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17일 저녁, 일본 동경 홍고 산쪼메 동경대 앞 이자끼야(いざかや[居酒屋])
결혼 일주일도 되지 않은 新婚夫婦가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 왜 울어요?”
아내는 울고 있는 남편이 이상해서 물었다.
남편은 대답도 없이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봄 방학 때 잠시 나와 맞선을 보고 결혼한 아내였다.
아직 서먹서먹 한 상태라서 아내는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하며 텔레비전을 보면서 울고 있었을까.
나는 그때, 근덕을 생각했었다.
근덕에서의 외로움이, 넓은 운동장을 굴렁쇠를 굴리며 달리고 있는 소년의 그것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때 울었던 이유를 아내는 알 수 없었고, 아내가 죽을 때까지 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내가 강릉에서 근덕으로 전학을 간 이유는 순전히 아버지의 사진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강릉 월대산 밑에서 양계장을 하다가 닭 콜레라로 망하고, 교사 시험을 쳐서 첫 부임지가 근덕농고였다.
아버지는 하숙을 했었고, 어머니는 나와 여동생과 남동생을 데리고 한달에 한 번 아버지 하숙방을 청소를 했다.
그때 아버지 책에서 떨어진 사진이 문제였다.
사진 속에는 삼화사 정문 앞에 키 크고 잘 생긴 남자와 긴 생머리의 여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여자는 내가 자주 보던 음악선생이었다.
아버지 학교에 놀러가면, 향긋한 냄새를 피우며 항상 웃으면서 나를 데리고 과자를 사 주던 여자였다.
어머니에게서는 나지 않았던 天上의 향기였다.
어머니는 사진을 보고 털썩 주저 않았고 엎혀 있던 여동생은 어머니의 엉덩이에 깔려 동네가 떠나가도록 울었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우리는 근덕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 와서 친구가 없던 나의 친구가 굴렁쇠였다.
논과 밭 사이를 굴렁쇠를 굴리면 돌아다녔다.
장난을 좋아하던 나는 곧 친구들을 사귀었고, 근덕의 산과 바다와 냇가를 장난을 치면서 돌아다녔다.
기억나는 것은, 銀魚였다.
강릉 월대산 밑 남대천 하구에서도 은어가 많았기에 은어를 잡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대나무로 헤엄치는 은어들을 내리치면, 은어가 기절해서 떠올랐다.
근덕 친구들은 나의 새로운 기술에 빠져 들었으며 나는 곧 동네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때 봄날의 햇빛에 반짝이던 은어의 영롱한 은빛은, 50년 후 묵호항 꽁치의 은빛에서 다시 발견 할 수 있었다.
어판장 천장을 눈부시게 밝혔던 꽁치의 은빛과 근덕에서의 은빛은 나를 설래게 했었다.
그리고 기억나는 것은, 강뚝을 따라 내려가서 헤엄치던 맹방 해변이었다.
강릉 남대천 강뚝을 따라 내려가면 남항진이었다. 나는 남대천과 남항진 해변에서 이미 월등한 수영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후 해군에 입대하고 심해 잠수가 되었고, 스쿠버 강사가 되었다.
근덕은 나에게 제 2의 남항진이고, 월대산이고, 남대천이었다.
겨울이면 맹방의 해송 솔방울을 주워서 교실 난로에서 연료로 사용했다.
봄이면 전교생이 맹방에 보리밟기(踏靑)하러 나갔다.
지금 그곳에는 매년 봄이면 월동추(유자) 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근덕 시내 느티나무 주변에서 열렸던 5일장에서 동네 아이들과 도둑질을 하다가, 걸려서 저녁 시간에 밥도 먹지 못하고 손들고 서 있는 벌을 받았고, 아버지는 다음 날 책을 사오셨다.
아마, 그때 책을 읽으면서 독서 습관과 글쓰기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것 같다.
그리고 기억나는 것은, 합창부로 삼척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합창복을 마련하지 못한 아이가 슬픈 눈을 하고 우리를 배웅 하는 장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합창복이라는 것이 싸구려 하얀 나이론 셔츠였다.
배고팠던 시절, 그것조차도 준비하지 못한 그 아이가 지금도 생각난다.
합창부 시절 불렀던 노래가 지금도 가사를 기억하고 있는 ‘오빠생각’ 이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삼척 죽서루에 사생대회를 나가서 처음으로 상을 타기도 했다.
다음 해 6학년 때 나는 그 동안의 인기로 전교 회장이 되었고, 얼마 후 아버지가 강릉농고로 전근을 오는 바람에 강릉국민학교로 전학을 와서 졸업을 하였다.
근덕은 나에게 소년의 굴렁쇠와 은어의 은빛과 전교생의 보리밟기를 기억나게 하였고, 그것이 동경대 앞의 이자까야에서 눈물 지었던 이유였다.
근덕은 묵호항과 닮아 있다. 나의 문학은 근덕과 묵호항과 강릉 월대산과 남대천과 항상 함께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