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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유메카나
Fancafe 애담유메카나(http://cafe.daum.net/ASAHA)
<7>
찬영이는 유독 사랑에 잘 빠졌다. 녀석은 늘 진심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봤을 땐, 찬영이의 사랑은 상대방이 예쁘기만 하면 시작되는 것 같았다. 찬영이도 꽤 반반하게 생긴 타입이라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제가 찍은 여자는 웬만하면 넘어왔고 금방금방 여자가 바뀌었다. 그러나 딱 한번 찬영이가 찍은 여자가 넘어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 애는 옆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는 여자애였다. 소문만큼 역시 여자애는 콧대가 높았고 찬영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열 번 찍어 안 넘어오는 나무 없다는 좌우명을 가진 찬영이는 한 달 동안이나 여자애를 무작정 쫓아다녔고, 결국 그 애 학교에서 찬영이가 스토커의 대명사로 굳혀지며 끝이 났다. 애들은 모두 결국 엿 된 찬영이를 비웃었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찬영이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에 대해 그만큼 열정을 보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부러웠다.
“오냐오냐 했더니 아주 기어오르는 구나! 택도 없는 소리 마라!”
아마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 할 수 없을 테니까...
“종자도 더러운 자식 년을 호적에 올려 달라 하도 애걸복걸하기에 들어줬더니. 이젠 공개 석상에 대놓고 보이겠다고? 이게 도둑 심보가 아니고 뭐란 말이냐! 이러려고 이 집에 들어온 게지? 이렇게 하나씩 우리 집안 피를 쪽쪽 빨아 먹으려고!”
“어머니..제발 고정하세요..”
“듣기도 싫다! 어머니란 말 입에 올리지 말거라! 내 며느리는 하나뿐이다!”
노인네의 서슬 퍼런 고함소리에 여자는 그 앞에서 발발 떨고 있었다. 내 앞에서는, 우리 아빠 앞에서는, 할망구 앞에서는...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올 것처럼 모질게 굴던 사람이.... 십년 넘도록 자신을 인정 해주지도 않는 시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거였다. 매일 이런 꼴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버텼겠지. 당신은 돈 앞에서 남편이고 자식이고 다 버릴 수 있을 만큼 독한 여자니까.
“며느리라고 생각 안 하시면 시어머니 행세도 안하셔야죠.”
거실 소파에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노인네의 앞에서 한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가 발딱 일어났다.
“이난희! 너 할머니 앞에서 말 버릇이 그게 뭐야!”
“날 손녀로 생각도 안하시는 분인데....할머니라니. 듣는 분 기분 나쁘시겠어.”
“저게 아주 나를 잡으려고 들어온 게구나! 망할 것!”
“너 정말..!”
“발로 차는 주인 섬길 만큼 충성스런 개가 못되는지라 먼저 올라갈게요.”
분노에 파르르 떠는 노인네와 충격에 굳어버린 여자를 본척만척 계단을 올랐다. 놀랐을 거다. 어렸을 땐 조용히 살았으니까. 아무리 발로 차도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충견처럼 컸을 거라 생각했겠지. 생활비도 교육비도 모두 이 집의 돈으로 컸으니까.
“처음부터 나를 피 말려 죽이려던 속셈인 것이야! 더러운 것들!”
노인네는 미닫이 방문을 신경질적으로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완전히 올라왔을 때 어느새 나를 따라 온 여자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너 뭐하는 짓이야! 당장 내려가서 잘못했다고 빌어!”
“내가 이 집에 오고 싶다고 했어? 돼지를 도살장 끌고 가듯 질질 끌고 왔으면서, 뭘 더 바래?”
“정말로 화나면 무서운 분이라는 거 몰라서 이래!”
“당신이나 돈에 자존심이고 자식이고 남편이고 다 팔고 이렇게 살아. 그런 개만도 못한 인생 나한테까지 강요하지 말고!”
짝― 살과 살이 맞닿는 강렬한 마찰음이 귀에 꽂혔다. 왼쪽 뺨에서 열이 뜨겁게 올라왔다. 여자는 내 뺨을 때린 손을 떨며 주먹을 쥐었다.
“너까지...정말 속상하게 할래...?”
