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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2,21-33,36-38
우리는 지난 주일,
성지 주일에 성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억하면서) 성전으로 들어 가는 행렬을 했었지요,
우리 삶이
앞장서 가셨던 그 분의 삶을 그렇게 따라 걷겠다는(살겠다는) 결의를 드러내면서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고 계십니다.
고대근동에서는
식탁에서 빵을 적셔 건네주는것은 우정과 환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를 향한 우정, 사랑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는것이지요.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빵은 건네 받았지만 그분의 자신을 향한 한결같은 우정, 사랑은 건네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배려는 계속 됩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13, 27)
다른 제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13,28)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유다를 배려하고,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사랑을 드러내시지만 그의 마음이 "밤"이었기에 예수님의 이런 마음은 알아채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는 건너뛰었지만 )예수님께서는
"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하십니다.
우리는 성지주일 예식을 통해서 그분이 가신길을,
어떠한 경우에도
끝까지 사랑을 선택하는
그 길을 따라
걸어가려고 먹었던 마음은
매일의 삶안에서
계속 되어야하는 걸음이기도 합니다.
오늘 그분 말씀과 함께 잠시 멈추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문해 보면 좋겠습니다.
- 나는 미사때 그저 성체만 받아 모시는가?
그분의 사랑까지도 받아 모시는가?
-나는 그분이 나에게 보여주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나자신과 이웃에게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각자의 자리에서 은총의 성주간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
(정 루치아나 수녀님)
<성주간 수요일 강론>
(2026. 4. 1. 수)(마태 26,14-25)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하십니다.’ 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26,14-25).>
1)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 그때 이미 유다의 배반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요한 6,70).”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떠나버렸을 때(요한 6,66), 배반자 유다의 마음도 예수님에게서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몸은 남아 있었지만 마음이 떠났으니, 그것은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마음이 떠난 것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빵의 기적’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요한 6,15),
아마도 유다는 ‘헛된 희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임금이신 예수님 옆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희망.
그런 희망을 품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시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실망’이 배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희망을 잃으면 믿음도 잃게 됩니다.
2) 사제들이 ‘배반의 대가’로 유다에게 준 ‘은돈 서른 닢’은, 아마도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지명수배령’을 내릴 때(요한 11,57) 내걸었던 ‘현상금’이었을 것입니다.
‘은돈 서른 닢’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든지
당시의 기준으로 보든지 간에 별로 큰돈은 아닙니다.
그래서 유다가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넘기기로 약속할 때,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을 것이고, 사제들이 그에게 준 돈은 그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표시가 되었을 것입니다.
3)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사도들의 말은,
“저는 아닙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 혹시 그게 저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이 말 앞에 있는 ‘몹시 근심하며’ 라는 말은, ‘몹시 슬퍼하며’ 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 가운데에 배반자가 있다는 말씀에 큰 충격을 받았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나약함을 의식하면서 “혹시 내가 배반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 이상한 점은, “사도들은 왜 유다의 배반을 모르고 있었을까?” 라는 점입니다.
배반자 유다만 따로 떨어져 있었는지, 아니면 유다가 속마음을 철저하게 숨겼는지...
어떻든 사도들이 유다의 배반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때까지는 아직 제대로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유다의 말은,
다른 사도들의 말을 흉내 낸 것이고, “저는 아닙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유다만 ‘스승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렸음을 나타냅니다.
4) 예수님께서 왜 유다를 사도로 뽑으셨는지, 그가 배반자가 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뽑으셨는지, 배반자가 되더라도 회개할 것이라고 믿으셔서 뽑으셨는지, 우리는 자세한 상황을 모릅니다.
그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또 유다가 배반한 이유도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반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멸망할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예고된 사람은 유다가 유일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의 운명이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유다도 회개했다면 멸망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치면서도 회개는 하지 않았고, 자살함으로써(마태 27,3-5) 스스로 멸망을 향해서 갔습니다.
<사도들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도 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배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순교자들만큼이나 배교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니 끝까지 방심하지 말고, 자만하지도 말고,
계속 ‘깨어 있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4월1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오 26,14-25
그저 하느님의 크신 자비만 바라며, 가슴을 치는 성주간 수요일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스승 예수님을 적들에게 넘기는 결정적 배반 사건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취한 행동을 추적해보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스승님을 적들에게 팔아 넘길 작정을 한 그는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움직입니다.
먼저 수석 사제들을 찾아가서 몸값 협상을 합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오 복음 26장 15절)
유다에게서 신뢰감과 확신을 느낀 대사제들은 선금, 중도금 따지지 않고, 일시불로 처리해줍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두둑한 목돈까지 챙긴 유다 이스카리옷은 드디어 스승님을 팔아넘길 날짜와 시간을 가늠하며
적당한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스승님을 팔아넘길 계획을 착수하고 있던 와중에도 유다 이스카리옷은 태연한 얼굴로 다시 제자단에 합류해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 자리 잡고 앉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그런 유다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했습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예수님의 심정을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분노로 마음이 이글거리며 최후의 만찬 전에 제자단을 따로 집합시켰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개석상에서 배신자가 누구인지 딱 지목하시면서, 불벼락을 내리셨을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유다 이스카리옷만을 따로 불러, 그에게 참교육을 실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배신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으십니다.
배신자가 생겨날 것임을 암시만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행보에 대한 정확한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 자신만 아시겠지만, 이런 유추를 해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회개를 마지막 순간까지 열어 놓으셨을 것이라는 것. 혹시라도 그가 회개하면
귀신도 모르게 다시 제자단에 머물 수 있게 하려는 스승님의 배려심.
