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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1864~1943)
어린시절(1864~1881) 까미유 끌로델은 1864년 12월 8일 프랑스 북동부 에느 지방 페르 안 다르드노와에서 등기소 소장인 아버지와 의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1남 2녀중 장녀로 태어났다. 까미유의 어머니는 유독 막대 여동생 루이즈에 대한 편애가 심했기에 그는 남동생인 폴과 가깝게 지내는 편이였다. 남동생 폴은 바로 프랑스의 대시인이자 극작가인 폴 끌로델이다.
13세의 남동생 폴 끌로델 (젊은 로마인) 1881
그즈음부터 흙반죽에 열중하게 된다.타고난 감성과 열정은 그녀를 작품에 몰입하게 했으며 기초적인 데생이나 조각에 대한 수업을 받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인 감각에 의해 조각 작품을 만드는 것이였다. 1879년경 그 지역의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에게 첫 사사를 받게 되는데 그는 곧 까미유의 천부적재능을 타고난 재원임을 읽어내고 그의 재능을 키워줄 것을 아버지에게 당부한다. 알프레드 부쉐는 까미유를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의 교장인 폴 뒤브와(Paul Dubois)에 소개하며 까미유의 습작인 "다윗과 골리앗" 을 보여 주었다. 교장은 매우 놀라며 그녀가 로댕에게서 수업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을 했다. 그러나 까미유는 그때까지 로댕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창작기(1882~1892)
까미유의 예술에 대한 이상은 확고했으나 당시 전문적인 예술세계는 여성에게 거의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가장 권위있는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여학생들을 받지않았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클로델은 1881년 17살의 생일이 되기 전에 훌륭하긴 하지만 패쇄적인 사립학교 아카데미 콜라로 시에서 수업을 받으며 그곳에서 사귄 야심찬 젊은 여자 친구들과 함께 노트르담 데 샹에 공동 작업실을 마련한다. 그들에겐 영감을 불러일으켜줄 선배 여성 조각가가 없었다. 그런건 꿈도 꾸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예술의 세계를 뚫고 들어갈 능력이 있음을 확신했다.
1883년에 알프레드 부셰는 로마상를 받게 되어 오귀스트 로댕(1840~1917)에게 노트르담 데 샹에 있는 작업실과 자신의 제자들을 대신 맡아줄 것을 부탁하고 로마로 떠나게 된다. 까미유와 로댕이 처음 만났을 때 까미유는 19살의 생일이 되기전 이였고 로댕은 43살의 나이었다.
1887년 23세쯤의 까미유
당시 로댕은 조각가로서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로댕은 까유유의 작품에서 자신의 조각과의 내적인 유사성을 느낀다. 까미유가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댕은 그의 작업실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안 한다. 1887년 로뎅의 제자에서 제작 조수로 일하게 된다. 로댕의 작업실에 젊은 여조각가의 등장은 하나의 사건이였다. 그녀는 주위의 한가로운 잡담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조용하고 말없이 자신의 일메만 열중했다.
그 당시 로뎅이 새로 만드는 장식 미술관의 주문으로 [지옥의 문]을 창작하고 있었는데, 까미유는 몇몇 지옥의 여인 모델이 되기도 하고, 몇몇 여인들의 손과 발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까미유보다 24세 연장자인 로뎅은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까미유의 조숙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당시 예술사에서 흔치 않는 관계가 맺어지게 된다. 이후 까미유와 로댕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사랑을 겸험하게 된다. 로댕과 함께한 기간 중에 까미유도 작품을 더러 전시했으나 결코 세 점이상은 되지 않았다.
