못했을 겁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끈 군대는 바로 대 선제후와 병사왕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의 글을 자세히 보신 분이라면, 제가 계속해서 "가문"을 중요시했다는 걸 눈치채셨을 겁니다. 사실 이건 당시 유럽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국가라기 보다는 "가문"의 영토였습니다. 그리고 군대와 신민들도 국가나 민족이 아닌 가문(왕조)을 충성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즉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 군대는 오스트리아라는 국가나 독일이라는 민족에게 충성한 것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했으며, 프랑스 군대는 부르봉 가문에 충성했습니다. 이탈리아를 침공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충성을 다 바친 이탈리아 사람들 역시, 당시에는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이탈리아 민족"이 아니라 "합스부르크"라는 가문이었기 때문이죠. 이렇듯이 당시 유럽은 가문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한 나라의 군주는 사실상 그 나라를 지배하는 가문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국가를 신성로마제국 이라는 이름보다는 오스트리아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1713년, 브란덴부르크를 "프로이센 왕국"으로 바꾼 프리드리히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합니다.(대 선제후와 이름이 똑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병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진 인물입니다. 사실 대 선제후의 평생에 걸친 노력 덕분에, 이 시기가 되면 프로이센 왕국은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군사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여전히 유럽의 변두리에 있는 소규모의 후진국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프로이센 왕국은 이제 새로운 군주 병사왕과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에 의해 유럽 최강의 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왕위에 오른 후부터, 병사왕이 언제나 생각하고 있던 것은 호헨쫄레른 가문 군대의 강화였습니다. 그래서 대 선제후와 마찬가지로 병사왕도 호헨쫄레른 군대의 증강을 위해 그의 온 생애를 바칩니다. 그는 평생동안 언제나 오직 군복만을 입게 되었는데, 이건 곧 다른 나라의 군주들도 흉내내게 됩니다. 또한 병사왕의 지도 아래에서 프로이센의 관료제도는 더더욱 개선되어, 어떠한 부정부패도 용납하지 않게 됩니다. 시민들로부터 거둔 세금은 모두 국왕에게 전달될 정도였죠.(이게 왜 대단하냐 하면,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는 국가가 거둔 세금의 2/3를 관료들이 횡령했거든요. 오직 1/3만이 황제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당연히 국가는 돈이 없고, 그래서 더더욱 국민들을 쥐어짜야만 했습니다. 그럴수록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심해져 갔고......) 그리고 관료들의 전문성과 효율성 역시 극도로 뛰어났고, 이는 호헨쫄레른 가문 전체의 활력과 효율성을 뒷받침했고, 나중에 프리드리히 대왕 때, 프로이센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도 끝까지 살아남는 원동력이 됩니다.
군대 역시 계속 증강되어 가서, 즉위 초에 4만 명이던 군대는 곧 8만 명으로 증강되었습니다. 병사왕이 항상 머릿속에 두던 것은 프로이센 군대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 군사훈련 방법이었으며, 호헨쫄레른 가문의 군대 병기 공장과 군복 제조공장은 쉴새 없이 가동되었습니다. 이렇게 군사력을 증강시켰다면, 보통은 자신의 군대를 전쟁에 보내서 시험해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 해지는 건 당연했지만, 병사왕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전쟁이란 이기든 지든 간에 군대와 국가에 피해를 준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사왕은 굳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서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면 그 편을 택했습니다. 이러한 병사왕의 신중함 덕분에 프로이센 군대는 무의미하게 소모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병사왕은 필요할 때는 군대를 사용할 줄도 알았습니다. 바로 호헨쫄레른 가문의 숙원인 "포메라니아 획득"이 그것이었습니다. 대 선제후는 전쟁을 통해 포메라니아를 되찾는 데 성공했지만 부르봉 가문의 협박 때문에 그것을 스웨덴에게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병사왕은 그 신중한 정치 덕분에 드디어 포메라니아를 차지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당시 스웨덴 왕국의 왕은 칼 12세였는데, 그는 자기 나라의 막강한 군대를 사용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덴마크, 폴란드와 러시아를 순식간에 멸망시켜 버린다는 황당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일으키고야 마는데, 이를 "대 북방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칼 12세의 스웨덴 군대는 덴마크로 쳐들어가 박살을 내고, 곧 폴란드로 쳐들어갑니다. 그리고 폴란드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후에 스웨덴의 꼭두각시를 폴란드 왕으로 앉혔습니다. 여기에 자신만만해진 칼 12세는 당시 표트르 대제가 다스리는 러시아로 쳐들어 갑니다. 그러나 너무나 먼 원정은 스웨덴 군대를 지치게 만들었고, 이 때를 노린 러시아 군대의 공격으로 스웨덴 군대는 폴타파 전투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이를 보고 스웨덴 주위의 국가들이 스웨덴을 공격했는데, 이 때 프로이센의 병사왕 역시 그 공격에 참여했고, 스웨덴 제국은 어쩔 수 없이 본국 스웨덴과 핀란드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회를 잘 이용한 덕에 병사왕은 군대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포메라니아를 완전히 얻게 됩니다.
드디어 호헨쫄레른 가문은 포메라니아를 얻음으로서 "브란덴부르크" 지역과 "동프로이센"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그 어떤 나라도 시비를 걸지 못했습니다.
병사왕은 군대 뿐만 아니라 국가의 인구를 늘리고 풍요롭게 하는데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각지에서는 종교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병사왕은 그 사람이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그가 호헨쫄레른 가문에 도움이 되기만 하다면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이민정책은 이전에 대 선제후가 실시했던 정책으로서, 병사왕도 충실하게 그 정책을 물려받았습니다.
