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1905년 스위스 베른의 젊은 특허국 직원이었던 26세의 무명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새로운 관점, 즉 상대성이론을 제창해서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모습을 출현시켰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19세기를 통해서 부상되었던 고전 역학과 고전 전자기학 사이에서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19세기 후반기에 성장한 전자기학 분야에서는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전자기 방정식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현재 우리는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 현상을 설명할 때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의 형태를 바꾸지 않고 적용하고 있으나, 19세기에는 맥스웰 방정식은 다양한 전자기 방정식 가운데 단지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전 전자기 법칙들은 고전 역학이 바탕으로 하고 있던 갈릴레오 변환에 대해서 불변이 아니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즉 당시의 전자기 법칙들은 서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관찰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서로 불변으로 유지되지 않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19세기 전자기학과 상대성 이론의 맹아
하지만 19세기를 통해서 이것을 문제로 느끼고 새로운 해결점을 제시하려고 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19세기에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우주에 꽉 차 있으며 압축이 되지 않는 완전 탄성체인 가상의 물질 에테르를 가정하여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에테르는 빛이 파동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던 19세기 과학자들에게는 꼭 필요한 가상의 물질이었다. 왜냐하면 지구와 태양 사이와 같이 매질이 존재하지 않는 진공 중에서는 파동인 빛이 전파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맥스웰 이후에 활동한 과학자들은 이 에테르의 성질에 대해서 저마다의 다양한 논의를 전개했고, 이에 따라 전자기학 분야에서는 수많은 전자론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1851년 프랑스의 과학자 피조(Armand Hippolyte Fizeau)는 움직이는 유체 속을 지나는 빛의 속도가 고전 역학적인 속도 합성 공식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관찰한 바가 있었다. 이것 역시 갈릴레오 변환에 대해서 불변으로 유지되지 않는 예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1887년 미국의 마이컬슨(Albert Abraham Michelson)과 몰리(Edward Morley)는 자신들이 고안했던 간섭계를 이용해서 지구의 운동과 에테르와의 상호작용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지구 운동이 에테르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할 어떤 증거도 얻지 못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이 문제를 고전 전자기학의 테두리 내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인 로렌츠(Hendrik Antoon Lorentz)는 마이컬슨-몰리의 실험적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1892년 지구의 운동 방향으로 물체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수축한다는 하나의 미봉가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19세기 중반 이후 과학자들은 강체역학이나 유체역학에서 사용하는 형태의 유비의 일종으로서 고전역학적인 기계적 모형을 사용하여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고전 전자기 법칙을 정립시킨 맥스웰은 전자기장을 유체의 흐름을 나타내는 편미분 방정식에 의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전자기 현상을 고전역학적 모형에 의해 설명하려던 견해는 맥스웰 이후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톰슨(J.J. Thomson) 등에 의해서도 공유되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1897년 톰슨이 음극선의 하전량과 질량 사이의 비례 관계를 밝힌 실험을 계기로 전자기 현상을 역학적인 원리에 의해서 설명하려는 믿음은 서서히 약화되었다. 즉 카우프만(Walter Kaufmann)과 레나르트(Philipp Lenard) 등과 같은 실험 물리학자들은 톰슨의 실험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전자의 속도가 빛의 속도의 1/3에서 1/30 정도로 빠르게 달릴 때 전자의 외견상의 질량이 증가하는 현상을 관찰하게 되었다. 이후 고전역학적 개념이었던 질량이 전자기적인 현상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는 가능성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물리학을 뉴턴의 역학이 아니라 전자기 현상으로 통일하려는 전자기적 세계관이 서서히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0년 프랑스의 푸앵카레(Henri Poincar)가 전자기 방정식이 뉴턴의 운동 법칙인 작용-반작용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고, 1901년에는 빌헬름 빈이 역학을 전자기적인 토대 위에서 재 규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면서 전자기적 세계관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더욱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푸앵카레는 포인팅 벡터에 의해서 표현되는 '전자기적 운동량'과 '전자기적 질량'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는데, 괴팅겐의 사강사였던 막스 아브라함(Max Abraham)은 이런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서 전자가 강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고전전자기학의 체계 내에서 속도의 증가에 따르는 전자의 질량의 변화를 수학적으로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유도한 식은 후일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유도한 식과는 2차항의 10분의 1정도만 차이가 나는 것으로서 1906년에 행한 카우프만의 실험에서는 아인슈타인의 결과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계산 결과가 실험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다.
한편 수학을 자연과학과 공학에 응용하는 데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펠릭스 클라인(Felix Klein), 다비드 힐베르트(David Hilbert),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등을 비롯한 괴팅겐의 수학자들도 로렌츠가 발전시켰던 새로운 전자론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물리학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수학을 많이 사용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물리학의 수학화는 더이상 물리학자들에게만 맡겨서는 안되며, 수학자들이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로렌츠가 1903년 12월에 탈고한 원고로서, 클라인이 편집인으로 활동하던 수리과학 백과사전에 출판하기 위해서 집필했던 로렌츠의 전자론에 관한 글을 근간으로 해서 자신들의 연구를 시작했다. 그들이 행한 연구의 주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변분법을 비롯한 수학적 방법을 동원해서 전자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수학자들이 주도한 괴팅겐의 이 세미나에는 수학자들뿐만이 괴팅겐의 천문대장이었던 카를 슈바르츠실트(Karl Schwarzschild)와 지구물리학 교수였던 에밀 비헤르트(Emil Wiechert), 그리고 클라인의 제자로서 아헨 공대에서 재직하고 있던 아르놀트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도 참가했었다. 이 과정에서 좀머펠트는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바로 직전인 1905년 초에 빛보다 빠른 전자의 운동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으며, 민코프스키도 괴팅겐 학자들과의 협동연구 속에서 후일 나타날 4차원 시공 세계에 대한 수학적 논의를 발전시키게 된다. 민코프스키의 수학적인 4차원 시공 세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타난 배경과는 상당히 달랐던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속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성장 과정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의 울름에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 이미 아버지가 보여준 나침반에 매료되었으며, 이때의 경험이 후일 자신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다. 12살 때에 이르러 아인슈타인은 유클리드의 평면 기하학에 관한 책을 접했었는데, 이때 유클리드 기하학의 명확성에 아주 깊고도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12세에서 16세까지 그는 독학으로 미적분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뮌헨의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 권위주의적인 독일 김나지움 교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그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뮌헨을 떠나 아버지가 사업을 하던 이탈리아로 갔다. 그러나 가족의 전기회사 사업이 실패하고, 또한 가족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전기공학자가 되기 위해 다시 공부를 계속하려고 마음먹었다. 독일 김나지움의 졸업장이 없었던 그로서는 독일의 대학이나 고등기술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의 학교를 선택해야 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의 취리히로 가서 취리히 연방공과대학(ETH)에 진학하기 위해서 입학시험을 쳤다. 이 시험에서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물리학은 아주 잘 보았으나 현대어, 동물학, 식물학 등 다른 과목에서는 떨어졌다. 그 뒤 교수의 권유로 그는 스위스의 간톤학교를 1년간 다녔다.
