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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奉先寺)
봉선사는 크낙새와 수목원으로 널리 알려진 광릉에서 아주 가깝다. 광릉 매표소에서 광릉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전나무 숲길 따라 남동쪽으로 1.5km쯤 내려가면 수십 채의 식당이 영업 중인 동네가 나타난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300m 가량 들어간 곳에 봉선사가 있다. 봉선사의 역사는 고려 시대부터 시작된다. 원래 봉선사 자리에는 고려 광종 20년(969년) 법인 국사가 창건한 운악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여러 차례 난리를 겪으며 폐허가 된 것을 1469년(조선왕조 8대 임금 예종 원년) 정희왕후 윤 씨(7대 세조의 왕비)가 세조의 영혼을 봉안코자 다시 일으켜 세운 뒤 봉선사라 개칭했다.
이후 봉선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소실과 중건을 7차례 했다. 절에서 100m 떨어진 곳에 큰 비석 여러 개가 눈길을 끈다. 그중 하나가 춘원 이광수 선생 기념비다. 그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기 전 4년 동안 남양주 사능 부근 작은 집에서 산 적이 있는데 그때 한 해 겨울을 봉선사에서 지낸 인연이 있다. 당시 주지 스님이 운허라 그런 인연을 맺은 것이다. 기념비 정면에는 한글로 ‘춘원이광수기념비’라고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주요한의 글이 서예가 원곡 김기승의 글씨로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좌우 측면에는 이광수가 남긴 글들이 김기승의 글씨로 음각되어 있다. 기념비의 제막식은 1976년 5월 29일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봉선사 구내에서 개최되었다.
봉선사에 가면 가장 먼저 찾아볼 것이 대웅전 처마 밑에 걸린 현판이다.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큰 법당이라고 한글로 쓴 것이 이채롭다. 1970년 운허 선사(춘원 이광수 팔촌 동생)가 대웅전을 세우면서 써서 달았다. 또한, 경내에 봉선사 대종(보물)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동종 중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것으로 예종 원년(1469)에 왕실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다. 조선왕조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봉선사는 가수 유현상이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장소로도 유명하며 가왕 조용필 역시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큰법당' 한글 현판, 1천6백년 불교사 파격… 남양주 봉선사
기자명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중부일보 기사 입력 : 2022.04.25. 17:51 수정 2022.04.25. 22:07
◇봉선, 선왕의 덕업을 받들어 모시다.
봉선사는 고려 969년(광종 20)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해 운악사(雲岳寺)라 불렸고, 세조가 승하하고 광릉(光陵)이 조성되면서 원찰로 중창되며 봉선사(奉先寺)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나라를 대표하는 국찰의 기능과 역할을 해왔다. 세조의 영정을 봉안한 숭은전(뒤에 봉선전)으로 홍살문과 하마비가 세워지고, 예종과 성종의 각별한 지원과 관심을 받았다. 특히 1551년(명종 6)에 선종(禪宗)의 봉은사(奉恩寺)와 더불어 교종(敎宗)의 수사찰(首寺刹)로 승격되면서 봉선사는 교종 본찰(本刹)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불탔지만 다시 중창되어 사격(寺格)을 유지할 수 있었고, 1790년(정조 14)에는 전국 사찰을 총괄하는 5규정소(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함경도 지역의 사찰을 관장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특히 1902년(광무 6) 원흥사(元興寺)를 대법산(大法山)으로 하고 전국 16개 사찰을 중법산(中法山)으로 정할 때 경기좌도(京畿左道)의 수사찰이 되었고, 1911년 일제에 의한 사찰령(寺刹令)으로 전국의 사찰이 30본산로 구역될 때 봉선사는 경기 북부 일원의 사찰을 관장하는 본사(本寺)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어 본사로서의 사격을 잃었다가 1968년 대한불교 조계종의 마지막 제25교구 본사가 되어 한강 이북의 사찰들을 관장하는 교종의 으뜸사찰이다.
◇‘큰법당’ 한글 현판이 준 문화적 충격
봉선사가 보통의 절집과 다른 것은 절집 중심에 ‘大雄殿’ 현판이 아닌 ‘큰법당’이라 큼지막하게 써 붙인 한글 현판이었다. 1980년대 초 이를 처음 보고 느낀 신선한 문화적 충격은 분명 봉선사를 매력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개 절집의 가장 큰 중심법당을 큰법당이라 부르지만 ‘큰법당’이라 한글 현판을 저렇게 당당하게 써서 붙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천600년 동안 그 당연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충격이었다. 이러한 당연함을 당당히 실천한 사람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독립운동가이자 역경사업에 헌신한 운허(耘虛, 1892~1980) 스님이다. 속명이 이학수(李學洙)로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와 같은 마을에서 자라 함께 공부한 8촌 형이다. 운허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이자, 불경의 한글번역과 강원교육을 통해 후학을 양성한 큰스님으로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중흥조라 할 수 있다.
