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16바이콜릭스(Bikeholics) 제309차 여주 명소 라이딩<결과>
세종대왕릉 0008
일시: 2016.11.6(일) 0930:00~16:00(6시간30분)
코스:
이매역~경강선~여주역-소양천-영광해장국-하동교3거리-세종대왕영릉-효종대왕영릉-입암-남한강자전거길-여주대교-신륵사-금당천/금당교-목야박물관입구-이호교-대순진리회본부도장/고개-강천보-연양천-점봉천-명성황후생가-여주대학교입구-맛고을-여주역(33km)
참가: 종국 오벨로 성근 창인 영성 경흠 명수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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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스머프차 (차성근)
어느덪 10월도 지나고 11월로 접어들었지만 가을의 정취와 라이딩을 즐길 날도 머지 않은것 같다. 세월의 흐름이 탄지지간(彈指之間)과 같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다. 이번 라이딩은 경강선 개통이후 처음으로 여주를 찾아 역사,문화유적지의 순방길에 나서기로 하였다. 이매역에서 08시에 일곱명의 대원들이 합류하고, 08시36분에 여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모델 한(한영성)이 5개월만에 동참하였으며, 기상관계로 불참했던 오벨로(임종국 부인)도 함께 참여하여 분위기가 한층 밝아 보였다.
전철 차창 밖 산자락에 위치한 농촌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정연(亭然)한 아파트는 농촌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농촌 풍경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건축설계사와 마을 주민들의 몫이지만 나는 농촌에서 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농촌다운 농촌의 풍경이 늘 그립게 느껴진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에는 스산하고 황량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산에는 싱그럽던 초목도 세월을 못이기는 듯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여주역에 도착한 시간은 9시 25분경 이었다. 하늘은 찌푸득하였으며, 바람은 좀 쌀쌀하게 불었다.
세종대왕릉 부터 우선 알현하기로 하고 소양천을 따라 이동하였으며, 이동간에 해장국집에 들러 아침 공복을 채우고 영릉로를 따라 세종대왕릉에 도착한 시간이 10시 36분경 이었다. 세종대왕릉은 원래 경기도 광주 헌릉의 서쪽인, 지금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으나 1469년(예종) 3월6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세종때는 우리 민족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고, 유교정치의 기반이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과학,의학, 음악발전과 국토의 개척및 확장등 눈부신 업적을 이루었다. 이중에서도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세종은 1450년 2월17일 54세로 승하한다.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 성명 효대왕,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능호는 영릉(英陵)이며, 울울창창(鬱鬱蒼蒼)한 소나무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세종대왕릉에서 비포장도로 송림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700m 거리에 효종대왕릉과 왕비 인선왕후 장씨가 모셔진 쌍릉이 있다. 세종대왕릉은 천객만래(天客萬來)하였으나 효종대왕릉은 찾는 방문객이 한산하였다. 병자호란으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로 8년간 인질로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소현세자는 죽고 동생인 봉림대군이 인조 다음으로 왕위에 올랐으니 이분이 바로 효종이다.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게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4일 재위 10년 만에 승하 하였다. 11시 45분경 효종대왕릉을 벗어나 왔던길로 다시나온 후 입암에서 남한강변 자전거길로 진입하였다. 남한강에는 오리과 종류의 새들이 무리를 지어 먹잇감을 사냥하고 있었다. 모델 한이 새를 쳐다보고 너희들 이름이 무어냐? 하여 배꼽을 뺄 정도로 한바탕 폭소를 자아냈다. U자형 나무데크 자전거길을 빠져나오면 영월 근린공원이 시야에 들어온다. 영월루 정자에서 휴식하면서 간식을 섭취하였다.
영월 근린공원 남한강변에 여주 8경의 하나인 마암(馬巖)이 있다. 이 바위에서 여주 지명의 유래가 되는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솟아났다 하여 마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지명도 황려(黃驪)라 불렀다고한다. 즉, 여주의 지명은 골내근현 -황효-황려-여흥-여주로 변천되었는데, 황려지명은 이 마암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규보의 한시중에 "두마리 말이 기이하게 물가에서 나왔다 하여, 이 때문에 고을 이름이 황려라네" 라고 읊은 내용이 있어 그 역사성이 매우 높은 유적이다. 또한 여주의 대표적 성씨인 여흥 민씨의 시조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규보, 이색, 서거정, 정약용등 당대의 시인 묵객들이 마암에 찾아와 시와 풍류를 즐기던 명소이다.
여주대교를 건너 우회전한 후 남한강변길을 따라 이동하면 여주박물관과 황포돛배 나루터가 보이고 바로 신륵사 입구로 들어선다. 신륵사 입구에는 오색 찬란한 단풍이 수를 놓고있어 컬러풀(colorful) 하였으며, 미적 쾌감을 맛 볼 수 있었다. 신륵사는 여주시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사찰로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말인 1376년(우왕2) 나옹(懶翁)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 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3)에는 영릉원찰(英陵願刹)로 삼은 보은사(報恩寺)라 불렀다. 고려 고종 때 용마가 나타나 겉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壋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했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神勒寺)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신륵사내 강월헌(江月軒) 정자에 오르니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가족과 연인들이 백조 유람선을 타고 유람하며 풍류를 즐기는 풍경이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한 폭의 그림 처럼 보였다.