“.....”
“내가...누굴 위해서..이렇게 사는데...”
여자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왼손을 들어 천천히 맞은 뺨에 갖다 댔다. 뜨거운 열이 그대로 전해졌다.
“누굴 위해 그렇게 사는데? 설마 나를 위해서라는...그런 가증스러운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
“내가 부탁했어? 그렇게 비굴하게 살면서 돈이나 챙기라고...그러니까 제발 나 버려 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냐고!”
“버리지 않았어! 내가 언제 널 버렸어! 날...떠난 건....너잖아..”
“...싫다고 했잖아....”
“.....”
“제발 집으로 가자고...당신 바짓가랑이 붙잡고 빌었잖아...”
아빠와 할머니를 떠나 엄마와 이곳에 온 그날부터 나가는 그날까지. 울고 또 울었다. 노인네에게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동갑 동생과 눈에 보이는 비교를 당하면서...사람들의 손짓과 눈총을 받으면서...너무 울어서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만큼, 목이 터져라 울어댔다.
“당신은 나는 포기해도 이 집 재산은 포기 못했지.”
“어쩔 수 없었잖아...그때 방법은 그것뿐이었어..”
“그래. 어쩔 수 없었겠지. 나는 도대체 뭐가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난 지금, 이제 와서 당신 원망하는 거 아니야. 그냥 내가 사고 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당신 멋대로 이용할 생각 하지 말란 거야. 난 이 집 재산 욕심 없어. 노인네 비위 맞출 생각은 더더욱 없어.”
여자가 내 앞에서 우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인형이라도 되는 양 제 멋대로 내 인생을 헤집어 놓던 여자였다. 12년 동안 증오하던 여자에게 눈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만약 있다고 해도 까만색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여자의 눈에 흐르는 눈물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투명색이었다. 왠지 배신당한 기분까지 들었다.
“2학년만 끝내면 보내주겠다던 약속..꼭 지켜.”
울고 있는 여자를 뒤로 한 채 방으로 들어와 방문을 신경질 적으로 쾅 닫았다.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던졌다. 가방이 미끄러지며 제법 멀리 나갔다.
당신은 당신이 최고라는 듯 자만심에 빠져 웃기만 해야 해. 가까운 사람 심장을 갈기갈기 찢고 헤집으면서도 당신은 오히려 당당해야 해. 여태 그랬던 것처럼 그래야만 해. 지금처럼 안 어울리게 당신도 피해자인 양 굴면 안 돼. 적어도 내 앞에서는 당신은 그러면 안 돼..
나는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찾았다. 은호의 전화번호를 누른 채, 문에 기대어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보세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누나?
어쩌면...이게 당신의 사랑 법일지 모른다고... 하지만 잘못 된 사랑 법은 남에게 비웃음을 살 뿐이라는 것 역시도 알고 있다.
―..여보세요? 누나? 전화 해놓고 왜 말이 없어?
찬영이가 그 애들에게 비웃음을 샀듯....
“....지금 차공명이랑 같이 있어?”
.....그래서 나는 당신이 용서 할 수 없어...
/
“어허. 학생! 교복을 입고 이런 델 오면 어떡해?”
“들어 가야돼요.”
“오려거든 사복으로 갈아입고라도 왔어야지. 누구 장사를 말아 먹으려고!”
막무가내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주인아저씨가 막아섰다. 제정신 아닌 채로 나오는 바람에 깜빡했다. 녀석들이 있다고 말한 곳은 술집이었고, 그곳엔 교복을 입고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아저씨의 손에 저지당해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은호의 번호를 찾는데 누군가가 휴대폰을 낚아챘다.
“왜 이렇게 안 오나 했더니...”
차공명은 인상을 찌푸리며 내 휴대폰을 탁 덮었다.
“아주 용을 쓰고 있구나. 용을. 너 누구 엿 먹이려고 그 꼴로 당당하게 여길 왔냐?”
“급하게 나오느라 깜빡했어.”
“전화로 횡설수설 할 때부터 알아봤다. 급하게 나를 만나야할 만큼 중요한 얘기가 뭔데?”
“낮에 했던 말...”
“결정 했나보네.”
