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 8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은 한국프로축구의 시작을 알리는 슈퍼리그의 개막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숨 막히는 승부가 펼쳐졌고 스탠드는 관중들로 가득 메워졌다. 그렇게 대한민국 땅에 씨를 내린 프로축구의 불씨는 일주일 위 고스란히 부산 구덕운동장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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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부산 사람들은 부산을 ‘구도’라 부른다. 求都, 공의 도시, 즉 공으로 하는 운동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화끈하고 열정적인 바다사람들의 정서는 프로스포츠 경기와 딱 들어맞았다. 야구가 그랬고 축구가 그랬다. 그리고 83년 슈퍼리그가 그랬다.
할렐루야와 유공, 국민은행과 대우의 경기가 열렸던 5월 14일, 유공과 국민은행, 포항과 대우의 경기가 펼쳐진 5월 15일. 부산시리즈 4경기가 펼쳐졌던 주말 이틀 동안 구덕운동장에는 4만7천여 명의 관중들이 운집했다. 구덕운동장은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는 것처럼 북적북적 했고 축구에는 관심 없는 인근 마을 주민들도 무슨 일인가 기웃거리며 분위기를 살폈다. 아들의 손을 잡고 경기장을 찾은 부자,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봉지에 담은 아저씨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색다른 데이트 코스를 발견한 연인들, 그리고 이 순간을 오기만을 고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축구팬들, 이 모두가 한 줄을 이루어 경기장을 향하고 있었고 그 줄이 끝나는 스탠드에서는 22명의 선수들이 땀방울을 흘리며 그라운드를 누비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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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리그 부산시리즈의 개막전에서 맞상대 한 팀은 할렐루야와 유공, 일주일 전 동대문 운동장의 개막전에서 맞붙어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양 팀이었다. 동대문에 이어 구덕의 개막전에서도 맞붙게 된 할렐루야와 유공은 구덕의 프로축구 첫 경기를 잊기 힘든 명승부로 장식했다. 전반전은 할렐루야의 선제골과 유공의 동점골, 다시 할렐루야의 추가골이 터지며 2:1의 스코어로 마감되었다. 한골 차의 열세를 안고 후반전을 맞이한 유공은 김강남과 박윤기가 연속골로 승부를 뒤집으며 슈퍼리그 첫 승을 향해 다가섰다. (당시 유공은 할렐루야와 포항 두 경기에서 모두 무승부를 기록했다.) 하지만 후반 36분 할렐루야의 오석재가 다시 동점골을 터트리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고 두 팀은 동대문의 대결에 이어 다시 한 번 무승부를 기록하고 말았다. 명승부를 보여준 선수들에게 관중들은 많은 박수를 쳐 주었고 양 팀 선수들은 그 박수소리를 뒤로 한 채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는 하루에 두 개의 경기가 같은 구장에서 벌어졌고 그 때의 관중들은 할렐루야와 유공의 선수들이 퇴장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후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어 벌어진 두 번째 경기는 국민은행과 대우였다. 두 팀 모두 정식 프로팀이 아닌 실업팀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했던 것이지만 스탠드의 관중들은 이런저런 상황을 따지지 않고 그저 새롭게 등장한 즐거운 구경거리를 즐길 뿐이었다. 물론 그 경기에 나선 두 팀 중의 한 팀이 나중에 자신들의 지역팀이 되어 구덕운동장을 누빌 것이며 그런 이유로 한 팀에게 일방적인 응원이 간다던가 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었지만...
두 번째 경기는, 지금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의 강신우, 장외룡, 조광래, 이춘석, 이태호 등이 포진한 대우가 국민은행을 2:0으로 제압하고 의미 있는 구덕운동장 첫 승을 달성했다. 향후 부산을 연고로 하게 될 대우 팀이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거둔 첫 승이기 때문이었다. 전반 13분과 18분 이태호와 이춘석이 터트린 연속골이 승부의 분수령이 되어 대우는 국민은행을 제압할 수 있었다.
슈퍼리그 부산시리즈 이튿날인 5월 15일 역시 구덕운동장에는 전날과 비슷한 관중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고 9월 7일 펼쳐진 경기에서도 수요일임에도 불구, 2만이 넘는 관중들이 찾아와 주었다.
‘솔직히 운동장 위치나 잔디 상태가 그리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관중들의 열기가 너무 좋았죠. 부산 팬들이 유난히 더 열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많으니 절로 운동할 맛이 났습니다.’ 83년 첫 시즌 구덕운동장을 회상하는 이춘석 전 국가대표팀 코치의 말이다.
