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곳에서도 쉽게 자라는 '점령자' 식물… 산불로 황폐해진 땅 복원하기도 하죠
띠
야생 식물인 띠(왼쪽 사진)는 흰색, 조경용으로 많이 심는 홍띠(오른쪽 사진)는 붉은색이 각각 섞여 있어 구별돼요. /국립생물자원관·차윤정 산림생태학자
가을이 무르익으면 우리 주변 곳곳에 있는 정원은 홍띠의 붉은 잎들로 물듭니다. 홍띠는 야생의 ‘띠’를 재배한 식물로, 우리에겐 정겨운 식물이었습니다. 이른 봄이면 아이들은 논두렁에서 삐죽이 솟아 나오던 띠의 어린 이삭을 뽑아 먹기도 했죠. ‘삐리’ 혹은 ‘삘기’로 불렸답니다. 띠는 소가 뜯어 먹어도, 낫으로 몇 번을 베어도 연한 새잎이 계속 돋아났답니다. 가을이면 이 띠를 한가득 베어 퇴비를 만들기도 하고, 또 불이 잘 붙는 식물이라 아궁이의 불쏘시개로도 사용했습니다. 더 옛날에는 물기가 잘 스며들지 않는 특성을 활용해 띠를 엮어 집 지붕을 이었고, 비옷인 도롱이를 만들기도 했어요.
벼과 띠속의 여러해살이풀인 띠는 씨앗과 땅속줄기로 번식합니다. 띠는 우리나라, 일본,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열대에서 아열대에 이르는 건조한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분포하는데, 숲보다 초원에서 번성해요.
가늘고 긴 이파리를 갖는 벼과 식물을 그래스(grass)라고 부릅니다. 그래스의 꽃을 이삭이라 하는데, 이삭엔 꽃잎이 없어요. 띠의 이삭은 첫 번째 잎에 말려 돋아나옵니다. 이삭은 암술과 수술을 모두 갖추고 있어요. 이삭은 땅속에 있는 줄기로 연결되어 있어 서로 다른 개체인지 구분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다른 이삭에서 온 꽃가루만 받습니다. 이를 타가수분이라고 해요. 띠의 씨앗은 가볍고 긴 솜털이 달려있어 바람에 날려가거나, 사람이나 짐승, 기계 등 무엇에나 붙어 이동하죠. 폭 1㎝ 내외, 길이 20~60㎝ 정도의 기다란 띠의 잎은 휘어지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어 서슬 퍼런 칼 같기도 해요.
최근 들어 띠는 많은 나라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잡초’로 지목되고 있기도 합니다. 쉽게 이동하는 많은 양의 씨앗과 하나의 그물망처럼 광대한 땅속줄기를 갖춘 띠는 어느 땅이든지 빠르게 점령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띠는 다른 식물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고약한 물질을 분비하기도 해요. 띠는 이런 식으로 땅을 자신들만의 영역으로 만들어버려요. 불에 쉽게 타는 성질 때문에 띠에 불이 옮겨붙으면 큰 산불이 되기도 하죠. 온도가 높거나, 건조하거나, 홍수가 나서 물이 불어나는 등 극단적 환경에서도 매우 생존력이 높기 때문에 일단 한번 자리 잡으면 제거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띠에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띠가 가진 ‘점령자’ 성질은 망가진 생태계를 빠르게 복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답니다. 산불이 일어나 황량해진 땅에 띠와 같은 식물이 새로 들어오지 않으면, 비나 바람에 의해 토양이 쉽게 쓸려가버려서 식물이 정착할 기반이 영영 사라질 수도 있어요. 또 주기적으로 들불이 발생하는 열대 초원에서는 띠가 부드럽고 신선한 풀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죠. 띠는 초원의 동물들에겐 고마운 존재랍니다.
최근엔 붉은 단풍이 아름다운 홍띠가 조경용으로 많이 심어졌어요. 아름다운 홍띠를 보면서 띠의 정겨운 추억을 떠올려봅니다.
차윤정 산림생태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