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올려 있는 '방언에 대하여'의 글을 보시고 갖게 된 의문을 질문해 주셨습니다. 여러 가지를 질문하셨는데, 사실 님이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은 이미 님이 읽은 글에 있습니다. 그러나 님의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기 위해서 질문에 해당되는 부분을 재언급하여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이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말이죠.
방언(方言)은 그 행해지고 있는 현상을 가지고 방언의 존재와 그 필요성과 목적을 띠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방언을 무엇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방언이란 어떤 것이었는지를 봐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방언이 이 시대에서도 과연 행해지는 것인지도 봐야 합니다.
님의 질문 서두에서 알 수 있었듯이, 님은 방언을 행해왔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기도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님이 다니시는 교회가 방언을 인정하고 신유능력 등의 은사들을 인정하고 있는 것도 한 원인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님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저희 교회는 방언을 인정합니다. 신유능력 모 그런 은사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저도 '방언'이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해서 기도합니다. 물론 통역의 은사는 없습니다. 소리내서 또박또박 기도할 수 없는 내용들을 거의 방언기도로 해왔는데요. 그러니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입술로는 방언기도로..."
그러면서,
"그렇다면 제가 하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닌 것인가요? "라는 의문 속에서 "앞으로 이런 방언기도는 하지 말아야 하는것인가요?"라고 하였습니다.
단언하거니와, 님이 방언으로 해온 기도생활은 진정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말이죠. 님이 방언을 했는데, 그래서 님은 자신이 방언을 하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님이 방언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님이 한 그 방언은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그 방언으로서의 '진정한 방언' 아니었으며, 그래서 님이 방언으로 기도하였다는 그 방언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요, 그래서 참된 방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저의 말이 그동안 방언으로 기도생활을 해 온 님에게는,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그 방언을 해 온 것으로 알고 있을 님에게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이 한 방언은 진정한 기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방언은 신약에서가 아니라 구약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신약의 방언은 구약의 방언과의 연계에서 보아야 합니다. 전에 어떤 분이 방언과 관련한 질문을 하였을 때 이렇게 답변했었습니다(질문과 답 195번). 그대로 옮겨와 다시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사도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에 따라서 되어진 것인데 이들이 이렇게 방언을 말할 것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예언된 일이었습니다. 이사야 28장 1-11절에는 마지막 때에 주어질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예언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절에 보면,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으로 말씀된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사마리아에 있는 지도자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의 타락을 책망하는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사마리아의 멸망과 함께 예루살렘도 이방인의 손에 붙이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마리아의 지도자와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모습은 술독에 빠져 취하여 비틀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이런 모습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모습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받을 때에도 독주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전달할 때에도 여전히 정신이 없어 헛걸음질을 치고 있으며 성전에서 제사장의 일을 하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들이 앉아서 먹고 마시는 식탁에는 이들이 먹다 먹다 지나치게 먹어서 토해 놓은 오물로 가득 차 더럽혀 놓은 식탁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하나님에게 화를 냄 욕알 합니다. "이사야가 선지자냐? 네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우리를 감히 가르치려 드느냐? 네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뜻을 가르칠 수 있느냐? 네가 뭐길래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느냐? 혹시 우리를 이제 젖먹이에서 갓 벗어난 아이로 여기는 것이냐? '차블라차브 차블라차브 카블라카브 카블라카브'하면서 말하는 이 소리가 도대체 무슨 뜻이냐? 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취하여 비틀거림으로 선지자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그들이 이렇게 자신을 흉보며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이방 군대를 보내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이상한 말을 하도록 하실 것이며, 그래서 그들을 가르칠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그들에게 전할 말은 '차블라차브 차블라차브 카블라카브 카블라카브'하면서 여기서도 저기서도 생소하게 들리는 이 외우는 소리로밖에는 들려줄 것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 이사야가 말하는 방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나 이를 받는 사람들이 술 취하여 있어서 비틀거리는 사람은 생소한 주문 외우는 소리 듣듯이 듣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진노하심 속에서 복음을 주십니다. 그것은 6절에서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도실 것이라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 판결하는 신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며 또한 16절에서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는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에게는 화려한 화환과 빛나는 면류관이 되실 것이며 재판관들에게는 올바른 영(정신)을 블어 넣어 주실 것이며 적군을 쫓아내는 용사들에게는 힘과 용기를 주실 것을 말씀하셨으며, 시온산 위에는 어떤 폭우와 홍수에도 씻겨 내려가지 않는 튼튼한 주춧돌을 놓아주겠는데 그 머릿돌에는 '누구든지 주를 의지하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를 써 놓았다는 것입니다.
