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5일(월)
* 시작 기도
주님...
내 안에 호기심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기적을 구하려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기적은 보기 원하면서, 회개하고자 하는 가난한 마음은 없습니다.
주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는 두 마음을 가진 자는 정함이 없는 자라고 하셨는데 내 안에는 이 두 마음이 공존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날 불쌍히 여겨주소서.
내 안에 세상으로 향한, 욕심으로 향한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제 이 마음이 주님께로만 향하게 하시고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오직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으로 이끌어가오니 회개할 마음을 주사 주의 보혈로 나를 덮으소서.
정함이 없던 자가 주의 은혜를 입어 주의 보혈로 정함을 입게 하소서.
주께 구하오니 나를 정결케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12:13-27
제목 :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리차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7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 나의 묵상
11장 후반부의 성전에서 예수님과 권위 논쟁을 벌였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또다시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 빠트리기 위한 시도를 한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 중에서 사람을 뽑아 예수께로 보냈다.
바리새인은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비롯된 말로써 ‘구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않는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스스로 구별된 자로 분류하였고 또한 교제도 피하였다.
이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땅의 백성’이라는 아주 경멸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불렀다.
무엇보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였는데, 특히 세리는 동족의 피를 빨아 로마를 배불리는 자들로 여겨 더더욱 경멸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당연히 로마에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한 헤롯당은 친로마적 상류층에 속한 자들로 로마에 납세하는 것을 인정하며 그 일에 충실한 집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바리새인과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의 목적 아래 뭉쳤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제거하는 목적이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며 함께 먹고 마시는 자였다.
게다가 안식일을 범하고 정결의 계명을 어기는 등 율법을 따르지 않는 자였으며 특히 자기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적대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헤롯당원들에게 예수는 선지자 혹은 그 이상으로 백성들의 존경과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정치적 제거대상이었다.
언제 세례 요한과 같이 헤롯이나 자신들을 향하여 공격의 화살을 돌릴지 모르는 아주 위험천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은 공동의 적인 예수를 제거하기 위하여 하나가 된 것이다.
마치 헤롯과 빌라도가 서로 원수지간이었으나 예수를 죽이고자 할 때는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눅 23: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그들이 예수께 와서 교묘한 질문을 한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한껏 추켜세운다.
당신은 진실하고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분이며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길을 진리로 가르치는 분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한방을 날린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지 내지 않는 것이 옳은지를 말해달라는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이 로마에 내는 세금은 유대의 성인 남녀 곧 남자는 14-65세, 여자는 12-65세까지의 모든 유대인이 한 데나리온씩 거두어 로마 제국의 국고로 보내는 인두세를 말한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로서 과연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던 사안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시험하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그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일갈하신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이 질문한 내용에 대한 적절한 답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님이 하신 말씀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정확히 옳은 답임을 알 수 있다.
세금에 관한 질문은 위선의 가면으로 가려진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이 논쟁의 핵심은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 아니었다.
단지 세금 문제로 위장을 한 함정에 예수가 빠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였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께서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들의 생각에 예수께서 어떠한 대답을 하든지 그 대답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올무에 걸려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치라고 하면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정부에 낙인이 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들의 위선의 가면 뒤에 숨겨진 진의를 간파하신 주님은 그 시험문제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15절에서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라는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를 통쾌하게 물리치시는 이 말씀이 심령 깊은 곳에서 울린다.
(마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한편 주님께서는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오라고 하시자 그들이 곧장 가져왔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동전 곧 자기들이 사용하던 동전을 가져왔을 것이다.
어떤 통치자의 형상과 글이 새겨져 있는 동전을 사용한다는 것은 곧 그 통치자의 권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스스로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지고 만 것이다.
유대인들인 그들이 동전에 대한 소유권이 가이사에게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그 동전을 실생활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가이사가 그 동전에 대한 세금을 그들에게서 거둬들일 권리가 있음을 실제로 인정하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결국 이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트리려다가 자신들이 그 함정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이 동전을 가져오자 동전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인지 물으셨고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다.
이에 그들은 주님을 보고 매우 놀라워하였다.
세금 논쟁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시각차를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세금 내는 것을 자신이 소유한 것을 주는 것 곧 자신의 소유권을 빼앗기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 차원에서 이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세상 임금과 그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세속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주권 역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금을 내는 것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여기셨다.
17절의 ‘바치라’의 의미는 헬라어 ‘아포디도미’로서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빚을 갚듯이 필연적으로 되돌려준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국가에 대한 의무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동시에 충실히 행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는 무시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아주 짙었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납세는 국민의 의무로서 사도들도 이를 권장하였다,
또한 당시에 로마 제국이 지배국으로서 피지배국인 이스라엘을 종교적 경제적으로 핍박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지배 아래 있는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준 것도 사실이다.
(딤전 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따라서 예수님은 가이사의 몫은 가이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으시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결론적으로 말씀하심으로 신적인 영광과 위엄을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릴 것을 말씀하신다.
데나리온에 새겨진 그 동전의 금전적 가치는 가이사에게 돌려야 하지만, 그 위에 새겨진 황제 숭배의 어떤 사상도 용납하지 않고 거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이 땅의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 외에는 경배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부당한 경배를 요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만유의 통치자이시며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세상의 소유물 곧 물질에 대하여는 다분히 유대인들과 같이 네 것 아니면 내 것처럼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땅에 속한 만물은 나에게 사용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배려요 선물이다.
하지만 그것을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진짜 그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 주어진 소유물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사용하는데 거리낌 없이 할 것이지만, 법적 테두리 안에서 사용할 것이다.
나의 소유라고 해서 내 맘대로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을 가지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날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를 베푸셨다면 나 또한 그 은혜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무엇을 해서 주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그 은혜를 받아 나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임을 믿는다.
나의 행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걸려 넘어지던 자가 이제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자유함을 누리는 자가 되었기에 그저 감사하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안에 주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던 바리새적 악한 속성 가득 들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나를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고발합니다.
나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여 나도 그 십자가에 매달아 주소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주님과 함께 무덤에 장사되는 연합이 나의 삶속에서 날마다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그 연합을 통하여 새 생명으로 일어나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