스위스 아라우의 아르가우 간톤학교에서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김나지움과는 아주 다른 인상을 받았다. 아르가우 간톤학교는 19세기말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해서 고전어 교육보다는 수학과 실용적 학문을 강조하면서 일어났던 개혁 김나지움 운동의 영향을 받은 학교였다. 아인슈타인은 아라우의 이 아르가우 간톤학교에서 뮌헨의 김나지움과는 전혀 딴판인 상당히 민주적인 느낌을 받았고,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아인슈타인 자신은 매우 만족스러운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아라우에서의 교육은 아인슈타인의 사고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비교적 자유로운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스위스 칸톤 학교 시절인 16세 때부터 이미 물체가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 골몰했다고 한다. 이것이 상대성이론과 관련된 그의 최초의 사고 실험이었으며, 그 뒤 10여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고민을 한 끝에 마침내 1905년 자신의 상대성이론을 얻어내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상대성이론은 스위스 아라우에서의 자유로운 교육 환경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특수 상대성이론의 기원
아인슈타인의 집안은 발전기나 모터를 만드는 전기공학자의 집안이었고, 아인슈타인 자신도 과학자라기보다는 전기공학자가 되려고 취리히의 연방 공과대학에 들어간 것이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비롯한 위대한 과학 사상을 발전시키는 활동의 이면에서 그의 생애 동안에 냉장고에 관한 것을 비롯해서 몇몇 발명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연방 공과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아돌프 후르비츠(Adolf Hurwitz)와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같은 유명한 수학자들에게 수학을 배웠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직접적인 실험에 더욱 매료되어 대부분의 시간을 물리 실험실에서 보냈으며, 남는 시간은 집에서 키르히호프(Gustav Robert Kirchhoff), 헬름홀츠(Hermann Helmholtz), 헤르츠 등의 책을 읽으며 보냈다. 특히 그는 1894년 아우그스트 푀플(August Fppl)이 집필한 『맥스웰의 전기론 개론』(Einfhrung in die Maxwellsche Theorie der Elektrizitt)을 통해서 맥스웰의 전자기학에 대해서 배웠다. 이외에도 그는 마흐(Ernst Mach)의 역학에 관한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로렌츠와 볼츠만의 논문들도 공부했다. 아인슈타인은 유명한 수학자였던 민코프스키에게 수학을 배울 기회가 있었지만, 아인슈타인 자신은 수학 수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민코프스키의 평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은 민코프스키의 수학 수업시간에 아주 게으른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미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서 수학의 역할을 상당히 낮게 평가했으며, 수학적 형식주의에 대해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이런 태도는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1887년 볼데마르 포크트(Woldemar Voigt)는 비압축 탄성 매질 속에서의 도플러 효과에 관한 논문에서 후일 로렌츠 변환식으로 일컬어지는 변환식을 이미 언급했었는데, 포크트에게 배운 바 있는 민코프스키가 이 사실을 1908년의 4차원 시공 세계에 관한 역사적인 강연에서 언급하면서 상대성이론 출현 이후에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이와는 별도로 마이컬슨-몰리 실험을 설명하기 위해서 1892년부터 임시방편의 수축가설을 도입했던 네덜란드의 로렌츠는 1904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보다 일반적인 형태로 등장하게 되는 소위 로렌츠 변환식을 유도했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이 로렌츠의 이 작업을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확실한 점이 많다. 우선 아인슈타인의 논문에서는 로렌츠의 이 논문이 인용되고 있지도 않았고, 또한 아인슈타인은 로렌츠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변환식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 이전에 마이컬슨-몰리 실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그의 상대성이론의 형성에는 어떤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도 아인슈타인 자신의 진술이 여러 곳에서 엇갈리고 있기 때문에 과학사적으로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던 문제였다. 우선 아인슈타인은 1949년 출판된 그의 자서전의 그 어디에서도 마이컬슨-몰리 실험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1905년 전후에 나타난 논문에서도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이 시기를 전후해서 쓰여진 편지 속에서도 그 실험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1931년 미국 칼텍에서 열린 만찬에서 아인슈타인은 마이컬슨의 작업이 자신의 상대성이론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으며, 1922년 12월 14일 일본 교토에서 행한 '나는 어떻게 상대성이론을 창안했는가' 라는 강연에서 그는 학창 시절에 이미 마이컬슨의 실험을 알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아인슈타인은 1905년 이전에 마이컬슨의 실험에 대해서 그 존재 자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에테르와 지구와의 상대 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마이컬슨의 실험 자체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창안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이컬슨의 실험보다도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창안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준 실험적 증거는 어떤 것이었을까? 1899년 아인슈타인이 그의 첫 부인이었던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피조의 실험이 마이컬슨의 실험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51년 피조는 움직이는 액체 속을 지나는 빛의 속도가 액체의 굴절률의 역제곱에 비례하는 양만큼 고전역학적인 속도의 합성 공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이 현상은 1907년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에 의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입각한 새로운 속도합성 공식을 바탕으로 해서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설명되었는데,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이것은 고전역학적인 방식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아인슈타인은 이 피조의 실험과 1728년 제임스 브래들리(James Bradley)가 발견한 별의 광행차에 대한 관측만으로도 빛과 물체의 운동과 관련해서 현상을 고전물리학 체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새로운 운동학 체계를 모색했던 것이었다.
