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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린왕자의 들꽃사랑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그린리버
2016년 3월19일 아침 7시 제주시청 앞에서 서귀포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 시간 여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1횡단도로(5.16도로)를 타고 아리랑 고개를 타고 내려가는 길목에 들어서면 평화로운 서귀포 앞바다가 펼쳐진다. 이 아리랑 고개는 어린 시절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들어서 서귀포를 향해 갈 때면 꽤나 아득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던 곳이다. 어서가서 그 바닷가를 보고 싶게 하였고 제주시 에서만 살던 나에게 새롭게 다가서는 그곳에서 꼬불꼬불 거리를 지나느라 차멀미를 한 나의 지친 몸을 쉬고 싶게 했던 고개였다.그렇게 40여년이 흘러 다시 지나는 서귀포 가는 길목은 그 옛날 돈내코 유원지가 어디갔으며 토평이란 마을의 흔적을 찾기엔 지난 30여년이란 세월은 지난날의 옛 지역들을 찾아볼수가 없게 많이 변해있었다.
어쩌다 그런 실수를 했을까?
일주일 전 부터 올레 사무국 홈페이지에 찾아 들어가 걷기행사 날짜를 검색하여 19일에 참가 해야겠다고 준비를 해왔었는데 어찌하여 나의 핸드폰은 12일 행사를 캪춰해 두었을까? 나는 서귀포 신시가지에 있는 바자회 행사장이 있는 월드컵 경기장에 하차하여 행사장을 찾아가는데 걷기를 위해 행사장을 찾아가는 사람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고 거리가 썰렁한게 분위기가 아니다. 이른 시간이어서 혹시나 나의 전화에 응대하는 이가 있을까 하여 확인차 사무국에 전화를 해봤더니" 선생님, 오늘의 행사장은 그곳이 아니고 쇠소깍 코스입니다.오늘은 12일이 아니고 19일이잖아요?"
이럴수가 내가 일주일 전 행사장을 찾아가고 있는게 아닌가? 아직 내 나이 그 나이가 될려면 한창일텐데 어찌하여 이런 실수를 했을까? 여느 단체 행사는 드믄드믄 있어서 그렇게 허탕쳐 제주로 돌아갈 판이었는데 다행이 사무국의 행사는 매월, 매일 걷기행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담당자의 안내로 서귀포시 하효에 자리해 있는 효돈중학교 앞에서 하차하니 성산포가 37km 남았다고 토요일아침 횡하니 비어있는 동회선 일주도로상에 이정표가 걸려 있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
쇠소깍 가는 올레길의 동네는 집집마다 게으른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고 저 멀리 한라산도 지난 밤 어둠과 함께 눈을 감았던지 한 숨 푹 잘 잤다며 아침햇살에 기지게를 펴듯 내 앞에 드러내고 있었다.
'쇠소깍 가는 길'이라는 팻말을 따라 마을길을 들어서니 매어둔 복실이 처음보는 이방인이 곤히 자는 지 주인 깨울까봐 조용히 지나라는듯 컹컹 짖어대는 폼새가 오히려 지 소리에 지 주인이 깰것 같아 너나 잘하라며 미소를 지으며 부지런히 발을 놀리는데 길 한편으로 따개비 덕지덕지 달라붙은 모습에 신기해 다가가 보니 수 많은 다육이가 담벼락에서 아침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아마도 평소 다육이를 키우던 주인이 카페를 연것 같다. 이른 아침이 아니라면 따끈한 원두커피 한잔 하고 가면 좋으련만 아마도 이 카페주인도 아직 잠자리에서 뭉기적 거리고 있을것이리라.
제주는 참 돌이 많은 곳이다. 어릴 적 집 뒤 텃밭을 일구는 어머니를 따라 나서면 땅 속에선 캐도캐도 이처럼 튼실한 돌맹이들이 수도 없이 나왔었다. 밭에서 캔 돌맹이를 가지고 경계를 짓는 밭담을 쌓았었고, 건물을 세운다고 포크레인 작업을 하더라도 이처럼 무수히 나온 돌맹이들은 工期를 지연시키곤 했었는데 쇠소깍 가는 길목에 어디서 이처럼 많은 돌멩이들을 실어 왔는지 흡사 자갈밭에 들어선 기분이다.