차공명이 빙긋 웃으며 휴대폰을 내 앞으로 건넸다. 나는 휴대폰을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네가 했던 부탁....아니, 그 제안 아직도 유효하냐?”
“물론. 오히려 급한 건 내 쪽이니까.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교복이라 안 들여보내주던데..”
“당연하지. 멀쩡한 가게 영업 정지 먹일 일 있냐?”
남 말할 처지는 아니긴 하지만, 차공명은 정말 더럽게도 말 예쁘게 한다. 같은 말이라도 어쩜 저렇게 사람 속을 한번 뒤집을 수 있을까?
“그럼 어떡해?”
“자리를 옮겨야지. 교복 입고도 갈 수 있는 곳으로.”
문득 어제의 카페가 떠올랐다. 덤으로 내가 했지만 아직도 나조차 이해 할 수 없었던 어제의 만행도 떠올랐다. 어설픈 염탐을 한 것도 모자라 들키기까지... 순간 또다시 쪽팔림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왜 갑자기 얼굴은 붉어지고 그러냐?”
“더워서.”
“하여간 특이해. 잠깐만 기다려라. 옷가지고 나올 테니까.”
너한텐 특이하단 말 듣고 싶지 않다고!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가는 차공명의 뒷모습을 향해 가게 문 밖에 처량하게 서있던 나는 속으로 외쳤다.
/
차공명과 함께 온 곳은 근처의 카페였다. 어제와 같은 곳은 아니었지만, 당분간은 카페에 오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을 예정이었으므로 딱히 만족스러운 장소는 아니었다. 차공명은 여유롭게 내 음료까지 멋대로 주문하고는 알바생을 떠나보냈다.
“왜 내 것까지 네 멋대로 시켜?”
“유치하게 네 권리를 뺏었다 이거냐? 어차피 커피 종류도 잘 모를 거면서.”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제 오렌지주스 시킨 네 센스를 이미 간파했다, 이 말이지.”
젠장...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원래도 말빨이 센 편은 아니었지만 왠지 차공명에게 말빨이 밀리면 괜히 기분이 상했다. 이렇게 말빨에 밀렸을 때, 주먹으로 해결하고 싶은 적은 처음이었다. 주먹으로는 어떻게 승산이 있을 것 같긴 한데..
“아무튼 누구 덕분에 술집에서 1차 보내고 2차를 카페로 왔네.”
“원래 학생한테는 술집보다 카페가 더 일상적인 거거든?”
“여자들이야 이런데 좋아하지. 남자들은 이런 덴 별로다.”
“이상한 이름의 커피 주문하는 것도 엄청 자연스러웠으면서 내숭은. 자주 오는 거 아녔냐?”
“자주 왔었지.. 아람이가 카페 가는 거 좋아하거든.”
“아...”
“덕분에 주완이랑 은호도 카페 엄청 끌려 왔다. 아람이만 끼면 무조건 술집 못 가고 카페 직행이었으니까.”
녀석의 상황을 의식을 해서일까? 킥킥 거리는 차공명의 웃음이 왠지 씁쓸해 보였다. 그때 알바생이 주문한 음료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커피를 빤히 쳐다봤다. 하얀 휘핑크림이 가득 얹어져 있고 그 위에 초코시럽이 잔뜩 뿌려져 있는 모양이었다. 왠지 엄청 느끼해보였다. 반대로 차공명의 앞에 놓인 건 깔끔한 커피였다.
“바꿔. 나 느끼한 거 싫어해.”
“안 먹어봤으면서 말이 많다. 먹어 봐.”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분간이 되냐? 보기만 해도 딱 느끼한데.”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거란 말이다.”
“네가 만난 여자애들하고 내가 다른 모양이지.”
별로 탐탁지 않아 하는 차공명의 의사를 무시한 채 나는 놈의 잔과 내 잔을 바꾸었다. 까만색이 보는 것만으로도 써 보이기는 했지만 느끼한 것보단 훨씬 나았다. 반면 눈앞에 놓인 자신의 음료를 보는 차공명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너는 내가 여태까지 봤던 인간들 중 가장 특이한 캐릭터다.”
“나도 이 말은 진짜 안하려고 했는데..”
“뭐?”