특수 상대성이론의 형성과 그 수용과정
전기공업 회사 집안에서 자랐으며, 전기공학자로서 특허국에서 일하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도체의 전자기 현상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피조의 실험과 별의 광행차 관측에서 나타나듯이 움직이는 물체를 다루는 전자기학에서는 뉴턴의 역학과 전자기 법칙이 서로 모순되는 측면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아인슈타인은 자석과 움직이는 도전체 사이의 상대 운동으로 발생하는 전기 유도에서 나타나는 비대칭성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느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이 비대칭성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자석이 움직이고 도체가 정지해 있으면 자석 주위에 특정한 에너지와 함께 전기장이 발생한다. 하지만 자석이 정지하고 도체가 움직이면 자석 주위에는 상응하는 에너지가 발생하지 않는 채로 기전력만이 발생한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비대칭성 문제는 지구와 에테르와의 상호작용을 발견할 수 없었던 실험과 마찬가지로 역학과 전자기학 내에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의 전자기학에 내재하는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1905년 6월 30일에 제출한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관해서'(Zur Elektrodynamik bewegter Krper)라는 논문에서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관측자들에게 고전 전자기 법칙이 불변으로 유지되는 새로운 시공 개념을 제시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채택하면서 고전 전자기학이 가정하고 있던 가상적인 물질이었던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했다. 빛이 파동일 경우 꼭 필요했던 매질인 에테르를 부정한 아인슈타인은 이미 그해 3월 17일에 완성한 논문에서 진공 중에서도 빛이 전달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빛의 입자성을 나타내는 광양자 가설도 새로이 제안했었다. 후일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빛에 관한 파동-입자 이중성 개념으로 일반화되었고, 그가 제안한 빛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현대 양자론의 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학계에서 널리 퍼지게 만드는 데에는 독일 물리학계의 거물인 막스 플랑크(Max Planck)의 역할이 컸다. 플랑크는 당시 무명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했던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의 편집인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베를린 대학에서 여러 유능한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었던 독일 과학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열열히 옹호하며, 학생들로 하여금 이 주제를 선택하도록 독려했는데, 1906년부터 1914년까지 플랑크 밑에서 나온 학위 논문 가운데 무려 3분의 1은 상대론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1906년 발터 카우프만의 실험이 로렌츠-아인슈타인의 이론식이 아니라 자신의 제자인 아브라함의 식에 더욱 가깝게 나왔을 때에도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옹호했다. 무엇보다도 플랑크에게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물리학에서의 보편성과 단순성을 뒤받침해준다는 의미에서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이론이었다. 막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이런 공개적인 지지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자신도 19067년 사이에 최소 작용의 원리에 바탕을 둔 상대론적 역학을 발전시키는 등 초창기의 상대성이론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1908년 괴팅겐의 수학자였던 민코프스키는 상대성이론에 수학의 불변 이론과 함께 4차원 시공 좌표를 도입했다. 물론 민코프스키의 상대론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되는 4차원 좌표를 사용한 사람이 있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였던 푸앵카레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하지만 그는 4차원의 비유크리트 기하학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상대주의적인 지식관에 따라 기하학에 대한 규약주의적인 입장만을 견지했었다. 반면에 민코프스키의 상대론에서는 4차원 세계가 절대적이고 실재적인 의미를 지니며, 아인슈타인 역시 4차원 시공 세계의 절대성을 받아들였다. 후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특히 비전문가들에 의해서 왜곡되어 아인슈타인이 세계를 상대화했다고 와전되기도 했다. 더구나 철학자들조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푸앵카레나 에른스트 마흐의 상대주의적 철학관과 같은 주장으로 이해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마치 지식의 상대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철학적·과학적 입장을 전적으로 잘못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단순히 전자의 운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통상의 물체에도 적용가능한 일반적인 논의라는 것은 상대론적인 강체의 존재에 관한 논쟁을 통해 확립되었다. 1909년 괴팅겐의 사강사 막스 보른은 소위 로렌츠 수축가설을 만족하는 '상대론적 강체 개념'을 제기했다. 보른은 이 개념을 이용해서 전자를 고전역학적인 강체로 보고 고전전자기학에 입각한 전자론을 전개했던 1902년의 아브라함의 이론을 상대론적으로 재해석하려고 했었다. 보른의 이런 시도에 대해서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는 보른의 상대론적 강체 정의는 물체가 회전을 할 경우 모순에 봉착한다고 지적하면서 비판을 하고 나섰다. 즉, 원통의 물체가 회전을 할 경우 회전 방향으로 로렌츠 수축이 일어나지만, 강체 자체의 원둘레는 변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을 당시 과학자들은 에렌페스트 역설이라고 불렀다. 그 뒤 이 논쟁에는 헤어글로츠(Gustav Herglotz), 프리츠 뇌터(Fritz Noether), 발데마르 폰 이그나토프스키(Waldemar von Ignatowski), 막스 플랑크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상대성 이론이 단순히 전자의 운동에만 적용되는 이론이 아니라 통상의 물체에도 적용가능한 일반적인 운동학 논의라는 것이 많은 과학자들에게 인식되게 된다. 1911년 플랑크의 제자인 막스 폰 라우에가 상대론에 의하면 강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더 나아가 헤어글로츠가 유체역학적인 방정식을 동원해서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서 에렌페스트 역설과 관련된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결국 1911년 막스 폰 라우에가 집필한 최초의 상대성이론에 관한 교과서가 출판되는 것을 전후해서 특수 상대성이론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분명한 형태로 이해되면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출처: 우주와생명과창조주>
아인슈타인 일화
1). 가족들은 이 아이가 말없이 혼자 놀기만 해 걱정이 많았다.
그를 가르친 교사들의 평가는 한결같이 나빴다.
학교에서는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고 계산하는 시간이 길었으며 그나마 틀린 답을 내놓기 일쑤였다.
라틴어는 '양', 그리스어는 '가'를 받았고 결국 학교를 중퇴할 때 그리스어 교사는 다음과 같이 퇴학 권고 사유를 밝혔다.
'너의 존재가 내 학급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한다.'
이 소년의 이름은 아인슈타인이었다.
2). 한 소녀가 산수숙제를 하다가 그 마을에 머리 좋은 영감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다.
그 영감은 친절하고 너무나 잘 가르쳐줬다.
그 아이는 엄마에게 그 일을 말했고, 그 아이의 엄마는 그 영감이 아인슈타인이란 걸 알고 뒤늦게 찾아가 사과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의 대답은
"내가 아이에게서 배운 것이 더 많습니다"
3). S = X + Y + Z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그 많은 학문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는 손끝에 물방울 하나를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바다에 비하자면 나의 학문은 이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
제자들이 다시 물었다.
"그럼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학문에 성공하셨습니까?"
그는 종이에 'S = X + Y + Z' 라고 쓰면서 설명했다.
S는 성공, X는 말을 많이 하지 말 것, Y는 생활을 즐길 것, Z는 한가한 시간을 가지라는 뜻이었다.
4). 한 남자가 예쁜 여자와 한 시간 동안 나란히 앉아 있으면 그 한 시간은 1분으로 생각되겠죠.
그러나 그가 뜨거운 난로 옆에 1분 동안 앉아있으면 그 1분은 한 시간이나 되게 느껴질 거요.
그게 바로 상대성이론이오!