드디어 쇠소깍이 보이는 듯하다. 계곡 옆으로 산책로가 곱게 정비되어 있고 저 멀리 푸른 물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서울의 양재천변을 걷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처음 걸어서 와보는 쇠소깍이라 도중에 헤매어 늦으면 어쩌나 하며 조바심을 내고 걷던 길이었는데 시간을 확인해보니 행사 시작 시간까지는 아직도 30여분이나 남아있음에 한시름 돌려 놓는다.
쇠소깍이란 바닷물과 용천수로 이루어진 천연 어항으로서 우돈(牛屯)이란 지명을을 따서 우소(牛沼)라고도 부르는데 거기에 바다와 만나는 하구(河口)를 깍이라 부르는 제주어의 합성어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곳에 용이 산다 하여 이곳을 용소(龍沼) 라고도 불렀다. 이와 비슷한 곳으로 제주시 용두암 근처에 용연이 있는데 작년에 찾았던 용연에서도 쇠소깍 물위에서 보트체험을 하는것 처럼 장비를 갖추어 놓고 수익사업을 하고 있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쇠소깍의 파도를 바라보며 지난 날 친구와 찾았던 추억을 그려본다. 저 멀리 남태평양의 커다란 노을이 수많은 사연들을 품고 다가오다 육지에 다가 올수록 하나 둘 그 사연 내려놓고 급기야 하얀 포말로 부숴내버리는 모습을 보며 지난 날의 아름답던 추억들 역시 뇌리에서 사라짐을 아쉬워 흩어져버린 추억들 하나 둘 건져 올려 구슬로 엮을수는 없는지 되돌아 나가는 파도를 보며 덧없다 느껴본다.
토요일 아침부터 이곳 쇠소깍에는 수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거리에 사람들, 주차장엔 그들이 타고온 자동차들, 쇠소깍 맑고 푸른 물위엔 수상자전거, 노를 젓는 보트 그리고 십여명의 사람들을 실은 태우(자리돔을 잡았던 뗏목 형태의 어선), 오전 11시까지 비싼 이용료를 내고서도 예약이 다 찼다고 지나던 관광객의 푸념을 들을 수가 있었다.동네청년들이 장비를 마련하여 쇠소깍 수상보트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마을의 발전을 위해 공동자금으로 쓰고 동네사람들은 무료로 이 놀이시설을 이용하고 있다고 이곳이 고향인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요금이 만만치가 않다. 조상과 지역을 잘 만나 이들은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이들 역시 관광사업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어딘가 씁쓸한 느낌을 받는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3월의 어느날 제주를 찾은 청춘남녀들은 이 쇠소깍앞에 펼쳐진 바다를 배경으로 열심히 추억쌓기를 하고 있었다.
"고개 이리 돌려봐.아니, 그렇게 말고 요렇게."
"어디가 좋을까? 쇠소깍? 아니면 파도를 배경으로?"
"그래, 찍는다. 하나,둘,쎗"
"찰카닥"
올래꾼들 하나 둘 몰리고 사무국에서 나온 '밸레기 간새'(잘난 척하는 게으름뱅이)들이 행사준비를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내가 처음 본 올래사무국은 이제 체계가 잡힌 집단인것 처럼 보였다.아니 그들은 이러한 행사들을 수십번 수백번 치뤄왔기에 이제 그들에게 이정도의 행사야 여반장이렸다.
신이난다. 처음 들어보는 올레 로고송의 반주에 맞춰 파란 말모양의 올레 마스코트 인형이 참가한 올레꾼들과 행사진행의 흥을 돋구기 위해 길닦기를 하고 있다. 쇠소깍을 찾은 관광객을 불러모으고 서로의 손을 앞사람의 등에 얹혀 기차놀이를 하고있다. "나도 끼어들어? 에이, 오늘 처음 참가했는데 쑥쓰러워서 어찌..."
눈빛을 맞추려는 진행자의 눈을 피해 취재나온 어느 일간지 카메라 기자 마냥 애궃게 핸드폰 카메라 셔터를 연거푸 눌러댔다.
