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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시간에 따라 사는 한 농부 가족의 소박한 이야기 얼마 전에 탱이네 귀농 이야기를 담은 책 『아이들은 자연이다』를 읽었습니다. 도시의 생활이 어쩔 수 없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고 시간에 갇혀 지내게 되는 것이라면 시골에서의 생활은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아가는 동안 우리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인 그저 소박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삶이란 것을 어린 탱이가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가고자 하는 개인의 삶의 선택에서마저도 심사숙고를 해야만 하는 처지이고, 우리네 아이들은 흙의 냄새보다는 콘크리트 바닥의 열기에 익숙합니다. 이런 우리와 아이들 자신을 위해, 삶의 방향성보다 속도를 더욱 중시하는 도시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그림책을 펼치고 시간을 거꾸로 돌려, 지구 저 편에 위치한 미국이란 나라의 19세기 뉴잉글랜드 지방으로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첨단 자본과 마천루를 상징하는 미국의 이미지는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말이죠. 아마도 아이들은 『달구지를 끌고』를 펼치기도 전에 “엄마, 달구지가 뭐야?”라고 물어올 것입니다. 어쩜 엄마도 달구지를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으니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을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책 속에 달구지에 대한 모든 묘사가 들어있으니까요.
10월이 되면 농부는 1년간 거두어들인 것들을 달구지에 가득 싣습니다. 4월에 농부가 깎아 두었던 양털, 그 양털을 가지고 농부의 아내가 겨우내 짠 숄, 아내가 자은 털실을 가지고 딸이 만든 벙어리장갑, 또 겨우내 가족 모두가 모여 만든 양초와 아들이 깎아 만든 자작나무 빗자루, 밭에서 캐낸 감자와 순무와 양배추들, 꿀과 벌집, 3월에 단풍나무에서 수액을 받아 졸여 만든 단풍나무 설탕, 그리고 뒷마당 거위들에게서 떨어진 깃털까지. 이 모든 것들을 싣고 농부는 장이 있는 포츠머스로 길을 떠납니다. 언덕을 넘고 계곡을 지나고, 시냇가를 따라 걷고, 여러 농장과 마을을 지나 자신이 키운 것들을 팔고 아끼던 소까지 팔았습니다. 그리고 농부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겨울을 나기 위해 벽난로 불 위에 매달아 놓을 무쇠솥, 딸에게 줄 수예 바늘, 아들에게 줄 주머니칼, 그리고 가족 모두를 위한 박하 사탕을 사서 다시 먼 길을 돌아 가족들에게로 돌아옵니다. 다시 겨울이 시작되면 농부는 새 멍에를 깎아 만들고, 농부의 아내는 아마 섬유로 리넨 천을 짜고, 그 리넨 천에 농부의 딸은 수를 놓습니다. 4계절의 주기를 가지고 변화하는 자연과, 그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소박한 삶의 모습이 목판화를 연상시키는 바바라 쿠니의 그림과 도날드 홀의 시적인 언어로 따뜻하게 살아납니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 많은 찬사를 받았는데, <뉴욕 타임즈> 북리뷰는, “다시 다시 반복해 읽고 싶은 책이다. 마음에 쏙 드는 그림책이다. 어른과 아이 모두를 감동시킨다.”고 평했다고 합니다. 바바라 쿠니는 이 책으로 1979년 칼데콧 상을 받았습니다. 1959년 그녀의 그림책 『챈티클리어와 여우』에 이은 두 번째 수상이었지요. 그림책의 음유 시인 바바라 쿠니(Babara Cooney)
위의 인용문은 바바라 쿠니 여사가 쓴 “대학을 졸업하고 현실 세계에 어떻게 발을 들여놓아야할지 몰랐습니다. 독서광이었던 저는 막연히 책의 삽화 작업으로 목표를 좁혀 생각하면서 뉴욕의 출판사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한참 뒤에야 일거리를 찾았지만 그 때 아트 디렉터는 제게 흑백의 선으로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했지요. 그래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The Art Students' League)에서 저는 에칭과 석판 인쇄술을 배웠습니다. 또한 그림에 대한 생각도 흑백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작곡가들이 악보를 필보하듯이 그때 저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매일같이 모사했습니다. 제게 커다란 도움이 되어준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Beardsly)의 그림에서 저는 그가 창조해낸 흑백이면서도 섬세하고 장식적인 패턴의 대담한 면 활용 방식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후로 서른다섯 권 이상의 제 책에서 이때 배운 미술적 방법으로 삽화 작업을 했지요. 그러면서도 마음에서는 여전히 채색화를 언젠가 그려야겠다는 소망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물론 흑백 삽화를 인쇄하는 것이 다색 삽화 인쇄에 비해 훨씬 비용이 저렴했지만, 제 아트 디렉터는 저에게 색체 감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의 말이 제게 커다란 오기를 심어주었지요.” “인쇄기술의 발달로 저의 삽화에도 네 가지 색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당시 저는 각각의 색을 각각의 종이나 비닐 필름에 그려야만 했습니다. 물론 그 때까지도 주조 색은 여전히 검정이었지만, 마젠타, 노랑, 시안 등의 화사한 색으로 그림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만으로도 기뻤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그녀의 채색 그림책이 나올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그녀가 기초적인 삽화 작업에 충실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채색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도록 할까요?