5). 아인슈타인의 어머니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1879년 다뉴브 강기슭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4세까지도 말을 제대로 못하는 늦둥이였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도 심부름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할 정도로 둔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어려서부터 질문하는 데는 명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것을 대견하게 생각하여 그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피아노를 잘 쳤습니다. 아들을 위해서 피아노를 쳐주었을 때 알베르트는 황홀한 듯이 피아노 옆에 붙어 서서 따뜻한 어머니의 미소를 지켜보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특히 모차르트와 브람스를 즐겨 연주해 주었고, 아버지는 괴테, 실러, 하이네의 작품을 즐겨 낭독해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아인슈타인은 어려서부터 음악과 시 낭독을 즐기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초등학교 담임 선생이 생활기록부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무엇을 할지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함”이라고 기록할 정도로 학교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알베르트는 학교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학과의 내용과 의미는 설명해 주지 않고 무턱대고 외우라고 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어머니는 공부를 못한다고 학교에서 매를 맞아 퉁퉁 부은 아들의 붉은 손바닥에 입을 맞추면서, “사랑하는 아들아, 걱정하지 마라. 너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좋은 소질을 가지고 있다. 나는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될 줄 믿는다.”고 말할 정도로 현명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성격도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어서 다른 학생들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학교에 보내지 말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 부모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인 것이 그 아이의 특징이며, 그것이 장점이 되어서 활발하고 사교적인 사람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알베르트의 개성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갖고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중학교에 진학하여서도 성적이 좋아지지 않고 학교 생활에 대해 불평이 많았습니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학교공부는 너무 강압적이었고, 주입식이어서 싫증이 났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모두가 군인 하사관과 같았고, 중학교 선생님은 장교처럼 굴었다.” 알베르트의 어머니는 마음이 따뜻하고 이해심이 깊고 지혜로웠습니다. 아들의 성격과 특징을 잘 알고 이해해 주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혼자서 사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데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알베르트는 15세가 되기 전에 이미 유클리드, 뉴턴, 스피노자,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의 책을 읽을 정도로 혼자서 생각하고 공부하는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알베르트 어머니 또한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일년도 채 못 되어 알베르트는 배우기 싫다며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그는 어머니가 즐겨치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하면서 다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어머니도 이를 적극 지원해 주었습니다. 이때 배운 바이올린으로 그는 연구로 인해 피곤한 머리를 식혔고, 휴대하고 다닐 정도로 바이올린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대물리학자이며 상대성 원리를 발견해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아인슈타인의 이면에는 이토록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음악을 사랑하며, 아들 속에 깊이 감추어진 보화를 볼 줄 알고 캐내어 준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학교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았지만 혼자 생각하고 추리하는 아들의 우수한 능력을 인정하고 칭찬하고 격려한 지혜로운 그의 어머니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6). 건망증
아인슈타인이 기차에서 기차표를 잃어버렸다.
차표를 찾는 그를 보고 역무원이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차표는 안 내셔도 됩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차표를 찾는데 열중했다.
역무원이 계속 괜찮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차표를 찾아야 내가 어디에 가려는지 알 수 있단 말이오."
아인슈타인 [Einstein, Albert, 1879.3.14~1955.4.18]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1879년 3월 14일 독일 울름에서 태어났다. 스위스국립공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베른 특허국의 관리 자리를 얻어 5년간 근무하였다. 광양자설, 브라운운동의 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연구, 이를 1905년 발표하였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갈릴레이나 뉴턴의 역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종래의 시간·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으며, 철학사상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몇 가지 뜻밖의 이론, 특히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等價性)의 발견은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예언한 것이었다.
브라운운동에 관한 기체론적 연구는 분자물리학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고, 플랑크의 복사법칙을 검토하여 광양자설에 도달, 그 예로서 광전효과를 설명하였다. 1913년 베를린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나, 그 동안 자신의 특수상대성이론을 중력(重力)이론이 포함된 이론으로 확대하고자, 1916년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 이 이론에서 유도되는 하나의 결론으로서 강한 중력장(重力場) 속에서는 빛은 구부러진다는 현상을 예언하였다. 이것이 영국의 일식관측대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광전효과 연구와 이론물리학에 기여한 업적으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으며, 그 후 중력장이론으로서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중력장과 전자장의 이론으로서의 통일장이론으로 확대할 것을 시도하였다.
유대인 출신인 그는 유대민족주의·시오니즘운동의 지지자, 평화주의자로서 활약하였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유대인 추방이 시작되자, 1933년 독일을 떠나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로 취임, 통일장이론 개척에 힘을 기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원자폭탄 연구에 몰두하자, 미국의 과학자와 망명한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을 가질 필요성을 통감하여 당시 대통령 F.D.루스벨트에게 그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것이 미국에서의 원자폭탄 연구, 맨해튼계획의 시초가 되었다.
한편, 그는 통일장이론을 더욱 발전시키기에 힘썼다. 일반상대성이론은 리만기하학을 이용한 것으로서, 그것은 2차 대칭하는 텐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만년에 생각해낸 통일장이론은 2차 대칭이 아닌 텐서에 의거한 이론이다. 이것을 아인슈타인 최후의 통일장이론이라고도 한다. 미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아인슈타인상(賞)을 마련하고 해마다 2명의 과학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naver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매우 작은 소립자들 세계와 전체 우주의 모든 물리현상들에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상대성이론을 완성한 독일의 물리학자이다. 1905년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해 맥스웰의 전자기이론과 뉴턴의 갈릴리안 상대성이론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1916년에는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이 같다는 등가원리와 휘어진 공간의 기하학적 구조에 대한 중력이론을 일반화한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또한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질량과 에너지 등가원리를 내세운 질량-에너지 관계식을 밝히는 등 현대물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한 그는 원자폭탄 및 수소폭탄 금지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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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4.18 -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 사망
미국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1955년 4월 18일 미국 프린스턴 대학병원에서 사망했다. 독일의 울름에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스위스 취리히 이공 대학을 마치고 연구에 몰두하여 1905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그 뒤 프라하 대학 교수와 베를린 대학 교수가 됐다. 1916년에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여 물리학자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1922년에 광양자 이론의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히틀러 독재 정권에 쫓겨, 1933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원자 폭탄의 제조를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미국에서 원자 폭탄 연구의 시초가 됐다. 오늘날 그는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물리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1949.12.26 - 아인슈타인, '통일자장이론' 발표
