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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꿈
간절한 한걸음이 만든 위대한 기적
함평군 사람들은 나비를 먹고 산다. 가게 이름에 온통 나비를 붙였다. 나비마트, 나비꽃집, 나비 이발관, 나비떡집, 나비치킨…. 나비축제의 성공으로 깨끗한 곳이란 이미지를 얻었고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농산물도 잘 팔린다. 이곳에서 나는 나비쌀은 경기미와 1, 2 등을 다툰다. 일반 쌀에 비해 30%가 비싸지만 잘 팔린다. 새마을호도 정차하질 않던 곳인데 이제는 KTX가 다닌다.
하지만 10년 전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이 함평이란 곳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던 시골이었다. 속출하는 폐교처럼 마을 전체가 체념과 좌절, 무기력에 빠진 유령 마을 같았다. 하지만 오늘날 함평은 즐거움과 열정으로 신이 나는 동네다. 함평 골프 고교 출신 신지애 선수가 펄펄 날고, ‘나비축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승승장구한다. 상전벽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2008년 4월 함평에서 세계나비곤충엑스포가 열렸다. 이날 방문객은 6만 5천명으로 에버랜드보다 5천명이나 많았다. 13개의 전시행사, 11개의 체험행사에 총 관람객수는 130만, 입장료 수입만 100억 원을 넘었다. 외국인 관람객 3만 여명에 행사장 내 농특산물 매출만 5억 3천 만원에 이르렀다.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기발한 상상력과 참신한 아이디어가 만들어낸 기적이다. 언론은 “함평이 지역축제에 만족하지 않고 국내 최대의 테마파크마저 위협한다”고 기사를 썼다.
아무 것도 없는 촌 동네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든 자체가 기적이다. 1999년 첫 나비축제를 한 이후 이곳을 찾은 관람객 수는 천만 명을 넘는다. 각종 평가에서 받은 시상금 액수만 1044억 원이다. 2천억이 넘는 경제유발 효과를 낳았다. 도대체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나비의 꿈은 바로 그 성공의 과정을 그린 책이다.
아무 것도 없다는 것도 경쟁력이 될 수 있다
1998년 함평에 이석형이란 젊은 군수가 등장한다. 당시 이 동네 상태는 최악이었다.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온 동네를 감싸고 있었다. 재정자립도 10%대 초반으로 지자체 중 최하위였다. 정부 지원으로 근근이 연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때 10만 명이 넘었던 인구는 줄어 고작 4만 명뿐이었다. 뿌리깊은 체념이 온 마을에 구석구석 배어 있었다. 누구도 깨뜨리지 못할 옹벽 같았다. 별명도 3무의 고장이었다. 천연자원도 없고, 관광자원도 없고, 산업자원도 없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곳, 무엇을 새롭게 시도해볼 엄두조차 없는 곳이 이곳이었다.
새로 취임한 군수가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어차피”와 “차라리”였다. “어차피 해도 안 되니께, 젊은 군수 양반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날짜만 채우시면 되어라우.” “아이고, 어차피 우리는 잘살 수가 없당께. 차라리 함평을 나주나 무안에 합칠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그야말로 온 동네가 좌절과 체념에 깊이 빠져있었다. 참으로 힘이 빠지는 상황이었다.
공무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체 회의를 열었지만 별다른 열의를 느낄 수 없었다. 공무원들도 이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들이라 벼농사 외에는 뾰족이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뭔가 해보려던 군수에게는 모든 것이 사면초가 같은 상황이었다. 뭔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몇 차례 아이디어 회의를 소집해지만 회의는 늘 침묵으로 시작해 한숨과 하품소리로 막을 내렸다. 이를 무시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밀어 부치려 하자 곳곳에서 군수를 비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군수는 이런 소리를 듣자 오히려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한 번 해보자는 의지와 욕망이 더욱 꿈틀대기 시작했다.
말이 중요하다
참으로 말이 중요하다. 생각이 말을 바꿀 수도 있지만, 말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그는 직원들에게 부정적인 말 대신 긍정적인 말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그 동안 너무 많이 사용하던 어차피와 차라리란 말이 너무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는 직원들이 어차피란 말을 할 때마다 이렇게 덧붙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겠지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어차피, 차라리란 말 대신 도리어, 오히려란 단어로 바꾸어 말씀해 주세요.”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런 말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질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반복하고 밀어 부쳤다. 그러자 “오히려 군수님”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헌디 오히려 군수님은 오늘 안 보이시네” “누가 아니래? 오히려 군수님은 오히려 하느라 오히려 바쁘당께” 이렇게 장난 삼아 붙이기 시작한 “오히려” 란 말투가 직원들 사이에 유행어가 되었다. 근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장난처럼 아무 생각 없이 쓰기 시작한 오히려란 말이 마음을 유쾌하게 만들고 절망에서 희망을 주었다. 그 말을 하면서 사람들 표정도 밝아졌다.
