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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주일에 읽을 두 복음묵상을 하나씩 올립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예루살렘 입성 복음 묵상
✠ 마태오복음 21,1-11
오늘 우리는 교회 전례력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성주간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당신 지상 생애의 마지막이자 가장 결정적인 한 주간을 여십니다.
오늘 복음의 한가운데에 등장하는 ‘어린 나귀’,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타시기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작은 짐승은, 오히려 그분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어린 나귀’는 그분이 걸어가실 길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군마가 힘과 전쟁을 상징한다면, 어린 나귀는 온유와 평화를 상징합니다. 복음서에는 암나귀와 어린 나귀가 함께 언급되지만, 예수님께서 올라타신 것은 어린 나귀였습니다. 아직 어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 작은 나귀의 모습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방식으로 오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세상의 임금들이 보여주는 권세와 정복의 행진이 아니라 섬김과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입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입성을 시작으로 성전을 정화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성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십니다. 그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시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신 뒤 체포되십니다.
예수님의 입성을 맞이한 이들,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축제를 지내러 올라온 갈릴래아 사람들은(루카 19,37; 요한 12,12)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본래 “주님, 저희를 구원하소서!”라는 간절한 기도였던 이 외침은, 그 순간 “메시아 만세!”라는 환호로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 환호는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외침으로 바뀌고 맙니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사제들과 원로들이 선동한 또 다른 무리도 있었지만(마태 27,20), 환호하던 이들 가운데 일부가 마음을 바꾸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금요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생을 마치시고, 성토요일의 침묵을 지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십니다.
이 모든 여정의 출발점이 바로 오늘, 어린 나귀를 타고 이루어진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단순한 환영의 순간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의 시작이며, 예수님께서 어떤 메시아이신지를 드러내는 계시의 순간입니다.
그분은 세상을 정복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묻게 됩니다.
나는 힘과 사랑 중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낮아짐을 기쁘게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드러남과 높은 자리를 추구하고 있는가?
(천 사비나 수녀님)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강론>
(2026. 3. 28. 토)(요한 11,45-56)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요한 11,45-54)”
1) 48절의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라는 말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로마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라는 말은, 로마제국이 반란을 진압하려고 군대를 보내면 유대교는 망할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도 멸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비록 로마제국의 식민지이긴 했지만,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회 의원들은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인지, 가짜 메시아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또 속마음으로는 민족의 안위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진짜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최고의회를 비롯해서 지도층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기득권을 누리면서 사는 것에 만족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카야파가 한 말은, 민족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는, 뜻으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는 것보다”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그자를 죽이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다.”입니다.
그의 말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고민하지 말고, 그냥 그자를 죽입시다.”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예수님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자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은 기득권 유지를 방해하는 걸림돌일 뿐이니 그냥 제거하자는 말입니다.
2) 51절과 52절은, 복음서 저자의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살인자들 쪽에서 보면,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살해당한 일이지만, 예수님 쪽에서 보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 사람들, 즉 이방인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일입니다.
‘모든 사람’에는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들도 포함됩니다.>
3)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은,
그 자체로 불법인 일입니다.
재판도 없이 사형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생명을 주려고 오신 메시아를 배척한 일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 자신들의 영혼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과 같습니다.
최고의회가 로마제국을 두려워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몰랐더라도, 그렇게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것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자체도 ‘큰 죄’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려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라고 생색내면 안 됩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 통곡하는 여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루카 23,28ㄴ.31)”
성주간을 지내는 신앙인들의 기본자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 가운데에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끝까지 자신의 기득권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자들은 결국 서기 70년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할 때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3월28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요한 11,45-56
착한 목자는 상처 입은 양의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복음 11장 50절)
위 말씀과 관련해서 헨리 나웬 신부님께서는 특별한 에피소드 하나를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참된 사목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한 나라 안에서 두 패로 갈라져서 싸우는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한 작은 마을에 어린 병사 하나가 큰 부상을 당해 나타났습니다.
군복을 보니 적군이었습니다.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비록 적군이지만 불쌍한 소년병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은신처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상처를 치료해주었고 먹을 것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즉시 그날 저녁 한 무리의 병사들이 찾아와 그 소년병을 어디에 숨겼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들은 내일 새벽 동트기 전까지 소년병을 내놓지 않으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본당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가르쳐달라고 자문을 청했습니다.
진퇴양난의 순간 앞에 신부님도 난감했습니다.
소년병을 넘겨주면 소년병이 죽고, 소년병을 안 넘겨주면 마을 사람 전체가 죽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사제관으로 들어간 신부님은 올바른 길을 열어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신부님은 성경 안에 답이 있겠지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밤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동트기 직전 답이라고 여겨지는 성경 구절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 성경 구절은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 복음 11장 50절의 말씀, 대사제 가야파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신부님을 무릎을 탁 치며 즉시 이장님을 찾아가서 주님께서 위 구절을 답으로 주셨다고 통보해주었습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적군에게 소년병의 은신처를 알려주었고, 병사들은 소년병을 끌고 가 죽였습니다.
그날 밤 마을 회관에서는 큰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지혜로운 신부님의 기도와 조언으로 마을 사람 모두가 살아났다며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마음이 무척 찜찜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살았지만, 불쌍한 소년병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어른거렸습니다.
깊은 슬픔과 자책감에 사로잡혀 침실로 들어갔는데, 그날 밤 주님의 천사가 그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일을 했는가?”
“저는 너무나 난감한 상황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다가, 그래도 응답이 없다 싶어, 성경 말씀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밤새 읽었습니다.
그리고 답이 되는 구절을 찾았기에 그 답을 마을 주민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천사는 화가 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는 메시아를 적군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신부님은 괴로워하며 반문했습니다.
