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에 한번 온 사람은 나의 고객으로 만들겠다는 오기
(모두가 안된다고 아우성치는 2000년대로 들어서고서도 당신의 활약은 끝이 없다. 부활의 15주년 기념 앨범, 그리고 정규 7집, 그리고 올해의 데뷔 20주년 기념 자축 앨범까지 - 모두 예상을 뒤엎고 성공을 거두었으며 매진을 거듭하는 당신의 전매특허인 투어콘서트는 이제 완벽한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어쩌면 당신은 전성기가 가장 긴 뮤지션으로 역사에 남을 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저력은 역시 라이브 콘서트에서 나오는 듯한데 도대체 어떤 비결이 있는가?)
올해 투어로 미국 4지역, 캐나다 밴쿠버와 호주 한 곳을 포함해서 스물세 군데를 돌았다. 내년 초까지 열세 곳이 더 남았다. 그리고 아시아 쪽 일본과 중국 지역은 지금 잡고 있는 중이어서 더 추가될 듯하다. 공연... 단지 나와 스탭들이 기획을 잘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십년에 이르는 음악 활동 기간 동안 많은 역경이 있었다.
특히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근 오년간이나 방송을 정지당했다. TV와 라디오를 출연 못하는 상황에서 앨범을 만들어도 죽은 작품이나 다름없으니... 오로지 공연이었다. 난 다행히 부활을 통해 언더그라운드 시절을 거치며 라이브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알고 있었다. 가야할 길이 공연이다! 공연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때 2집으로 번 4억을(지금 가치로는 한 10억 정도 되지 않을까?) 91년의 전국 투어 콘서트에 몽땅 부었다. 미국의 산타나의 세션도 데려오고 용필 형의 위대한 탄생 멤버도 초청하고... 앞날을 내다보고 한 것은 아니다.
공연장에 한번 온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고객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오기였다. 작곡가 하광훈씨는 내가 방송을 못하게 된 것이 결과적으로 내 가수 생명이 오래가게 된 것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라이브 콘서트의 가장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건 절제다. 옛날에는 객석의 모두 흥분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발라드를 부를 때도 오버했다. 지금은 기승전결의 구조 속에서 흐름을 포착한다.
나는 공연을 하나 올리려면 최소한 두 달을 준비하고 연습한다. 나의 좌우명이기도 한데, “잘될 때일수록 의심하라!” 모든 것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고 의논한다.
(당신이 [희야]를 부르며 소녀 팬들을 매료시킬 때 당신은 열아홉이었고 그로부터 이십년이 흘렀다. 당신의 공연장을 채우는 팬층은?)
잠재 시장은 하이틴 세대에 있지 않고 기성세대에 있다고 본다. 말없는 이들의 힘이 나의 콘서트를 매진시킨다. 나의 공연은 ‘온 가족이 함께하는’ 공연이나 다름없다. 물론 2~30대가 6~70%로 압도적으로 많지만 85년 이후 출생한 어린 친구들도 5~10% 정도 되고 4~50대가 나머지 퍼센트를 차지한다. 한마디로 10대부터 50대까지 함께 하는 공연인 셈이다.
밴드 부활, 그리고 ‘운과 재능’을 함께 한 작곡가들
(당신의 첫 이력인 밴드 부활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2001년 다시 만나기도 했다. 부활의 조기 해체는 80년대 당시 많은 팬들의 안타까움이었다. 특히 프론트맨인 당신과 밴드의 음악적 리더인 기타리스트 김태원과의 불화가 원인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는데?)
