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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운학문 매병(靑磁 象嵌雲鶴文 梅甁)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靑磁 象嵌雲鶴文 梅甁)은
고려시대인 12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청자 매병(梅甁)이다.
상감 기법을 이용하여 병의 표면에 학을 가득 새겨서 디자인 측면에서 대단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병의 조형 자체도 최상급이라는 평가를 받는, 고려청자의 대표작이다.
일제강점기에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여러 고려청자 가운데서도 최고 명품으로 꼽히는 작품이며,
한국 도자기의 최상의 작품이다.
그야말로 고려청자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은 1962년에 국보 제6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높이 42.1cm, 입지름 6.2cm, 밑지름 17cm 크기의 매병이다.
보통 고려청자를 생각하면 이 작품이 가장 먼저 떠오를 만큼
아름답고, 가치있고, 널리 알려진 도자기이다. 그러다보니
역사, 미술 교과서에서 고려 청자를 소개할 때 참고 사진으로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
청자의 상단은 풍만한 자태를 보여 당당하고 기백있는 모습을 나타냈고
밑 부분에는 연꽃무늬를 넣어 아름다움을 극대화 했다.
몸통에는 학과 구름을 상감기법으로 새겨넣어
능숙한 문양처리와 함께 고려 도자기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현대에 남아있는 고려청자 중 상당수는
개성이나 강화도 등지에 있던 고려시대의 무덤들을 도굴하면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 매병도 강화도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한다.
일설에서는 고려 무신정권의 권력자인 최우의 무덤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에 대한 별다른 근거는 딱히 없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이라는 이름을 풀이하면,
학과 구름 무늬를 상감 기법으로 표면에 새겨 넣은 청자로 된 매병이라는 뜻이다.
'상감 기법'이란 흙으로 도자기를 빚어낸 뒤에 칼로 흙표면에 문양을 새기고
이 홈을 백토(하얀 흙)나 흑토(검은 흙)과 같은 색이 있는 흙으로 채우고
유약을 발라 도자기를 구워서 완성시키는 방식의 세공 기술을 의미한다.
이는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도자 장식 기법으로,
고려 후기인 12~13세기에 크게 발달하였다.
'매병'은 아가리가 좁고 어깨는 넓으며 밑이 홀쭉하게 생긴 병을 말하며,
술 또는 물이나 꿀 같은 액체를 담거나 화병으로 쓰였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68호로 지정되었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은 고려청자 중에서도 당대 최고의 작품으로 꼽혀서
조선총독부까지도 눈독을 들여 1만 원에 구매 의사를 밝혔으나, 판매자가 거부하였다.
이후에 간송미술관의 창립자인 전형필이 이 청자를 구입한 금액은 2만 원으로
당시 서울 시내의 기와집 20채 가격이었다고 한다.
이후 오사카의 일본인 수집가가 직접 찾아와 4만원의 가격을 제시하며 팔 것을 권유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이 청자보다 더 훌륭한 자기를 가져오시면 바꿔 드리겠소."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고려 매병(梅甁)은 중국 송(宋)나라 매병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12세기경에 이르러서는 고려만의 풍만하면서도 유연한 선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이러한 고려 매병의 양식은 이 작품에서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높이 42.1㎝, 입지름 6.2㎝, 밑지름 17㎝의 크기의 매병의 구연부는 작고 낮으며 밖으로 살짝 벌어져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구연부의 아랫부분에는 꽃무늬를 둘렀으며 굽 위로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몸통 전면에는 구름과 학을 새겨 넣었는데, 흑백상감한 원 안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학과 구름무늬를, 원 밖에는 아래쪽을 향해 내려가는 학과 구름무늬를 새겼다.
학의 진행방향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도자기 표면이라는 일정한 제약을 넘어
사방으로 공간을 확산시켜 짜여진 구획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듯하다.
이같은 표현상의 변화 추구와 함께 문양처리의 능숙함에서
고려 도자기의 우수함과 고려인의 창의력을 엿볼 수 있다.
간송 전형필과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강서양천신문사
2022.10.12
우리가 중학교나 고등학교 다닐 때 국사 교과서에서 고려청자의 진수라 보고 배운 것이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
이 고려청자가 세상에 나오고 지금까지 우리 곁에 있는 데는 사연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5년 일본인 마에다는 도굴된 고려청자 하나를 6,000원에 매입하게 된다.
그 시절 경성 시내에 여덟 칸짜리 기와집이 1,000원 하던 시절이니 기와집 6채 값을 지불하고 매입한 것이다.
도자기에 새겨진 학은 69마리였지만 매병을 빙빙 돌리면 천 마리 학이 나는 것처럼 보여
이 고려청자를 ‘천학매병’이라 명명하고 조선의 고관대작과 일본의 거부들에게 사진을 보내며
소문을 내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곳은 조선총독부였다.
그때 막 경복궁 안에 박물관을 지었기 때문에
최고의 골동품으로 박물관의 위신을 세워보고자 1만 원을 제시했으나 마에다는 거절했다.
도굴품인 줄 알면서도 거금을 주겠다는 조선총독부의 제안을 거절하기란 일본인인 마에다도 쉽지 않았다.
조선총독부가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모를 일이었지만, 마에다는 천하제일의 명품인 천학매병을 통해
한몫 잡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기 때문에 기회를 살폈다.
간송은 이미 24살에 조선 거부 40명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고,
그 유산으로 가치 있는 서책 등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천학매병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무척이나 보고 싶어했다.
드디어 마에다를 만나고 천학매병을 마주했다.
간송은 속으로 감탄했다. 고려 상감 청자의 백미였다.