로댕 흉상 1888(석고)~1892(청동) 1883년에 쓴 로댕의 <광폭한 연인>에서 보인 정열이 불타오르는 편지는, 로댕이 그녀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정열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1886년 노트르담 데 샹의 작업실에서 "사쿤탈라" 작업중
그즈음 프랑스 예술가 살롱전에서 힌두교의 전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사쿤탈라(Sakuntala- 마술에 걸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쿤탈라가 남편과 재회하는 모습)는 최고상의 영예를 얻는다. 로댕 또한 1883-1893사이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는등 많은 공적 생활을 하게 되고 이 생활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클로델과 나누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질 못했다. 지방출신인데다가 다리를 절어 불편했고, 예술계의 막후 거물들 중에서도 고작 '옷을 못입는 사람들' 만을 보았을 따름 이었다. 스스로 단지 장인의 역할에 국한 시키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클로델은 예술적인 천재성은 개인의 내면에서 나오며 타고난 재능에 비례하여 인정받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은둔 생활을 하며 작업하였다. 까미유는 로댕과의 관계를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고 주위사람들에게 단지 로댕의 제자로만 인식 되어있었다. 로댕과의 성적인 관계가 탈로나면서 클로델은 집에서 쫓겨났다. 클로델은 이시기의 상당기간을 이탈리아 가에 있는 허름한 빌라에 기거하면서 작업했다. 그녀는 때가 되면 자신의 재능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리라고 확신하고있었다. 고독한 창작기(1893~1905) 1893년 부터 1905년 동안에는 까미유는 로뎅의 그늘을 벗어나서 왕성하게 창작하는 시기다.
로댕의 여인 Rose Beuret, 1890
까미유는 1892년 경에 음악가 끌로드 드뷔시와 친분을 갖게 되었다. 그 둘은 예술가의 친선 모임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 까미유는 24살이었고 드뷔시는 26살로 아직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까미유와 드뷔시를 연인으로 보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들은 서로 커다란, 매우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어느날 갑자기 까미유는 드뷔시와 헤어지고 후에 왈츠의 청동상을 드뷔시에게 주고 드뷔시는 죽을때까지 왈츠 상을 소장하였다.
1894년 살롱에 까미유는 세인의 주목을 끌만한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것은 청동으로 만든 "어린소녀 샤틀렌느"(La Petite chatelaine)의 초상으로서 가냘프지만 정열이 가득 담긴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어린 소녀상으로 나이가 어린데 비해 성숙해 보이고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총명함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소녀 성주, 1895
까미유의 작품은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많은 비평가들이 신문, 잡지등에서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1898년 까미유는 로뎅과 이별을 고한 뒤, 그들이 관계는 편지를 통하여 재연되었으며 까미유는 그에게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손님을 대신 만나 줄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1897년 까미유 끌로델은 옥으로 만들어지 뜬 소문(Les Causeuses)을 샹 드 마리스의 살롱전에 출품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공은 그녀에 대한 모멸 또한 부채질 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물질적인 어려움은 없겠군'하고 말하며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수근 거렸다.
탄원, 1900
사람들은 그녀가 아틀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잊기 위해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899년 까미유는 살롱전에 대리석올 된 클로토를 출품한다. 이것은 로댕과 까미유가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까미유는 이 작품을 룩셈 부르크의 박물관에 전시하기를 원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몇년이 지나도록 그것은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행방도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로댕은 그 연유를 알기 위하여 모르하르트와 의논하였으나 사건은 점점 더 악화 되어갔다. 즉 , 까미유는 로댕이 이 작품을 훔쳐갔다고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까미유는 로댕이 자신의 영감을 도용했다고 하여 그에 대한 증오를 날로 쌓아갔다. 까미유의 로댕에 대한 강박관념적인 증오는 로댕이 죽은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1899년 까미유는 부르봉가 19번지로 거처를 변경한다. 이곳에서 그녀는 정신병원에 들어가지 전까지 약 14년간을 혼자서 살았다.
대중의 까미유에 대한 첫 주문작인 "중년(성숙)"이 자신과의 관계를 반영한 작품이란 이유청동으로 제작되는 것을 로댕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작업을 막게 하는데, 이에 까미유는 본래의 석고상을 자신의 작업실에 보관하면서 비밀리에 두번씩이나 청동작품을 만듦으로써 정부의 처사에 이를 반박을 가한다. 그 일로 인해 경제적으로나,정신적으로 지쳐버린 까미유는 모든 창작활동을 중단하고 파괴적인 칩거생활에 인생을 맡기게 된다.