1940.12.12 - 아인슈타인 박사, 미국에 귀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집권자가 된 후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을 떠났다. 뒤에 그는 프린스턴대학교 고등연구소 수학과정 기초임원이라는 정식자리를 받아들였다. 그결과 나치주의자들은 그가 애용하는 베를린 근처에 있는 여름 별장을 수색하고 그의 배를 압수했다. 그는 독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유럽 자유세계가 방위력을 보충하고 무장하도록 촉구했다. 프린스턴에서 아인슈타인은 20년 이상을 거의 변화가 없는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소박한 2층 목조가옥에서 아내와 살았고, 아침마다 산책을 하거나 연구소까지 걸어다녔다. 연구소에서 통일장이론을 연구했고 동료들과 토론했다. 마침내 그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자신을 항상 유럽인으로 생각했다. 전쟁이 임박함에 따라 나치 과학자들이 '원자탄'을 최초로 만들 것이라는 공포감으로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경계를 해야 하며 만일 필요하다면 빠른 조치를 취하라"는 편지를 썼다.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했던 그러한 권고는 맨해튼 계획의 시작을 의미했다. /naver
1939.10.11 - 아인슈타인 등 미국에 원폭개발 촉구
원자탄 개발 역사에서 오펜하이머(Oppenheimer, Franz, 1864~1943)와 함께 개운치 않은 존재를 드러내는 또 한 사람의 천재는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 1879~1955)이다. 미국이 원자탄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45년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폭이 떨어지기 6년 전이었다. 1939년 10월 11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받아 본 아인슈타인의 편지 한 통이 미국 정부에 핵 개발을 '진언'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사실 이 편지에 아인슈타인이 사인한 날짜는 8월 2일이었다. 그 초고를 쓴 것은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Szilard, Leo, 1898~1964)였다. 아인슈타인은 질라드와 유진 위그너(Wigner, Eugene Paul, 1902~1995), 에드워드 테라 등 3명의 헝가리계 물리학자들의 간청을 받고 편지에 사인한 것이었다. 히틀러의 박해를 받아 미국에 이주한 유태인이었던 이들은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원폭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의 반응은 신속했다. 즉시 상임위원 3명으로 우라늄 자문위원회가 발족했다.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받아 원폭 개발에 전면적 노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 세워진 것은 1941년 12월 6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하루전 일이었다. 원자폭탄의 산실은,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미국 뉴멕시코 산타페 앨러모연구소였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는 1942년 말 이곳 소장에 임명돼 노벨상 급 물리학자들을 이끌며 원폭 개발을 성공시켰다. /조선
1931.1.16 - 아인슈타인 미국 천문대 방문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1931년 오늘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윌슨 천문대를 방문한다. 당시 52살인 아인슈타인은 이 천문대의 거대한 광학망원경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YTN
1922.12.10 -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나란히 노벨상을 수상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준엄하게 말했다. 여기서 신이란 자연 혹은 물리법칙이고, 주사위 놀이란 확률을 의미한다. 그런데 보어는 감히 아인슈타인에게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든 말든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오히려 “신이 왜 주사위놀이를 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충고했다.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후배들에게 점잖게 충고하려고 했던 아인슈타인으로서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흠을 찾아내 이 보라며 후배들에게 말했다.
“아침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제를 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면 보어는 어김없이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냈다. 아인슈타인은 계속 문제를 냈고, 보어는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그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아인슈타인이 안고 있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했다.” 이러한 논쟁은 솔베이회의가 열린 6일 동안 계속됐다고 하이젠베르크는 회고했다. 물론 이 논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후 30여년 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승리자는 보어와 양자역학을 지지하는 수많은 다윗들이었다. 과학사학자들은 이때의 논쟁을 두고 아인슈타인이 스스로 쇠락의 길을 택했다고 말한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만남은 참으로 운명적이었다. 1922년 보어는 원자구조에 관한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날 아인슈타인도 함께 상을 받았다. 1921년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됐던 아인슈타인에 대한 시상식이 1년 늦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알고보면 양자역학 발전에 기여한 선후배였다. (Chollian.com) /Google
1915.11.25 - 아인슈타인,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일반상대성이론)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 광양자가설, 브라운운동가설 등 3편의 논문을 발표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덕분에 궁색했던 그의 생활도 폈다. 1902년 스위스 베른의 연방특허국에 들어갈 때만 해도 3급 견습에다 연봉은 3천8백 프랑에 불과했다. 그런데 1906년 그는 2급 전문관으로 승진했고 연봉도 4천5백 프랑으로 올랐다.
더욱 아인슈타인을 기쁘게 했던 것은 그토록 바라던 대학에 자리가 생긴 것이다. 1908년 독일 물리학계의 거물이었던 막스 플랑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베를린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했으며, 1909년에는 특허국 생활을 청산하고 취리히공과대학 교수가 됐다. 이후 세계적인 과학자의 자격으로 1911년에는 제1회 솔베이회의에 참석했다. 1913년에는 프러시아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혔으며, 같은 해 베를린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의 마음엔 늘 꺼림칙한 문제 하나가 있었다. 그가 1905년에 제시한 3편의 논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특수상대성이론이다. 사람들은 특수상대성이론이라고 하면 시간여행을 상상하곤 한다. 운동하는 물체의 시간이 느려지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달리는 기차의 길이는 짧아진다. 예를 들어 1백m 길이의 고속열차가 시속 3백km로 달리면 1조분의 4m 가량 열차의 길이가 준다. 이러한 지식들은 사람들에게 상식처럼 돼 있다. 또 여기서 유도된 질량에너지등가공식(E=mc2)은 물리학과 천문학, 그리고 에너지 개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특수상대성이론은 말 그대로 특수한 경우, 즉 등속직선운동을 하는 관성계에서만 성립한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가속운동을 하는 좌표계나 회전운동을 하는 경우에는 맞지 않는 얘기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특수상대성이론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10년 동안 끙끙거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15년 11월 25일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하고, 이듬해 3월 20일 ‘물리학연보’에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특수상대성이론이 광속도일정의 법칙을 기준으로 만든 것이라면,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과 가속도가 같다는 등가원리에서 출발된 이론이다. 따라서 일반상대성이론을 따르면 중력에 의해 휘어진 공간을 통과하는 것은 질량을 가진 물체든 질량이 없는 빛이든 모두 휘어진다. 그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뉴턴의 중력이론이 질량을 가진 물질들의 운동만 설명하는 한계를 일반상대성이론이 뛰어넘은 것이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가속도와 같다는 생각을 끄집어낸 것은 행운이었다고 회고했다. /Google
1905.9.27 - 아인슈타인, E=mc²라는 질량-에너지 등가성에 대한 논문을 출판
100주년 맞은 '상대성 이론'
<앵커 멘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핵심 공식이 소개된지 오늘로 100년이 됐습니다.
정지주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물체의 고유한 에너지는 질량에 비례한다는 공식. (E=mc² !)
특수 상대성 이론의 핵심 내용은 100년 전 오늘 태어났습니다.
<녹취>아인슈타인 육성 : "에너지는 물체의 질량에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값입니다."
질량 1kg의 물질이 천만 인구가 9달동안 쓸 수 있는 에너지로 변환된다는 이 공식은 발표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인터뷰>김제완 : "같은 핸드폰도 이렇게 보면 납작하게 보이듯 물질과 에너지는 사실은 같은 것이라는 말!"
당시 26살의 청년 과학도 아인슈타인이 쓴 3쪽짜리 짧은 논문으로 뉴턴과 갈릴레이가 세운 고전 물리학의 아성은 무너졌고 기존의 절대적 시간과 공간 개념은 모두 수정됐습니다.
특수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아인슈타인의 이 공식은 원자력 발전과 핵폭탄 기술 개발에 출발점이 됐습니다.
생전에는 한국에 오지 못했던 아인슈타인!