"자, 모두 나오세요. 오늘 참석하신분 기념촬영합니다"란 소리에 그 장단엔 맞춰 줘야 할것 같다. 나도 언젠간 이들과 함께 제주 올레길 전 구간을 돌아야 할테니까. 그들 모두는 서로서로가 지인들이기에 나는 홀로 게면쩍게 슬며시 그 틈새로 파고들어 "대가리~~이"하고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드디어 출발!
쇠소깍 6번 코스 밟기가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출발선상에 선 러너들처럼 힘차게 걸어나간다. 나는 맨 뒤에서 그들의 뒤를 쫓았다. 초보 올레꾼이 해야할 예의를 차리듯이...
일행 맨 뒤에서 뭔가를 열심히 조작하는 이가 나중 알게된 6번 올레길 지킴이 백혜진씨다.
그녀는 올레길을 걸으며 훼손된 장소를 촬영하고 무언가 열심히 적는다. 아마도 지킴이의 본분인가 싶다.
어디선가 본듯한 장면인데, 어디서 봤을까? 올레꾼들의 걷는 모습을 보며 나는 어린시절 설레는 소풍길을 걷는 느낌을 받았고, 학창시절 동아리 멤버들과 손에손에 수련장에가서 먹을것들 바리바리 싸안고 수련회를 가던 길을 그려보았다.
언제부터 제주에 이렇게 커다란 야자수가 있었을까? 예전의 제주 풍경에서 볼수없었던 모습을 보며 이제 제주가 아열대 기후로 들어서는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하기사 제주의 관문인 제주공항에도 이렇게 커다란 야자수가 심어져있어 완전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나무들 사이 관리동이 보이는데 오래 전부터 관리가 안되는 건물처럼 폐허가 되어있다. 개인농장인가?
따뜻한 봄날이다. 바람 한 점없이 온화한 햇볕이 얼굴을 그을릴까 잔뜩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나왔건만 봄날의 햇살을 이겨 낼것 같지 않다.하지만 잔잔한 바다와 빨강등대를 바라보며 올레길을 걷고있는 자신을 보니 하늘이 고맙기만하다. 어제는 비 오고 바람이 불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을 냈었는데....
길을 걷다보니 광어양식장이 깔끔하게 나를 반긴다. 한 때 이 양식광어와 인연이 있어 나는 계단을 밟고 양식장안으로 들어섰다. '무료개방'이란 팻말에 용기를 얻어...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 풀뿌리 정치에 발을 들여 놓기전에 치어양식장을 하여 몇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25년만의 양식장 방문이다.이곳의 양식장은 넓고, 현대식 시설을 갖추어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좋은 홍보가 될듯싶다.내 친구의 양식장을 찾을 때도 시기별,크기별로 구분해놓은 가두리에 광어를 넣고 사료를 주며 키우고 있었는데 이곳 역시 그러하다. 고기들이 병에걸리지 않게하기 위하여 해수를 수시로 갈아줘야 하기에 바다가 근접해있는 곳이나 아니면 해상가두리 양식장을 이용한다. 제주의 양식광어는 일본에서는 최고로 쳐주기에 많은 양의 광어를 수출하고 있다. 예전에 여수나 완도의 양식광어는 제주의 광어와 달리 조금 짙은 검은색을 띄는반면 제주의 광어는 황토빛 처럼 노랗다. 그리고 육질 또한 그만이고, 지금에야 어떨지 모르지만...
이제 치어수준을 벗어난 광어새끼들이 잽싸게 물속을 헤엄쳐 다닌다. 사진에서 보기에 아마도 2,000마리는 넘을것 같다. 이것들이 커서 출하를 하게된다면 양식장 사장에게는 많은 돈을 안겨 주겠지?
예전엔 양식광어와 자연산 광어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배바닥으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자연산광어는 배바닥이 하얀반면 양식광어는 등어리의 색깔이 배바닥까지 침투하여 이 둘사이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이용했었는데 제주의 광어는 이 방법으로 구별해내기가 쉽지가 않다. 제주의 양식광어는 일부 배바닥이 자연산광어와 비슷하게 배바닥이 하얀색깔을 띄기에... 요즘은 어찌할지 모르겠지만 횟집에가서 이 방법을 써보는것도 괜찮을 것이다.
