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토요일 오전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섭니다. 동네 기차역으로 10분 정도 걸어내려가는 길. 한 달 전부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새벽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오는 교육과정에 참가하느라 피곤한 아내, "혼자 가도 정말 괜찮으니까, 집에서 쉬라"는 제 말에도 기어이 따라온답니다. 주중에 서로 바빠 얼굴도 제대로 못 봤으니 오늘 하루 이렇게라도 데이트를 하자고요.
기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두 시간 가까이 여행을 합니다. 호수가 바뀌었군요. 레만 호수쪽에 도착합니다. 구름에 가려 잘 안보이지만, 호수 건너편으로는 알프스 산맥.
일년에 한 번씩, 남녀 유럽 랭킹 상위 16명씩 총 32명을 모아서 토너먼트 방식으로 대회를 치루는 장소에 도착합니다. 1971년부터 '유럽 톱12컵'이라고 상위 12명씩 모으다가, 2015년부터 참가 선수 수를 남녀 각각 16명으로 늘려서 '유럽 톱16컵'이라는 이름으로 고쳐부르고 있습니다.
'체육관 주변 주차 공간이 많지 않으니, (주차 공간 찾아 빙빙 돌거나 부정 주차 범칙금 낼 각오가 있지 않으면)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있어 기차를 타고 간 것인데, 정말 주차장이 작기도 하고 주차요금도 비싸고 남은 자리도 없고...
예약한 표 보여주고 지정된 자리에 앉습니다. 16강전과 8강전이 열리는 오늘은 탁구대 두 대를 놓고 대회를 진행합니다. 준결승전과 결승전이 열리는 내일은 탁구대 하나만 놓지요.
프랑스의 시몽 고지 선수와 포르투칼의 주앙 제랄도 선수의 3세트 경기가 진행되고 있군요.
아내는 탁구 경기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탁구를 치지를 않으니 세세한 기술, 작전 등을 모르죠. 공도 빠르고 랠리도 정신없이 진행되다가 금새 끝나버리기 일쑤고... 조금 보다가, 가지고 온 컴퓨터를 엽니다. 월요일까지 써내야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는군요.
스위스의 라셸 모래 선수와 체코의 하나 마텔로바 선수의 시합이 열립니다. 스위스 여자 탁구계 부동의 1위 라셸 모래는 올해로 다섯 번째 대회에 참가합니다. 유럽 상위 랭킹에서 한참 멀지만, 개최국의 남녀 선수 한 명씩에게 출전권을 주는 혜택 덕분입니다.
저쪽 제2탁구대에서는 지난해 대회 남자부 우승자인 슬로베니아의 다르코 요르기치 선수가 덴마크의 조나탄 그로스 선수와 경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경기는 봐야겠다"하면서, 아내는 컴퓨터를 가방에 넣고 뜨개질을 꺼내듭니다. 세트 점수 3대3으로 마지막 7세트까지 가지만 라셸 모래가 아깝게 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올해 남자부 우승 후보로 지목한 스웨덴의 트룰스 뫼레고드 선수와 슬로바키아의 왕양 선수의 경기입니다. 왕양 선수는 포핸드 공격도 적극적으로 하는 현대적 수비 선수인데요. 역시 수비수 선수들의 경기가 직접 보기에는 멋지고 재미있습니다. 2011년 파리 월드컵때 본 주세혁 선수의 경기를 아내가 두고 두고 얘기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이번에도 아내가 오늘 경기중 제일 재미있었답니다.
여러 아이들이 공 줍는 역할을 했는데요. 많이 먹어야 예닐곱 살 먹었을 아이도 한 명 있더군요. 세트가 끝나고 주운 공을 부심에게 가져다 주는 모습이 귀엽습니다.
16강전의 마지막 경기입니다. 작년 대회 여자부 우승자인 독일의 한잉 선수와 스웨덴의 린다 베르그스트롬 선수인데요. 둘 다 수비 선수입니다. 승부 내는 데에 정말 오~래 걸렸어요. 깍다 깍다 못 참고 유혹에 끌려 공격하는 쪽이 점수를 잃는 현상이 자주 벌어지더군요.
16강전 마지막 경기가 오래 걸리는 바람에 저녁 식사를 위한 휴식 시간이 그만큼 줄어버렸습니다. 저녁 8강전 스케쥴은 예정대로 시작하니까요. 멀리까지 따라온 아내에게 대회 행사 간이식당에서 밥먹자고 할 수는 없지요. 해가 넘어가는 호숫가를 거닐다가 식당 하나 나오면 거기서 천천히 먹고 대회장에 돌아오기로 합니다.
남미 식당이 하나 있길래 들어갔습니다. 개최국 초청 선수로 참가한 엘리아스 하르트마이어 선수가 친구들과 와 있군요. 저희가 대회장에 도착하기 전, 오전에 크로아티아의 안드레이 가치나 선수에게 4대1 패배로 탈락했습니다. 간간히 왁자지껄 떠드는 내용이 제 귀에까지 가끔 닿았는데, '한 세트 딴 게 어디냐', '좋은 경험했다'고 하는군요.
맨날 적*혀*님의 뒷풀이 사진에 한이 맺힌 터라, 저도 음식 사진 한 장 찍어보았습니다.
밥 먹고 돌아오니 8강전 첫 두 경기가 진행중입니다. 스웨덴의 크리스티안 카를손의 스카이서브에 모든 시선이 집중.
'나도 스카이 서브 넣는다'는 독일의 당 치우 선수. (눈 아프겠어요...)
저같은 많은 탁구인들의 진정한 룰모델(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룩셈부르크의 니 시아리안 선수가 16강전에서 이기고 8강에 올라와 경기를 합니다. 안타깝지만 8강에서 탈락. 스스로 경기 내용에 불만이 많았는지, 경기 끝나고 달래는 남편 코치의 말에도 완전 뚱해서 한동안 자리를 못 뜨더군요. 올해 만 60세가 되는 것으로 아는데, 승부욕이 여전합니다.
저쪽 제2탁구대는 디미트리 옵차로프와 크로아티아의 토미스라프 푸카르 선수와의 8강전인데요. 쫙쫙 뻗어가서 탁구대에 빡빡 꽂히는 옵차로프의 드라이브를 보노라니, 저거는 엄청 잘 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딴 세상 사람 같군요.
아직 남녀 8강전 두 개씩, 네 경기가 남아있지만, 집에 돌아가야겠군요. 옆에서 아내가 졸기 시작합니다.
경기를 준비하는 요르기치 선수와 고지 선수를 뒤로 하고 대회장을 나섭니다.
저희 동네 기차역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거의 다 되었습니다.
2011년 파리 월드컵 이후로 국제 경기 관람을 못하고 있었는데,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내일 준결승, 결승 경기는 시간이 안되서 저녁에 동영상을 찾아봐야겠군요.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기차 타고 직관 다녀오셨군요 ^^
예, 기차에서 점심 먹으며 다녀왔습니다.
스위스 인가요? 프라이부르크 에 잠시
살았는데 사진만 봐도 뭉클하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예, 뇌샤텔(Neuchâtel)에 있습니다. 프라이부르크(프리부르)에 계셨었군요.
대회는 레만 호숫가 도시 몽르뢰에서 열렸습니다.
잘봤습니다. 명경기들을 직관하시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탁구는 직접 구경하는 게 동영상 보는 것보다 정말 더 재미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가보는 스위스 전국A리그만 해도 꽤 박진감 있고 재미있는데, 유럽 최상위권 선수들의 경기는 또 그 차원이 다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