마에다는 30살 남짓의 젊은 조선 청년이 고가의 명작을 구입하겠다고 하니
한편으로 가소롭게 여기며 기와집 20채 값인 거금 2만 원을 부르고는 간송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간송은 일체의 주저함 없이 한 푼도 깎지 않고 2만 원이 든 돈 가방을 내어놓았다.
마에다는 그러한 젊은 조선 청년의 패기와 배짱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거래가 이루어진 이틀 후
골동품상인 마에다의 장인 아마이케가 일본에서 사위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둘은 그의 단골인 오사카의 거상 무라카미가 천학매병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나누게 되지만,
이미 간송에게 판매한 뒤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무라카미가 천학매병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며 조선으로 건너왔고
간송의 집에서 천학매병을 보게 되었는데 그 자태가 너무 아름다워 감탄을 연발했다.
너무 욕심이 난 무라카미는 간송이 구입한 가격의 2배인 4만 원을 제안했고,
간송은 웃으며 “어떻게 2만 원에 산 천학매병을 4만 원을 받겠느냐”며
2만 원에 매도하겠다고 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이 천학매병보다 더 좋은 고려청자를 소개해주고 가격은 원하는 대로 치르겠다고 했다.
무라카미는 이 조선 청년의 위상에 크게 웃으며
“제가 졌습니다. 저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은 선조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지켜져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마도 한 점 한 점마다 이러한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어느 휴일 가족들과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방문하여
그러한 선조들의 마음과 정성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서울강서문화원 강진호 원장
나를 움직이게 한 ‘너그러운 열어둠’ 국보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2022-03-30
작성자 : 문화재청
청자, 독보적인 단아한 아름다움
평소 작업을 대하며 중요하게 여기는 화두 중 하나는 ‘제 빛깔’에 관한 것이다.
혼돈에 맞서 의지로 이루어 낸 승리의 소산과 같은 작품을 만나면 숙연한 마음에 압도되지만,
나는 어쩐지 본연의 자질을 충분히 발휘하면서도
나를 새롭게 각성시키는 아름다움을 자꾸만 좇게 된다.
청자에 내가 지닌 각별한 애정의 이유도 그랬다. 나는 줄곧 청자를 소금구이 요리에 비유해 왔다.
최소의 가공으로 재료의 신선한 풍미만 충분히 살려도 더 바랄 것 없는 맛이 나오듯,
환원소성으로 기물 속 산소를 충분히 끌어내 주기만 해도
유약의 철분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푸른 빛,
그 단순한 원리로 만들어진 가장 유려하고 깊이 있는 빛깔.
자연히 나는 비색(翡色)이 절정의 미를 이루는 고려청자에 단숨에 마음을 빼앗겼다.
비색의 순청자는 별다른 장식 없이 단순하고 균형 잡힌 형태미에
청자의 유색만으로 검소 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기법이나 기형에서 중국의 영향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새롭게 받아들인 기술을 한국의 흙과 한국의 재료로 소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고려청자만의 푸른 비색은 독보적으로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익숙한 고려청자의 아이콘은
단연 국보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상감청자’일 것이다.
어딘가 이미 심드렁한 내 마음속 고정관념의 장벽을 뛰어넘어
상감청자의 실체와 직관적으로 공명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순청자가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유는
‘비색’이라 칭해지는 청자 유약의 오롯한 빛깔이 좀 더 고요하게 돋보이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하면 상감청자는 유약이 비교적 투명한 까닭에 유약 아래 태토(胎土)의 색이 함께 비쳐 보인다.
청자를 대하는 미적 취향이 단순했던 나에게 상감청자의 유약은
제 빛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게 느껴졌고 정교한 상감 장식마저
온전한 유색의 감상을 방해한다 여겼다. ‘제 빛깔’이라는 것은 그 시절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서로의 개성에 시너지를 더해준 상감청자
야금야금 여러 해가 지나고 세상살이를 더하게 되면서
그렇게나 익숙하던 상감청자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 색을 충분히 내지 못해 아쉽다 느꼈던 유약의 투명함은
태토의 상감 장식이 적당히 드러나 보일 수 있도록 겸손하게 자기를 양보하고 있었고,
태토와 유약의 빛깔은 마치 자갈이 비치는 덕에
더욱 청량해 보이는 개울물처럼 시너지효과를 내고 있었다.
각 요소가 절묘하게 공존하며 서로의 개성을 함께 발휘할 수 있는 그 ‘너그러운 열어둠’의 태도 덕분에
다른 공예에서 쓰이던 상감 기법을 청자에 새롭게 접목해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창조의 기회가 탄생했고,
그것이 상감청자의 독창적인 예술적 가치를 이루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각 재료의 ‘제 빛깔’을 하나하나 깊이 이해하고 조화롭게 요리해 낼 수 있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섬세한 균형감각이 조금씩 나의 마음을 움직여 여는 것이었다.
예술을 통한 소통은 800년쯤은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었다.
같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공명한다는 느낌은 시간도 공간도 초월한다.
그렇게 마음이 연결되고, 언제라도 연결될 여지를 열어두는 것,
그 과정에서 ‘제 빛깔’은 당연한듯 마법처럼 스며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가진 작가
청자의 감각적 심상을 현대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부와 대학원에서 도예를 수학하고
국내외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Waterdrop〉, 〈Dewdrop〉 시리즈에 이어 평면 회화로 번역한 청자의 물질성이
명상적인 자연을 떠올리게 하는 〈Fluidity〉 시리즈를 선보이며
소재와 양식의 고정관념을 넘나드는 유연한 태도로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탐구한다.
글. 이가진(시각예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