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시민 융합 환경학교 제6강
신귀백 익산근대문화연구소장, ‘익산의 물과 강(江) 이야기’ 주제로 강의
지난 10월 31일 저녁 7시 유스호스텔에서 2022년 시민 융합 환경학교 마지막 강좌인 제6강이 있었다. 이날 강좌는 신귀백 익산근대문화연구소장이‘익산의 물과 강 이야기’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였다.
신 소장은 ‘강(江)의 인문적 특질, 익산지역과 만경강 등’, 여러 주제를 통해 물과 강이 품고 있는 지역의 인문적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신 소장은 강의 끝에 “ 만경강에는 안개가 피고 기러기가 날고 매일 해가 진다. 지는 해를 두고 명상을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최적의 장소가 만경강이다.”라고 말한다.
다음은 신귀백 소장이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수천 명의 사람이 사랑 없이 살아왔지만, 그 누구도 물 없이 살 수는 없었다.”
Ⅰ. 서론 : 강(江)의 인문적 특질
1. 생명의 시작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상을 이루는 가장 근원적이고 기초적인 물질 중 하나로 꼽혔다. 원형 상징으로서의 '물'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속성을 지녔으므로 정화와 순결을 상징한다. 물 그 자체가 생명 탄생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오랫동안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한다. 동양에서는 수생목(水生木)으로 5행(行)의 중심이었다.
인간의 중요한 식재료인 물고기를 끊임없이 제공, 거대한 강 하류의 삼각주에서는 강의 범람이 토지의 비옥도를 크게 올려주어 농업의 생산량에 엄청난 영향을 주기 때문에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는 물은 재물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취수가 쉬운 곳에 사람이 모여 중심지가 되고 경제활동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특히 수운(水運)이 가능할 정도의 강은 고속도로의 기능으로 문화가 발달하고 물자가 모이는 중심지 역할을 해서 상공업이 크게 발전해왔다.
2. 물의 인문적 특성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의 성질을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로 삼는 도가의 말인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비롯하여‘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 같은 성격, 물수능, 물태우, 물주먹, 물상병, 물병장 등’, ‘나이트클럽 등지에서 '물 좋다'라는 은어적 표현’도 있다. ‘물장사, 물 반 고기 반’, ‘보통 4원소(물, 불, 바람, 흙)와 함께 판타지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는 마법사의 주 스킬/속성 중 하나로 등장한다.
3. 강과 하천
강은 내륙을 흐르는 하천(河川) 중에 규모가 제법 크고 뚜렷한 물줄기로, 강보다 작거나 강으로 합류하는 상류의 시냇물은 '천(川)' 또는 '내'라고 부른다.
한자 어원인 강 강(江)자는 본래 중국의 장강(양쯔강)을 가리키던 글자였으나 의미가 확대되어 지금의 모든 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한반도는 깔때기 역할을 하는 산이 많아 계곡들을 위주로 강이 형성되었는데, 하필 물이 모이는 곳이 도시나 마을이 생기는 지역인 평원지역이다. 염분이 많아 인류가 직접 사용하기엔 부적합한 바다와는 달리, 염분이 적어서 인류가 생존하는 데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담수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는 강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으며, 오래된 도시들은 대부분 강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4. 상징으로서의 강
-강은 소멸과 죽음, 이별, 부활의 상징
거대한 물(큰 호수나 강, 바다)은 변덕스럽고 신비하고 강한 힘이 깃든 곳이다.
-정치적인 상징: 루비콘강, 배수진(背水陣)’, ‘
- 종교적 상징
*요단강
*삼도천: 삼도내라고도 한다. 죽은 지 7일째 되는 날에 이곳을 건너게 되는데, 이 내에는 물살이 빠르고 느린 여울이 있어, 생전의 업(業)에 따라 산수뢰(山水瀨)·강심연(江沈淵)·유교도(有橋渡) 등 건너는 곳이 세 가지 길이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스틱스: 스틱스 여신 스틱스는 오케아누스와 테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이기도 하다. 스틱스는 팔라스와 함께 젤로스, 니케, 크라토스와 비아(에오스라고도 함)을 낳았다. 올림푸스신족과 티탄 신족과의 싸움에서 가장 먼저 달려와 올림푸스 신들을 도운 대가로 신들 간의 약속은 그녀의 명예를 걸고 이루어지게 되었다. (나무위키 참조)
Ⅱ. 본론 : 익산지역과 만경강
개인적으로 ‘시골집 지시락물, 엄마의 물동이, 만경강 단치 낚시, 고구마 냄새’ 등이 떠오른다. 시인이 보는 물은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비 오는 날 커피 마시기’ 등
Q1. 과연 강가에서 농사를 짓는가?