천재는 영감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진정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은 바바라 쿠니 여사의 이야기만으로도 입증된 셈입니다. 191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쿠니 여사는 주식 중개인인 아버지와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바라 쿠니는 어머니로부터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으며 미술에 입문하게 되었는데요,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시는 것을 어린 시절에도 싫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림 그리는 것은 무척이나 좋아해서 감기에 걸려 결석을 하고 집에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때 정말 행복했다고 하는군요.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제 어머니는 열정적으로 유화, 수채화를 그렸지요. 성격도 매우 관대해서 제가 엄마의 화구를 엉망으로 만들어도 특별히 야단을 치거나 화를 내거나 하지도 않았어요. 단, 나중에 브러시는 깨끗하게 씻어 놓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지만요.” 혼북 매거진에 소개된 쿠니 여사의 회고담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책에 매료되어 있었고, 책에 그림 그리기를 즐겨했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직접 밝히지 않은 부분이 그녀의 경력에 있기에 여기에서 살짝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바라 쿠니가 직업을 찾아 방황하던 때는 2차 세계 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1942년 그녀는 여성 육군 부대(The Women's Army Corps)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다지 원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죠. 장교 훈련을 마치고 소위 계급장을 달고 이듬해 제대했습니다. 제대의 이유는 첫 아이의 임신과 결혼이었죠. 바바라 쿠니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그림이란 확신이 있었기에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결단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죠. 또한 삽화 작업을 위해서라면 먼 곳까지의 리서치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쿠니 여사는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그곳의 민담을 공부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그리게 될 그림이 배경이 되는 땅과 그 곳의 빛을 직접 느끼고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배경이 되는 풍경과 건물은 정확해야만 합니다. 또한 그 땅의 사람들의 의상과 머리 모양 등도 정확하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직접 제가 경험하고 느껴보지 않고는 이국의 풍광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림책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헌신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여든셋의 나이로 이 세상과 결별한 것이 2000년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마지막 작품인 『바구니달』이 1999년에 출판되었다는 것은 삶과 그림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집념을 보여주는 숭고한 대목이 아니라 할 수 없겠습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봐 백여 년 전 미국의 뉴욕 허드슨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는 물푸레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산 속 동네가 있었다고 합니다. 도시 사람들 눈에는 도깨비 소굴처럼 비쳤을 깡촌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도시인들은 ‘시골뜨기’라 부르며 비웃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아까 언급한 『아이들은 자연이다』의 한 대목을 인용할까 합니다. 탱이의 6학년 겨울방학인 2000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초등학생이었던 탱이는 학교가 마련해준 버스를 타고 산길을 달려 학교에 가지만, 겨울철에는 깜깜한 새벽에 집을 나서야만 합니다. 