1955년 그가 숨을 거둔 후 미국 프린스턴 대에서 보관돼 오던 뇌의 일부가 상대성 이론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평균치보다도 작은 뇌에서 시작됐지만 그의 이론은 현대 과학에서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KBS 2005-09-27
1905.6.30 -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논문 출판
1905년 6월 30일 스위스 베른에서 약관 26세의 특허국 심사관이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이 물리학 분야에서 20세기 최대의 업적으로 된 논문을 완성했다. 이른바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이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친구의 소개로 특허청에서 근무하면서 연이어 논문을 발표했다.
3월에는 광양자(光量子)에 관한 논문, 5월에는 브라운운동에 관한 논문, 게다가 이날 `운동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해서`라는 제목의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완성한 것이다. 이 논문이 9월에 물리학연보지에 발표되자 일부 전문가들은 격찬했지만 대부분은 거의 이해할 수 없어 불평을 샀다. 1915년 이 이론은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발전했고 그 실용성은 40년 후에 원자에너지로 현실화됐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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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I do not foresee that atomic energy is to be a great boon for a long time, I have to say that for the present it is a menace."
"원자 에너지는 잠시동안 큰 축복이 되리라고 예상할 수 없는 이상 현재로서는 위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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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상상력에 의거하여 충분히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예술가이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지식은 제한되어 있지만, 상상력은 세계를 포괄한다. "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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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의 생애 최대 업적은 1915년에 독일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에서 완성한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05년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서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관측자들에게 물리 법칙이 불변으로 유지되는 새로운 개념인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논의를 확장시켜 가속도의 경우도 다룰 수 있는 이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등속도를 가속도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상대성 이론은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을 통합시키는 이론에서 중력에 관한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을 얻어내려는 아인슈타인의 의도는 특수 상대성이론과는 달리 무척 오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
1907년 12월 아인슈타인은 중력장과 이에 상응하는 기준좌표계의 가속운동이 완전히 물리적으로 동등하다는 '등가 원리'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후 아인슈타인은 등속도 운동만이 아니라 가속운동에도 적용되는 일반 상대성이론을 완성하기 위한 머나먼 학문적 여정을 떠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1907년의 이 논문에서 마이컬슨-몰리 실험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는 한편, 아직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고 초보적인 형태이지만 중력장 속에서 시간이 천천히 간다는 주장과 중력장 속에서 빛이 휘는 현상에 대한 논의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뒤 약 3년 반 동안 중력에 관한 논의를 더이상 진행시키지는 않았다.
1909년과 1910년 사이에 아인슈타인은 주로 광양자 가설에 대한 논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광양자 가설은 광전효과를 설명하는 데에는 아주 성공적이었지만, 회절과 간섭 현상을 설명하는 데 광양자 가설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중견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이 광양자 가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1909년을 전후한 시기 아인슈타인은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 몰두하면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그의 논의는 잠시 중단되게 되었다.
오랜 침묵 끝에 1911년 6월 아인슈타인은 프라하에서 중력에 관한 논의를 재개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선 강한 중력장 속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것, 다시 말해서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빛에 적색 편이가 생긴다는 것과 강한 중력장 부근에서 빛이 속도가 달라진다는 주장을 1907년보다 훨씬 정확한 형태로 전개했다. 즉 여기서는 특수 상대성이론의 전제가 되는 광속도 불변의 원리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빛의 속도가 강한 중력장 속에서 달라지기 때문에 호이헨스의 원리에 따라 강한 중력장 주변을 지날 때 빛이 휘게 되는 소위 중력 렌즈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다음 해 2월 아인슈타인은 역시 프라하에서 가변적인 빛의 속도를 바탕으로 해서 뉴턴의 중력이론과 푸아송 방정식에 상응하는 정역학적인 중력장 이론을 제안했다. 여기서 그는 로렌츠 변환이 중력을 취급하는 데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과 중력장 방정식은 비선형 방정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1912년을 전후해서 아인슈타인은 가속운동을 하는 물체가 경험하는 관성력은 전체 우주 우주의 다른 물체들의 양과 분포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소위 '마흐의 원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마흐(Ernst Mach, 1838∼1916)는 원심력은 물체의 절대 회전의 결과라는 뉴턴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거대한 질량에 대한 상대적 회전이 원심력이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우주론을 전개할 때 이 마흐의 원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년에 가서 마흐의 원리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열정은 점차로 식게 된다. 만년에 가서 아인슈타인은 관성이라는 것은 국소적인 측지 방정식(geodesic equation)에 내재되어 있으며, 우주 다른 곳의 물질의 존재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바뀐 것처럼 훗날 과학자들 사이에는 거대 규모의 우주적 전체론과 국소적 작용 원리(local-action principle) 사이에서 어떤 것을 더욱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등장하게 된다.
1912년 8월 연방공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취리히로 돌아온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학창시절 친구였으며 당시에는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의 수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그로스만(Marcel Grossmann)과 일반 상대성이론을 만들기 위한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그로스만과 공동작업을 하면서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시간-공간 구조와 연결시켰다. 즉 그들은 스칼라 함수로 표현되는 뉴턴의 퍼텐셜을 포기하고 대신 텐서로 표현되는 새로운 중력 방정식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로스만과의 공동작업에서 아인슈타인은 그가 1915년 11월에 최종적으로 얻은 리만 기학학에 입각한 장 방정식에 아주 근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상대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이때 아인슈타인은 리만 기하학이 뉴턴의 중력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유도해내지 못하자, 리만 기학학이 지니는 물리적 의미를 부정하면서 그 이론을 포기했다.
1913년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의 협동 작업에서 최종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얻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집필한 에이브러험 페이스(Abraham Pais)는 당시에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인 중력 장 방정식을 유도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텐서 방정식을 유일하게 결정하는 데에 필수적인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좌표 조건이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나타나는 10개의 텐서 방정식을 풀 때, 질량-에너지 보존 법칙과 연관이 있는 비앙키 일치식(Bianchi identities) 때문에 10개의 자유도가 6개로 주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데, 이때 텐서 방정식의 자유도를 다시 10개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조화 좌표 조건'(harmonic coordinate condition)과 같은 특정한 좌표를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전자기학에서 벡터 퍼텐셜에 의해서 맥스웰 방정식을 표현할 때 '연속 방정식'(equation of continuity) 때문에 4개의 자유도를 가진 전자기 방정식이 자유도 1개를 상실하게 되는데, 이때 이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로렌츠 게이지라는 것을 선택해서 다시 4개의 자유도를 만드는 방법과 유사한 것이다. 페이스는 1915년의 아인슈타인 논문에서는 1913년 논문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조화 좌표 조건'에 관한 논의가 분명하게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1913년 당시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어서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얻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리만 기하학에 의한 중력장 방정식을 얻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현재 아인슈타인의 전집을 편집하고 있는 스태철(J. Stachel)과 특히 존 노튼(John Norton)은 아인슈타인이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얻지 못한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당시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정적인 중력장의 개념이 물리적으로 그릇된 추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노튼은 이런 주장을 뒤받침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 공동 작업을 했을 시기에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공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공책에는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식을 손쉽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나타나 있다. 사실 역사적인 설명을 할 때, 왜 실패했느냐 하는 것은 왜 성공했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설명을 얻어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무엇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어내지 못했는가는 분명히 밝힐 수는 없을지라도, 아인슈타인이 당시에 중력 방정식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상당히 헤맨 것만은 분명하다. 20대 젊은 시절의 참신한 기지로 얻어낸 특수 상대성이론과는 달리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을 많은 실수와 오랜 방황의 끝에 힘겹게 얻어내었던 것이다.