왈츠, 1891~1905
파괴적인 칩거생활(1906~1913) 1906년 "상처입은 니오미드"가 제작되었는데, 이작품은 보자르 측이 자체 결정한 재료로 까미유에게 주문의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도움은 그 시기가 너무 늦어, 이미 크게 쇠약해진 까미유에게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1906년에 사랑하는 남동생 폴 끌로뎅이 결혼을 하자 마자 중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이게 충격을 입은 까미유는 이때부터 매해 여름 그녀의 창작활동을 모두 중단하고 그 해의 모든 작품들을 고의적으로 부숴 버렸다. 그녀의 작업실은 점점 황폐해져 갔다.
1906년부터 1909년 까지 폴은 중국의 텐진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살며 그곳의 시장과 경찰 국장을 지내다가 1906년 영사를 역임했다. 1909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까미유를 만났다. 폴은 전후사정을 아버지에게 편지로 알리게 되고 까미유의 광기에 의해 아버지는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게 된다.1912년 여름 로댕이 반신불수가 도었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같은해 까미유 조카의 죽음이 있었다. 폴은 9월20일 함부르크로 떠났다. 까미유는 앙김으로 이송됐다가 몽드베르그 수용소로 다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1943년 10월 19일 사망하기 까지 마지막 인생의 30년을 보냈다. 1919년 2월 25일 몽드베르그로부터 까미유는 처음으로 정신 병원에서의 편지라 불리우는 서신을 미쇼 의사에게 보냈다. 그는 그녀에게 감금 증명서를 발부한 사람이다. 그녀가 빌뇌브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가족들이 수모를 당하느니 그녀 혼자 고통 받게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가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 루이즈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파리 아파트 발코니에서, 1886 중앙에 까미유 왼쪽에 남동생과 아버지 앞에 어머니와 여동생 1915년 5월경 그의 첫번째 방문에는 <까미유는 많이 수척해지고 눈이 누런 빛을 띄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나아진 것 같다>고 적었으나, 5년 후에 <매우 여위었고 회색빛 얼굴에 치아도 몇개 빠졌다>고 적었다. 그 후 또 5년이 지난 1925년 폴은 다시 까미유를 볼 수 있었는데 그때는 치아가 모두 빠져 없어지고 건강 상태도 몹시 나빴으며 허옇게 센 머리는 늙은 여자를 연상 시킬 뿐이었다. 1927년의 방문에는 낡아 구멍이 뚫린 밀짚 모자와 누런 베 치마의 서글픈 까미유의 모습을 보았다. 1930년 6월 8일 일기에는 <그녀는 너무 늙어 버렸다. 머릿속은 온통 불안에 싸여 있고 아무런 생각없이 낮은 목소리로 내 귀에 아무 뜻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까미유는 한 수녀가 그녀를 위해서 만들었다는 '용의 눈물'이라는 회색 구슬 묵주를 나에게 주었다>고 적었다. 1939년 부터 유럽은 다시 전쟁에 휩쌓였다. 몽드베르그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환자들의 사망이 두드러졌고 이들의 안전 대책은 전무한 상태였다. 1942년 여름 이후 까미유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녀의 나이 78세였다. 그해 말,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까미유는 부종 상태였고 음식물을 삼키지 못했다. 게다가 탈수 증세도 보였다.
1929년 71세때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에서
1943년 9월 20일이 되어서야 폴 끌로델은 까미유를 방문했다. 1913년 3월 10일 빌르 에블라르 Ville-Evard 정신병원에 강제로 감금된지 30년 후인 1943년 10월 19일 오후 2시 까미유 끌로델은 몽드베르그 Montdevergues 정신병원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첫댓글 게바라님 그림이 다 어디로 갔나 눈이 침침혀서^^ 라헬,초이님 보여요?
아...내가 기본앨범에 저장을 안해서 그렇군요. 일단 기본앨범에 올려놓았습니다. 순서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네요. 까미유의 가장 첫모습, 미지막 모습은 순서가 맞습니다.
까미유ㅠㅠ
음... 안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