방향을 잡아라
이렇게 맥이 빠진 동네를 살리기 위해서는 비전이 필요했다. 방향을 잡아야 했다. 직원들과 군민들이 힘을 합쳐 함께 달려갈 곳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대안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쌀을 살리자니 소가 울고, 소를 살리자니 쌀이 울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다른 것보다 쌀값이나 많이 받아달라고 주문을 했고 축산을 하는 사람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얘기했다. 여러 아이디어를 소집했지만 특별한 것이 없고 다들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메밀꽃 축제였다. 하천가에 메밀을 심고 메밀꽃과 메밀국수로 축제를 열자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 하는 일이라 애로사항이 많았다. 군민들 반응은 그저 그래 직원들을 독려해 메밀을 직접 심기 시작했는데 불평이 많이 나왔다. 그나마 메밀이 나올 무렵인 9월 말경 태풍 예니가 이곳을 덮쳤다. 엄청난 폭우가 함평천 둑이 무너트리고 하천변을 할퀴어버렸다. 좌절과 절망의 목소리가 나왔다. “쓸데없는 일 해서 괜히 힘이나 뺀다는” 원망도 들었다.
메밀이 실패한 후 유채꽃을 심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하지만 유채꽃은 이미 여러 곳에서 하고 있었다. 뭔가 부족했다. 그것만으로는 2%가 모자랐다.
온몸을 전율케 할 베스트 오브 베스트가 필요했다. 계속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이 군수는 유채꽃밭을 거닐며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생각에 골몰했다. 그 순간 노란 나비 대여섯 마리가 펄럭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그는 무릎을 쳤다. 나비다, 나비야… 도시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나비, 깨끗한 곳에서만 살 수 있는 나비, 함평은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환경과 청정한 자연이 남아 있다. 나비로 그걸 보여주면 되겠다.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뭔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 범위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는 군수를 하기 전 방송국에서 환경 및 생태 전문 다큐멘터리 PD를 했다. 나비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튄 것이다. 동시에 나비박사 정헌천이 떠올랐다. 눈만 보이면 나비가 보인다는 사람, 입만 열면 나비 얘기로 밤을 새는 사람, 방송국 PD 시절 친구의 소개로 만났던 개띠 동갑내기 친구다. 당시 그는 광주에서 외국어학원을 운영 중이었다. 그는 수년간 나비사업의 성공가능성을 여러 지자체에 얘기했으나 잘 먹히지 않았다. 연구실적과 나비표본을 갖고 다니면 “나비는 살아서는 이벤트, 죽어서는 전시관”이라고 외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헌천의 꿈이 이 군수를 만나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만나 함평천 유채꽃 밭 위로 나비 10만 마리를 날려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아이디어를 내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완전 다른 이야기다. 우선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다. 나비 축제를 하자고 하자 모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뭔 놈의 나비냐는 것이다. 그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직원도 반대하고 의회도 반대했다. 그는 자리를 내놓고 설득했다. “나비축제에 실패하면 군수를 그만 두겠다”고. 완전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겨우 관련자를 설득했지만 군민을 설득하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설득이 끝나고 나자 축제까지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가장 급한 것은 나비를 생산해 내는 것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나비 10만 마리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정헌천은 우선 나비를 길러낼 온실을 지었다. 온도만이라도 제대로 맞춰 나비가 부화할 조건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비 먹이를 찾으러 산과 들을 샅샅이 뒤졌고, 5명의 곤충연구소 직원들은 나비 사육장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했다. 나비 양산의 모태가 될 씨앗나비를 생포하기 위해 직원들은 제주까지 날아갔고 여러 곳을 헤매다 애월읍 근처에서 몇 마리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보통 고생이 아닌 일이다.
축제를 위한 기획안을 만드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 하는 일이라 아이디어가 잘 나오지 않았다. 컨셉을 잡는 것도 어려웠다. 관람객들이 축제에서 원하는 것은 뭘까? 애들의 축제로 할 것이냐 어른의 축제로 할 것이냐, 경쟁자는 누군가, 어떤 이벤트와 전시장을 만들 것이냐, 운영을 직접 할 것이냐 외주를 줄 것이냐… 고민거리는 차고도 넘쳤다.
결과는 이랬다. 우리 경쟁자는 다른 지자체 축제가 아니라 에버랜드 같은 놀이동산이다. 돈을 받되 놀이 동산과 비교해도 시간과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은 축제를 만들자. 진행은 직접 하자. 그래야 노하우가 축적된다. 타깃은 어린이뿐 아니라 어린아이를 포함한 가족으로 하자. 이를 위해 수시로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처음에는 긴장을 해서 아이디어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분위기가 잡히자 회의도 축제처럼 진행할 수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아이디어 노트만 17권에 이른다. 엄청난 노하우가 쌓였다.