그나마 초등학교에서는 버스라도 내주지만 중학교는 인근 도시 마을까지 나가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탱이의 6학년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하루라도 빨리 도시로 나가라”는 말을 자꾸 했고, 하나 둘 도시로 떠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탱이는 도시에서 거꾸로 시골 마을로 들어온 자신의 부모를 잠시 원망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지금이야 반드시 서울이 아니라고 해도 지방의 중소도시도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으니 서울을 동경하고, 도시를 동경하는 아이들이 예전처럼 많지는 않지만, 제가 성장할 때만 해도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도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아이들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주눅이 들어 수업과 도시 생활에 적응할 때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하물며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70년대 우리나라의 풍경도 이럴진대, 『바구니달』에 등장하는 깡촌 소년의 시대(시대는 명확히 나오지 않으나 책 뒤쪽의 작가의 말에 의하면 1900년도에서 1950년도 사이 그 어디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에는 오죽했을까요. 바구니처럼 둥글다고 해서 바구니달이라 불리는 보름달이 뜰 때면 소년의 아버지는 도시 허드슨으로 바구니를 팔러 나가십니다. 그러나 소년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혼자 도시로 장대에 바구니들을 걸고 뚜벅 뚜벅 먼 길을 걸어갑니다. 우거진 나무들은 바구니의 재료로 쓰이는데, 숲 속의 성인 남자들은 나무를 베어내고 다듬어 이를 바구니 쪽대로 깎습니다. 그런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소년은 바구니 만드는 법을 배워나갑니다. 그런데 언제나처럼 도시 허드슨을 동경하던 소년이 아홉 살이 되던 생일날, 마침내 아버지가 소년을 데리고 허드슨으로 바구니를 팔러 나갑니다. 먼지가 이는 흙길이 끝나고 매끈하게 포장된 도로가 시작되는 곳, 그곳이 바로 허드슨입니다. 소년은 처음 마주하는 도시의 휘황찬란함에 두 눈이 둥그래지고 말았죠. 도시 허드슨은 구석구석 뭔가를 사고파는 사람들로 분주합니다. 나무와 바람, 둥근 달과 소박한 시골 사람들이 전부인 소년에게 상점의 등유 냄새, 가지런히 놓여 있는 깡통들, 강물의 냄새는 동경의 대상이 되어 다시 집으로 향하는 소년의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그런데 광장을 가로질러 가는 소년과 아버지 등 뒤에서 사람들이 놀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이, 산골짝 촌뜨기들! 저 촌뜨기들은 바구니밖에 몰라.” 소년은 뒤돌아 사람들을 보지만, 아버지는 괘념치 않습니다. 소년은 집에 와서도 마냥 우울하기만 합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왜 자신을 허드슨으로 데려가지 않았는지 알 듯도 합니다. 풀이 죽어있는 소년은 아무도 모르게 다 만들어놓은 바구니들을 쌓아두는 창고로 가서 바구니들을 걷어찹니다. 이 때 순박한 조 아저씨가 나타나서 소년에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바람의 말을 배워 음악으로 만들어 부르지. 또 어떤 이들은 바람의 말을 듣고 시를 쓴단다. 그런데 우리는 바람의 말로 바구니 짜는 법을 배웠단다.” 조 아저씨의 말을 듣고 있었던지 때 마침 바람에 나부껴 참나무 이파리 하나가 창고 안으로 들어옵니다. 순간 소년은 바람은 누굴 믿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바람이 선택한 사람으로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의 시간에 스스로를 내맡길 줄 알게 된 소년은 이제 바람이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선택된 존재로서 물푸레나무 숲에서 바구니를 짜는 것을 업으로 삼고 평생을 살아가게 되었겠죠. 이 책은 죽음을 일 년 앞둔 바바라 쿠니 여사가 1999년에 발표한 작품이라 더욱 심오하게 와 닿습니다. 많고 많은 소재 중에서 왜 자연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림책에 담았을까를 궁리해본다면 구태여 제가 여러분에게 직접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이 그 해답을 찾으실 수 있으리라 믿기에 저는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시 쓰는 여인 에밀리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자는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간에, 천사들이 우리 옆집을 빌리기 때문이다.“ - 에밀리 디킨슨의 시 에밀리 디킨슨은 1830년 메사추세츠 주의 암허스트에서 태어나 1886년 죽기까지 생의 마지막 25년간을 노란 2층 집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은둔자였지만,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친근했는데, 종종 아이들이 자신의 방 밑에 몰려들면 줄에 맨 바구니에 생강빵을 담아 창문 아래로 내려주곤 했다고 합니다. 이 그림책을 쓴 마이클 베다드와 그림을 그린 바바라 쿠니는 암허스트에 있는 에밀리 디킨슨의 생가를 찾아 그녀가 글을 쓰던 2층 방에도 가보고 피아노가 있는 아래층 거실에도 앉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에밀리』라는 그림책으로 에밀리의 은둔의 고독이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암허스트로 이사 온 소녀는 이웃집에 ‘신비의 여인’이라 불리는 흰 옷만 입고 집 밖으로는 나오지 않은 채, 시를 쓰는 아줌마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바로 자신의 방 맞은 편 창문 안쪽에 말이죠. 어느 날 소녀는 편지 한 통을 받고 거실에서 피아노를 연습하고 있는 엄마에게 가져갑니다. 편지 봉투를 열자 마른 꽃잎이 피아노 위로 떨어집니다. 소녀는 엄마에게 누구에게서 온 편지냐고 묻지만 엄마는 비밀에 부치죠. 