“제가 무슨 수로 그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네가 어젯밤 간절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는 대신 단 한 번이라도 그 소년병을 찾아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면,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 예화를 통해 헨리 나웬 신부님은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착한 목자는 기도만 열심히 하고 성경만 열심히
읽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착한 목자는 상처 입은 양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와 눈동자를 마주침을 통해 그의 내면, 그의
영혼의 상태를 확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결국 사목자는 맡겨진 양들을 위해 발로 뛰는 사람, 양들 사이로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28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요한 11,45-56
자기 영광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법: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아주 냉혹하고도 효율적인 논리를 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이롭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합니까?" (요한 11,50)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추악한 욕망을 '민족의 안녕'이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죽이는 행위를 '정당한 희생'이라고 선언합니다.
세상에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선이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의 생명에 관한 것이 그렇습니다.
낙태, 살인, 전쟁과 같은 악행은 그 어떤 숭고한 목적으로도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명분만 있으면 너무나 쉽게 칼을 휘두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보십시오.
그들이 내세우는 나토 가입 저지나 안보 확보라는 명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차가운 땅 위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청년과 민간인의 생명보다 소중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핵무기 억제라는 카드를 꺼내 들고 이란을 침공한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해 몇몇은 죽어도 된다는 논리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영광이라는 악이 숨어있습니다.
무엇이 ‘정의’냐고 묻는 철학적 논의 중에 '트롤리 딜레마(Trolley Problem)'라는 것이 있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가 5명의 인부를 향해 달리고 있을 때, 선로를 바꿔 1명만 죽게 하는 것이 정의냐는 물음입니다.
많은 이가 '5명보다 1명이 죽는 게 낫다'며 공리주의적 선택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야파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상황을 조금 바꿔봅시다. 당신이 육교 위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기차를 멈추게 할 유일한 방법은 옆에 있는 뚱뚱한 당신의 자녀를 밀어 떨어뜨려 기차를
세우는 것뿐입니다.
이때도 당신은 '5명을 위해 1명을 죽이는 게 이롭다'며 자녀를 밀 수 있겠습니까?
절대 못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중성입니다.
대상이 '나'나 '내 것'이 아닐 때만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당신을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영광에 빠진 자에게 타인은 그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부속품일 뿐입니다.
모기가 피를 빨 때 사람의 아픔을 고려하지 않듯, 자기 영광이라는 생존 본능에 사로잡힌 인간은
타인의 눈물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도 우리 삶 안에서 한 생명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지 살펴야 합니다.
한 생명, 그것은 온 우주보다도 소중합니다. 그것이 나의 생명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지 못할 경우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도 자기 영광의 감옥에서 못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1961년 예일 대학교의 스탠리 밀그램은 충격적인 실험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학습 효과 증진'이라는 명분을 주고, 틀린 답을 말하는 학생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게 했습니다.
전압이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올라가 비명이 들려도, 권위자가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계속하라"고 하자 65%의 사람들이 치사량의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들은 '과학 발전을 위해'라는 명분 뒤에 숨어 살인자가 됨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목적(실험 완수)을 위해 수단(인간의 생명)을 도구화한 것입니다. 우리도 '직장 생활을 위해',
'자녀 교육을 위해'라는 명분으로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수단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출처: 스탠리 밀그램, 『권위에 대한 복종』)
자기 영광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은 가야파의 논리를 정반대로 뒤집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이
기꺼이 손해 보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려고 모든 이가 마음을 합칠 때,
그곳은 모기들의 전쟁터가 아니라 천사들이 사는 천국이 됩니다.
2001년 1월 26일,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씨는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습니다.
그는 결국 목숨을 잃었지만, 이 사건은 자기밖에 모르던 일본 사회에 거대한 영적 지진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이 사건을 '기적 같은 이타주의'로 대서특필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이후입니다.
이전까지는 선로에 사람이 떨어져도 자기 안위가 먼저라 외면하던 문화가, 이수현 씨의 희생 이후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이 함께 선로로 뛰어들거나 기차를 밀어내는 기이한 현상'들이 계속해서 보고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희생이 수만 명의 자기 영광을 무너뜨리고,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목적보다
소중히 여기는 천상의 문화를 이식한 것입니다.
(출처: 고(故) 이수현 추모 보고서; 「아사히 신문」 2001년 1월 27일자)
미국에서도 이러한 예가 있었습니다. 2013년 11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하루 동안 영화 속 '고담 시'로 변했습니다.
백혈병에 걸린 다섯 살 소년 마일스 스콧의 소원이 "하루만이라도 배트맨이 되어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보잘것없는 한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시장, 경찰청장, 그리고 수만 명의
시민이 생업을 잠시 내려놓고 연극에 참여했습니다.
수억 원의 비용과 도시 전체의 행정력이 오직 '한 명의 아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투입되었습니다. 효율성을 따지는 가야파의 눈으로 본다면 이는 엄청난 낭비이자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지만 그날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아이가 우리에게서 이기심을 씻어내고 사랑의 기쁨을 알게 해주었다." 한 사람을 목적으로 대할 때, 공동체는 비로소 지옥에서 탈출합니다.
(출처: 메이크어위시 재단 기록; 다큐멘터리 '배트키드 비긴즈' 2015)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목적이 아무리 선할지라도 수단이 불의하다면, 그 행위는 결코 하느님의 일이 아니다.
악한 수단으로 지은 집은 결국 그 주인을 깔아뭉갤 것이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그대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를 결코 그대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마라. 사랑은 그 사람을 존재 자체로 목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유의지론』).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은 나를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나를 희생시킵니다.
이 감옥에서 나오는 유일한 길은 나의 생명을 타인을 위해 쓰는 길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따릅시다.
내가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나라는 두려움의 감옥으로부터 가장 빨리 빠져나오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