양식장을 나와보니 일행이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어 나는 헐레벌떡 잰걸음을 안 놓을 수가 없었다.일행을 놓쳐 길을 잃어버리면 낭패가 아닌가? 초보 올레꾼이 건방지게 봄의 모습을 촬영한다, 양식장을 돌아본다하며 늦장을 부렸으니 길을 잃어도 할말은 없다. 그래도 서귀포에 봄이 찾아왔는데 심드렁하게 봄을 보내버리면 봄에대한 예의가 아닐것 같아서...
섶섬을 뒤에 두고 길가의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제주시는 아직인데 역시 서귀포는 따뜻한 곳이여.
앞에보이는 섬이 섶섬이고 전봇대가 즐비하게 서있는 뒷편에 마라도처럼 항공모함처럼 떠있는 섬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을 하고있어 땅이 바닷 속으로 돌아간다는 뜻인 지귀도(地歸島)가 있다.(핸드폰 카메라 여서 지귀도는 안 보일것임) 섶섬은 서귀포 앞바다에 세개의 큰섬 문섬, 범섬과 함께 떠있는 섬이다. 이 섶섬은 문필봉(文筆峰)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이 섶섬 꼭대기에 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나무의 모양이 붓의 모처럼 생겼다 하여 문필봉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라 백혜진 지킴이는 말한다. 이 섬의 정기 때문일까, 이 효돈에는 옛부터 많은 공무원과 소위 먹물을 먹었다는 사람들이 많이 났었다 한다.
백혜진 지킴이가 전해주는 말에 의하면 이섶섬에는 소천지가 고향인 큰 귀 달린 새빨간 뱀이 살았었는데 이 뱀은 용이 되기위해 오랫동안 용왕님께 빌었다 한다. 이 기도에 감복한 용왕님이 섬의 동쪽 깊은 곳에 숨겨진 야광주를 찾아오면 용이 될 수있다는 말에 이 뱀은 100년 동안이나 이 야광주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찾지못하고 10개의 알을 낳은 채 죽고 말았다.
용왕님은 이를 가엾게 여겨 뱀을 환생시켜 주었는데 뱀은 섶섬지기, 10개의 알은 섶섬동자가 되어 이 효돈 지방의 사람들에게 자리돔과 각종 동식물이 번성하게 하여 이 섶섬과 보목리일대를 지키고 있다고 전한다.
나는 제주 이야기를 하며 느끼는건데 우리 제주사람들은 주위 사물에대해 참 의미부여를 많이하는 후손들이라 여겨진다. 제주의 어느 해안가, 어느 산간, 시골의 어느 마을에 가더라도 그곳에 얽혀있는 자연 지형물에 대하여 각각의 갖고있는 이야기들이 참 많이들 갖고 있다. 이렇듯 앞으로 나는 올레길을 걸으며 그 지방에 전해내려오는 전설들을 참 많이 하게 될것 같다. 제주는 가는 곳마다 이런 이야기 보따리가 잔뜩 쌓여 있기에....
1시간 여 효돈의 해안가를 걸어오다보니 보목리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잠녀식당이 보이고 어디선과 쿵광쿵광 징과 북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어느 집에서 굿을하는 소리리라. 나는 어렸을 적 이런 해안가나 시골길을 걷노라면 이렇게 굿을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다. 그 당시는 어느 집에 무사기원을 위해 드리는 굿, 마을 공동의 번영을 위해 드리는 굿들이 한 때 제주는 많았었다.
그러나 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시절 미신타파라하여 이런 굿이 사라지는가 했었는데 이제는 전통문화라하여 무당이나 박수무당을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해놓는가하면 전통문화 보존이라 하여 나라에서도 그리 금하고 있지는 않는것 같다. 나는 호기심에 이 굿하는 소리를 쫓아가 잠시 장면을 엿보려다 집안의 사람이 부정탄다고 그랬는지 싫은 기색을 하기에 그냥 돌아서 나왔다. 언제가는 제주에 매년 입춘때 시작하는 칠머리당굿을 꼭 보고야 말리라.(제주의 칠머리당굿은 너무나 유명한 굿이기에...)