돌아보니 저 역시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 그리고 베드로 사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크신 자비만 바라며, 가슴을 치는 성주간 수요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4월1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오 26,14-25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시는데, 왜 굳이 죄를 고백해야 할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폭탄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마태 26,21)
이 말씀에 제자들은 큰 슬픔에 잠겨 저마다 묻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2)
그런데 가리옷 유다도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5)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질문 같지만, 유다의 질문에는 하느님을 향한 무서운 '시험'과 '거짓'이 숨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유다의 호칭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Kyrie)"이라고 불렀지만,
유다만은 "스승님(Rabbi)"이라고 부릅니다. 유다에게 예수님은 내 생명의 주관자가 아니라,
단지 내가 속일 수 있고 내 계획을 평가받아야 할 한 명의 현자에 불과했습니다.
유다가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물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똑똑해도 내가 은밀히 사제들에게 받은 은 서른 냥은 모를 거야.
아니, 혹시 알아차렸더라도 이 거룩한 만찬 석상에서, 동료들 앞에서 내 정체를 폭로하여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무자비할 수는 없지. 이것이 이분의 약점이야.'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믿음, 혹은 "알아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라며 하느님의 자비를 역이용하는 비겁함입니다.
나를 진실하게 할 대상, 곧 주님이 사라진 자리는
즉시 사탄의 놀이터가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탈개인화(Deindividuation)'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이 가려지고 타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평소에 작동하던 도덕적 규범과 사회적 책임을 한순간에 던져버립니다.
현대 사회의 악플 문화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에드워드 디너(Edward Diener)의 실험은 이를 소름 돋게 증명합니다. 핼러윈 밤, 아이들에게 사탕을 마음껏 가져가라고 했을 때, 혼자 온 아이들보다 가면을 쓰고 단체로 움직여 자신의 신분이 모호해진 아이들이 규칙을 어기고 사탕을 훔쳐 갈 확률이 무려 57%나 높았습니다.
유다가 바로 이 영적 탈개인화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나는 누구도 모르게 완벽히 숨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 익명성에 대한 믿음은 자유가 아니라, 인간을 통제 불능의 짐승으로 만드는 독약입니다. 자신을 지켜보는 절대자의 시선을 지워버린 유다에게 남은 것은, 결국 스스로 목을 매는 비참한 종말뿐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조상 아담과 하와도 이 환상에 빠졌습니다.
죄를 지은 그들은 숲속에 숨어 무화과 잎사귀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들은 사실 하느님이 몰라서 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주님, 저희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고 "저 여자가 줘서 먹었습니다"라고
핑계를 댄 이유는, 하느님을 '다 아시는 분'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나를 가리게 만들고, 가리는 행위는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부인하는 불신앙으로 이어집니다.
유다의 "저는 아니겠지요?"는 에덴동산의 그 비겁한 숨바꼭질이 변주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향한 욕구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지켜봐 줘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 왕의 사례에서 고백의 위대함을 봅니다.
다윗은 밧 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그는 완벽하게 은폐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탄 예언자가 나타나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지적했을 때, 다윗은 유다처럼 발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2사무 12,13)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아, 하느님은 다 보고 계셨구나.
내가 숨길 곳은 우주 어디에도 없구나.' 이 자각이 그를 살렸습니다.
시편 139편에서 그는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낱낱이 아십니다.
제가 앉으나 서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을 꿰뚫어 보십니다."
다윗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죄를 안 지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고백은 하느님께 정보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 안으로 나를 동기화(Sync)시키는 과정입니다.
(출처: 『주석 성경』 사무엘기 하권 12장)
여기서 우리는 신자분들이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신부님,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굳이 구구절절 제 입으로 죄를 고백해야 합니까?" 하느님은 정보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은 하느님을 인정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고백은 바로 이 실험의 영적인 완성입니다.
내가 고해소에서 내 입으로 죄를 뱉는 순간,
내 뇌와 영혼은 "하느님께서 지금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재로 받아들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하느님은 나를 정직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백을 통해 그분의 시선을 내 삶의 중앙에 모실 때, 우리는 비로소 '거짓의 옷'을 입고 살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저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이미 꿰뚫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어느 주일, 성당에 가지 않고 친구들과 몰래 오락실에 다녀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완전범죄를 꿈꾸며 성당 입구에서 주보만 슬쩍 챙겨 집으로 돌아왔지요.
어머니 앞에 주보를 당당히 내밀며 "엄마, 저 성당 잘 다녀왔어요!"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빛이 이상했습니다.
어머니는 "정말 성당만 갔다 왔니? 신부님 강론은 어떠셨어?" 라고 넌지시 물으셨습니다.
저는 대충 둘러댔지만, 결국 어머니는 제가 오락실에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던 모습을 동네 아주머니를 통해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다 알고 계시면서 왜 나한테 물어보셨을까?'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것은 저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하려는 어머니만의 '거짓말 방지 장치'였습니다.
엄마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제가 직접 고백하게 함으로써, 제가 '거짓으로 숨길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가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다면, 저는 끊임없이 제 자아를 긍정하며 '거짓말은 유용한 수단'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거짓을 아버지로 삼고 사는 사람은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엄마의 질문은 제가 진실 앞에 무릎 꿇게 하려는 사랑의 초대였습니다.
이번 성주간 수요일, 우리도 유다의 질문 "저는 아니겠지요?"를 멈춥시다.
대신 다윗처럼,
그리고 돌아온 탕자처럼 고백합시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고해소에 들어갈 때, 그곳은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거짓의 옷을 벗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빛의 옷으로 갈아입는 잔칫집이 될 것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주님, 제가 고백하지 않아도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가 고백하는 이유는 제 마음의 닫힌 문을 열어 당신의 빛이 들어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백은 하느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제10권).
또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했습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죄를 숨기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의 비밀은 지옥의 불씨가 되고, 하느님 앞에서의 폭로는 천국의 이슬이 된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