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윤동주 탄생101주년>
오늘은 윤동주 탄생 101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詩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 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라고
정병욱 前 서울대 교수님의 회고담입니다.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달했던 1930년대 이후
많은 文人들이 친일파로 변절했습니다.
개중에는 이광수처럼 적극적인 친일로 돌아선
이도 있고, 가족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펜을 잡은 이효석과 같은 이도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文人들도
있었으니 그 중 한 분이 '윤동주'입니다.
그는 만주 북간도 명동촌 일대의 기독교 집안에서
1917.12. 30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는 해같이 빛나라고 해환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집안은 유복하여 명동촌에서 손꼽히는 갑부로 통했지요. 이 동네 사람들은 항일 감정이 특출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윤동주'는 자연스럽게 반일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고, 나이가 찼을 때는 일본 순사 멱살 잡기로 유명한 평양의 '숭실중학'에
편입하게 됩니다.
그가 평양으로 가게 된 데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촌형 '송몽규'와 친우인 '문익환'의 영향도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숭실중학'은 최고 명문으로 통했는데, 교장이
미국인이었던지라 일제의 탄압에도 어느 정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급변했지요.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조지 맥큔' 교장이 쫓겨나
버린 것입니다.
'윤동주'를 비롯한 '숭실중학'의 학생들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윤동주'는 자퇴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가지요.
이 때가 1936년으로 '숭실중학'은 1938년에
강제 폐교됩니다.
만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결정할 때
'윤동주'는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 문과 (문학부)에 입학하려고
하면서 갈등이 생깁니다. 아버지인 '윤영석'은 아들이 의대나 법대에 진학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지요.
'윤동주'도 한 고집 했던지라 한동안 집안에서 그릇이나 가구들이 날아다녔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중재해서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 문과에 입학할 수 있었지요.
당시 '연희전문'에는 한글 학자인 '최현배'와 역사학자 '손진태'가 있었는데 우리말에 대한 활용과 민족정신
함양에는 그들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윤동주'의 詩에 좀 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영문학자 '이양하'로 '윤동주'는 그에게 개인지도를 받았음을 증언했지요.
연희전문 재학 시절[[자화상]], [[별 헤는 밤]]과 같은
명시들이 탄생했습니다.
동시에 '연희전문' 시절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가 드러나는 때이기도 합니다.
1930년대의 詩가 평화로 돌아가고 싶다는 노스텔지어 성격이 강하다면 후기 작품들은
좀 더 깊은 고민이 서려있고, 암울한 현실에 대한
주제의식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1940년 12월까지 1년 넘게 한 편의 詩도 쓰지 못한
때도 있습니다. (윤동주는 자신의 詩에 꼭 탈고
날짜를 함께 적어 넣어서 연구에 큰 도움)
그래도 '연희전문' 졸업 학기에는 고뇌에서 탈출했는지 의욕적으로 작품활동을 이어가게 됩니다.
졸업 직전에는 자신이 쓴 18편의 詩에 [[서시]]를 붙여서 詩集을 하나 내려고 하지요.
詩集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그러나 '이양하' 교수는 신변이 위험할 수 있다며 출판 보류를 제안합니다.[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는 '윤동주'에게 복사본을 건네받은 후배 정병욱에 의해 광복 이후 출판되어,우리들 곁으로 시인이 되어 돌아온
'처녀작 詩集'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는 학문에 대한 열의로 일본 유학을 결정합니다. 이때 '히라누마 도슈'로
창씨개명을 하지요. 간혹 이 때문에 그가 친일파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창씨개명' 자체만으로는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창씨를 안 하면 인생이 하드코어 하게 흘러가는
게 현실이었으니!
그리고 '윤동주'는 창씨개명 신청서를 내기 5일 전에
詩 한편을 썼는데 이게 바로 [참회록]입니다.
그의 창씨개명은 결코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고
당연스럽게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지요.
여하튼 '윤동주'는 일본의 기독교 계열 대학인
'릿코대학'과 '정지용'이 졸업한 '도시샤대학'에서 지속적으로 문학을 공부합니다
(도시샤대학에는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가 건립)
동시에 함께 유학한 사촌형 '송몽규'와 자주 만났는데
이게 문제가 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경력이 있어 요시찰 인물로 분류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송몽규'와 '윤동주' 등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을 붙여 그들을 잡아 들였지요.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고 불립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됩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원인불명의 사인으로 옥사하지요.
그의 나이 28세로 6개월만 더 버텼다면 광복이었으니참 아쉬운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북간도에 묻히지요.
'윤동주'는 투사는 아니었지만,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일은 그리 많지 않지요. 또 다른 저항시인인 '이육사'가 의열단 등에 참여하고 의지를 굽히지 않는 남성적인 詩를 썼다면 윤동주는 부끄러움과
반성, 또는 종교적 희생을 주로 썼습니다.
'윤동주' 詩人을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없으리라.
누구나 그의 詩 한 두 편은 알고 있지만
,윤동주 詩人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요절했는지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 합니다,
친숙한 이름과 익숙한 詩이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낯설은 詩들이 많을테지요.
이준익 감독이 영화 "동주"를 만든 이유입니다.
'윤동주'詩人의 생애와그의 詩를 사랑하였고,
존경하는 영원한 순수詩人을 사모하였던 날들!
🎵동주🎵를 두 번 보았고,암울한 그 시대를 살아내야 했었던 그 때의 어찌할 수 없었던
그~날의 통분을 헤아리며 아팠습니다.
'윤동주'님의 육필원고가 보관되었던 '정병욱가옥'
에서의 가슴뭉클 했었던 그~날의 기억들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집니다.
1945. 2.16 님은 떠나셨지만 그의 영혼은 살아 탄생
101주년을 맞이 하셨고,앞으로 또 100년
그후로도 오랫동안 우리 겨레의 가슴에 영원한 '아름다운 순수의청년'으로 살아 남을 것입니다.
님의 탄생 101주년을 축하하고 거룩한 넋을
추.념.하.면.서!!!
https://youtu.be/dXyDvS1ZYf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