운허스님은 1970년 큰법당을 세우며 서예가 운봉 금인석(琴仁錫, 1921~1992) 교수에게 한글 편액과 한글 주련을 부탁하였다. 큰법당은 겉에서 보면 영락없는 목조건축물인데, 실상은 철근 콘크리트로 정교하게 만든 건물이라 또 한번 놀라게 된다. 큰법당은 근대건축 재료와 구조로 전통성을 표현하고자 한 60~70년대 기술을 대표하는 사례로 근대건축사적, 불교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봉선사가 근대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첫 자리는 역경사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 빛나는 자부심은 한글로 된 ‘큰법당’과 한글 주련들 그리고 운허스님이 한글로 쓴 일주문의 ‘운악산 봉선사’ 큰 글씨로 당당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한문 독경이 아닌 우리말 아침예불이 봉선사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는 불경의 한글번역을 넘어 의례의 한글화, 대중화를 선도하는 봉선사라는 사실이다.
◇봉선사의 보물들
봉선사는 국난을 온전히 겪은 절집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불타고 1950년 6.25전쟁으로 불타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봉선사가 한반도 북쪽에서 서울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봉선사 보물은 이런 국난에도 살아남은 5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봉선사 동종, 삼성각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범종은 그리 많지 않다. 1469년(예종 원년)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제작된 높이 238㎝의 커다란 봉선사 동종은 음통은 없지만 두 마리 용이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한국 범종의 모습이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절터에 동종 하나 덩그러이 놓여진 사진은 국난과 함께 한 봉선사를 상징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탓에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전각인 삼성각은 1926년 월초 스님이 건립한 것으로 현재 봉선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셈이다. 이곳의 독성도와 칠성도는 2011년 경기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902년에 건립된 흥인지문 밖 원흥사가 폐지되고 창신공립보통학교가 되면서 월초 스님이 봉선사로 옮겨온 것이다.
봉선사에는 범종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비로자나 삼신괘불도가 있다. 1735년(영조 11) 상궁 이성애(李性愛)가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1669~1735)의 명복을 빌며 제작한 괘불이다. 밝고 화사한 색채와 굵고 대담한 묵선으로 묘사된 인물들의 움직임과 옷자락의 자연스러움은 왕실발원 불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보물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물이 봉선사에는 있다. 그것은 올곧은 정진과 교학의 가풍이다.
◇봉선사의 가풍을 만들 사람들
봉선사 가풍을 만든 이는 조선 말기 이래 봉선사를 대표하는 홍월초(洪月初, 1858~1934) 스님을 꼽을 수 있다. 근대불교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승려의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다. 남·북한총섭을 역임하였고, 불교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의 설립자였다. 전통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새롭게 부는 일본불교의 바람을 맞으며 불교의 발전을 모색했던 인물이었다. 월초스님의 업적 가운데 특기할 것은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 1927)’의 편찬을 꼽을 수 있다.
본사 봉선사를 비롯하여 회암사·흥국사·불암사 등 24개 사찰의 사지였다. 당시 봉선사 강사였던 안진호(安震湖 1880~1965)에게 명하여 편찬케 하였다. 이후 안진호는 많은 사지를 편찬하였다. ‘봉선본말사지’는 이듬해 만해 한용운의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 1928)’으로 이어졌다. 6.25전쟁으로 봉선사와 강원도 건봉사가 불타고 난 뒤 이들의 사지 편찬은 역사적 혜명으로 일컬을 만큼 위대한 업적이 되었다. 또한 1934년 월초 스님은 열반하기 직전 자신의 소유토지 2만6천여 평을 모두 봉선사에 기증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이 설립되었고, 손상좌 운허 스님이 그 뒤를 이어 봉선사를 이끌었다.
◇월초 스님의 또 다른 손상좌로 운암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이 있다.
대학시절 가장 감명 깊게 있은 책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쓴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었다. 본명이 장지락(1905~1938)으로 알려진 파란만장한 김산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충창이었다. 김충창은 김성숙의 다른 이름이다. 성숙이라는 법명을 스승 홍월초가 주었다. 그렇게 봉선사는 홍월초, 이운허, 김성숙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 정신과 교학의 가풍을 이어왔다.