이렇듯 프로축구 첫 해 부산은 축구의 메카로서 자리 잡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4월 7일과 8일, 부산 개막전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이어졌다. 주말 이틀 동안 3만에 가까운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아주었고 경기에 나선 팀들은 명승부를 펼치며 성원에 보답해 주었다. 특히 4월8일 럭금과 현대의 경기에서는 후반전에만 2골을 내주며 패색이 짙어졌던 현대가 이 후 내리 세 골을 몰아치며 역전을 펼지는 진기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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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이후 프로축구의 인기는 서서히 시들기 시작했다. 1987년 지역연고제를 기반으로 한 홈앤어웨이 방식의 도입과 대우로얄즈 팀의 우승으로 잠시 인기가 살아나긴 했지만 한 1990년대에 들어서기 전 까지는 구덕 역시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프로축구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은 시기를 보냈었다. 하지만 대우 로얄즈가 점차 부산의 팀으로 인식되는 등 지역연고의 개념이 조금씩 뿌리를 내리자 프로축구를 등졌던 많은 부산시민들이 다시 구덕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1991년 대우 로얄즈의 우승과 함께 구덕은 프로축구 흥행의 메카로 자리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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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부터 대우 로얄즈에 입단해 명성을 떨친 김주성 위원의 말은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의미 있게 설명해 준다. “초창기에는 일단 지역 사회하고의 교류가 우선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런 뿌리가 약하다 보니까 연고지 애착심이 조금 미흡한 면이 있었습니다. 시행 초기만 해도 연고지 보다는 기업 중심이라는 이미지가 많다보니까 그 지역에서는 해당 팀에 대한 인식등에 생소한 부분들이 많았지요. 처음에는 이 팀들이 자신들의 뿌리라는 생각을 갖진 않다가 해를 거듭해 조금씩 정착이 되었다고 봅니다.”
“지역의 축구 열기는 어떻게 보면 성적과도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본래 그 지역 연고가 아니기 때문에 시민들로부터 인정을 받기에는 많은 기간을 필요로 하죠. 거기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지역과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것이 한 방법이라고 봅니다. 당시 우리가 호화 맴버였고 우승도 많이 하면서 그러한 부분을 보완했고 결과적으로 다른 도시에 비해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연고제도의 정착이 이루어지고 부산대우 로얄즈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구덕운동장은 K리그 역사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순간들을 장식 해 왔다. 97년 10월 25일, 부산대우가 천안일화를 1-0으로 꺾는 순간 부산은 K리그 한 시즌 전관왕 달성이라는 사상초유의 기록을 달성했고 그 무대가 바로 구덕운동장이었다.
98월드컵의 후폭풍의 영향으로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던 그 해, 98년 9월 12일 부산과 포항의 경기에서 부산 구덕운동장에는 무려 36,274명이라는 대관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스탠드를 메웠고 이 날 관중 기록은 당시 역대 최다 관중동원 기록으로 새겨졌었다.
하지만 최다관중 기록은 1년도 안되어서 다시 세워졌는데 그 무대 역시 구덕운동장이었다. 99년 5월 23일, 대한화재컵 타이틀을 놓고 벌인 부산과 수원의 경기에서는 37,836명이 경기장을 찾아 다시 한 번 최다 관중기록을 경신하며 부산의 높은 축구열기를 뽐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이 끝난 8월 18일 부산과 포항의 경기에서는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떠나는 송종국을 배웅하기 위해 3만 207명이 경기장을 찾아 떠나가는 선수의 마지막을 축복해 주었다.
하지만 세월의 힘은 어쩔 수 없었다. 1973년 개축 이후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오는 동안 시설은 많이 낙후되었고 안전성에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 사이 부산 사직동에는 아시안게임과 월드컵을 치러 낼 아시아드 경기장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2000년 대우 로얄즈를 인수한 현대산업개발은 2002년을 마지막으로 홈구장을 구덕에서 아시아드경기장으로 옮겼다.
2002년 11월13일 구덕운동장에서 부산과 포항이 펼친 2002 K리그 마지막 경기는 20년 동안 부산의 프로축구와 함께 해 왔던 구덕운동장의 K리그 고별 경기이기도 했다. 구덕운동장은 K리그 역사에 적지 않은 족적과 의미를 남긴 채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현재 구덕운동장은 부산시체육관리사업소의 운영 하에 관리되고 있다. 주로 시민들과 단체들에게 비용을 받고 대관을 해 주거나, 아마추어 육상 팀이나 축구팀의 훈련장소로서 경기장을 빌려준다. 시간에 따라서 트랙은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개방되는 등 이제 구덕운동장은 지역의 자그마한 체육시설로서, 아마추어 스포츠인들의 훈련장소로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
흔하지는 않지만 지난 5월 부산컵 국제축구대회의 개최와, 9월 AFC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을 치러내는 등 경우에 따라서는 규모가 큰 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주요 업무는 분명 아마추어 스포츠 훈련장소로, 일반시민들과 단체들의 행사 대관장소로 집중되어 있다.