소녀는 ‘신비의 여인’에 대해 더욱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이제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부모님의 이야기로 그 편지를 쓴 주인공이 이웃집 여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겨울 햇살에 거리를 덮었던 눈이 질퍽해진 날, 소녀는 엄마와 함께 에밀리의 집으로 갑니다. 그러나 대인공포증이 있는 에밀리는 층계참에 앉아 조용히 소녀의 엄마가 자신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음악에 귀 기울일 뿐 내려와 보지 않습니다. 소녀는 까치발을 하고 층계참에 서서 에밀리에게 말을 건냅니다. 그리고 준비해간 백합 알뿌리 두 개를 조용히 에밀리에게 건네줍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에밀리 아줌마네 집 마당에도 하얀 백합의 향이 가득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소녀가 에밀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쓰고 계신 것이 시인가요?” 그러자 에밀리가 대답합니다. “아니, 시는 바로 너란다. 이건 시가 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일 뿐이야.” 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소녀는 언젠가 아빠에게 시가 무엇인지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소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설명해 주셨지요. “엄마가 연습하는 음악이 가끔 살아 숨쉬는 듯해서 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런 신비한 일을 말이 할 때, 그걸 시라고 한단다.” 에밀리도 저 세상에 가고 없고 바바라 쿠니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끔 우리를 오싹해지게 만들어 준 것, 그런 신비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그들의 예술혼이라면 그들은 우리 곁을 떠도는 천사가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의 분신 해티 앞서 바바라 쿠니를 소개하면서도 이야기했지만, 바바라 쿠니 자신과 같이, 그녀의 어머니도 화가였습니다. 『해티와 거친 파도』의 표면적인 주인공은 바로 바바라 쿠니의 어머니이지만, 실제로 해티는 작가 자신의 분신이기도 합니다. 책 속에서도 해티는 바바라 쿠니처럼 감기에 걸려 학교에 안 가고 집에서 온종일 그림만 그릴 수 있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해티네 가족은 성공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온 독일인 이민자로서, 해티의 외가는 모두 예술 계통에 종사합니다. 그러나 해티의 아빠, 삼촌들은 열심히 일해 큰 돈을 번 사업가들입니다. 한편 꼬마 해티에게는 예쁜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인 언니와 아빠처럼 사업가로 성공하고픈 오빠가 있습니다. 그들이 아빠의 성공으로 안정된 삶을 쫓아 살아가는 것에 만족을 하는 반면 해티는 자신의 진정한 꿈은 외할아버지처럼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는 것입니다. 해티는 종종 혼자 바닷가를 거닐며, 눈앞에서 사납게 부서지는 거친 파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그러면서 거친 파도가 자신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해주려 한다고 느낍니다. 세월이 흘러, 모두 자신의 꿈대로 인생을 살아갈 때 해티가 화가가 될 결심을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파도를 보면서 저 드넓은 세상을 파도처럼 부딪히고 깨지더라도 파도가 꿈을 실은 배를 띄울 수 있듯이, 해티 자신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향해 항해하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미술 대학에 등록을 하지요. 그러고 나서 해티는 차가운 눈발이 날리는 코니 아일랜드 놀이동산에서 점쟁이 집시 인형에게 동전을 주고 점을 봅니다. 마치 영화 ‘빅’에서 빅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해티가 속삭입니다. “앞으로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점쟁이 인형은 핑크빛 카드를 보여줍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게 될 겁니다.”라고 적혀있는 카드입니다. 쿠니는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미 동부 상류 사회의 풍속을 섬세하고 사실적이며 유려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림책의 분위기는 그 시대 미국 상류층이 누렸던 독특한 풍취가 배어 있어 묘한 이국적 향취로 독자를 빠져들게 합니다. 그러나 작가가 미국 상류층의 삶의 모습을 동경의 시선으로 독자들이 바라봐주기를 원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해티와 거친 파도』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요?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주위의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꿈을 추구하는 해티의 모습을 통해 자아발견과 추구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녀가 평생을 통해 완성한 자신의 꿈처럼 이 책을 보는 어린 독자들도 자신처럼 열정적으로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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