특히 역경원장을 역임한 운허 스님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을 봉선사에서 이끌었고, 그 원력을 이어 받은 제자 월운(月運) 스님은 1965~2002년까지 37년에 걸쳐 해인사 소장 고려대장경을 총 318권의 한글대장경으로 완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렇게 봉선사는 역경사업을 통한 불교대중화와 서당운영을 통해 젊은 인재들을 배출하며 교학불교에 뛰어난 봉선사의 전통을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승려들의 보편적 복지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등 불교의 현대화에도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광릉의 봉선사는 광릉숲과 더불어 더욱 빛나는 가풍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남양주 봉선사
[불교신문 3741호/2022년11월8일자]
기자명 권중서/조계종 전문포교사
깊어가는 가을 더 늦기 전에 춘원과 봉선사를 …
“님에게는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 이제
알았노라 님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투신 부처님이시라고”
춘원의 ‘애인-육바라밀’은 너무나 유명한 시이다.
이처럼 쉽게 육바라밀을 시로 표현하여
보살도를 일러 주었다. 또 불자들이
법회 때 부르는 ‘청법가’의 작사도 춘원이 했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스님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이후 조선 세조가 예종에게 “선조를 받들고 효도하기를 생각할 것(奉先思孝)”을 유언으로 남겼다. 예종은 1469년에 ‘봉선사(奉先寺)’란 사액을 내려 절 이름이 바뀌었고 광릉의 능침사찰이 되었다. 세조는 왕권 강화와 토지제도 정비, 불교서적 간행 등 백성을 위한 많은 업적을 남긴 호불 군주로 ‘조선의 아쇼카왕’이라 말할 수 있다.
‘삼해탈’ 일주문
봉선사 일주문을 바라보면 ‘어! 한글이네’ 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앞의 ‘운악산 봉선사’ 한글 편액과 뒤에 ‘교종본찰 봉선사’란 한자 편액을 볼 수 있다. 일주문만 보아도 봉선사는 불경의 한글 역경사업의 중심도량임을 알 수 있다. 봉선사는 조선 명종6년(1551) 허응당 보우스님의 목숨을 건 선교양종의 승과 부활로 교종의 으뜸사찰이 되었다. 일주문은 삼문(三門)으로 4개의 돌기둥을 일렬로 세운 것은 흔들림 없는 수행으로 삼독심을 버려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삼해탈문(三解脫門)을 표현했다. 대웅전에 걸린 특이한 한글 편액 ‘큰법당’에서는 불경의 한글화에 크게 이바지한 운허·월운스님의 한글 사랑이 느껴진다. 내부에는 한글 <화엄경>과 한문 <법화경>을 동판에 새겨 벽을 이루었다. 6·25전쟁으로 타버린 법당은 철근 콘크리트를 구조이지만 전각의 전통성을 잘 표현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범종을 치는 이유
범종각에는 예종의 지극한 효심이 느껴지는 보물 범종이 있다. 범종에는 1469년 조선 시문서화의 4절로 꼽히는 최고의 문장가 강희맹의 글이 새겨져 있다. “범종이란 불도 수행 기구의 가장 으뜸이 되는 것으로서 그 소리가 웅장하여 위로는 하늘 꼭대기에, 아래로는 지옥까지 미쳐 육도에 들린다. 색계 18천의 하늘 아가니타왕까지 이 범종이 크게 울려 불법(佛法)이 크게 일어나니 지금 이 범종으로 하루 여섯 번 경책하면 악도에 윤회하는 것을 그칠 뿐이겠는가. 반드시 광릉에 크게 울려 문득 부처님의 지혜를 더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산이 평지가 되고 바다가 마를지언정 이 공덕은 끝내 없어지지 않는다”하여 봉선사 중창의 공덕을 찬탄하였다. 또 이 범종 소리로 세조대왕이 깨달음을 이루고 28중생세계(지옥, 아귀 축생, 인간, 욕계6천, 색계18천)가 윤회를 그쳐 극락에 이르길 발원하였다. 이처럼 새벽에 28번 범종을 치는 것은 28중생세계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다.
범종은 높이 238㎝, 입지름 168㎝의 큰 동종(銅鐘)으로 조선 범종의 특징인 음통이 없고 용뉴에는 위엄이 넘치는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지며 여의주를 잡고 있다. 사방 4곳의 연못에는 각 9개씩 36개의 연꽃봉오리가 도드라져 있어 밀교의 37존불을 형상화했다. 연못 사이에는 4명의 보살이 서 있고 그 밑에는 육자대명왕진언, 파지옥진언을 범어(梵語)로 새겼다. 아래 중첩된 물결무늬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피안으로 가는 것을 나타냈다.
북두칠성은 7여래로 변하여…
큰 법당 서쪽 언덕에는 1926년에 건립된 삼성각이 있다. 6·25전쟁을 견뎌낸 산령각, 북두각, 독성각은 한 지붕 밑에 세 가족처럼 한 전각에 산신, 칠성, 독성을 모셨다. 가난했던 시절 초가삼간에 부모님 모시고, 처자와 함께 살았던 정이 묻어난다. 처마 끝 풍판(風板) 안쪽에는 청룡이 힘차게 날고 운악산 백호가 긴 꼬리를 흔들거리며 늠름하게 봉선사를 지키고 있다. 북두각에는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가 금륜을 왼손에 들고 인간의 수명과 복락을 관장한다. 북두칠성은 칠여래로 변하여 중생을 살피고, 치성광여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연꽃 위에 해와 달을 들고 있다. 원유관 위에 흰 점으로 별을 표시한 칠원성군이 있다.