병사왕의 이러한 관대하고도 포용력 있는 이민 정책은 수많은 이민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지금 보면 병사왕의 행동은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절대 당연한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각국의 군주들은 자신의 백성들이 무슨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 엄청 신경쓰고 있었고, 자기가믿는 종교를 믿지 않는 백성들은 사정없이 괴롭혔습니다. 단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카톨릭 신자였는데,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매우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신앙을 카톨릭으로 바꾸게 하기 위해 잔인한 박해를 했습니다. 특히 악명높은 것이 바로 "용기병"들을 오직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가정에만 숙박하게 한 겁니다. 거칠고 성욕에 가득찬 용기병들이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가정에 하룻밤을 보내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루이 14세의 목적은 카톨릭 신앙을 가지지 않는 백성들은 모두 프랑스에서 나가라는 거였습니다. 이런 루이 14세의 박해는 대단한 성과를 거두어 , 수많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은 바로 프랑스 최고의 기술자, 상인, 예술가, 과학자, 학자들이었다는 겁니다. 이들이 전부 다 빠져나간 후에야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가장 뛰어난 기술자와 과학자, 학자들을 모조리 다 잃어버렸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수공업은 몰락해 버리고 맙니다. 최고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졌으니........ 그럼에도 루이 14세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모두 쫓아낸 걸 자신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이라고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ㅡ.ㅡ; 루이 14세가 죽은 후에야 많은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트 박해 때문에 프랑스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한탄하게 됩니다.(볼테르 같은 경우 거의 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키게 한 건 루이 16세가 아니라 루이 14세입니다. 이 인간..... 진짜 바보 황제라고 밖에 할 마음이 없습니다. 괜히 자기 자존심을 위해 몇십년에 걸쳐 계속 전쟁을 하는 바람에 프랑스 경제를 완전히 다 말아먹고, 국가를 빚더미에 깔리게 만듭니다. 또 베르사이유 궁전이다 뭐다 해서 온갖 사치를 다해서, 엄청난 빚더미에 깔려있는 국가재정을 더더욱 힘들게 합니다. 베르사이유 궁전 하나를 만드는데 엄청난 비용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한마디로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 완전히 거덜나버렸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기술자와 학자들을 다 쫓아버려서 공업을 박살내놓고..... 제가 알기로 프랑스 사람들 중에서 루이 14세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은 단 1명도 없는 걸로 압니다)
그런데 이렇게 쫓겨난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받아준 사람이 바로 대(大) 선제후와 병사왕이었습니다. 이들은 따뜻하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맞이하였으며, 프랑스 이주민들 덕분에 프로이센 왕국의 공업과 상업, 문화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구도 크게 늘어서 (당시에는 인구가 곧 국력이었습니다) 처음에 100만도 안되던 인구가 225만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은 더더욱 많은 이민자들을 불러모으게 됩니다.
이들 이주민들 덕분에 공업이 발전하자, 병사왕은 중상주의 정책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어, 수출업종을 장려하여 많은 외화를 벌게 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왕실의 경비 지출은 절약에 절약을 거듭해서 최소 수준으로 줄였습니다. 그래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돈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관료제 개혁, 외국인의 이주 장려, 공업 발전 장려, 수출 장려, 왕실 경비 절약....... 등등의 정책으로 인해 호헨쫄레른 가문의 프로이센 왕국은 강대국으로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쌓아가게 됩니다. 세금을 전혀 올리지 않았는데도 국가 수입은 크게 늘어 매년 700만 탈러(달러가 아니라 '탈러'입니다)로 늘어났고, 국고에는 800만 탈러에 달하는 돈이 저장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는,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국가는 빚더미에 앉게 되고, 전쟁비용을 위해 계속 세금을 늘려갑니다. 너무 늘어난 세금 때문에 국민들은 점점 분노에 가득차 갔으며, 루이 14세의 바보짓으로 쫓겨난 사람들 때문에 인구는 줄어들었고...... 이는 프랑스 왕국의 약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1740년, 병사왕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는 병사왕과 대 선제후가 물려준 어마어마한 유산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개시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프리드리히 대왕입니다. (계속)
(PS. 1. 사실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데 가장 열을 올린 건 프리드리히 대왕입니다. 이 양반은 아예 이민국까지 설치해두고 열심히 이민자들을 받아들였죠. 일단 루이 14세의 얼간이 같은 프로테스탄트 내쫓기 정책을 설명하려다 보니 필요이상으로 병사왕의 이민정책을 좀 부풀린 감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정책을 가장 열렬히 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대왕입니다.
2. 병사왕(Seargent King)이라는 이름은 한국어로 여러가지로 변역되더군요. 다른 곳에서는 군대왕이라고 번역합니다. 뭐, 하사관 왕이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더구만요.)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제 프리드리히와 빌헬름만 나오면 끝인가요? 아쉽네ㅋㅋ 재밌게 잘봤습니다
신교도들이 추방당하면서.. 프랑스의 면직물 공업 등은 사실상 전멸했지요.. -_-; 루이14세.. 도대체 뭐하는 작자인지..
아니요. 제1차 세계대전으로 호헨쫄레른 가문이 망하는 부분까지 다룰 겁니다.
오... 기대하져!!
루이 14세의 재상이었던 콜베르란 인물이 너무 불쌍하죠;;; 온갖정책으로 프랑스의 국력을 향상시키는데 각고의 노력을 했음에도 그놈의 왕이란 작자가 다 까먹어버리죠.
'본인은 독일황제를 퇴임한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왕으로는 재임할것이다'라고 발표했으나 수상의 배신으로 네덜란드로 망명길을 떠날수 밖에 없었던 불운한(? 제무덤을 팠다고 해야하나-ㅅ-;; ) 호엔촐레른왕가의 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