보목리 해안에서 바라본 서귀포 전경이다. 저 멀리 TV 송신탑이 보이는 곳이 삼매봉이고 그 앞 절벽위에 커다란 성처럼 지어진 하얀 건물이 예전 유명한 호텔이었다가 얼마전 일본의 신흥종교단체에서 연수원으로 매각한 건물이 보인다. 이처럼 제주는 절경이 아름다운곳의 건물이나 땅들은 이미 외지인들 손에 넘어간곳이 많다. 지금과 같아서는 언감생심 이런 위치에 이런 건물을 세우기도 힘들텐데 제주는 이처럼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 몸살을 안고 있다.
보목리 마을을 벗어나 잠시 걷다보면 해양경찰대에서 경비초소로 쓰이는 전망대 해안가에 아까 귀 달린 뱀의 살았다는 소천지가 보인다.모양을 보니 백두산의 천지처럼 생겼다하여 소천지라 지은것일까?
이 소천지는 바람이 없고 바다가 잔잔할 때에는 한라산의 모습이 이 소천지의 해수면위에 떠 오른다 하는데 투영되는 각도가 이 소천지와 맞는지 소천지 곁에는 어느 겨울날 한라산 정상에 흰눈이 쌓인 모습의 사진이 세워져 있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고개와 위치를 돌려가며 그날의 한라산의 모습을 찾아보려 했지만 우리가 서있던 위치에서는 한라산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초보자가 올래길을 걷는데 그리 큰 무리는 없을것 같다. 사진에서 보는것 처럼 올레길의 심벌마크인 제주 몸생이(조랑말)가 나갈 길을 가르켜 주고있고, 주황,파랑의 리본이 초보 올래꾼들을 위해 길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올래 길목에 서있는 이 조랑말은 사각의 쇠파이프도 아니고 플라스틱으로도 만들어져있지않다. 자연을 파괴하지 않기위해 녹말가루로 만들어 친환경적인 길라잡이이다.
이 노릇을 어찌할꼬...
갈길은 먼데 우리는 길가에 자리잡은 선술집에 들려 시원한 쉰다리(제주의 전통 발효 음료) 한 사발 들이키려 들렸었는데 마침 그곳은 올레길 지킴이 백혜진씨 지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자리를 차지하고 식당 메뉴를 둘러보니 멜튀김이 있으렸다? 멜은 생멸치의 제주도 방언이다. 제주는 초 여름 많이 잡히는 생멸치를 가지고 푸성귀 손으로 성큼거려 뜯어놓고 국을 끓여 먹거나 기름에 튀겨 먹기도 한다. 그런데 벌써 그 멜이 나온단 말인가?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우리는 딱 막걸리 한 사발씩만 하고 가던 길 가자 해놓고 막걸리 두병을 시켜놓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맨 후미에 뒤쳐진 나, 올래길 지킴이 그리고 포목점을 하신다는 올레꾼 한 분과 함께 막걸리잔 권하며 통성명을 하였더니 세사람 다 대학 동문들이었다. 간만에 지인들을 만난 기분으로 올레길 이야기를 나누다 일어서야할 때를 느꼈는지 시간을 보던 백혜진씨가 이중섭 미술관 쪽으로 가야한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한다.
"그럼, 나머지 길은요? 여기서 중단해서 가자고요?"
결국은 올레길 탐방 첫날부터 중도하차다.
"그곳에서 오늘 서귀포 시민 잔치를 하는데 돼지고기도 주고 몸국도 준다하니 빨리 가보자고요."
나는 그날 올레길을 안내해준 고마움에 계산을 마치고 불러놨던 콜택시가 도착하길래 그들을 따라 잔치집으로 나섰다. 첫날부터 완주 실패라... 천지연 폭포를 거쳐 외골개까지 가야하는데 우리는 선술집에서 몽기작 거리다보니 벌써 도착해야할 시간을 놓쳐버린 것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찌하리 다음 번 시간 내어 다시 한번 6코스를 밟을날들이 많을텐데 그리 조바심 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후일를 기약하며 간만에 먹어보는 몸국을 맛보기 위하여 낮술을 한 붉으레한 얼굴을 하고선 택시에 몸을 실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