“너한테 특이하다는 말은 진짜 안 듣고 싶거든? 앞으로 그 말 하지마라.”
“그럼 네가 평범한 여자애냐?”
“다른 애들이 말하는 건 이해해도 네가 말하는 건 도저히 납득이 안 되서 말이야.”
차공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녀석의 그런 눈빛은 무시한 채 커피를 홀짝였다. 쓴 맛이 입안을 확 감돌았다. 커피 맛은 잘 몰랐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근데 왜 갑자기 바꿨냐?”
“네가 멋대로 주문했잖아.”
“커피 말고.”
“아..”
“아까 낮에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된다더니.”
순간 벌레 보듯 경멸의 눈으로 나를 보던 노인네의 시선이 뇌리를 스쳤다. 눈물을 흘리던 여자의 모습도 떠올랐다. 쓴 커피를 원샷 한 것 마냥 입이 썼다.
“역시 다이아몬드 구두가 탐이 났나?”
“구리로 만든 구두래도 상관없어. 단지 신데렐라를 부러워하는 새언니가 필요할 뿐.”
“새언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늙었지 않냐?”
“확실히 노인네가 놀라서 나자빠지게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누구냐? 차공명이다. 나만 믿어.”
“흠..”
“다음 주 주말에 삼진 창립기념 파티야. 그때 확실히 네 눈앞에서 그 노인네가 평면 tv보다 더 납작해지는 걸 보여줄게. 상상만으로도 짜릿하지?”
자신이 차공명이니 무조건 믿으라니... 썩 신용가지는 않았지만 놈의 넘치는 자신감에 그냥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가 뭘 하면 돼?”
“지금 이 순간부터 나랑 둘만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우리는 연인이다. 너희 집안과 아람이는 물론이고... 은호랑 주완이, 그 녀석들도 알아서는 안 돼.”
“근데 아무리 걔들이 단순하다지만 진짜 믿을까?”
“벌써 아까 술집 나올 때 둘만 어디 가냐고 수상하다고 지랄들이었어.”
“확실히.....걔들 속이는 게 제일 쉽겠네.”
설주완은 첨엔 날카로운 느낌을 풍기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실체를 알면 알수록 은호보다 더 심각한 단세포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예전 꼴통 녀석들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었다.
“근데...혹시라도 들키게 되면?”
“그럴 일은 당연히 없어야겠지만...만약 들키면..”
“들키면?”
“병신 되는 거지 뭐.”
“....”
“지금 잠깐 생각해봤는데...들키면 존나 쪽팔리겠다, 진짜. 삽질도 그런 개 삽질이 없겠네.”
차공명은 가득 얹어진 휘핑크림을 수저로 휘휘 젓다가 이내 컵을 저 멀리 치워버렸다. 크림과 커피가 완전히 섞이지 않고 기름이 둥둥 떠 왠지 먹기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완벽하게 끝내는 게 아니라 중간에 어설프게 들키게 된다면...노인네가 얼마나 비웃을까? 그 생각을 하니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완벽하게 해야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차공명과 나는 처음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한은......”
“너무 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내가 끝내자고 할 때까지.”
“뭐?”
“걱정마라. 오래 끌 생각도 없고, 네 소원은 꼭 들어주고 끝낼 테니.”
삼진그룹에서 나오는 믿는 구석이 철저하게 있는 자만심이었다.
/
전날 엄청난 짓을 한 것 같았지만, 여전히 월요일 아침은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월요일 아침에 이렇게 일찍 눈이 떠지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할망구가 빗자루를 들고 엉덩이를 몇 대 내려쳐야 밍기적거리며 일어나서 겨우 지각을 면하거나 지각을 하거나 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가도 갈 곳이 있다는 게 그저 기쁠 뿐이었다.
“어제 연애통신 봤어? 비 오빠 나왔는데 완전 더 멋있어졌더라!”
“난 어제 다락방 고양이 봤는데. 근데 거기 남자주인공 죽나?”
“어. 병 걸려서 죽어. 그거 소설 원작이라서 나 봤었어.”
“엑! 진짜? 어쩐지 어제 마지막 대사가 영 찝찝하더니..”
