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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이 서로를 밀치며 끌어안는 시
어제의 기억 속에서 내일의 나를 보았다
김수영문학상, 동국문학상, 불교문예작품상 수상 시인 이윤학의 아홉번째 시집 『짙은 백야』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시인은 3~5년 주기로 성실하게 시집을 출간해왔고, 그때마다 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사소한 존재들에 관심을 쏟고 생의 결핍을 성찰적 시선 안으로 끌어들이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윤학 특유의 방식은, 5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깊이를 더한다.
태어나 살아가고 언젠가 묻히게 될 사적인 공간, 그곳은 ‘농촌’이자 제이, 제삼의 고향이며 과거의 기억에서 미래의 모습을 읽어내고 현재의 ‘늙은 시절’을 기록하게 하는 곳이다. ‘십대의 몸’ ‘칠십의 마음’이었다 어느덧 ‘칠십의 몸’ ‘십대의 마음’으로 살게 된 시적 자아가 기록하는 ‘늙은 시절’은 이 시집에서 영원한 삶의 무덤인 동시에 생명과 감각의 터전이 된다. 언뜻 처연해 보이는 사적인 역사를 투영하여 바라본 곁의 존재들은 그러나 죽음 근처에서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생명의 아이러니를 온몸으로 나타낸다. 시인은 동물과 식물, 모든 생명들의 원천이자 무덤인 자연에서 개별적 삶들의 운명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해 질 녘 취한 상태로 제 태어난 곳, 아니 제 삶을 묻을 곳의 풍경을 아프게 응시하고 그것을 시의 어떤 기호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 이것은 『짙은 백야』를 관통하는 시의 꼭짓점이자 컴퍼스에 해당한다. 이 시집에서 온갖 풍경과 생애로 구성, 조직된 ‘늙은 시절’은 영원한 삶의 무덤tomb이자 생명과 감각의 터전인 삶의 자궁womb이기에 어떤 ‘젊은 시절’들보다도 우월한 사랑의 기술, 바꿔 말해 고통과 결핍의 오늘을 순정과 충만의 내일로 바꿀 줄 아는 지혜를 본질로 한다. 그래서 시인은 ‘늙은 시절’에의 기억과 그리움, 드디어는 귀환의 순간을 적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최현식(문학평론가)
자신이 태어난 곳, 살아가는 곳, 언젠가 묻힐 곳을 응시하고 시로 만드는 일
삶엔 마치 “짙은 백야”처럼 두터운 안개가 끼어 있다.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지만 어디로 가든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길을 우리는 걷는다. 이윤학의 시에서 시적 자아를 포함한 존재들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사월의 눈」) 모를 삶이라는 길을 “필사적으로 걸어”왔다.
“가난을 즐기는 게으름뱅이가 되려다 실패한 수천만번째 사례”(「공터의 벽시계」)인 “사내”에게는 이제 사랑조차 서로에 대한 “확대 해석”(「하리 선착장」)이고 “어떤 사랑도 실패한다는(「누옥의 방 한 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기에 그저 “드러누워 병나발을”(「사일로가 보이는 식탁」) 분다. 또한 “남편이 숨지면서 던져준 태엽/감는 손목시계를 몸뻬 주머니에서 꺼내 귀에 대고 산등성이”를 걷는 “혼자 남은 노인”(「서대길」)이나 “간신히 일회용 숟갈을 들어” 올려 “식은 팥죽을 떠먹는 여인”(「드르니항」)처럼, 이윤학이 응시하는 건 모두 “또 하루를 산 것이 대견해 눈물이”(「서대길」) 날 법한 존재들이다. 인간뿐 아니라 고양이, 개, 닭, 염소, 나무 같은 동식물이나 무생물도 마찬가지다. 죽은 개와 고양이와 염소를 오동나무 밑에 묻어준다. 철제의자는 어느덧 “녹이 쪼아 먹는 중”(「드르니항」)이다.