사실 현 부산 아이파크가 아시아드 경기장으로 홈구장을 옮긴 이 후는 과거 구덕에서 자주 느낄 수 있었던 열기가 쉽게 형성되지 않고 있다. 경기장이 워낙 크다보니 관중들이 많이 들어와도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고, 트랙과 그라운드와의 물리적, 시각적 거리도 구덕 경기장에 비해 불리한 입장이다.
김주성 위원 역시 이러한 부분에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시설이나 환경은 좋지만 비효율적인 면이 있습니다. 과거 같이 부산 팬들이 축구에 대한 열기와 관심이 많으면 아시아드의 장점으로 부각되고 얻을 수 있는 효과가 많을 것이라고 보는데 정작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다 보니 역효과가 나는 것 같습니다. 운동장 시설은 크고 광대한데 관중이 텅 빈 곳에서 하다보니까 선수들의 경기력에도 그다지 좋지 못하구요. 관중들의 열기가 있었을 때 선수들은 자신의 기량을 120% 발휘할 동기가 되어 준다는 면에서 과거의 부산을 기억하는 저로서는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구덕으로의 복귀설도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었고, 특히 구덕운동장에서 열린 AFC챔피언스리그 4강전에 많은 관중들이 모여 식지 않은 부산 서구민들의 축구열기를 확인하자 그러한 여론은 수면위로 부상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난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부산구단 역시 구덕운동장으로의 이전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시설을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입장이다. 적절한 부지에 전용구장을 건립하는 것이 첫 번째 사업계획이고 가능하다면 구덕운동장의 신축이나 증, 개축이 하나의 대안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계획들이 단순히 축구팬들의 목소리나 구단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기에는 배후에 깔려진 여러 역학관계가 너무나 복잡하다.
물론 과거처럼 구덕운동장이 K리그 구장으로 사용되어 많은 관중을 동원하거나, 혹은 더 좋은 시설로 탈바꿈하여 부산의 홈구장으로 사용된다면 축구팬들에게 있어서는 분명 행복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K리그 경기장으로 사용되지 않더라도 구덕운동장은 묵묵히 나름대로의 역할과 임무를 이행해 오고 있다. 아마추어 스포츠의 터전으로서, 시민체육시설의 근간으로서 지금도 구덕운동장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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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매표소를 앞에 길게 이어진 줄을 보며 내뱉던 한숨과 여러 사람들 틈에 앉아 돌아오는 파도타기를 기다리던 설레임, 김주성, 안정환, 마니치의 골에 열광하며 연신 뱉어냈던 함성들, 통닭 한 마리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걸쭉한 입담을 늘어놓던 아저씨들의 모습까지... 구덕운동장은 이미 아름답고 은은한 추억으로서 부산 축구팬들의 기억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
훗날 어떤 모습으로 구덕운동장이 바뀌어 우리에게 다가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구덕운동장에 새겨진 중요한 시간과 역사와 아름다운 추억이 그대로 매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꼭 축구장이 아니어도 좋다. 꼭 K리그 경기가 열리지 않아도 좋다. 그저 우리 기억의 서랍장 한 구석에 꽂혀있는 아름다운 추억들, 그것들을 꺼내볼 수 있는 매개체로의 모습만 잃어버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K-리그 명예기자 안희조
출처 : K리그 공식 홈페이지
주인장인 저도 정말 저도 부산팬으로서 구덕구장에서 이뤘던 대우로얄즈 시절 금자탑은 아직도 뿌듯합니다.
비록 지금은 사직아시아드구장에서 부산아이파크가 잘 사용하고 있지만 부산팬들의 가슴속
홈구장은 영원히 구덕으로 기억 될 것입니다.
첫댓글 한국스포츠계의 원조 꽃미남 오빠 김.주.성
구덕이다.... 가본적은 없지만, 트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가깝게 느껴진다고 하던데.
네 정말 가까워요 코앞에있는 기분
추억의 설인 구덕운동장.
중학교때 동아리 축구결승 여기서 뛰었는데 정말 뛰는 내내 행복했...
여기 트랙없애고 축구전용구장 ㄱㄱ
지금 부산 스쿼드랑 그 당시 스쿼드를 비교하면 관중들의 외면이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