남자애들은 마치 초등학생처럼 교실을 뛰어다니고 여자애들은 끼리끼리 모여 별 내용 없는 수다를 떠는, 적당한 아침이었다. 너무 평소와 다름없어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을 줄 알았다. 그래, 확실히 차공명이 교실에 등장하기 전까진...
“쟤 오늘은 왜 저렇게 빨리 왔대?”
“귀신같이 1교시 시작하는 시간 맞춰서 오더니..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정상 등교시간에 나타난 차공명의 등장에 아이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놀랐다. 나 역시 같은 이유로 놀랐다. 전학을 온 그날부터 지금까지 녀석은 늘 1교시가 시작하거나 끝날 때쯤에 느긋하게 등교했었다. 마치 그게 등교시간이라도 되는 양.
“야! 조용히 안 하냐? 뭔 구경거리 났다고 그렇게 쳐다 봐? 눈깔 다 돌려.”
짜증 섞인 차공명의 외침에 아이들은 거짓말처럼 모두 고개를 돌렸다. 옆 분단 맨 끝자리에 앉은 한 놈은 우리 쪽을 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었다. 차공명은 한쪽 어깨에 대충 둘러 맨 가방을 책상 위에 탁― 던졌다.
“일찍 와도 지랄이야. 이러니까 내가 일찍 오고 싶겠냐고.”
“핑계 거리 많아서 좋겠다. 그리고 너 일찍 온 건 아닌데.”
“그럼 늦게 왔냐?”
“정상등교지.”
“맘먹고 왔는데 아침부터 자꾸 태클 걸래?”
나를 보는 차공명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맘을 먹어?”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사이잖아.”
조용한 반 분위기를 의식해서인지 차공명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했다.
“아....”
“설마 까먹고 있었냐?”
“아니야.”
정말 잊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지.
“암튼 이제부터는 틱틱 거리는 그 말투 집어넣어.”
“사귄다고 말투까지 바꿔야하냐?”
“그럼 남자친구한테 뭐냐? 그랬냐? 저랬냐? 새끼야. 이딴 말 계속 쓰려고 했냐?”
“아 더럽게 귀찮네.”
“너 설마....남자 한 번도 안 만나봤냐?”
말도 안 된다는 듯 차공명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야, 저런 눈빛? 열여덟 먹도록 연애 안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뭐? 진짜로 안 만나봤다고?”
“그딴 반응 집어넣지? 짜증나니까.”
“여태까지 그 나이 처먹도록 연애도 못해보고 뭐했냐? 공부 했을 리는 없고.”
“그만하라고.”
“아....진짜 골 때리네.”
“왜. 내가 남자 못 만나봐서 너한테 무슨 폐라도 끼쳤냐?”
“지금까지는 아니지만, 앞으로 엄청나게 끼칠 예정이지.”
녀석은 머리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차공명은 정말 걱정 가득 담긴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연애 한 번도 안 해본 너랑, 지금부터 사귀는 척을 해야 하는데. 걱정이 안 되겠냐?”
아! 그렇구나. 지금 그런 상황이었지. 별 생각 없었는데... 찬영이랑 지영이는 애인을 쉴 새 없이 바꿨었다. 그러나 직접 만나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고민하는 걸 눈치 챈 듯 차공명은 짧게 한숨 쉬며 입술을 달싹였다.
“앞으로 무조건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라.”
이번에도 역시 그다지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
“누나. 아까부터 왜 이렇게 말이 없어?”
“그러게. 원래도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지만.....이렇게 조용한 타입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급식소를 빠져나오며 은호와 주완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녀석들은 더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혓바닥이라도 잘렸냐?”
주완이 끔찍한 농담을 했다. ‘미쳤냐?’하는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갈 뻔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 진짜 이상해. 존나 시니컬하게 미쳤냐? 라는 말이라도 해야 정상 아냐? 원래 이렇게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은 애였나.”