훗날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0-33).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그 돌이라는 것이며, 이 돌에 사람들이 부딪혀 깨져나가고 걸려 넘어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돌에 부딪히지 않고 걸리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말이죠. 그 돌을 인하여 멸망을 당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돌에 기록하여 주신대로 주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방언이라고 하는 것이 지닌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구주가 되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 의해서 사람들은 모두 다 깨져 부숴져 나가고 걸려 넘어지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방언을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한 것입니다. 승천하시기에 앞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증인이 될 것이다"(행 1:8)가 말씀한 것을 이루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게 하시는 것으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사도들이 방언을 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말한 방언은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외국말인데 이 말을 사용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야기 할 때 듣는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들음으로써 당연히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알아듣지를 못하여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사도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말씀해 주심으로 하늘의 것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데 예루살렘 땅에 있는 유대인들이 그 하늘의 세계의 언어를 알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는 아무리 사도들이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사용하는 알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 해주었을지라도 듣는 사람들이 전혀 알아 듣지를 못하고 있으니 그들에게는 방언이 됩니다. 그러니까 '차블라차브 차블라차브 카블라카브 카블라카브'하는 말처럼 여기서도 그리고 저기서도 외우고 있는 전혀 생소한 말로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알아듣지를 못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치는 돌로 취급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 버립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방언을 말했다고 하는 것은 사도들이 사람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다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주시는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각지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말로, 곧 그들의 언어인 외국말(또는 지방어)로 들을 수 있게 해 주었으나(예루살렘 본토 사람들에게는 외국말이 아닌 자국말, 표준말이 됨) 사람들은 사도들이 하는 말을 자신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말로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사도들은 유대인으로서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말을 했는데, 그들이 전하는 말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에 의해서 되어진 것으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의 언어를 각국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방언으로 들을 수 있는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들이 방언으로 말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하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방언하여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것이 하늘에서 주어진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알아듣습니다만,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복음에 순종하는 믿음에 있게 됩니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한갖 거치는 돌인 사람에게는 전혀 알아 듣지를 못하고 사도들이 전하는 말을 술에 취해서 비틀거림으로 하는 말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헛말로 여겨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배척함으로써 멸망의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훗날 사도들의 복음 증거에 의해서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이곳 저곳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면서 다루어지는 방언은 사도행전에서의 방언과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고린도전서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기도하는 모습에서입니다. 이때의 방언은 당시 예배의 분위기가 오늘날처럼 제도화되고 의식화되어 있는 것이 아닌, 그래서 순서에 따라서 그 순서가 차지하고 있는 제자리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예배의 모습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행해지는 방언은 자국어와 외국어의 개념에서가 아니라, 육으로 하는 말과 영으로 하는 말, 땅에 속한 언어로 하는 말과 하늘에 속한 언어로 하는 말이 갖는 차이의 개념에서입니다.
그러기에 이 방언은 통역이 없이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3절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아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말한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통역의 은사도 받도록 구하라고 한 것이며, 그래서 자신이 말한 방언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려 그들도 알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말하는 방언은 무엇을 말하는 것으로 있는 것일까요?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능력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께로부터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신앙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가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으로 하게 되는 방언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도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받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그 내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방언을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설교하는 예언[일반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서의 예언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이를 사람들에게 전하여 알게 해주는 것으로서의 예언인 것에 유의]을 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방언이 예배에서 행해지는 것에서나 또는 기도하는 것에서나 어떤 경우에서도 이 은사가 행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성을 알게 된 것을 전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다른 계시적 방편의 은사와 함께 사도 시대에 한하여 행해진 후 종결됩니다. 방언과 통역과 예언이 그것입니다. 이 계시적 방편으로서의 은사는 구원의 계시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기록으로 완성될 때까지 유효하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 이어서 사도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는 성경을 기록하게 하여서 이를 완성하심으로 계시의 종결을 짓습니다. 그리고 사도가 땅에서 사라짐으로써 계시는 성경으로만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확립이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방편으로서 방언과 통역과 예언의 은사를 다른 은사들과 더불어서 교회에 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의 구주가 되심을 전함으로써 함께 모임을 가진 믿는 자들이 그 믿음 속에 더욱 견고히 서 나가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에서 믿는 자들 간에 행해진 방언은 서로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었으며 신령상 덕에 속한 문제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 의해서 계시가 기록으로 완성됨으로 해서 계시의 기록이 종결됨으로 하나님의 뜻이 충족되고 충분하며 명확하게 그리고 통일성 있게 전달 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부분적으로 다양한 계시 전달의 방편이었던 방언과 통역과 예언의 은사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고 폐지가 되어서 그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9-10절에서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사실 성령의 은사의 폐지는 계시 전달의 방편이었던 방언과 통역과 예언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며 기적으로 행해진 메시야 권능의 수단이었던 영을 분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하는 것도 사도 시대의 종결과 함께 사라집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셔 섬기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참된 영을 좇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왕노릇을 하는 자가 된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해진 기적을 나타내는 방편이었던 은사들은 더 이상 나타나져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님이여, 아시겠습니까?