서해지역은 감조하천(感潮河川)이라 바닷물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이리지역은 과거에는 서해와 만경강 물때에 시간을 맞추었는데, 1912년 기차가 들어오면서 기차에 말 그대로 근대의 시간을 맞추게 되었다.
Q2. 감조하천(感潮河川)이란?
동진강이나 만경강은 만조(滿潮) 때 바닷물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 감조(感潮)하천이다. 사행천(蛇行川), 곡류하천의 흔적이 있다. 해발고도가 4∼5m에 불과, 홍수와 사리가 겹치는 때면 염분 피해가 심각했다. 이처럼 감조구간이 넓은 서해의 만경강과 동진강에서 유역 평야 지대를 관개(灌漑)하기 위해서는 밀물의 유입을 막는 제수문(制水門) 설치가 필수적이다. 강을 가로막고 있는 제수문은 염분의 유입을 차단하는 동시에 농업용수를 저장, 공급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Q3. 만경강의 옛 이름은 사수(泗水)였다 한다.
한 고조 유방의 고향으로 전주를 풍패지관(灃沛之館)이라 한다. 이 풍패(灃沛)에 이르는 강이 바로 사수였다.
만경강 강폭이 보통 600여 미터이다. 만경강직강공사 이전과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상류와 하류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시내를 관통할 때에도 강폭은 여전히 넓었다.
Q4. 새만금은 왜 탄생했는가?
새만금 전라남북도 분리정책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땅을 만들어 주고, 정서적으로는 쌍방울 레이더스라는 야구팀을 만들어 해태를 응원하던 사람들이 따로 전라북도라는 개념으로 응원했는데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Q5.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개념은?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있는 것이라는 쉬운 개념보다도 겨울에 땔감을 댈 수 있고 바람을 피하는 것이 컸다. 들판의 마을은 불과 100년 정도 된 마을이라면 산 아래 동네는 거의 500년 정도 된 마을이다.
백제 이후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익산지역의 중심은 미륵산 근처의 금마와 호남대로의 길목인 여산이었다. 전근대에는 산지가 용수, 땔감, 부식 등의 확보에 유리하였기에 평야 한가운데가 아니라 산과 평야가 만나는 곳에 도시가 발달하였다.[
Q6. 좋은 땅이란 어디를 말함인가? :
고을 주(州)가 들어간 동네.
Q7. 서울의 부자 동네 중 한 곳, 한남동이라면 옛날 이리(裡里)의 부촌은?
당시 이리에서 부동산 가격이 비싼 동네는?
옛날 창인동 성당이 있던 곳 소위 신한장이라는 곳이 홍수피해도 적고 시야 확보도 좋았다.
반대로 싼 동네는?
아마도 동산동이나 송학동 등 저지대가 부동산 가격이 낮았다. 실제로 여름에 물난리가 많이 난 곳이다. 그래서 남부지역에 모텔촌이 들어왔을 것이다. 실제로 대전 엑스포 하면서 모텔들이 들어왔다.
Q8. 治水 利水 背水 무엇이 중헌가?
배수가 잘 안 되는, 논에 물이 오래 있는 쌀이 맛있다.
통작거리가 중요하다.
수렁 논은 문전옥답(門前沃畓)이다. 장마를 안 탄다. 수렁 앞에 가면 소가 멈춘다. 통나무 밟아가면서 모를 던져가면 산다. 6·25 때 모심고 추수 때 돌아왔더니, 모끼리 뿌리를 감싸고 있더라.
Q9. 익산사람들은 과연 거친가?
이리(裡里)는 인공도시다.