입을 다물고만 있는 내가 낯설다는 듯 주완이 자꾸 건드려댔다. 시끄러워! 주둥이 좀 닥쳐! 골이 울리잖아! 주완을 향한 욕설들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내가 이토록 참고 있는 것을 아는 차공명은 재미있다는 듯 킥킥 거렸다. 나는 차공명을 쏘아봤다. 그러자 녀석은 언제 웃었냐는 듯 정색을 했다. 개자식...차공명이 말한 첫 번째는 무조건 얌전하게 말하기였다. 내 말투가 너무 딱딱해서 누구도 우리를 연인으로 보지 않을 거란 부가 설명을 해줬다. 말만 부드러우면 다 연인이란 말인가? 억지논리 같았지만 연애를 해보지 않았던 나는 차공명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얌전히 말하라고 했지..벙어리처럼 굴 필요까진 없는데?”
차공명이 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그따위로 말할 바엔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나아.”
“하여간 성질 존나 더럽지.”
“남 말 할 처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야! 지은호! 너희 누나 나랑은 말 졸라 잘한다?”
차공명이 빽 소리를 질러 앞서 가던 은호를 불렀다. 순간 은호와 주완이 고개를 휙 돌려 우리를 보았다.
“누나. 이러기야? 동생 말은 다 무시해놓고!”
은호가 삐진 듯 입술을 불퉁 내밀었다.
“너희 둘. 어제부터 수상해....”
실눈을 뜬 주완이 수상한 냄새가 난다며 코를 킁킁 거렸다.
“글쎄 내가 어제 그냥 말 없는 여자가 좋다고 했더니 오늘부터 아예 말을 안 하네.”
“뭐?”
“저게 무슨 말이야?”
놀란 은호와 주완의 표정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버린 내 얼굴. 거울로 안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져있을지. 반면 차공명은 저 혼자 즐기고 있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제 그 말, 장난으로 한 말이야. 이난희.”
“....”
“진작 말 하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그러니까.....말 못하겠더라.”
순간 내게 쏠리는 은호와 주완의 끈적끈적 불쾌한 눈빛들. 잠깐만.....이거 뭔가 이상한데..? 나 혼자 이상한 년 된 상황이잖아..??? 상황 정리가 끝난 나는 결국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지 못하고 내뱉었다.
“야! 차공명!!! 장난 하냐?”
“그래, 그래. 장난이었다니까. 이제 말해도 돼.”
“너 설마...이러려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차공명을 척 가리켰다. 차공명은 여유롭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야 알았냐? 재밌잖아.”
“재미? 재미이이이?”
“사람 성격이 다 다른데 사귄다고 말투가 바뀌는 게 말이 되냐? 안 어울리게 순진하긴.”
분노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내 귓가에 차공명이 작게 소곤거렸다. 열이 받다 못해 이젠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놀란 은호와 주완이 우리에게로 뛰어왔다.
“그게 다 무슨 말이야? 뭐야? 누나. 무슨 일이야?”
“너희 둘. 대체 뭐냐? 어? 분명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주완이 나와 차공명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중얼거렸다. 곧이어 차공명의 손이 내 어깨에 척 올라왔다.
“우리 사귀기로 했다.”
정적. 차공명의 폭탄선언이 끝나고 아주 잠깐 동안 짧지도 길지도 않은 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구라까지마 새끼야!”
“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 하지 마! 소름 돋았잖아!”
두 사람이 어색하게 웃으며 차공명의 어깨를 퍽 쳤다. 하지만 그런 어색한 웃음에서 묘한 긴장감이 읽혔다. 차공명은 다시 여유롭게 말했다.
“진짜야.”
이번에는 녀석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뭐? 나더러 어쩌라고? 뭔가를 강요하는 듯 한 녀석들의 눈빛에 나도 힘없이 입을 열었다.
“진짜야.”
내 대답에 두 녀석은 입을 쩍 벌렸다. 두 녀석은 급식소로 향하는 1층 복도를 가로막고 있다는 자각을 못하는 듯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오히려 지나가는 아이들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벽에 붙어서 우리를 지나쳤다.
“농담이면 재미없다.”
“진담이라 재밌지?”
“누굴 속이려고?”
“나야 니들한테 구라쳐도 이난희가 왜 니들한테 구라를 쳐?”
차공명은 은근히 말빨이 셌다. 절대 거짓이라고 장담하던 주완과 은호의 눈빛이 흐트러졌다.
“그래..우리 누난 그런 농담 같은 거 안 해...”