이 말의 내용을 이해한다면, 신약에서 방언의 은사가 주어져 행해진 것은 개인의 경건생활을 위한 기도의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으로 있는 성령의 은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방언의 은사의 유효를 말하는 자들은 이 은사가 개인의 구함으로써 성령께서 주시고, 그래서 각 개인은 자신들이 받은 은사의 은혜를 소위 영적 체험이라는 것으로 누리는 식입니다. 그러니 방언의 본의적인 내용과는 상반되는 거리가 있는 비성경적입니다. 만일에 이런 방언을 하는 것으로 방언을 구하고 또한 행한다고 하면 그것이 아무리 개인의 경건을 도모하는 기도생활로 갖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방언과는 '다른 방언'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점을 아시기 바랍니다.
더욱이 님의 방언에서는 "물론 통역의 은사는 없습니다. 소리내서 또박또박 기도할 수 없는 내용들을 거의 방언기도로 해왔는데요. 그러니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입술로는 방언기도로..."라고 말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통역'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는 은사의 질서와도 위배가 됩니다. 바울은 통역의 은사가 동반되지 않는 은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당시 고린도교회에 방언을 하는 은사를 받기를 원하지만 차라리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고전14:5-9).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왜 이러한 권면을 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서의 방언만이 당시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는 참으로 무익한 방언으로 고린도교회를 어지럽히는 일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이죠. 바울은 방언으로 일만 마디 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의 말을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하면서, 단지 교회 안에서의 질서가 없이 유익이 되지 못하는 방언만의 행함은 교회에 해악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였습니다(고전14:18-25). 계시의 한 방편으로 존재하였던 당시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도 이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계시의 종결 시대에 있는 오늘날에서, 성령의 모든 은사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성도가 고린도교회 당시에 부분적으로 존재하였던 은사인 방언에 매달려서야 되겠으며,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닌 한갓 자기 열심에서 갖게 되는 종교적인 것에 불과한 방언을 사모하고 이를 행하고자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은 님의 말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소리내서 또박또박 기도할 수 없는 내용들을 거의 방언기도로 해왔는데요. 그러니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입술로는 방언기도로..."라고 한 것은 성경에서 말씀해주시고 있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과는 전연 다른 단지 자기 개인적인 방언으로 행하여 온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기도에서 소리내서 또박또박 기도할 수 없는 내용들은 방언으로 기도했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일반 언어로서 기도했다는 것이니, 이는 기도의 자리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이 들어서는 안될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스런 내용을 가지고는 방언 기도를 했다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알아 들어도 괜찮은 내용을 가지고는 일반 언어로 기도를 했다는 것이니, 이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속마음에 담고 있는 것을 가지고 방언 기도한 것이죠. 만일 그렇다면 이 방언으로 한 기도는 옳지 않습니다. 설사 님이 방언으로 기도하였다고 할지라도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방언이 아니니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지금 시대에서는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기 않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이 기록 계시로 완성되어 종결하신 후에는 생명의 진리인 복음 그 자체가 하나님이 말씀하여서 주시는 하늘의 신비한 방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방언(복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여 주신 자만 알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 방언(복음)을 말할 수 있게 하신 자만이 말할 수 있습니다. 님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한다면 말이죠. 님은 참된 방언을 말하는 분이십니다. 이런데 이 참된 방언 외에 다른 방언을 구하고 이것으로 방언을 말하고자 해서야 되겠는지요?
따라서 님이 (1) 그렇다면 제가 하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닌 것인가요? 와
(2) 앞으로 이런 방언기도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요?
에 대한 질문에 답변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시켜 드리면, 님이 해온 방언으로의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런 방언 기도는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습니다. 님이 먼저 방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방언으로 하거나 하지 않거나 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이제 님의 또 다른 질문인 (3)에 대해 답변하겠습니다.
