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이야기 497]
<달구벌의 얼, 六臣祠(육신사)이야기>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사육신의 한 분인 취금헌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순천 박씨 충정공파의 집성촌이다. 구한말까지는 300여호의 집이 있었고,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100여 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30여 호만 남아 있다.
대구 성서공단역에서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를 지나 낙동강 강창교를 건너면, 달성군 하빈으로 연결되는 외곽대로가 전개된다. 필자가 젊은 시절이던 1970년대 중ㆍ후반에는 적적하던 시골촌락이 지금은 대구의 변두리가 되어 전원마을로 발전했다. 대로가에는 오월의 가로수로 이팝나무 꽃들이 도열하는 병사들처럼 하얗게 피어 도로가를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5월 3일 대구에 살면서도 지금 껏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六臣祠를 들리게 되었다. 대구 성서에서 불과 10여분 거리에 있는 동곡을 지나니 곧 하빈면으로 들어가는 갈래 길이 나오고, 세월을 따라 현대식으로 개조한 달서고등학교와 멋지게 신축한 교도소가 있었다. 달서고교는 결혼전 아내가 교편 잡았던 학교라 옛날엔 가끔 들리던 곳이다. 벌써 40여년이 지난 세월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한다.
육신사는 코로나 상황에도 간간히 들리는 학생들의 체험교육 때문에 주차장에는 차량들이 제법 주차되어 있었다.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육신사의 사당 앞에는 1979년에 '육선생사적건립위원회'가 세운 육각비가 있었다. 육각의 면마다 사육신의 행적을 세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유응부, 하위지 등 사육신들의 행적을 정성스레 새겨 놓고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 6대 임금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하던 육신들은 거사를 실패하고, 결국 계유정난으로 무참한 형별인 3족이 멸하는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멸문의 화를 당하면서도 불사이군의 정신을 지켰던 사육신 중 박팽년의 가문은 부인과 종의 기지로 유일하게 자손을 이어 가게 된다. 성삼문의 서릿발 같은 기개와 마찬가지로 취금헌 박팽년 역시 조선 선비의 변함없는 불사이군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절개의 시가 가슴을 울리는 현장이었다.
까마귀 눈비 맞아 검는듯 희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박팽년>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자로 이름 높은
조선의 대선비 박팽년의 충절시이다. 성삼문은 "임행한 일편단시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로 새겼고, 박팽년은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로 받았다. 의를 위하여 목숨을 깨끗이 던지던 조선 선비들의 절개가 산천을 울리고도 남는다.
3족이 멸해 제사를 모실 후손이 없는 사육신을 위해 이 부근의 낙빈사에 신주를 모셔서 육신제를 올리던 것을,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의해 이 곳 묘골 박팽년의 마을에 육신사를 건립하고, 새롭게 추모할 장소를 마련한 것이다. 역사의 얼이 서린 숭정사(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곳)에 들러 경건한 마음으로 향을 피우고, 예를 올렸다.
육신님의 하늘 같은 충절을 다시 한 번 범부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 보는 순간이었다. 30 여 호의 순천 박씨 가문들을 살피면서 역시 충절 높은 가문은 세월이가도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매사가 그렇듯이 결코 선비의 옳 곧음과 삼가정신은 그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근의 삼가현 소개비에 적힌 글처럼 삼가란 <중용>에서 유래한 말로 선비의 자질은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고,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익어야 되는 것이었다.
사육신 가운데 유일하게 후손을 보존한 박팽년의 둘째 아들은 부인이 임신중이라 아들을 낳으면 죽게 되고, 딸을 낳으면 관비가 될 운명이었다.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고,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서 아기를 바꾸어 길러 목숨을 보존했다. 외할아버지에 의하여 朴婢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키워진 아이는 후일 사육신이 옳은 일을 했다는 역사 평가가 있자, 성종대에 이르러 왕으로 부터 사면을 받고,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종택을 짓고 이곳 묘골에 정착했다. 묘골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지만, 이름이 묘골이라 고양이 처럼 영특한 기운을 이어받아 그 피비릿내 나는 난리 속에서도 가문을 이었구나 하고 믿고 싶었다.
박팽년의 둘째 아들의 부인이 낳은 박일산(朴一珊)은 이러한 기구한 운명속에서 생존하여 순천 박씨 충정공파의 입향조가 된다. 박팽년의 아버지 한석당 박중림과 박팽년 그리고 그의 아들 박순 3대는 충청도 회덕 출신으로 가문이 번성하였다. 후일 달성군 부근에 낙빈서원을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했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충효위인정화사업'으로 지금의 육신사가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곳 묘골은 우리나라 제일의 부자이며 세계적인 초일류의 기업의 창시자 故 이병철 회장의 부인 박두을 여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일행은 소박하게 관리되고 있는 박두을 여사의 생가 대청마루에 걸터 앉아 명풍수의 지관을 되새기고자 했다. 이 터를 본 큰 스님은 박두을 여사의 사주는 왕비가 아니면, 큰 부호의 부인이 될 것을 예언했다. 순천 박씨 박두을 여사는 이곳에서 자라 한국의 최고 갑부 이 병철회장의 부인이 되어 일체의 바깥일을 하지 않고, 집안관리와 자식교육에 전념했다고 한다.
자식들은 잘 기르는 것은 인생의 대업이다. 박두을 여사는 우리나라 기업사에 충무공 이순신 같은 위대한 기업인 이건희 회장을 낳은 자랑스런 어머니시다. 육신사의 지세는 소쿠리 같은 내공이 담긴 땅으로 보였다.
문장과 말이 모두 유창하여 집현전 학자 중, 저작물의 전체적인 편집과 종합정리에 책임을 맡았던 박팽년, 그는 조선의 대선비였고, 세종대왕의 크나큰 사랑과 신임을 받은 최고의 집현전 학자였다. 육신사를 통해서 순천박씨의 품격 높은 삶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였다.
꽃향기 솔바람이 옛 뜻을 불러오는 육신사 삼가헌 그리고 도곡재에 정성스레 가꾸어진 정원들의 꽃들에서, 육신사 박종혁 회장의 종가를 향한 거룩한 마음을 읽으며, 일행은 뜻 깊은 역사탐방을 마치고, 이팝나무 꽃들이 늘어선 길을 도로 달려 낙동강변 하빈식당에서 육천원짜리 담백한 시골점심을 즐겼다.
송천상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