그러나 이 쇠함에 지극한 슬픔이나 절망은 없다. 소박하고 사소하고 어쩌면 늙거나 낡고 약한 존재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지역 이름이나 꽃이름들,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제목들로 꾸려진 이 시집 속 3부 62편의 시들은 어머니들과 고양이, 개, 닭, 물고기, 나무…… 모든 생명들의 “무덤”에 다녀오고 있는 중이다. “진정한 애도”와 “따스한 기억”으로 죽음은 단지 죽음에 머물지 않게 되기에, “죽은 자의 힘을 빌려 살지 않겠다”는 시적 자아의 다짐은 마침내 유효해진다.
이곳에 삶, 도처에 죽음―나이든 몸, 어린 눈으로 되짚는 개인의 역사
‘늙은 시절’이란 삶보다 죽음이, 생성보다 소멸이 가까운 시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윤학은 이 시집에서 삶과 죽음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삶 속에 죽음이, 죽음 속에 삶이 섞여 있다고 이야기하려는 듯하다. 죽음은 적나라하지만 추하지 않고, 삶 역시 미화되지 않는다. “머리끄덩이를 잡고/들깨를 턴 포장에서 뒹굴”다 “서로의 어깨를 잡고 흐느껴”(「들깨를 터는 저녁」)우는 동네 아낙들의 한바탕 싸움과, “기진맥진해설라무네 엎드려 울 힘도 없”었지만 우윳병을 물리자 “네 발로 버팅겨 서서” “후들거”리며, “간신히 꼬리에 묻은 물똥을 흔들면서” “발걸음을 옮”기는 새끼염소에게서 나타나는 삶에 대한 의지, 근원적 에너지조차 푸르고 역동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파리들도 그중 아픈 녀석들에게 꼬이더라구” (「가뭄」) 라는 발언처럼 어쩌면 그 염소는 다른 시에서 까마귀에게 눈과 내장을 파먹힌 새끼 염소 가운데 한 마리였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이 완벽하게 분리된 어떤 단계가 아니라 우리 바로 곁, 도처에 함께 놓여 있다는 통찰이며,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젊음’이 아닌 두 눈으로 목도한 ‘늙은 시절’을 담담한 어조로 따스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푹푹 찌던 지난 세월이” “몰려왔다”. “많은 징검다리를 밟고 여기까지 왔다”(‘뒤표지 글’). 갖은 풍경과 생애로 구성되고 조직된 시로써 마침내 마주하게 된 것은 무엇일까. 벼름박(벽)에 걸어둔 간드레(광산의 카바이드등)와, 폐광된 갱도를 따라간 바닷물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묻힐 그곳에서 ‘나’는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시인의 말’). “명감도 보고 개암도 보고 정금도 보고 나를 만나지 못한 나도 보았다”. 그렇게 이윤학의 시는 현실의 시간을 부정하되 공허에 빠지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깊은 자아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집 속으로
베란다 창문을 반나절 열어놓고 외출했는데 접어놓은 카펫 움푹한 자리에 새끼를 들여놓은 꿩이 종적을 감추었다 털이 나기 시작한 새끼 꿩 세 마리는 쉬지 않고 울었다 밥풀을 으깨주고 조를 부셔주고 생수를 따라주었는데 거들떠보지 않았다 밤이 되어 털옷을 깔아주고 전기난로를 틀어주었는데 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감기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울고 또 울었다 연초록 떡갈잎이 돋아난 야산으로 통하게 베란다 창문을 열어놓았는데 밤사이 어미는 돌아오지 않았다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 졸기를 반복하는 새끼 꿩 세 마리가 똥오줌을 깔고 앉아 쉰내를 풍기며 울었다 약한 불에 올려놓은 찜통의 사골이 졸아드는 반지하 어미를 찾는 아이들 울음이 들렸다 지독한 노린내를 풍기는 연기가 주방후드에서 쏟아져 나와 담쟁이를 감고 올라갔다
―「늦봄」 전문
화단을 지키는 고양이 밥그릇에다
성견 사료 한 알 한 알 떨어뜨려줬더니
골이 났는지 눈길도 주지 않더라
마름모꼴 방 끝의 티브이를 켰더니