"통변의 은사가 없는 어떤 분께서는 성경책을 읽으면서 방언기도를 한다고 하셨었는데요. 말씀으로 마음의 열매를 맺고, 방언으로 영을 세운다고 하셨었습니다. (맞나?) 그래서 저도 따라해 보았는데요. 이 방법도 잘못된 것인가요?"락 질문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님의 이 글을 보면서 참 별의 별 방언기도가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님이 예를 든 어떤 분에게서 보는 방언 기도는 결국은 통역의 은사가 없이, 그래서 통역의 은사가 없다 보니까 성경의 말씀을 보면서 그것을 통역 삼아 그 말씀에 따라서, 그 말씀에 맞추어서 방언 기도를 한다는 것이잖습니까? 만일 방언과 통역의 질서 관계를 말하자면, 통역이란 것은 방언이 있고 나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통역이란 방언을 위해서 있게 되는 은사란 것이죠. 방언으로 말하게 하신 성령의 뜻을 회중에게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말이죠. 성경책을 읽으면서 방언기도를 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미 방언이 통역이 되어 있는 것인데 그 통역되어 있는 것을 가지고 무슨 방언을 또 한다는 것입니까? 이는 방언과 통역의 질서 관계에서도 맞지 않습니다. 통역이 되어 있는 성경책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주시고 있는지를 모두다 보고 알 수 있는데 무슨 방언을 또 하게 하시느냐는 말입니다. 만일 성경책을 보고 그래서 통역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그것을 따라서 방언을 한다고 하면 그 방언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는 것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서 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런 거짓된 주장에 이끌려서 거짓된 방언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님은 또한, 질문 (4)인 "방언기도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하나의 또 다른 기도라고 했는데요. (제가 정확히 이해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설명하려니 몬가 잘 안되네요. 여하튼) 이 말도 잘못된 것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답변은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연히 잘못된 것입니다!." 방언이 무엇인지는 앞서 구구절절이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말이죠.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기도는 오늘날에 신자들이 한다는 하는 방언기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분을 알게 하시며 그 믿음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님이 성령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듣고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래서 이 세대의 풍속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전한 몸을 이루어간다고 하면(롬2:1-5), 님은 성령님의 간구하시는 기도 속에 있는 것이며, 이것이 님의 기도이기도 하여야 하는 것이구, 님은 그 기도의 응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하는 기도, 곧 방언이니 방언기도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머리에서 싹 지워주셨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는데, 이는 한글만 알면 누구나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으며 들을 수 있는 것이고 또한 말하여 전할 수 있는 것인데,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참된 방언을 두고서 왜 그렇게 어렵게 방언을 구하여서 하려고들 하십니까? 또 그렇게 해서 방언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 행해지는 것도 아닌 단지 자기 속에서 끌어내어 만든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며 어느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이방 종교적인 잡다한 말에 불과한데요.
끝으로, 님은 "목사님 말씀처럼 방언기도나 은사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 해 주시고, 문제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방언기도가 성령 받은 것의 전부다'라고 말씀하시진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이라는 것과 우리가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알고 있고, 그것 때문에 매일매일 참 많이도 찔림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언기도를 많이 하라고도 하십니다. 유익을 준다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저도 많이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많이 혼란스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님의 심경이 어떤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종교는 인간의 교회, 곧 인간의 종교와는 다릅니다. 님의 담임목사이신 분이 말씀을 중요함을 알고 있고 이를 또한 강조하고 있다고 하면, 순전함으로 하셔야죠.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함으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그대로를 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참된지, 아니면 거짓된 것인지는 이것으로써 구분합니다. 말씀의 중요함을 알고 이를 강조하면서 여기에 왜 방언기도를 끼워 넣어서 성도에게 방언기도를 많이 하도록 가르칩니까? 말씀의 중요함을 알고 이를 강조한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해서 성도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해야죠.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로써,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받은 의를 그들 또한 받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말해야죠. 그런데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방언기도를 추구하게 해서 결국은 이것으로 자기 신앙을 삼게 하니, 이는 전형적인 거짓 선생된 자의 모습입니다. 이는 님이 방언기도를 말한 것에 따라서 방언기도를 추구해 왔고, 또한 방언기도를 하는 그 속에 있었음으로 해서, 지금 몹시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복음과 비복음, 진리와 비진리, 신앙과 비신앙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는데 혼란을 겪고 있을 만큼 이에 대한 분별을 갖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이겠습니까? 잘못된 다른 신앙의 복음을 가르친 거짓 선생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곧 사단적입니다. 저의 이 말이 너무 단호하여 참으로 과격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렇습니다.
님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아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해보려고 노력하는 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님의 그러한 노력이 님을 바른 신앙으로 반듯하게 서 나갈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해서 말입니다.
님이여, 제가 써서 올린 방언에 대한 글과 함께 방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우려고 소개한 여러 글들도 다시 한번 자세히 정독하시고, 또한 반복하여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잘못된 신앙에서 떠나 바른 복음에 선 바른 신앙에 서 있기를 주께 구합니다.
첫댓글 신부에녹님도 저와 동일한 고민을 하셨네요. 저도 20여년간 그런 방언을 해왔었는데, 목사님 말씀 읽고 보니 이제 그만 해야겠네요. 아니 이제부터는 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