교통의 정차장 인근의 보행거리 이내에 상업, 주거, 직장, 공원, 공공 용도 등이 입지 되도록 계획한 것이다.
100년 전 일본인들에 의해 기능적으로 설립된 이리(裡里)는 풍치 공간으로서의 강이나 천이 없었다. 그래서 거칠다. 정서적으로 거친 곳이다.
여담으로 이리역 모기가 꽤 많았다고 한다. 기차도 역시 물로 식혀야 하기 때문에 기차역 옆에 물을 담아놓은 엄청나게 큰 저수조가 있었다.
-익산 시청 위 기계공고 쪽에서부터 물이 남쪽으로 흘러간다. 익산의 복개천은 온성목욕탕에서 옛 군청 그리고 이일여고 쪽으로 흘러간다. 지난번 홍수가 난 길이 바로 이 복개천이다.
-모현동의 설래방죽 쪽 역시 저지대다. 모현도서관에 거대한 저수조가 있다. 바로 잔디 운동장이다.
10. 함께 생각해 볼 문제
-어떤 논이 비닐하우스가 되는가?
건기가 찾아오면. 강의 중심 쪽으로만 물이 흘렀고, 그 주변으로 넓은 퇴적 지형이 드러났다. 이 가운데는 거의 몇 년에 한 번씩이나 강물에 덮이는 곳도 있었는데 평소 이런 곳은 묵은 땅으로 남아있었다. 머지않아 강물에게 그 터전을 내줘야 하는 강의 일부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강물이 흐르는 속도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속도가 유독 느려지는 곳에서는 강물이 싣고 온 자갈이나 모래를 강바닥에 부리는 데 이를 퇴적이라 한다.
그래서 어떤 논은 하우스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논은 논농사만 지을 수 있다. 이는 강의 흐름과 모래알의 크기에 관련한다. 점토질 땅은 쌀농사가 잘 되고 사질토는 대지나 과수원이 된다.
-수리유적 황등제, 황등호를 재건해야 하는가?
막대한 재건비는 어디에서 충당할 것인가?
-만경강의 새를 위해 파크골프와 패러글라이딩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수변도시는 문제가 없는가?
Ⅲ. 결론: 새만금 시대를 속죄하는 사원을 세워라.
김훈은 『자전거 여행』의 서문에 ‘만경강에 바친다.’고 썼다. 몇 년 후, 이 작가는 소설 『칼의 노래』 작가의 말에서 ‘다시, 만경강에 바친다.’고 썼다. 김훈처럼 자전거는 없지만, 드론을 들고 만경강에 나가보았다. 대아 댐에서부터 어우보 지나 망해사까지. 벚꽃 핀, 안개 낀,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그리고 해가 지는 만경강을 붙들었다. 오래 보니 아름다웠다.
임진강에서 낙동강 하구까지 모두 갈비집과 카페에 모텔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만개의 이랑을 적시는 이 복된 강인 만경강에는 고산천에서 망해사까지 쓸 만한 점방 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논들에 젖을 흘려보내는 수문조절장치 말고는 인위적인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김훈은 모텔도 삽질도 없는 이 강 너머로 지는 해에 반했을 것이다.
여행의 트렌드는 변한다. 불국사나 콜로세움같이 인류가 남긴 거대 문화유산에서 요즘은 한옥마을과 골목 등 시간 여행을 즐긴다. 언제까지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뭐냐? 자연이다. 만경강에는 안개가 피고 기러기가 날고 매일 해가 진다. 지는 해를 두고 명상을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최적의 장소가 만경강이다. 그러니, 부디 만경강 강가에는 그 어떤 것도 만들지 말고 짓지 말았으면 한다.
새만금 그 너른 땅에 골프장과 카지노를 지을 구상을 하는 중생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서해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새 땅에 망해사 지을 터를 전라북도민들에게 돌려주었으면 한다. 거기 한 오천 평 절집 지을 곳을 보시하여 수많은 게와 고동들, 서해 훼리와 이 앞길을 지나간 세월호의 넋들을 위로하게 했으면 한다. 강을 파헤친, 강을 막은 죄를 씻을 마지막 기회다. 그 절 세울 땅을 만경강에 바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