부활은 당시 열아홉 스무살 짜리들이 갖기 힘든 흡인력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차별화된 작곡과 편곡 능력, 그리고 연주. 당시 보컬리스트의 괴성과 긴 다리정도로만 단순하게 인식되던 록그룹의 거친 요소들은 걷어내고 대중성을 갖춘 밴드였다. 리드기타였던 김태원의 화려함에 세컨기타였던 이지웅형(유일하게 서른 살이었다)의 래리 칼튼과 같은 코드와 색깔이 가미되었고, 지금은 클래지콰이와 러브홀릭의 제작자이기도 한 김병찬의 베이스와 황태순의 드럼 또한 완성도가 높았다. 멤버 하나하나가 다 살아 있는 영국의 퀸과 같은 그룹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나와 태원형은 많이 달랐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이 없는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팀의 경제적인 측면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태원형은 아티스트 그 자체이다. 경제적인 것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음악도 하고 싶은 것을 마구 저질러 놓으면 내가 정리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니 음악적으로는 유명해졌는데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령 나이트클럽 무대에 서면 많은 개런티를 받을 수 있었는데 그런 제의는 태원형한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모두 원수가 되어서 헤어졌다고 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다. 좋은 마음으로 끝났다. 각자가 가야할 길을 격려해 주면서. 그러니까 부활 15주년 프로젝트로 다시 뭉칠 수도 있었고 또 합심해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당신은 조용필, 전인권에 이어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보컬리스트로 칭송받아 왔다. 그리고 사실 부활 시절부터 최근 앨범까지 당신은 꾸준히 자신의 곡을 만들기도 했지만 역시 대표적인 노래들은 다른 작곡가들이 제공한 노래들이다. 부활 시절의 김태원부터 첫 번째 솔로 앨범의 파트너 박광현 그리고 최근의 [긴 하루]를 만든 전해성까지 이들은 당신과 함께 하기 전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당신의 목소리와 함께 알려지게 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작곡가들을 선택하고 또 작업하는가?)
전해성을 신인 작곡가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나이가 만만치 않은, 말하자면 늦게 빛을 본 사람이다. 나의 [긴 하루]에 이어서 윤도현의 [사랑했나봐]로 연타석 히트를 날리며 지금은 가수 열명 분 일이 밀려 있다고 아우성인 모양이다. 아주 신선한 발상의 발라드, 발라드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하여튼 그의 곡은 노랫말도 좋고 독특하다.
솔로로 전향하면서 만난 박광현은 당시 서울대 음대 재학생이었는데 그가 만들어 준 노래는 정말 당시로선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당시 통상적인 발라드의 멜로디 스타일과 전혀 다른 곡을 썼고 노랫말도 “00하지마” 같은 반말투도 새로웠다.
일이 되려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나 순식간에 의기투합하게 된다. 박광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포장마차에서 소주 마시다가 뜻이 맞았다.
하나의 스타가 탄생하고 또 롱런하려면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절대로 자기 혼자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이돌 스타도 아니고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 운에 나의 재능이 조금 가미되었을 뿐이다. 이 말은 결코 겸손의 말이 아니다.
“트렌드란 빵에 발라먹는 버터와 같은 것”
(그렇다고 하더라도 운만으로 이십년을 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생명력의 비밀은?)
각각의 시대가 요구하는 트렌드를 잘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 사실 나의 앨범은 단 한 장도 같은 음악이 연속된 것이 없다. 매번 새로운 앨범을 낼 때마다 새로운 음악적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가령 5집에서 윤일상의 작품인 [오늘도 난] 같은 노래를 녹음했을 때 부활 때부터 같이 온 많은 팬들을 잃기도 했지만 또 새로운 세대의 많은 팬들을 얻었다.
가수는 말이 많으면 안 된다. ‘가오’가 있어야 한다. 조용필형처럼. 하지만 조용필도 아니면서 요새 그렇게 하다간 깡통 차기 딱 알맞다. 요새는 같이 울어주고 같이 웃어주는 스타여야 한다. 음악적 자존심과 방향만 중심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트렌드란 빵에 발라먹는 버터와 같은 것. 이런 발상들이 나를 지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한 작곡가와 두 번 이상 작업한 적이 없다. 나는 계속 바꾼다. 그리고 유명한 작곡가와도 안한다. 타성에 젖어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신인들과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들이 작곡 스타로 커가는 것을 보는 것이 보람 있다. 나 역시 데뷔 당시부터 계속 곡을 썼다. 그러나 내가 부를 노래를 내가 쓰니까 노래가 자꾸 어려워진다.