위기를 기회로
축제가 두 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산불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볼 것이 별로 없는데 불길한 일이 생겨 온 동네가 실망을 하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 타 버린 산 전체에 커다란 나비를 한 마리 그려 넣자는 제안을 한다. 그날부터 모든 주민과 공무원이 하나가 되어 나비산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비 산으로 기네스 기록에 버금갈 정도였다.
불행의 징조처럼 시커멓게 타버린 민둥산이 하루 아침에 꿈의 상징으로 변신한 것이다. 전화위복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축제를 하면 사람들이 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홍보가 필요했다. 하지만 돈이 거의 없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홍보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단결의 기회를 제공했다. 모든 직원과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늘어졌다. 지연, 혈연, 학연을 모두 동원했다. 축제 관련 전단지를 서로 가져가겠다고 난리가 났다. 그 과정에서 한 마음이 되고 다들 신바람이 났다. 주민들이 나비축제 초대카드를 만들어 주변 사람에게 보내는 바람에 우체국은 업무마비가 되기도 했다.
나비, 날아오르다
이 군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행사에 과연 사람들이 올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행사 당일 엄청나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무려 30만 명이 넘어섰다. 마을이 만들어진 이후 최대 인파다. 함평으로 향하는 길은 꽉 막혔고, 주차장은 차고 넘쳤다. 주유소에는 기름이 떨어졌고 수백 곳의 식당에는 쌀, 김치, 반찬까지 모두 떨어질 지경이었다. 나비 날리기 행사는 환호성 그 자체였다. 투명 플라스틱 통 안에서 2만 마리의 나비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순간 와아하는 탄성이 터졌다. 나비 생태관도 인기 폭발이었다. 전통 소싸움과 전통 춤 판굿이 신명을 돋구었다. 축제는 대 성공이었다. 하지만 처음이라 미숙한 점이 많았다. 화장실과 주차장 등에서 불편이 있었고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이 되었다.
성공도 습관이다
나비축제는 봄에만 붐빈다. 여름에는 오는 사람들이 없다. 이를 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별로 할게 없었다. 이 동네에는 후진 돌머리 해수욕장만이 있을 뿐이었다. 근데 썰물 때는 뻘만 잔뜩 있어 해수욕장으로서는 경쟁력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이를 갯벌 체험장으로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밀물에는 해수욕장, 썰물에는 갯벌체험장이다. 없는 바닷물 타령은 그만 하고, 있는 개벌에 주목하자는 역발상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여름 한 달 2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다녀갔다. 갯벌은 그 자체가 관광자원이다. 싱싱한 뱀장어, 게, 조개, 바지락, 망둑어, 짱뚱어, 고둥…여름에는 돌머리 갯벌 체험장 앞 진입도로로는 평일에도 밀려드는 차로 몸살을 앓았다.
학교 문제도 그랬다. 원래는 농업학교를 실업고교로 바꾸었지만 여전히 원예, 축산, 농업 등을 가르쳤다. 한때 잘 나가던 학교였지만 학생이 오지 않으면서 쇠락했고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 자녀 교육이 문제가 되니까 그나마 사람들은 도회지로 빠져나갔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이들은 교육 문제도 역발상으로 풀었다. 학생 수가 적은 것을 마을 탓으로 하지 말고 전국으로 눈을 돌리자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골프학교다. 골프 시장이 커지면서 관련 일도 늘 것이고 이를 전문적으로 할 학생을 키우자는 것이다. 학교를 만들자 전국에서 입학문의가 밀려들었다. 학생 수를 채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적합한 학생들을 골라서 받을 수 있었고 그 중 한 명이 LPGA에 우뚝 선 신지애다.
리더십이 관건이다
역시 리더십이다. 리더십이 조직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한 때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살던 필리핀이 가장 어렵게 된 것은 지도자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고 어렵고 별 볼일 없던 동네를 잘 사는 싱가포르로 만든 것도 리콴유란 인물 때문이다. 함평이란 촌 동네를 활기 넘치는 마을로 만든 것도 이석형이란 군수 리더십 때문이다.
때로는 절박함이 약이 된다. 함평이 그런대로 먹고 살만했다면 나비축제 같은 아이디어는 절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동네가 절단 날 수도 있다는 절박함이 이런 기적을 만들어 냈다. 때로는 아무 것도 없다, 밑바닥을 쳤다는 것이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다.
비전의 중요성도 다시 느꼈다.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명확한 방향이 필요하다. 이 방향으로 사람을 모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에 나비얘기를 했을 때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리고 결국 해냈다. 지도자는 인기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욕을 먹더라도 설득하고 그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말의 중요성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오히려’ 군수란 별명처럼 말이 생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동네 분위기를 바꾼다. 열린 문화도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도자가 중요하긴 하지만 구성원들의 동의와 열정을 끌어내지 못하면 실패한다. 그는 열린 문화를 만들어 누구나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고 얘기를 할 수 있게끔 했다. 거기서 응집력이 나오고 집중력이 나온 것이다. 이 책은 한국판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같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모든 조직이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 있는 조직이 되길 기대해본다.
한근태 소장(한스컨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