그 옆의 독성각에는 빈도라발라타사 즉, 나반존자 불화가 있다. 독성의 모습은 오른손에는 불로초를, 왼손에는 긴 석장(錫杖)을 들고 반석 위에 앉아 있다. 탈속의 자유와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배경으로 붉은 태양과 상서로운 구름, 천태산의 소나무, 학, 모란꽃과 호랑나비, 새, 황룡, 거북, 동자, 동녀, 신선 등이 등장한다. 그런데 동녀가 안은 학과 바다 속 거북이가 흰 기운을 뿜으며 서로 입을 벌려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재미있다. 그 옆에는 오랜만에 동자의 호리병 속에서 나온 황룡이 검은 구름을 일으키며 신나 한다.
봉선사에는 음식 이야기가 전한다.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보면 박술은 구걸하기 위해 봉선사를 들렀다. 때마침 경기감사가 오니 봉선사는 진수성찬을 올렸는데 거지 박술이 절 뜰에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남산도 더는 높지 말고, 한강도 더는 깊지 말며, 감사께서도 더는 배부르지 말고, 걸인도 더는 배곯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공이 먹다 남긴 것이라도 얻었으면 합니다” 그러자 감사는 웃으면서 음식을 내주었다고 한다. 부족하지도 말고 넘치지도 않는 행복한 세상은 ‘보시’에 있음을 말해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춘원 이광수가 봉선사로 간 이유는?
봉선사 입구에는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서 있다. 감성적 천재 춘원 이광수(1892~1950)는 일제강점기에 불교문학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1922년 석왕사에서 <화엄경>, 1923년 금강산에서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등 불경을 읽고 더욱 불교에 심취하여 <이차돈의 死>(1935), <꿈>(1938), <무명>(1939), <사랑>(1939), <원효대사>(1942) 등 많은 불교관련 소설을 집필했다. 해방이 되자 춘원은 팔촌인 봉선사 운허스님에게 의지하여 머물며 지난날의 친일협력에 대한 번민의 돌베개를 베었다. 춘원은 <돌베개>의 서문에서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떠나서 수도생활을 할 작정으로 꽤 크고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봉선사로 갔다”고 했다.
춘원의 시 ‘애인-육바라밀’은 너무나 유명한 시이다. “님에게는 아까운 것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 이제 알았노라 님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투신 부처님이시라고” 이처럼 쉽게 육바라밀을 시로 표현하여 보살도를 일러 주었다. 또 불자들이 법회 때 부르는 ‘청법가’의 작사도 춘원이 했다. 아쉽게 북으로 끌려간 후 1950년에 생을 마감했다. 깊어가는 가을, 세조대왕, 춘원이광수와 함께 봉선사를 걸어 봄직도 하다.
남양주 봉선사 동종(南陽州 奉先寺 銅鍾)
대한민국의 보물 제397호(1963년 9월 2일 지정)
수량 1구
시대 조선시대
관리 봉선사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봉선사
좌표 북위 37° 44′ 47″ 동경 127° 11′ 00″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남양주 봉선사 동종(楊州 奉先寺 銅鍾)은 조선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봉선사를 다시 지을 때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한반도에 많이 남아있지 않은 조선 초기의 동종으로, 1963년 9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었다.
남양주 봉선사 동종(南陽州 奉先寺 銅鍾)은 왕실의 발원으로 만들어진 조선전기 대형 범종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예종원년(1469)년에 제작되었다. 높이 238cm, 입지름 168cm, 두께 23cm로 꼭대기에는 용통이 없고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지고 종의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조선종의 모습이다. 종의 어깨에는 이중의 가로줄을 돌려 몸통 부분과 구분 짓고 있으며, 종 가운데는 굵고 가는 3중의 가로줄을 그어 몸통 부분을 상·하로 나누고 있다.
줄 윗부분에는 사각형의 연곽과 보살입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가로 줄 아랫부분에는 강희맹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쓴 장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는 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만드는데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어서, 국가적인 감독으로 이루어진 범종임을 알 수 있다. 또 종의 입구 위쪽으로 넓은 띠가 있는데 그 안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파도 치는 모양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고려시대에 비해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나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보살입상 그리고 육자광명진언(六字光明眞言)이라는 조선시대 종의 새로운 요소가 등장한 점에서 조선시대 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남양주시 진전읍 봉선사(奉先寺)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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