1914년 4월 아인슈타인은 새로이 설립된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기 위해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 새로운 연구 환경 속에서도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찾던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계속 찾아나갔다. 1915년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은 1913년 자신이 버렸던 리만 기하학의 방법론을 다시 채택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해 11월 25일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자신의 '등가원리', 에너지 보존 법칙, 물리적 인과성, 뉴턴의 중력 방정식으로의 근사적 접근 등을 만족하도록 확장하는 물리적 추론과 리만 기하학과 텐서 미적분학과 같은 수학적 방법의 도움으로 자신의 완전한 장 방정식을 얻어내었던 것이다.
상대성 이론의 괴팅겐식 전개과정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 1826∼1866)은 1853년에 행한 교수자격 강연에서 나중에 리만 기하학으로 알려지게 되는 내용을 다루었다. 이 논문은 리만의 사후인 1867년 출판되었는데, 1916년 일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런 관심을 반영하듯 이 논문은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인 1919년 헤르만 바일(Hermann Weyl, 1885∼1955)에 의해서 재 출판되게 된다. 하지만 괴팅겐 수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을 수학적인 불변이론으로 간주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했다. 이것은 물리적 추론을 우선으로 했던 아인슈타인의 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최후의 장 방정식을 얻기 5일 전인 11월 20일 괴팅겐 대학의 수학자인 다비드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도 변분법이라는 수학적 방법을 이용해서 아인슈타인과 동일한 중력 장 방정식의 최종적인 식을 얻어냈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그해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에 아인슈타인이 괴팅겐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강연을 했었고, 이것에 자극을 받아 괴팅겐의 수학자들이 아인슈타인도 그때까지는 풀지 못했던 일반 상대론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런 성과가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괴팅겐의 수학자들은 아인슈타인과는 전혀 다른 관점과 연구 전통 속에서 전자론과 중력의 문제를 접근하고 있었다.
우선 괴팅겐 수학자들은 최소작용의 법칙에 바탕을 둔 변분법의 원리와 사영기하학에 바탕을 둔 변환군론에 이미 보편적인 물리법칙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도 괴팅겐의 수학교수였던 리만이 발전시킨 비유크리드 기하학에 의해서 이미 예정되었던 이론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괴팅겐의 수학자들은 전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물리적인 개념보다는 수학적 측면을 더욱 중시하는 연구 성향을 보였다.
또한 괴팅겐 학파는 비유크리드 기하학과 군론의 일종인 불변이론 분야에서 이룩한 그들의 수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항상 중력과 전자기력을 동시에 다루었다. 이미 1908년에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는 물질과 에테르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했던 로렌츠의 주장을 비판한 에밀 콘(Emil Cohn)의 입장을 받아들여서 역학의 문제와 전자기학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상대론적인 비선형 장방정식을 시도했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광양자 가설과 연관되어 발전해서 파동이론에서 필수불가결한 에테르의 개념은 철저하게 거부되었지만, 민코프스키의 상대론에서는 광양자 가설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발전했으며, 오히려 연속체론적인 자연기술을 선호하게 되면서 물질과 에테르와의 구분을 비판했던 콘의 입장이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1909년 민코프스키가 맹장 수술 뒤에 갑자기 죽자, 민코프스키가 맡았던 물리학 분야의 연구는 힐베르트가 떠맡게 되었다. 민코프스키의 연구 프로그램을 떠맡은 힐베르트는 중력과 전자기력을 새로운 비선형 전자기 방정식에 의해서 통일하려고 했던 미(Gustav Mie)의 이론에 주목하였고, 이 미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장 방정식을 얻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미의 물질이론은 괴팅겐 출신인 헤르만 바일이 고안한 게이지 변환(gauge transformation)과 괴팅겐 학자들이 선호했던 연속체론과 결합되면서 전자기력과 중력을 통일하려는 바일의 통일장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괴팅겐을 방문해서 민코프스키와 교류를 가졌으며, 민코프스키가 죽은 뒤에는 그가 추구하던 중력 이론을 발전시킨 필란드의 물리학자 노르드스트룀(Gunnar Nordstrm)의 논의도 아인슈타인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즉, 1913년에 발표된 노르드스트룀의 중력이론에 의하면, 중력 현상을 다룰 때에도 특수 상대성이론은 일반적인 유효성을 지녔으며, 중력장 속에서 중력 작용은 항상 빛의 속도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속도로 전달된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가속운동에 관한 상대론에서 바탕으로 했던 등가원리는 부정되었고,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도 빛은 휘지 않고 직진하며, 중력 퍼텐셜은 텐서량이 아닌 스칼라 양으로 주어졌다. 이 노르드스트롬의 중력이론이 당시에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과 쌍벽을 이루는 중력이론으로서 어느 이론이 경험적 사실과 부합되느냐가 과학자들의 관심거리였다.
일반 상대성이론의 검증과 수용
1916년 3월 20일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이론의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세 가지 예들, 즉 수성의 근일점이 1세기에 43" 만큼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 빛의 중력장 속에서 휜다는 것, 중력장 속에서의 빛의 적색 편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제시했다. 수성의 근일점이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천문학자 르베리에(Urbain Jean Joseph Leverrier, 1811∼1877)가 관측했었고,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이 르베리에의 관측 결과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생기는 빛의 적색 편이와 굴절 현상은 아직 관측되고 있지 않았다.
태양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개기일식 때 영국의 일식 관측대에 의해 처음으로 관측되었다. 사실 영국에서는 20세기초의 전자기학 분야에서 에테르 이론이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특수 상대성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에도 영국 과학자들은 상대성이론에 대해 거의 대부분 적대적이었며, 심지어는 냉소적이기까지 했었다. 더욱이 1914년에서 1918년까지는 전쟁 중이어서 독일의 학술 잡지가 영국으로 올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영국 과학자들은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내용을 거의 알지 못했다. 영국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왕립 천문학회의 간사였던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944)이었다. 그는 전쟁 중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드 지터(Willem de Sitter, 1872∼1934)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입수한 뒤에 1918년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영국 물리학회에 기고했다.
