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6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이 애굽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의 개념은 내 생각과 내 뜻대로 잘 이루어지는 만사형통을 의미하지만 성경의 형통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권력의 수하에서 종이나 노예가 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형통한 자임을 믿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39:2, 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내가 주님과 함께 있음을 상대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진짜 형통이요 영광입니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나의 비천한 뜻과 내 의를 의루고자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이런 나는 주님의 공의로 심판을 받아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그러한 나를 주님께서는 과연 심판하셨고 심판의 무덤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 안에서 전혀 알지 못하던 복음을 주셨고 그 복음으로 아들의 생명을 얻어 오늘도 새 생명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이런 주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 곧 은혜와 진리가 나를 감싸옵니다.
나를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12:28-34
제목 :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나의 묵상
18-27절은 예수님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부활 논쟁을 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경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시고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셨다.
이는 그들을 우습게 만들기 위한 힐난이 아니라 부활 이후 들어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도록 하기 위함이다.
28-33절, 이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들었던 바리새인들 중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한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여기서 서기관이라 함은 병행본문인 마 22:35절에서는 율법사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서기관이나 율법사나 동일한 직분임을 알 수 있다.
서기관은 ‘글을 베끼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왕의 비서, 회계 담당, 문서의 기록과 정리 등을 맡아 일을 보았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에는 이들이 종교적 의미를 지닌 율법학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율법사로 불리게 된 것이다.
당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핵심 규범이었다.
따라서 서기관은 완정 시대의 일반 사무를 넘어 율법의 해석자이자 교사로서의 기능까지 수행하였다.
신약 시대에는 이들이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주로 율법을 연구하고 규칙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일을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당시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에 속하였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던 예수에 대하여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예수를 넘어뜨리고자 시험을 하기도 하였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서기관 역시 병행본문인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 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본문의 ‘서기관 중 한 사람이’에서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은 항상 무리를 지어 예수님께 나왔다.
그것은 자신들의 무지와 불신앙을 최대한 감추기 위하여 집단적 행동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런데 본문에는 한 사람이 나아온 것이다.
이 사람은 다른 서기관들에 비하여 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요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하지만 그 역시 근원적으로는 다른 바리새인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예수를 시험하려는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던 서기관은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에 동의와 수긍을 표하였고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구나’라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한편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하다.
맨 먼저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으라)’를 말씀하신다.
신 6:4-5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신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신앙 신조로 아침저녁으로 암송하였고, 이를 양피지에 써서 작은 통에 넣어 이마나 팔목에 매고 언제든지 꺼내 읽을 수 있도록 한 가장 중요한 계명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첫째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다.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일한’(히, 모나드/ 헬, 헤이스)이라는 말은 단지 수량적 개념이 아니라 ‘무궁성, 통일성, 존재의 원점, 존재의 시원’이라는 뜻을 가진다.
자기만 최고라는 ‘일신(一神)’도 아니고 여러 신들을 다 인정하는 다신(多神)은 더더욱 아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모든 만물과 신들을 초월하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신다.
또한 둘째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신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을 수 있을까?
이는 다름 아니라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눈에 보이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구약의 족장 시대는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극진히 접대하는 것이 삶의 가장 기본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나그네를 접대한 것이 곧 하나님을 접대하는 기회가 되었다.
(히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태양이 작열하는 한 낮에 세 사람이 아브라함의 집 맞은편에 있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런데 그들 중 두 사람은 천사였고(창 19:1), 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다(창 18:22).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람으로 현현하신 것이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대접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희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종말장인 마 1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양에 속한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봐주었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우리가 언제 주님께 그런 일을 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주님이 이렇게 대답하신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실재이다.
나는 과연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였는가?
이제 며칠 후면 설 명절이다.
나는 부교역자로 있을 때 교회나 성도들이 선물을 주면 그것을 받아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본받아 두 아들과 함께 시장에 나가서 가난해 보이는 이들에게 그 선물을 전달하곤 하였다.
또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의 집을 찾아가 그 선물들을 나누곤 하였다.
나의 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선물을 현관 앞에 두고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숨어서 지켜보면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물론 이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일이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잠시 잠깐 있었던 일이었으며 그로 인하여 나의 마음도 부요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 두 아들은 이런 일로 인하여 선물을 다 남들에게 준다고 때로는 입이 뾰루퉁해지기도 하였다.
물론 들어온 선물은 이웃들에게 나누었지만 우리 식구들이 먹을 과일은 따로 구입해서 먹었다.
그런데 어찌 이것이 하나님께 칭찬 받는 최고의 일이겠는가?
때와 상황이 달라졌을지라도 언제나 한결 같은 마음으로 그렇게 행해야 할 것이다.
이곳 베트남에서도 이웃들에게 예수를 직접 전하지는 못하지만 설 선물을 나눈다.
그런 일을 통하여 예수의 향기가 조금이라도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날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을 따라 나도 십자가를 지기 원한다.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십자가에 죽고 함께 무덤에 장사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아 행하기를 원한다.
아주 조그만 섬김이지만 주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서기관과 같이 첫째 되는 계명과 둘째 되는 계명을 서로 분리하여 생각했던 자였습니다.
하나님께는 최선을 다하며 산다고 하였지만 정작 자기 부모에게 드릴 것도 ‘고르반’ 하면서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저 하나님께 열심히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나의 의를 드러내는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나는 마땅히 주의 공의로 심판 받아야 할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를 아주 멸하지 않으시고 징계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알게 하셨고 결국 영원한 생명으로 그 나라를 살게 하셨습니다.
이런 내게 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 크고 귀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그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제 나는 죽고 오직 예수만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을 더 사랑하되 보이는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나에게 그런 긍휼의 마음을 허락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