화면 중심으로 불 꺼진 성냥골이
쏜살같이 떨어지더라
백합이 품은 짙은 백야를
필사적으로 걸어온 자
물소리를 틀어놓고
자갈을 뒤집는 잠이 들었다
한 번은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최후의 툰드라를 틀어놓고
잠이 들어버린 자
바가지에 틀니를 벗어놓고
옛날 맛 그대로인 김치 씹은 물을 오물거렸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
딱따구리조각마법사
세 시 반의 맨발을 위해
오동나무 상판에 가로의 숨구멍을 뚫었다
카페의 목조계단은 비좁았고, 반들거렸다
음울한 클래식이 지름길로 들어오고 나갔다
그만이 무덤에 갔다 돌아왔다
짙은 백야를 걸었다
천년만년 본드를 흡입하고
봅슬레이를 타고 내려갔다
죽은 자의 힘을 빌려 살지 않겠다
냉골 바닥 거대한 십자가 앞에 팽개쳐져
떨거지가 되지 않겠다
―「짙은 백야」 전문
바깥마루에 털퍼덕 앉아서는 물가에 선 미루나무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미루나무는 수심을 닮아서 하늘을 자신의 키 높이로 끌어내려 황혼의 취기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올 사람 아무도 없는데 나는 어느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오지 않았기에 나는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쯤 억새가 피기 시작했을까요
내 늙은 시절이 떠오릅니다 내 애인은 나와는 육십 살 정도 차이가 났습니다 나는 슬픔을 안고 살았습니다 돌팔이 의사들은 거의가 단명했습니다 나를 업고 사기전골 돌팔이 의사에게 뛰어가던 어머니 나는 노루의 등에라도 탄 듯 뜨겁게 안겨오는 피의 온기에 맘껏 젖어 시들었다 피는 꽃이곤 했습니다 내 몸은 십대 초반이었고 내 마음은 칠십이 조금 넘었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십대 초반이고 내 몸은 칠십이 넘었습니다 나는 누구를 업고 뛴다는 걸 상상조차 못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물가에 선 미루나무는 그만 한 쇠꼬챙이로 내 쓰라린 슬픔의 한나절을 후비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돌팔이 의사들은 단명했고 불에 구워지는 미루나무 쇠꼬챙이 물가에 우뚝 서 있을 것입니다 황혼녘 나는 알싸하게 취해 뒤로 짚은 힘없는 두 팔에 몸을 바치고 저 세상인 듯 물가 미루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간혹 동전을 두 손안에 모으고 흔드는 것처럼 경운기가 지나가고 번쩍거리는 차들이 아스팔트 바닥에 바퀴로 해괴한 비명을 연주할 것입니다 돈사(豚舍) 지붕 앞으로 뻗어 나온 밤나무 가지에선 밤송이들이 입안에 세 알 두 알 한 알씩 알밤을 물고 있을 겁니다 나는 그런 말을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추석」 전문
뒤표지 글(시인의 글)
성묘를 하러 가다 담배건조장을 지났다 푹푹 찌던 지난 세월이 건조장의 화기와 함께 몰려왔다 많은 징검다리를 밟고 여기까지 왔다 18대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까지 돌고 천수만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도 저런 빛들이 모여 살던 때가 있었겠지 금광에 다닌 아버지가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본 어린 내 눈에는…… 진폐증을 앓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명감도 보고 개암도 보고 정금도 보고 나를 만나지 못한 나도 보았다 필터에서 불똥이 똑 떨어질 때까지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도 보았다
시인의 말
벼름박에 걸어둔 아버지의
간드레와 마주할 때가 있다
열네 살의 아버지가
금광에 다닐 때부터 쓰던 물건이다
폐광된 금광의 갱도를 따라
내려가 바닷물을 만났다
금광에 갈 때
금광에서 돌아와
내 눈을 들여다보는
아버지를 만났다
2016년 7월
서대마을에서
이윤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