에딩턴은 영국 왕립 천문학자로서 영국 천문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다이슨(Frank Watson Dyson)과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었다. 다이슨은 상대성이론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에딩턴으로부터 상대성이론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는데, 1919년 일식 때 아인슈타인의 예언을 검증하기 위해 관측대를 파견하자고 처음으로 제안했던 인물이 바로 다이슨이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 소위 '아인슈타인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일식 관측대가 조직되게 되었고, 그 해 5월 29일 두 팀의 일식 관측대들은 아인슈타인 효과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초의 사진들을 얻어내었다. 관측대가 얻은 관측 결과는 실제로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확실하게 입증하기에는 너무 오차가 커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11월 6일 긴급 소집한 영국 왕립학회와 왕립 천문학회 합동 회의에서는 관측 결과를 검토한 끝에 아인슈타인의 예언이 확증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데에는 영국 천문학을 대표하는 다이슨과 특히 에딩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이로써 당시에 대립하고 있었던 노르드스트룀과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 가운데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이 승리한 것으로 결판이 났으며, 이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다시금 과학계의 영웅이 되었다. 더구나 11월 7일에는 런던 {타임스}지가 이 내용을 '과학의 혁명/새로운 우주론/뉴턴주의는 무너졌다'라는 식으로 대서특필했으며, 이에 따라 과학계에서만 알려졌던 아인슈타인은 일약 대중적인 유명 인사가 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19년 11월 7일 20세기를 통해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될 아인슈타인의 신화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력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과학자들은 전자기 현상과 중력 현상을 포괄하는 새로운 통일장 이론을 계속 갈구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과 전자기 현상을 통일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1918년 괴팅겐의 수학자 헤르만 바일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바일은 이 통일장 이론에서 전자를 공간에 연속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물질로 보고 오늘날 우리가 게이지 변환이라고 부르는 기법을 활용해서 리만 텐서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고 했다. 물론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헤르만 바일의 통일장 이론을 거부했지만 아인슈타인 자신도 평생 이 문제에 매달렸지만 죽을 때까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는 통일장 이론을 얻어내려고 시도했던 것은 그가 광양자 가설의 통계적 성격을 극복하려고 했던 노력과 연결을 가지고 있다. 1917년 아인슈타인은 요즈음 레이저의 원리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자연 복사와 유도 복사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광양자의 방출이 통계적으로만 이해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자신이 전개하고 있는 양자론에 내재하고 있는 커다란 약점으로서 아직 광양자에 관한 논의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아인슈타인은 1923년 상대론적인 장방정식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의 상위 결정된(berbestimmten) 미분방정식 체계를 유도해보려고 노력했다. 이 새로운 시도에서는 연속체 가설과 결정론적 기술이 유지되었는데, 여기에는 양자론에서 나타나는 비결정론적 성격도 상위 결정된 미분방정식 체계에 의해 해결되기를 바라는 아인슈타인의 바램이 담겨 있었다.
1933년 나치가 등장하면서 아인슈타인은 그해 3월 28일 베를린 아카데미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에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의 활동보다는 과학 정책이나 평화 운동 등 정치적인 차원에서 더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39년 8월 아인슈타인은 실라르드, 부시 등과 함께 나치가 원자탄을 만들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서한을 루즈벨트에게 보냈다. 이 건의에 따라 미국 정부는 1939년 10월 핵문제를 자문할 기관인 '우라늄 위원회'를 구성했고, 결국은 맨해튼 계획이라는 미국의 원자탄 개발 계획이 추진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원자탄이 개발된 뒤에 아인슈타인은 반대로 미소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핵무기 개발 경쟁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며, 러셀과 함께 핵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할 세계 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치적인 움직임도 보였다. 그는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이 수폭개발을 결정했을 때에도 이 계획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태인이었던 아인슈타인 역시 시온주의를 지지했지만, 1952년 이스라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달라는 제안은 거절했다.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데 서명한 편지를 버틀런드 러셀에게 보낸 뒤 1주일 후인 1955년 4월 18일 오전 1시 15분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떠났다.
KPS 한국물리학회 /Google
http://www.kps.or.kr/home/kor/morgue/physicist/physicist_7.asp?globalmenu=6&localmenu=1&physicistpagenum=7
[아침햇발] 사회주의자 아인슈타인 / 정남기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헬렌 켈러의 공통점은? 쉽게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공통점이 많다. 일단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아인슈타인은 1879년, 헬렌 켈러는 1880년생이다. 이들은 똑같이 20세기 초반 격동의 세기를 살았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사회주의자였다는 점이다.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자였다? 많이 소개되진 않았지만 꽤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가 본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언어의 의미를 깨닫고 감격해하는 순간은 그에게 새로운 생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1909년 사회당에 입당해 평생을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라는 공개서한을 통해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반전파업을 주도하고 뉴욕 한복판에서 러시아 혁명을 찬양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 역시 자본주의를 혐오했다. 그는 1949년 <먼슬리 리뷰> 창간호에 쓴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글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무질서야말로 악의 근원”이라고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주장했다. 빈부격차를 키우고, 호황과 불황의 경기변동을 만들어내며, 심각한 실업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미국 정부와 의회가 공산주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메카시 선풍을 일으켰을 때도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기간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감시 대상 1순위였다.
두 사람을 사회주의자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사회적 여건 때문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20세기 초반 미국 사회의 실상은 참혹했다. 독점기업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동안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빈곤해졌다. 상위 1%가 전체 국민소득의 20% 가량을 차지했다. 기업들은 임금을 줄이고자 어린 10대 노동자들까지 동원했다. 그뿐 아니다. 사회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터진 대공황은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몰아갔다. 유럽도 비슷했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시대를 고민하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나고 60여년이 흘렀다. 그동안 안정세를 보이던 자본주의 체제가 다시 한번 거대한 소용돌이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거대 금융자본이 국가간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으며, 거기서 발생한 거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위태롭다. 빈부격차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사회적 대립과 갈등도 커지고 있다. 마치 20세기 초반의 위기 상황과 비슷하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지난 27일 스위스에서 폐막된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수십년 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론이 다시 등장했다. 가장 충격적인 발언은 조지 소로스한테서 나왔다. “세계는 60년 만의 최대 위기를 겪게 될 것”이란 경고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말로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시장 시스템을 역설했다.
우주의 신비를 풀어낸 아인슈타인도 사회 변화를 제대로 예측하지는 못했다. 그의 생각과 달리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적극 수용했기 때문이다. 빈부격차를 줄이면서 중산층을 육성하고, 사회복지 체제를 갖추면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냉전 종식 이후 세계화의 물결이 다시 한번 과거의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다. 빈부격차와 사회적 갈등 해소 없이 자본주의는 건강하게 발전할 수 없다는 교훈을.
정남기/논설위원 jnamki@hani.co.kr
한겨레 2008-01-3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66928.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