신륵사 후문을 통과하여 신륵로로 접어들어 금당교를 지나, 강문로와 강천로로 진입후 가야리에서 우측 남한강변 샛길을 따라 나무턱 시멘트 급경사 오르막길(경사 20도이상)에 올라서면 강천보에 닿는다. 쇄도우수 김명수는 힘 안들이고 거뜬히 올라간다. 10년이상 기량을 갈고 닦은 결과 라고 한다. 한편 바이크 손은 따라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는다. 이유인즉, 심장에 부담을 주어 혹시 사고라도 당할까 봐 염려해서 한 말이다. 한강의 명물이던 황포돛대의 모습을 형상화한 강천보는 한강문학관,강천성 수변공원과 함께 천혜의 풍광을 자랑한다. 특히 물빛 놀이로 이름지어진 보의 야간 조명은 시간대별 ,계절별로 각기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 보는 이들의 탄성을 끌어낸다고 한다. 강천보를 지나 마지막 목적지인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생가는 조선 기와집으로 야트막한 산자락밑에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며, 기념관은 작은 연못과 2층 팔각형 정자가 있어 한 층 운치있게 보였다. 기념관은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기록하였으며, 사진과 영상물로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명성황후는 16세 나이로 고종의 왕비로 간택된다. 대원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하고 고종과 짝궁이되어 국정운영을 주도하게 되지만. 일본과 서구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여러가자 시행착오를 하면서 외줄타기하 듯 위태로운 상황을 직면한다. 1882년 임오군란(신식 군대에 대한 불만)과 1884년 갑신정변(개화에 불만을 품은 개화파)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나머지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코자 하였으나 일본의 미움을 사 을미사변때 참혹한 시해(1895, 음력 8.20새벽)를 당한다.
외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가 가냘프지만 영민하고 총명하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한 여인이었다고 쓰여있다. 19세기말 한국을 다녀간 영국의 비숍 여사는 명성황후를 알현하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후는 가냘프고 미인 이었다...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만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매우 사랑스런 여인이었다.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은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데 능하였다...그녀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 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 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 조차도 그녀를 동양의 호걸,여장부로 평가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에 의해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해 고종에 의해 복호되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성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왕후로 추봉되었다. 장례는 죽은지 2년만인 1897년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홍릉에 안장되었다.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를 떠나 여주역으로 가는 도중에 맛고을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돼지갈비살에 소주와 맥주로 권커니 잣커니 홍연대소(哄然大笑)하며 정겹게 이야기하면서 분위기를 돋구었다. 돼지갈비살은 연하여 수원갈비살 못지않게 입안에서 슬슬 녹는다. 대원들 모두가 최고라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모델 한(한영성)이 한 턱을 쏘아 맛있게 먹었다. 여주역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3시50분경 이었다. 여주역에서 몸을 싣고 이매역에 도착하자 모델 한이 조취모산(朝聚募散)하여 맥주 한잔 더하자고 하였으나 발길이 바빠 각산진비(各散盡飛)하고 둥지를 찾아 떠났다. 콘닥 임종국은 경복궁내 역사 문화 대학에 적을두고 있어 무소부지(無所不知)라 조선왕조 실록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거침없이 재미있게 엮어나가며 구수하게 설명한다. 보고 느끼는 것보다 직접 듣는 것이 더 실감나고 가슴에 와 닿아 감심(感心)하였다. 견권지정(繾綣之情)의 벗들과 역사, 문화유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견문각지(見聞覺知)하여 지만의득(志滿意得) 하였다. 성동고16회 바이콜릭스(bykeholics)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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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쉐도우수
이매역에서 경강선 08:36출발 전철 탑승 0001
여주역도착 라이딩 개시 0002
소양천을 따라 0004 05
아침을 거른 친구들이 해장국으로 0006
세종대왕 영릉으로 0007 08
인접한 효종대왕 영릉으로 숲속 고개 길을 넘어 0012~18 0023
찾기 쉽지 않은 효종대왕 묘소를 다녀와 0020 21 0863 4179
효종대왕 영릉을 떠나 남한강 자전거 길로 0028 29
여주대교로 올라 영월대에서 휴식하고 여주대교를 건너 0031 34 35
신륵사의 가을을 한껏 음미해 0036~50
신륵사 뒷산 요양원 길 낙엽의 낭만에도 젖어 0052~54
신륵로 신륵사고개 넘어 목야박물관입구를 지나 0058 59
노변 조경이 아름다운 대순진리회본부도장 고개 길을 넘어 0063 65
다시 남한강으로 나가 강천보를 바라보고 0066
강천보에 올라 0067 70 75
강천보한강문화관을 거쳐 연양천-점봉천 둑길로 0076~81
명성황후 생가를 돌아봐 0082~92
여주대학교 입구 지나 여기서 늦은 점심을 0094~98
여주역 16시발 전철을 타고 출발지 이매역으로 복귀 0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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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라이딩은 11월13일 오래만에 탄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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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 가을 풍경
세종대왕 영릉 담벽 단풍 0009 0011
여주대교 0033 35
신륵사 경내 조포나루터와 강건너 황포돗배 나루터 0037 38 42
신륵사의 가을 아기 뱀 0040
신륵사 강변 고려시대 다층 전탑(塼塔)과 삼층석탑, 강월헌 0045 47
신륵사의 단풍 124004 4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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