(사실 [긴 하루] 같은 노래는 알려지고 나니까 신선하고 좋은 노래라고 생각하지 막상 처음 받았을 땐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는 노래 아닌가?)
내가 좋으면 뜨더라. 나는 신곡이 나와서 모니터링 할 때 음악 비전문가들의 의견을 주로 묻는다. 작곡가한테 곡을 받을 때 나는 세션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내가 음악적 지식이 많아야 한다. 그래서 국악 빼곤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이다. 그래서 작곡가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음악에 맞춰 새로운 창법이 나왔다.
4집 [[The Secret of Color]], 소리를 찾으러 뉴욕으로 가다
(1994년 네 번째 앨범 [[The Secret of color]]는 뉴욕까지 날아가서 만든 야심작이었다. 당시 국내의 톱 뮤지션들이 외국에서 녹음하는 붐이 일기도 했었지만 국내 시스템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였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당신이 얻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미국으로 간 것은 한마디로 소리를 찾고 싶어서였다. 소리를 듣고 싶었고 갖고 싶었다. 뉴욕에서 마크 코브린한테 코디네이팅을 맡겼다. 세 시간에 140만원씩 오마하킴 같은 드러머들을 쓰다 보니 몇 억이 후딱 날아갔다. 코러스로 맨하튼 트랜스퍼도 섭외가 되었는데 음악이 너무 깊어서 뉴욕 보이시스가 맡게 되었다.
몇 억 들어서 가지 않을 바에야 여기서 작업하는 것이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팝음악을 들어도 빌보드 차트 1위부터 10위까지만 듣지 않나? 그 멤버 그 스탭 그대로 쓰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4집이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 그러나 그 때의 경험은 그때 썼던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때 그 친구들이 11년 전에 마흔 정도의 연배들이었는데 그 나이 대부터 자리 잡고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만큼 경쟁이 심한 것이다. 오마하킴 같은 친구도 마돈나 세션이면서 저녁엔 작은 클럽에 가서 자기 음악을 한다. 내가 오십이 넘더라도 옷은 젊게 입고 젊은 애들하고 작업하고 싶다.
미국 가서 녹음하고 또 거기 친구들 데리고 와서 공연하고 해볼 거 다 해보고 난 뒤의 결론은 우리의 ‘가요’를 절대로 무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혼이 담기고 우리 모두가 눈물 흘릴 수 있는 유일한 노래이다.
팝 음악이 아무리 좋고 잘해도 우리가 뼈저리게 눈물 흘리게 되지는 않는다. 그걸 깨닫고 난 뒤에야 더 이상 미국에 안가도 되었다. 내 녹음실에서 내 엔지니어와 소주 마시며 작업하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 영화 이제 웬만큼 좋지 않고서야 우리 영화 못 깨지 않느냐? 국악이 점점 좋아지고 편안히 다가온다. 이제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다.
역시 록과 블루스다
(마지막으로 역시 진부한 질문 하나. 당신이 존경하는 아티스트는? 혹은 지금 당신이 주목하고 있는 뮤지션은?)
역시 록과 블루스다. 특히 데이비드 커버데일의 음악을 좋아한다. [Is this love]가 들어 있는 화이트스네이크 시절의 앨범은 최고. 지금 쉰다섯일 텐데 나이가 나이인 만큼 파워도 약해지고 절제를 빙자한 발라드만 한다고 이죽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나도 그처럼 다시 나이를 잊고 백바지 입고 록을 한바탕 하고 싶다.
국내 뮤지션 중에서 클래지콰이와 부가킹스, 자우림, 롤러코스트들을 주목한다. 이들이라면 다음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겨보고 싶다.
|
첫댓글 이승철 노래 정말 잘해요~! +_+ 데뷔 20주년 투어 갔다 오고 덜덜덜 +_+
저도 6월 18일날 20주년 기념 콘서트 갔었죠.. 카리스마 지대로더군요^^
뮤지션으로서는 대단하다 생각되지만,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는 별로일것같아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이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