은호가 혼 빠진 녀석처럼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은호야. 나도 그런 농담 같은 거 하는 사람이야. 속으로 은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니들 왜 여기에 몰려있어?”
어떻게 점심시간 마다 매번 마주칠 수가 있을까? 그게 어느 장소든. 급식소를 향하던 민아람은 우리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나는 주완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 같았으면 민아람을 잔뜩 경계했을 텐데, 정말로 충격을 받았는지 주완의 시선은 오직 나와 차공명에게만 쏠려 있었다.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차공명을 살폈다. 녀석의 눈빛이 약간 흔들리는 게 보였다.
“분위기가 왜 이래?”
“내가 폭탄선언을 했거든.”
차공명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싱긋 웃었다. 내 눈에는 이상하게 그 웃음이 메말라 보였다.
“폭탄선언?”
“우리 누나랑 공명이랑 사귀기로 했대.”
“어..?”
“아람이 너도 안 믿기지? 근데 진짜래.....우리 누나는 구라 안치는데..진짜래..”
물에 젖은 강아지마냥 은호가 축 처졌다. 아람이 약간 당황한 듯 우리를 훑었다. 우리에게서 흐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아람은 이내 생긋 웃었다. 언제 봐도 정말 예쁜 웃음이었다. 남자들이라면 한눈에 반하겠다, 싶을 정도로.
“그래? 그러면 축하를 해줘야지. 왜 다들 이런 분위기야?”
“안 믿겨서...”
“좀 놀랍긴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 잘 어울린다! 축하해!”
아람이 웃으며 축하했다. 나는 애써 어색하게 웃음 짓지 않았다. 그저 멀뚱멀뚱 아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차공명이 고맙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차공명의 표정이 그대로 보일 것 같아서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차공명이 지금 짓고 있을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근데 너무 했어. 어떻게 티를 하나도 안 낼 수가 있어?”
“내가 언제는 너희한테 티냈냐? 새삼스럽게.”
“하긴..그건 그렇다.”
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지만 도통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쓸쓸해보이지도 않았다.
“차공명.”
“이제 좀 충격에서 벗어났냐?”
“아니. 아직도 충격에 휩싸여있다.”
“그렇게 충격이냐?”
“당연하지. 상대가 이난희인데..”
주완이 나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뭐지? 저건 무슨 뜻이야.....?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너...이난희 좋아하냐?”
주완의 말에 모두들 차공명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나 역시 차공명을 쳐다봤다. 녀석은 놀라지도, 곤란해 하지도 않았다. 그저 여전히 여유로울 뿐이었다.
“그럼 내가 장난치겠냐? 지은호 누난데.”
“그래. 설마 네가 장난치겠냐? 네 말대로 지은호 누난데.”
‘지은호 누나’라는 말에 강세를 두는 주완의 표정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아직도 설주완이 날카로운 녀석인지 단순한 녀석인지 헷갈렸다. 은호는 여전히 벙 진 얼굴이었다.
“나 밥 먹으러 갈게. 두 사람! 다시 한 번 축하해! 그리고...”
“....”
“공명이 잘 부탁해. 난희야.”
아람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살짝 잡고는 지나쳤다. 아람이 사라지자 어색하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묘한 표정의 세 사람을 등지고 내가 제일 먼저 발을 뗐다.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왠지 예상보다 더 불안한 시작이었다.
(★)
오늘 2개월만에 고향을 떠나서 드디어 집으로 왔습니다.
집이 난장판이더군요....마치 도둑이라도 들었던 것처럼^^;
한시간 반만에 청소를 모두 끝내고 드디어 노트북을 연결했습니다.
아. 벌써부터 엄마가 있던 고향집이 그립군요.
업뎃쪽지 원하시는 분은 S.
첫댓글 1편부터 다 봤어요~ 여주 성격도 맘에 들고 재미있어요~ 그리고 지오가 올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틀렸나요?ㅋㅋ 나타나질 않네요~ 그리고 드디어 난희와 공명이가!!ㅋㅋ 앞으로 어떤 난관들이 있을지ㅋㅋㅋ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S.ㅎㅎㅎㅎ아람이에게먼가가있군요..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